산과 들/물길 따라서

탄금대 용섬의 석양

산골어부 2009. 1. 23. 10:18

탄금대 앞 용섬은 섬이라기 보다는

모래톱으로 금가면과 연결되었다가

홍수 시에만 섬이 되는 곳이었다.

또한 탄금대 제방의 중간 지점에도

섬뜰이라는 용섬과 비슷한 섬이 있었다고 한다.

 

대문산이 있는 탄금대는 양말산과 밤섬과 같은 섬이었다.

한강의 섬 중에 가장 큰 산은 대문산이었을 것이다.

단양의 도담삼봉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바위 덩어리지만

탄금대와 양말산과 밤섬은 한강의 유인도이다.

남이섬과 중도는 댐건설로 생겨난 섬이며,

한강개발로 인하여 잠실과 반포, 여의도, 잠실 등이

신도시로 개발돠었지만,

여의도의 양말산과 밤섬 등은

여의도 개발로 사라져 버렸고,

선유봉은 선유도로 변신하여 한강에 남았다.

 

 

 

밤섬의 옛모습

 

탄금대는

북쪽으로는 남한강  서쪽으로는 달천

동쪽은 샛강, 남쪽은 충주천으로

둘러싸인 섬이며 저습지였다.

용섬은 탄금대 제방과 달천제방공사로 생겨나서

탄금호에 감싸인 하중도가 되었다.

 

남이섬과 중도처럼 변해 버린 용섬은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상류에서 토사가 유입되질 않아서

자꾸만 사라져가는 것이 아쉽다.

 

 

 

 

 

선유봉(선유도에 있던 산)

 

 

용섬에서

                                          산골어부

 

지리와 지형을 모르는 신립. 

행주산성과 진주성도 그러할진대,

권율과 김시민은 승장이라.

 

 

 

 

 

다산 정약용은 이 탄금대에 대한 시를 여럿 남겼다.

그는 이 싸움을 굉장히 아쉬워하였으며 신립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다산이 살던 시절은 임진왜란이 한참 지난 뒤였지만,

후세의 사람으로서 선조의 잘못된 결정에 한탄 한 것은,

잘못된 역사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으리라.

<다산시문집>의 ‘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라는 시를 보면 그 당시 다산의 느낌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험준한 재 다 지나고 대지가 확 트이더니             嶺隘度盡地坼開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                  江心湧出彈琴臺신립을 일으키어 얘기나 좀 해봤으면                  欲起申砬與論事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을까               啓門納寇奚爲哉회음이 만약 성안 위치에 있었던들                     淮陰若在成安處적치가 무슨 수로 정형을 통과했으리                  赤幟豈過井陘來그때 우리는 조였으면서 한이 쓰던 꾀를 썼으니    我方爲趙計用漢뱃전에 표했다가 칼 찾으러 나선 멍청이로세        鍥舟索劍眞不才기 휘둘러 물 가리키며 물로 뛰어들었으니           麾旗指水入水去목숨 바쳐 싸운 군대들 그 얼마나 가련한가          萬夫用命良可哀지금도 밤이면 도깨비불이 출몰하여                   至今燐火夜深碧길손들 간담을 섬뜩하게 만든다네                      空使行人肝膽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