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물길 따라서

달천강의 끝자락-달천 샛강을 찾아서

산골어부 2010. 3. 9. 11:58

달천강의 끝자락은 탄금대 합수머리다.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은 속리산에서 시작하여

탄금대 합수머리에서 한강의 본류인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남한강과 달천강이 만나는 탄금대 합수머리는

홍수 때만 되면 누런 황토물이 요동치던 곳이다.

지금은 충주댐과 달천제방의 정비로

본래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90년 홍수로 인한 충주댐 방류시에는

엣날의 홍수를 재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강의 홍수기록을 살펴보면은

90년 홍수가 72년 홍수보다도 큰 홍수로 기록되지만,

충주지역에는 72년 대홍수를 더 큰 홍수로 기억하고 있다.

이는 충주댐의 담수와 달천제방의 조성으로

그 피해수역이  72년도 보다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90년 홍수 때 충주댐의 방류시기를

한강하류인 경인지역을 배려하여 늦게 수문을 열어서

남한강 일대와 단양지역에 홍수피해가 발생했다고 하지만,

충주댐이 없었더라면 남한강과 한강변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한강대교지점의 최고수위 및 홍수량
순위 발생년월일 최고수위 유량(m3/sec)
1 1925. 7. 18 12.26 34,400
2 1990. 9. 11 11.27 30,500
3 1972. 8. 19 11.24 30,000
4 1984. 9. 2 11.03 29,000
5 1965. 7. 16 10.80 26,000
6 1999. 7. 26 10.78 25,000
7 1936. 8. 12 10.56 24,400
8 1940. 7. 21 10.41 23,600
9 2006. 7. 16 10.22 25,735
10 1935. 7. 23 10.17 22,100
11 1936. 8. 29 10.15 22,000
12 1920. 7. 9 10.10 21,000
13 1995. 8. 25 10.00 25,000
14 1920. 8. 2 9.86 20,400
15 1922. 7. 30 9.80 20,100
16 1940. 9. 4 9.60 19,100

 

달천강의 끝자락인 달천 샛강의 흔적을 따라서

달천의 옛모습을 그려보고자 달천강가를 찾았다.

탄금대 합수머리는 크게는 달천강이 남한강에 합류하지만,

달천강의 마지막 지류하천인 주덕의 요도천과

충주시내를 가로지르는 충주천이 합류되는 곳이다.

그리고,  호암지에서 내려오는 실개천이

달천의 벌터(충주 위생사업소 주변마을)로 흘러들고,

함지못에서 내려오는 실개천은

달천대교와 달천철교 사이에서 달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달천강의 동편 샛강은 충주 위생사업소에서 벌터와 하방을 지나

충주 하수종말 처리장의 생태습지공원 부근에서

충주천과 탄금대 샛강과 합류하여 달천강으로 흘러들고,

달천강의 서편 샛강은 용관동 아파트 부근에서  범람하여

현재 공사중인 서부우회도로를 따라서 용두동 배수펌프장에서

주덕의 요도천과 합류하여 달천강으로 흘러들어 갔다 .

 

달천의 샛강에는 섬뜰이라는 하중도를 만들어 내면서

탄금대 일대를 거대한 물바다로 만들었을 것이다.

달천강물은 남한강에 비하면 유역이 작아서

홍수 때에는 남한강물이 역류하여 단월까지 밀려 올라간다.

90년 홍수 때에도

충주댐 아래의 용탄동의 침수와 탄금대 주변의 침수로

주댐과 탄금대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달천제방과 달천샛강의 농로를 따라 가니,

옛 추억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조양자동차 학원이 있던 동성연탄 공장 앞 다리 밑에서 고기를 잡던 기억.

탄금대 합수머리 백사장에서 투망으로 고기잡던 기억.

탄금대 샛강 다리를 건너서 탄금정에 올라 물구경하던 기억들

그리고, 달천강 주변의 공사현장에서 만났던 달천강 사람들.

 

달천 샛강은 사라졌지만 그 추억의 모습이 그립다.

자연환경의 보존과 개발의 논리가 상충하는 시대에

마냥 옛모습만 그리워 할 수 없는 우리들의 현실이 아쉽다.

머지않아 탄금대교가 완성되고 동부우회도로와

북충주 IC로 연결되는 도로가 개통되면

달천강가에 흐르던 애환과 향수도 저멀리로 사라질 것이다.

 

달천강을 오고가던 기러기.

달천강을 오고가던 고깃배.

달천강변에 솟아 오르던 저녁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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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철교와 달천대교 

 

달천 철교 아래의 폐가옥 (달천강에서 내수면 어업을 하는 선착장)

 

달천제방과 송림나루터 

 

동부우회도로 옆 하용관(농경지로 변한 달천샛강) 

 

달천 샛강을 따라 건설 중인 동부우회도로 

 

 동부우호도로 옆  상용두(농경지로 변한 달천 샛강)

 

 동부우회도로 옆 하용두(달천 샛강 )

 

 동부우호도로 옆 달천 샛강

 

 하용두 양수장과 달천 샛강

 

요도천 합수머리의 동부우회도로 

 

 달천강과 요도천의 합수머리

 

달천동 지형도

 

  탄금대 물길

 

오늘날 탄금대라 불리는 남한강 달천 합류지점의 독립된 섬이 있어 해발 70m에서 108m의 높이이므로 이를 견문산이라 하며, 평지에 비해 상대고도는 38m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독립된 섬을 이룬 산은 사방이 가파른 비탈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까운데에서 보면 꽤 커다란 산이라, 실제로 동서로 뻗은 길이가 1,000m 쯤이고 남북으로의 너비가 500m쯤 이나 된다. 이 산을 자세히 보면 좁은 지역의 구조가 매우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우선 동쪽을 보면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구릉 능선에서 북서-동남으로 능선이 이어져 있으며, 오직 북서쪽과 동서 방향으로 작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이 계곡은 주능선의 부분인 남측과 토성이 위치한 북측을 가르고 안부(鞍部)를 형성하고 있다. 계곡의 북쪽에 형성된 봉우리는 해발 105m인 최고 높은 부분이 토성의 동북쪽 모서리가 되고 북향으로는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험준한 단애(斷崖)로 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열두대라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 토성이 있는 북쪽의 지형은 자연적인 안부를 그 서쪽을 보강하듯 높이 쌓아올려 높아진 성벽을 이루었다. 가장 가파른 곳이며 암반이 노출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여 마치 충남 부여의 부소산성(扶蘇山城)의 서북쪽 모서리에 있는 낙화암을 연상케 한다.

이 북쪽의 높은 지대에서 동향 하던 능선이 동남향 하여, 다시 동남쪽과 서방향으로 능선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바깥을 향하여 좁고 가파른 계곡이 형성되어 있으며, 동남향 한 능선은 약 150m가 뻗어 내려온 뒤 역시 가파른 경사면을 이루며 강물쪽으로 경사져 있다. 다시 서향한 능선은 남향의 경사는 급하고, 북향한 경사도는 낮아서 자연적인 성벽처럼 형성되었는데 능선 위의 높이 차이는 크지 않아 평평한 편이다.

동서로 길게 뻗은 남쪽의 주능선은 470m 쯤 서쪽으로 뻗어 다시 안부(鞍部)를 두고 서쪽의 높은 대지는 남북방향으로 길쭉한 타원형이며 남쪽 길이가 약200m이고 동서 폭이 120-60m나 되며, 전체의 평면 가운데 가장 넓은 고위 평탄면을 이룬다.

이 서측 높은 대지의 서향으로는 서북향으로는 서북향하면서 3개의 안부(鞍部)를 동반한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유물들이 출토되지 않고, 또 지반의 구조도 달라져 있다. 풍화된 암반이 노출되거나 기반토가 드러나 있는 구역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탄금대의 전체를 보면 동.서.남의 능선부분이 높고, 북쪽 중앙이 낮아진 지세임을 알 수 있다. 북쪽 중앙의 낮은 곳은 한강에 침식된 흔적이 있는 모래벌을 이루며, 북동 높은 대지와 중앙남쪽의 동서로 뻗은 능선사이에 계곡이 서쪽으로 경사지고, 서쪽 고대지와 역시 동서로 뻗은 주능선이 만든 계곡이 북동향 하여 빗물이 대분분이 북쪽 중앙의 저지로 흘러들게 되어 있다. 현재 대흥사가 있고 휴게 및 식당 등이 잇는 옛 금휴포(琴休浦)가 그곳으로, 여기서삼각형으로 형성된 낮은 충적지가 한강으로 연계되는 나루터로 이용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된다. 여기에 양진명소(楊津溟所)의 신단(神壇)이 있어 제사를 지내왔다.

북변(北邊)이 모두 남한강의 강물과 닿아 있음에 비하여 남쪽과 동.서쪽의 끝은 급경사 아래에 얼마간의 평지가 있다. 다만 동쪽 끝은 최근에 이루어진 제방과과 체육공원시설을 위해 당초 강물이 있었던 샛강으로 큰 도랑이었던 곳을 메워서 형성된 것이고 서쪽 끝은 실제로 달천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곳이다.

따라서 탄금대는 서쪽.북쪽.동쪽 모두 강물로 둘러쌓이고 오직 남쪽만이 충주시가지 쪽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남쪽 역시 약간의 경사면을 지나 강물이 돌아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의 기록에서도 탄금대가 두물 사이의 섬으로 묘사된 바 있음에서 분명하며 점차 토사(土砂)가 모여 삼각주를 형성하고, 샛강을 메우거나 수로를 변경하여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이다.

탄금대의 동남향에 있어서는 지적도상에서 냇물이 확인되었는 바,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렀던 강물은 칠금동509-82천(川)으로 지번이 되어 있고, 다시 509-79천(川)으로 되어 충주시 봉방동과 마주치게 된다. 이 서쪽 끝에서 합류되는 것이 달천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바로 남한강의 본류(本流)인 509-82, 509-76천(川)을 뺀 509-79천(川)이 된다. 이 509-79천(川)은 양쪽으로 논과 밭을 거느리면서 509-80도(道)까지 이어져 있다. 현재의 도로 가운데 521도(道)가 탄금대로의 진입도로로 국도로서 충주에서 탄금대로 향한 513-1도(道), 521-9도(道), 521도(道)이며 이중 521도(道)가 탄금대의 남면을 반달모양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적도에서 보면 521도(道)의 동쪽 끝에 521-9도(道)가 있고, 이것과 513-79천(川)이 있어 끊기어 있다. 지금은 이 끊어진 부분이 메워지고 도로로 이용되고 있으나 본래는 이곳이 본류(本流)인 남한강에 이어진 탄금대의 남측을 돌아 흐르던 또 다른 샛강(川流)인 것이다.

509-79천(川)은 너비가 140-150m나 되며 탄금대 동쪽의 남한강과의 합류지점에서부터 600m지점의 509-80도로에 이른다. 이곳의 서쪽으로는 샛강을 막고 만든 523제방이 봉방동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의 지형을 추정하여 보면 탄금대의 남쪽 끝인 현재의 국도에서 남방으로 최대 360m거리까지가 대지(垈地)와 전지(田地)이고, 탄금대의 남쪽을 반달모양으로 509-79의 강물이 휘감아 돌아, 탄금대는 결국 강물이 휘감아 도는 섬으로 되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달천(達川)의 지명유래

 

본래 충주군 남변면의 지역으로 달천강을 중심으로 달천동과 용관·용두동이 나누어져 있음.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림리(松林里)와 이부동(二部洞), 달신리(達新里), 단신리(丹新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달천리(達川里)라 하였으며, 두담리(斗潭里)와 용두리(龍頭里), 관산리(觀山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관동(龍觀洞)이라 하고, 북변면지역 용두리(龍頭里)와 함께 읍내면에 편입시켰으며, 1962년 용관·용두·달천 연합동으로 편제되었음.

 

달천동(達川洞)

▣ 달천-동(達川洞)【동】본래 충주군 남변면(南邊面)의 지역으로서 달내강 가가 되므로 달내 또는 달천(達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림리(松林里)와 이부동(二部洞), 달신리(達新里), 단신리(丹新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달천리라 해서 읍내면에 편입됨.

 

●달-신(達新) [새터말]【마을】달내강변에 최초로 생긴 마을이 원달천이고, 다음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 달신(達新, 새터말)이라고 함. 달천파출소 부근이 됨.

●달천-강[덕천, 달강, 달래강]【강】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괴산칠성댐을 지나는 달천 서편의 강으로 탄금대 서편에서 남한강과 합침. 임란시 이여송과 같이 왔던 명장 한사람이 이 달천을 건너다가 목이말라 물을 마시며 명나라에서 유명한 수렴약수보다 낫다고 했다해서 맛이 달은 냇물이라는 달-냇물(달강)이라 부른데서 유래 되었다 하며, 이 강에 수달이 많아 달강이라고도 했다함. 이조시대 한 도승이 이 강변 어느 집을 지나다 집주인의 명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암시하고 면액의 길로 돌을 날라 다리를 놓으라고해 다리를 놓았으며 그 다리를 위급한 환자가 건너와 덕을 입은 강이라고 하였다하여 덕천이라고도 불렀다 함.

●달천-교(達川橋)【다리】달천나루터에 놓인 다리.

●달천-나루터(達川-) [달천진]【나루터】달천에서 용두동(서울방면)으로 건너던 나루터. 현 달천교 자리에 있었음.

●달천-철교(達川鐵橋)【다리】달철교 남쪽에 있는 철교. 충북선 개통 때 놓음.

●물개-달내【마을】달천동 서쪽 물가에 있는 마을. 달천교 부근의 마을. 충주목사선정비가 있음.

●벌-터【마을】원달천 서북쪽 벌판에 있는 마을.

●송림(松林)【마을】곤평 서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 솔무데기가 있었음.

●송림-나루(松林-)【나루터】송림에서 용관리 두담으로 건너가는 나루터.

●원-달천(元達川)【마을】달천동사무소가 있는 마을. 달천동에서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라 함.

●홈통-거리【마을】곤평 서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홈통으로 물을 갈랐다 함.

 

용두동(龍頭洞)

▣ 용두-동(龍頭洞)【동】본래 충주군 남변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으므로 용머리 또는 용두(龍頭)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북변면 용두리(龍頭里)를 병합하여 용두리라 해서 읍내면(충주시)에 편입됨, 조선조 때 용두원(龍頭院)이 있었음.

●벌-터【마을】조양자동차학원(용관동) 서편으로 위치한 마을.

●장터-거리【들】용두동 앞에 있는 들. 옛날에 달내강의 뱃길이 이곳까지 들어와 장이 섰었다 함.

●지내-답(池內畓)【들】→ 못안.

●하-용두(下龍頭)【마을】벌터에서 국도 건너 북방으로 위치한 마을.

 

●두무-소 [두담, 두무수]【마을】용관리의 중심에 있는 마을. 예전에 큰 용소가 있었다 함.

  

봉방동(鳳方洞)

▣ 봉방-동(鳳方洞)【동】본래 충주군 북변면(北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방동(上方洞), 하방동(下方洞)과 금대리(琴臺里), 대가미리(大加味里), 칠지리(漆枝里), 신촌리(新村里), 봉계동(鳳溪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봉계와 방동의 이름을 따서 봉방리라 하고, 1956년 봉방1구, 봉방2구로 구분하다 1962년 동행정구역 개편시 봉방동으로 편제되었음.

●봉방-교(鳳方橋)【다리】아랫방장골과 섬들 사이에 있는 다리.

●섬-들【들】아랫방장골과 가금면 창동 사이에 위치한 들. 옛날엔 서편으로 강이 흘러 섬이 되었었으나 현재는 제방이 되어 분할되었음.

 
●아랫-방장골 [하방, 봉방2구]【마을】구충주역 아랫쪽에 있는 마을. 일제 때 봉방2구라 하였음.

●어정이-들 [어정평]【들】상방마을 북방에 위치하며 지대가 낮다고 함.

●웃-방장골 [상방]【마을】충주역의 남쪽 위에 있는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