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호 오지마을 - 부산과 개천안
제천시 청풍면 부산리에는 면산마을이 있다.
부산리 면산마을은 부산(면위산) 자락의 고지대라서
충주댐 건설로 인한 충주호 수몰지역에서 벗어난 곳이다.
부산(면위산)의 등산소개나 산행후기를 보면
부산(면위산)의 유래가 일제 때 행정관서에서 나와 지명을 정리할 때,
면위산을 며느리산으로 잘못 알아 들어 婦자를 써서 부산(婦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고지도인 대동여지도나 청구도에서도 부산(婦山)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부산리 마을 유래에 나타나는 지명표기에 대한 행정착오는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정토사지에서 옮겨온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보물 제17호)와경복궁으로 옮겨진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국보 제102호)과 홍법국사실상탑비(보물 제359호)는하천리 하곡의 정토사지를 입증하는 사료이기에 정토산=개천산=부산은 동일한 산으로 추정된다. 개천사는 고려말기에 충주사고가 있던 절로 알려져 있으며,조선조의 사고인 충주읍성 내의 충주사고와는 다른 곳이다.정토산과 개천산의 지명은 불교와 연관된 지명이고, 천등산과 인등산과 지등산은 풍수지리에 따른 지명으로 추정된다.천인지의 명당자리가 정토사(개천사)가 있는 개천안은 아닌가 싶다. 또한 동량면 하천리에서 하곡=하천=개천도 동일한 지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개천안의 솟대는 정토사의 당간지주(쇳대=철당간지주)와 솟대를 일컷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하천리의 솟대거리에는 솟대작가 윤영호님이 머물면서 솟대문화를 전파하다가아쉽게도 청풍으로 옮겨가서 허름한 농가에 그 추억만이 남아 있다.
솟대작가 윤영호님이 머물던 농가
개천사에서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高麗, 1349~1392)
淨土山多好 정토산다호 부처가 사는 산은 아름다워서
開天寺足徵 개천사족징 족히 개천사를 이룰 만 했네.
百尺臺臨水 백척대임수 백척 높은대 아래로 물이 흐르고
千年木臥藤 천년목와등 천년 묵은 듯 나무덩쿨 얽혀 있도다.
踵門無俗客 종문무속객 산문따라 속된 사람 찾아오지 않고
面壁有高僧 면벽유고승 참선하는 높은 스님 계실뿐이네.
君歸足暇日 군귀족가일 그대들 돌아가서 한가한때 되거든
一一訪吾曾 일일방오증 모두 거듭하여 날 찾아오게나
조선시대 고지도인 대동여지도나 청구도에서는 정토산(개천산) 정토사가 인등산과 천등산 주변으로 표기되어 있다.그러나 개천팔경에 나타난 지명은 삼탄강(제천천) 유역의 지명들이 열거되어 있다.개천팔경은 부산 주변을 둘러싼 개천안(하천=개천)지역의 팔경을 그린 것으로 추청되기에 부산의 지명유래는 개천산에서 정토산으로 정토산에서 부산으로 변경된 것이 아닌가 한다.고려시대의 도은 이숭인이 쓴 개천사에서는 부산을 정토산으로 지칭하는데,정토산은 부처가 있는산 즉 부처산이다. 부산과 부산리의 유래는 부처산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 ? 동량면의 개천안 마을과 청풍면의 면산 마을은 산간오지마을에서 충주호의 건설에 따라 호반의 전원마을로 변해가고 있다.
♣개천팔경
제1경 : 전위봉인 옥녀봉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을 일컫는 옥녀만하(玉女晩霞)
제2경 : 덕봉(면위산 남동쪽에 있는 일명 국실봉)에서 바라보는 아침해 뜨는 경치 덕봉조일(德峯朝日),
제3경 : 말바위 부근에 만개하는 두암단화(斗岩丹花),
제4경 : 풍류산 푸른 소나무를 지칭한 풍벽창송(풍壁蒼松),
제5경 : 오지소에 물굽이 치는 소리가 가야금 타는 소리 같다는 오지탄금(五指彈琴),
제6경 : 가을단풍이 기막히게 좋다는 월굴단풍(月窟丹楓),
제7경 : 지등산 아래 장선고개를 넘어오며 바라보는달을 말하는 지등석월(地登夕月),
제8경 : 만천(충주호가 생기기전 하천) 잔잔한 물에서 노니는 물고기떼를 일컫는 만천관어(萬川觀魚)다.
부산리 승강장 및 마을 유래비
[부산리(婦山里)의 유래]
1983년 충주댐 건설로 청풍면 관내 27개리 가운데 정선리, 부산리, 학현리가
유일하게 수몰 한계선의 고지대에 분포하여 미침수 지역이다.
충주댐 이설도로를 개설하면서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수몰된 법정동명으로
존재한 방흥리, 진목리, 오산리, 단돈리 등지를 행정동명으로 아우르고 있다.
부산리(婦山里)는 부산(婦山)의 동쪽의 산기슭의 경사지에 자리한 곳으로
닥나무가 자생하면서 한지를 만들어서 충주 등지에 판매하여 고소득을 올리기도 하였다.
부산은 충주시 산척면, 동량면, 청풍면의 접경지역으로 부산을 중심으로 산촌문화를 형성하였다.
부산(婦山)을 등정한 모든 사람은 일제시대 명명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와전된 것이다.
이미 청풍군 강역에 속한 부산은 조선시대 중기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산은 청풍관아의 명산으로 기록하였다.
부산리(婦山里)는 며누리 부(婦)자에 뫼 산(山)자의 동명이 생성한 것으로 일명 면위산(免危山)이라고 부른다.
혹자는 면위산이 며누리산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식하는데, 이 또한 와전된 것으로 면산(免山)에서 연원한 것이다.
면산에서 면위산으로 변천하거나 부산에서 며누리산에서 면위산으로 부르면서 그 뜻이 애매모호하게 된 것이다.
부산리를 일명 면산을 부른 것은 면할 면(免)자는 위험을 모면할 수 있는 지세로 장선천에서 부산리는 협곡 가운데 은밀한 지형이다. 조선말기 유학자들이 면산서사를 세운 기록도 전하고 있어 선비들이 전란을 피하여 유유자적할 수 있는 처소이다. 그 선비들은 부산에 올라가 면산을 일컬었으니 면산은 조선말기에 형성한 것이다. 부산리는 6.25 사변 때 양평리에서 강 건너 장선천을 따라서 올라가면서 부산리는 발견하지 못하여 위험을 모면한 마을이다. 그래서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청풍호에 수몰된 마을을 수호하고 있으니 면위산은 슬기로운 며느리와 같은 포근한 정감을 느낀다.
부산리마을유래비
부산리(婦山里)는 본래 청풍군(淸風郡)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면위산(免危山) 또는 며누리산(婦山) 밑이 되므로 며뉘산, 면산, 부산(婦山) 또는 부산리(婦山里)라 하였다. 단돈리(丹頓里)는 본래 청풍군(淸風郡)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주토(朱土)를 캤으므로 단돈(丹頓)이라 하였다. 방흥리(芳興里)는 본래 청풍군(淸風郡)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방흥동(芳興洞)이라 하였다. 방(芳)은 살구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오산리(伍山里)는 본래 청풍군(淸風郡)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다섯 봉우리를 둘러 있는 안이 되므로, 오미, 오매 또는 오산이라 하였다. 진목리는 북동쪽으로 약 1.5㎞ 상류에 방흥리, 격강의 동쪽에 양평리, 격강의 남쪽에 한수면 황개, 서쪽에 한수면 호운리, 북쪽으로 약 750m에 오산리와 인접하였으며 조선시대 청풍부 수하면 진목정리(眞木亭里)라 하였다. 진목리는 1913년 12월 29일 군면폐합에 따라 청풍군이 제천군에 통폐합됨으로 동년 제천군 수하면 진목리가 되었으며, 부산리, 단돈리, 방흥리, 오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제천군 수하면 지역이 되었다가 1929년 10월 14일 청풍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부산리, 단돈리, 방흥리, 오산리, 진목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댐 공사로 일부 마을이 수몰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단돈리, 방흥리, 오산리, 진목리가 부산리로 편입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인 부산리(婦山里)가 되었다.
부산리 면산마을
부산리 면산마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충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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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8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48리이고, 연풍현(延?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51리이고, 경기도 여주(驪州) 경계까지 78리이고, 경기도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66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45리이고,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경계까지 58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혹은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長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빼앗았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을 옮겨서 채웠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2년(983)에 목(牧)을 두었다가 14년(995)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예속하였다.
현종(顯宗) 3년(1012)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만들었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만들었고, 고종(高宗) 41년(1254)에 승격하여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세종(世宗) 31년(1449)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이 셋이고 : 청풍(淸風)ㆍ단양(丹陽)ㆍ괴산(槐山). 현(縣)이 넷이다. : 연풍(延?)ㆍ음성(陰城)ㆍ영춘(永春)ㆍ제천(堤川).
(중략)
월악산(月岳山)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정토산(淨土山) :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천등산(天燈山) :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
(중략)
개천사(開天寺) : 정토산(淨土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