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에서/옛날 기록들

신작로와 나루(목계나루에서)

산골어부 2011. 3. 1. 23:25

 

남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발자취는 무엇이 있을까 ?

고조선의 멸망에 따른 한민족의 이동.

한민족의 분열과 대립으로 얼룩진 전쟁들.

신라의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가던 길.

나이 어린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가던 길.

마의태자가 천년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길.

조세 수송에 따른 수로와 육로 등

남한강 물길을 따라 지나간 흔적들은 너무나도 많다.

역사 속에서 길이란  세력의 이동이지만,

그 길 속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얼룩진다.

 

1970년대까지만해도 신작로와 나루터는

시골풍경의 대명사이자 추억의 고향이었다.

강원도 동강에는 줄배가 아직도 남아 있지만,

그 마저도 머지않아 사라져갈 것이다.

유구한 역사의 흥망을 가르던 남한강 뱃길은

조세제도의 개혁과 신작로의 건설로 쇠락하고,

도로와 교량이 강을 지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뱃길 때문에 나룻터로 모여 들었던 사람들이 강을 떠나면서

나룻터는 사라지고, 제자리만 맴도는 황포돗배만 서있다.

 

그 옛날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을 팔아먹었다는 이야기가

이제는 국가가 봉이 김선달이 되어  물값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강물에 배를 띄우던  나룻터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물을 보호해야하는 현실로 변해버렸다.

어찌보면 4대강 사업은 인간이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자연과 인간이 부딪치는 처절한 생존경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물길은 강을 따라 바다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길을 막으면 돈이 되는 물탱크(?) 또는 물뱅크(?)인 것이다.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저수지와 댐. 양수장과 배수장.

물을 활용하기 위한 정수장과  다시 쓰기 위한 처리장 등

인간이 자연에 역행한 댓가를 혹독하게 치루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싸움은 그 옛날의 소금배가 아니라,

중동사막처럼 바닷물을 퍼올려야하는 처참한 미래될지도 ~~~

 

남한강에서 가장 유명했다던 목계나루의 진실은 무엇일까 ?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번영기를 누렸지만

1974년에 목계다리가 건설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선말기의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어렵던 시대에

가난의 한을 가득 품고 나룻배에 의지했던 목계나루.

그래서, 신경림이 노래한 목계나루가 더 처량한 것은 아닐까 ?

 

가흥과 목계 사이에는 막흐래기탄이라는 험난한 여울과

목계와 금휴포 사이에는 월락탄(상시탄과 하시탄)이라는

험난한 급류가 있어 배가 다니기 힘든 곳이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시대 남한강의 조운과 조창에 대한 기록에서도

가금의 금천창보다는 가흥창이 지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두개의 여울을 지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력이 필요하고,

사고와 화재 등으로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여 금천창을 포기하고

충주목 관아에서 멀리 떨어진 가흥창과 나루가 운영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나는 선군(船軍-해군)의 수는 대단한 것이다.

강이 없는 충청도 내륙의 작은 현인 제천현과 음성현에서도 선군이 존재한다.

충주목 군정 "시위군(侍衛軍중앙에 번(番)을 들러 올라오는 지방의 장정)이

4백 40명이요, 선군(船軍-해군)이 4백 65명이다." -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

남한강의 수운체계에서 선군은 전투력을 지낸 해군이라기 보다는

세곡선을 운영하기 위한 조달체계의 뱃사공과 뗏꾼인 것이다.

물론 민간이 운영하는 상단과 상선이 있지만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충주에서 한양땅을 나룻배로 간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여름철 우기에는 충주에서 한양까지 3일 정도의 뱃길이라지만

배를 운영할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고, 여울과 급류로 인한 위험과

갈수기와 동절기에는 작은 나룻배도 오고갈 수가 없는 뱃길이다.

남한강 뱃길은 충주에서 한양까지 가는 배삯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돈 많은 사대부와 장사꾼 또는 지체 높은 관원들이나 타고 다니는 것이고

일반 백성들은 나룻배로 강만 건너거나 여울을 따라 걸어서 건너야 했다.

그리고 홍수기에는 위험해서 못가고, 갈수기에는 물이 없어 못가고,

겨울에는 강이 얼어서 제아무리 지체 높은 관원이나 수령이라도

강기슭을 따라 개나리 보짐을 메고 나귀를 타고 가야하는 것이다.

 

목계나루는 남한강의 수운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목계나루는 조운과 조창제도에 따른 나루가 아니라,

조세제도가 화폐로 개혁되고, 육로가 개설되면서

조운과 조창이 사라지고 일반상선들이 선창을 주도하면서

육로가 연결되는 길목마다  다시 형성된 나룻터와 장터이다.

요즈음 역사체험 나룻터 문화를 재현한다고 한다.

목계나루 뿐만 아니라, 옛 나루터가 있던 곳이면

강원도 산골짜기의 아우라지부터 시작하여

한강의 본류인 한양까지 가는 곳마다 깃발을 꽂는다.

 

 

 

 

 

 

  

 

  

 

 

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솔밭의 전설

 

가금면 장천리「저우내」마을 아랫편으로 솔 무더기가 있어 노송청파를 즐겨 관광
객이 끊인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곳 나루 이름이 목계나루이기 때문에 속칭「목계솔밭」이라고 부르고 있
는 것이다. 이 솔밭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조때「목계」나루는 내륙 하항으로 성황을 이루어 왔었다. 그런데「목계」나루는
매년 큰 화재가 나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것이 수 백년간 전통이 되다 시피
되어 화재 하면 공포에 떨고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까지 하고 있
을 때이다. 때마침 나룻배에서 내린 방갓을 쓴 두사람이 나룻터 한 구석에 앉아서
패찰을 내놓고 산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곳 촌노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그 옆으로 다가서서 말을 걸었다.

「뉘 시길래 이
냉습한 곳에 앉아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거요?」그러자 그 방갓쓴 두 사람은 마을
노인을 쳐다 보더니「이 곳에 사는 지요?」하고 나서 혹 이마을에 회재가 잦지 않
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목마른 사람이 샘을 만난 것처럼 어떻게 그런 내용을 잘 아느냐며 말을 이
었다. 무릇 액이 오는 것을 아는 자는 액을 쫓을 줄도 아는 법인데 그 방액은 없겠
느냐고 물었다. 한 사람이 방갓을 빗고 나서 손가락으로「부흥산」을 가르켰다.

저 산이 불의 정기가 강하여 이 마을 사람들은 불속에서 물장난을 하며 살고 있는
형국인데 더구나 이 강물은 이 산을 외면하고 흐르는 형국이니 사람들이 조금이라
도 저 산신의 비위를 거슬르면 화마가 닥치는 것은 정칙이라며 이 강물을 저마을
쪽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을 노인이 몸가짐을 다듬고 도대체
누구냐고 다구쳐 묻자 후일 알것이라며 그곳을 떠나버렸다.

그들은 청장 이여송의 모사인 두사충과 그와 같이 풍수를 공부하며 다니는 금강산
중의 수행승이었다고 한다. 그 노인은 방갓쓴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동리 사람들을
재촉하여 강물을 돌리기로 했다. 온 동민들은 물론 많은 인원을 품을 사서 흙을 파
다가 강 가운데다 산을 만들었다. 반년이 넘어서야 강물을 목계쪽으로 돌리게 됐고
그 산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그것이 곧 오늘날의 목계 솔무덕이 인것이
다. 따라서 한강물이 목계 부흥산 밑을 질러 나가므로「남한강」의 수신과「부흥산
」의 산신이 상극이 되어 물과 불이 견제하게 됐다고 하는 것이다.
한편 이 상극되는 산신과 수신을 위한 시키기 위해서 산제당을 지었으니 그것이 곧
지금 있는「부흥당」의 시초가 된것이다.

 

또 한가지의 전설은 옛날「목계」를 비롯한 이 지방에 가뭄이 심해서 기우제를 여
러번 지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목계」촌장과 가금면「저 우내」의 촌장의 꿈에 용이 비를 주기 위해서

목계나루에 걸쳐 있는데 강이 넓어서 몸이 불편하다며 강 가운데

섬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지금의 솔밭을 쌓아서 용의 다리를 놓아 줌으로

용이 비를 내리게 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