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문화제와 명현추모제에 대하여
우륵문화제와 명현추모제에 대하여
올해도 우륵문화제에서 충주를 빛낸 명현에 대한 ‘명현 추모제’가 9월 23일에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있는 청녕헌에서 열렸다. 매년 개최되는 우륵문화제는 명현 추모제를 시작으로 지역 특유의 향토문화행사를 진행하여 중원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륵 문화제의 내용을 보면 무언가가 부족하고, 문화제의 질이 떨어져 보인다. 말로만 우륵문화제이지, 우륵과 중원문화를 계승한다기보다는 충주시에 관련된 단체들의 생생내기 행사일 것이다. 그리고, 중원문화는 우륵과 가야금이 아니라 남한강 특유의 문화를 계승하고 창출해 나아가야하는 것은 아닐까 ? 충주를 빛낸 명현들은 우륵, 강수, 김생, 신립, 임경업을 말한다. 명현 5위는 누가 선정한 것일까 ? 특히 임진왜란의 패장인 신립이 충주에서 무엇을 빛낸 것일까 ? 그리고, 충주가 고향인 임경업은 충주를 위해 무엇을 했을까 ? 신립과 임경업의 업적을 보면은 대의명분에 매달려 국운을 망친 인물들이다. 두 장수의 잘못된 선택으로 조선조는 물론 두 전란을 겪은 백성들은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들이 택한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국사를 망친 ~~~~~~~
충주 명현추모제에서 신립과 임경업을 없애고, 중원문화의 꽃을 피운 우륵,강수,김생만을 추모하거나, 고려 때의 충주호족 유긍달이나 대몽항전의 충주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윤후를 추모하는 것이 어떨까 ? 그리고, 우륵문화제도 옛 명현과 중원의 역사보다는 그 후예들의 새로운 문학과 예술제로 변화하는 것이 필요한 때는 아닐까 ? 신립 [申砬]조선 무신 브리태니커신립 요약정보
1546(명종 1)~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충주성 밖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본관은 평산. 자는 입지(立之). 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도총부도사·경력·진주판관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왔다. 니탕개는 선조 초년부터 6진(六鎭)에 자주 드나들며 공순(恭順)의 뜻을 보였으므로 정부에서 관록(官祿)을 주고 후대했으나,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경원부로 침입, 아산보(阿山堡)와 안원보(安原堡)를 점령했다. 이에 기병 500여 명을 동원하여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1만여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 공으로 1584년 함경도북병사에 오르고 환도(環刀)와 수은갑두구(水銀甲頭口) 등을 받았다. 1587년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침입한 왜구 격퇴를 위해 우방어사로서 좌방어사 변협(邊協)과 함께 출진했으나, 5, 6일이 지나도 적의 기척이 없으므로 철수했다.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여 적병 2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해 10월 갈파지보(乫波知堡)에서 수졸(戍卒)을 참형했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동지중추부사로 물러났다. 1590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592년에는 변방을 순시하는 임무를 맡아 경기·황해 지방을 돌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金汝岉)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출전했다. 충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이 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에서 6, 7리 떨어진 단월역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왜군의 동향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사실을 보고한 안민(安敏) 등을 군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목을 베었다. 왜군이 충주로 진격해오자 김여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에게 밀린 많은 군사들이 퇴로가 막혀 익사하면서 전투는 참패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임경업 [林慶業]조선 무신 브리태니커임경업 요약정보 1594(선조 27)~ 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무신. 친명반청(親明反淸)에 투철한 무장으로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활약했으며,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된 이후에도 명나라와 협력하여 청을 공격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판서 정(整)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황(葟)이다. 1618년(광해군 10) 아우 사업(嗣業)과 함께 무과에 급제했다. 1620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을 지내고, 1622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정충신(鄭忠信) 밑에서 세운 공으로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봉해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그뒤 우림위장(羽林衛將)·방답첨사(防踏僉使)·낙안군수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신경인(申景禋)의 좌영장으로 출전, 강화도로 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뒤여서 후금군과의 전투는 없었다. 이듬해 체찰부별장, 1629년 용양위부호군, 1631년 검산산성방어사·정주목사 등을 거쳐,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안변부사에 기용되어 백마산성(白馬山城)·의주성(義州城)을 수축했다. 같은 해 명나라의 공유덕(孔有德)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군과 합세하려 하자, 명군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명나라의 왕으로부터 총병(摠兵) 벼슬을 받았다. 1634년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중국무역과 둔전(屯田) 개설의 공로로 이듬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무역거래에서 폭리를 취했다는 탄핵으로 한때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하여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산(松鶻山)·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경경비를 강화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청군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청군이 우회하여 남하했으므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 인조로부터 굴욕적인 강화를 받아내고 돌아가던 일부 청군을 쳐서 무찔렀다. 1637년 청나라가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병력을 요청하자 수군장(水軍將)으로 출전했으나,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씻을 기회를 노리던 그는 명의 심세괴(沈世魁)에게 연락하여 몰래 명군을 도왔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40년 다시 청나라의 요청으로 주사상장(舟師上將)으로 발탁되어 금주위(錦州衛)의 명군을 공격했지만 이때도 마찬가지로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 명군과 연락을 취하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1641년 서울로 돌아왔으나, 그의 행적에 의심을 품고 있던 청의 압력으로 벼슬에서 쫓겨났다가 곧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로 복귀했다. 그러나 1642년 명장(明將) 홍승주(洪承疇)가 청나라에 투항함으로써 명과의 관계가 발각됨에 따라 체포되었다. 청나라로 압송되던 도중에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 회암사(檜巖寺)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가 1643년 명나라에 망명했다. 그뒤 명나라 장군 마등고(馬騰高)와 함께 석성(石城)에서 청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마등고가 곧 항복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탈출을 기도하다가 그의 부하였던 한사립(韓士立)의 밀고로 잡혀 1645년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무렵 조선에서 심기원(沈器遠)의 옥사가 일어나 그의 관련설이 대두되자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역모사실을 부인했으나,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가 강력히 처벌을 주장, 심문을 받던 중 형리(刑吏)에게 장살(杖殺)되었다. 사후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임경업전 林慶業傳〉을 비롯하여 많은 소설·설화가 전해지고,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되었다. 1697년(숙종 23) 복관되었다. 충주 충렬사(忠烈祠), 선천 충민사(忠愍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