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중원경과 완장성에 대하여

산골어부 2012. 2. 1. 12:47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에 있는 중앙탑은 중원경의 상징물이다. 그러나 중앙탑은 충주탑평리칠층석탑(국보6호)으로 건립시기나 건립사유를 모르는채 한반도의 중심에 서있는 탑으로 전해진다. 내가 처음으로 중앙탑을 본 것은 1972년도 남한강 대홍수가 지나간 75년으로 기억하는데,  중앙탑을 처음 본 느낌은 흔히들 말하는 "사상누각(砂上樓閣)"처럼 보였다. 그리고 남한강변 하중도(모래섬)에서 천 년을 지켜온 중앙탑의 모습에서 신비로움을 느끼면서도 국보라기에는 너무도 초라하게 보였다. 지금은 중앙탑 공원이 정비되고, 중앙탑 주변의 토사를 깍아내려 탑을 더 높게 솟아있는 것처럼 시각적 효과를 주고 있지만, 문화재를 원형보존해야하는 본래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 또한 중앙탑 동측의 저지대와 탑평리 샛강은 옛부터 있던 것인지, 아니면 대홍수로 강물의 범람과 토사의 침식과 퇴적으로 샛강이 형성된 것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탑평리 유적지 일대는 수많은 홍수에 의해 지형이 변천되고 유적지가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이루어진 탑평리 유적지 발굴조사에서 유물들이 지표면에서 약 1m 아래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남한강의 홍수로 토사가 퇴적한 덕분에 유적지가 보존된 것이다. 중앙탑의 동측은 토사가 유실되고, 서측은 토사가 퇴적되어 유적지를 매몰시킬 정도의 대홍수라면 현재의 중앙탑 공원과 중앙탑이 온전히 남아 있을까하는 의문이 남는다.  대홍수의 빈도수는 예측할 수가 없다. 천년을 지켜온 문화재가 사라질때, 단지 천재지변이라는 변명으로 그를 대신할 수 있을까 ?

 

 중원문화의 중심에는 국원성(國原成)과 중원경(中原京)이 존재한다. 그러나, 국원성과 중원경에 관한 유적들에서 삼국시대의 인문지리에 대한 고찰은 너무도 미미하여 아직도 국원성과 중원경의 실체에 대하여 시원한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하고 있다. 중앙탑 부근의 탑평리 유적지의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유물에서도 중원경의 치소를 입증할 만한 사료는 찾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중원경의 치소라는 것이 통일신라시대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였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막연히 치소를 언급한다는 것부터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가금면 용전리(입석)의 중원고구려비에 대한 연구도 중원고구려비의 발견과 비문의 해석에 대해 논할 뿐이고, 그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고찰은 더 이상 진척된 것이 없는 실정이다. 또한 탑평리 발굴조사지의 선정도 중원경의 치소로 추정되는 지역을 체계적인 분석을 통하여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유적지의 훼손에 따른 소극적인 발굴조사로 중원경의 실체보다는 개발사업의 타당성을 부여하는 면죄부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진흥왕이 고구려의 국원성에 신라의 두번째 소경인 국원소경을 설치하고, 신라의 귀족의 자제와 6부의 호민을 이주시켜 국원에 정착하도록 했다.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은 옛 완장성인 국원소경에 국원성(둘레 2천5백9십2보)을 축조하였고, 신라의 경덕왕은 한산주를 한주(1주1소경27군46현)로 고치고, 국원소경을 중원경으로 개칭하였다. 사기의 기록에서 국원성의 크기와 국원성의 옛명칭이 완장성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국원성을 대부분이 장미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장미산 봉황성과 달리 대동지지에는 천룡산 봉황성(둘레 6천 1백 21척)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잘못된 기록을 대동지지에서 정정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봉황성은 장미산 고성이 아니라, 보련산 또는 천룡산에 있는 산성이다.

 

 薍[물억새 완, 달래뿌리 란]

1. 물억새 2. 달래 뿌리 3. 달 a. 달래 뿌리 (란)
[부수]艹 (초두머리)[총획]17획

"三國史記 第 七卷  新羅本紀 (文武王) 

十三年築國原城 古薍長城"

 

국원성의 옛 이름인 완장성(薍長城)에서  완(薍)은 "달래 뿌리(난) 또는 물억새(완)"이란 뜻으로 강변이나 늪의 갈대를 의미한다.  난장성(薍長城) 또는 완장성(薍長城)은 하중도나 갈대숲이 있는 평지성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고려사에 기록된 완장성(莞長城)도 완(薍)을 왕골(莞)로 표기한 것으로 그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국원성 또는 중원경의 치소 논란에서 장미산성보다는 남한강변의 나룻터와 하중도가 더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산성과 평지성은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관군의 주둔지는 산성이 아닌 평지나 골짜기에 목책을 두루고 야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 그 실체가 드나지 않은 중원경의 치소는 남한강변이거나 남한강에 접한 구릉지가 아닐까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완장성(薍長城)은 옛 광주목의 한강변에 위치한 한성백제의 풍납토성과 같은 평지의 토성이 아닐까 한다.  경기도 광주목에 있는 남한산성은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산성(日長山城)으로 불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 문무왕 12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으니, 둘레가 4천3백60보였다." 라고 기록되는데, 이는 문무왕 13년에 축조된 국원성보다 1년 먼저 축조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주장성을 남한산성으로 보고 있다. 일장산성은 세종지리지에 둘레가 3천9백93보(步)로 기록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8만6천8백척으로 기록되어 한강유역의 산성으로는 가장 큰 성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한성백제의 위례성에 대한 위치 비정에서 하남의 이성산성과 풍납동의 풍납토성이 제기되고 있는데, 남한산성 북쪽에 위치하는 하남의 이성산성은 한성백제 이후에도 서울의 강남지역과 성남시와 하남시가 속해 있는 한산주(광주목)의 치소로 존재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의 중원경도 장미산의 장미산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으로 가금면 일대에 군사체계을 구축하고 남한강변에 치소와 촌락을 설치하여 남한강 유역을 지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천룡성(봉황성)의 정확한 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인근 지역에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에서 고구려가 국원성을 개척하면서 천룡성(봉황성)을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특히 중원고구려비의 건립위치를  분석할때, 고구려군의 주둔지는 노은의 수룡리와 가흥의 봉황리에 고구려의 주력군이 위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보련산성과 장미산성을 국원성과 중원경의 치소로 보기는 어렵고, 남한강변 나루터 부근에 치소가 존재하지 않았을까한다. 고려의 대몽항전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장미산성이 천룡성보다 먼저 폐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중원경이 충주로 옮겨가면서 장미산성과 중원경의 치소를 폐하고 보련산성(천룡성)을 유지하다가 대몽항전 시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노은면 보련골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물인 건흥5년명금동광배와 조선초기에 시행된 사원정리에 관한 사사혁파기록된 보련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보련사는 본래 보련산에 있던 사찰로 추정되지만, 보련산의 본래 지명이 천룡산으로 변천된 것인지, 천룡산이 보련산으로 변천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사 등 고서에서 천룡산성 또는 천룡성으로 기록하고, 고지도에서도 천룡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봉황성은 천룡산성과 장미산성이 가금면 봉황리에 인접하여 천룡산성과 장미산성을 혼돈하여 봉황성으로 오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장미산성은 남한강변에 있던 나룻터와 취락을 중심으로 형성된 완장성 또는 국원성의  배후에 산성을 축조한 것인데, 남매의 축성설화에 따른 보련과 장미의 전설로 인하여 장미산 장미산성으로 변해 현재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한다. 그리고 보련산성은 보련산 자락에 위치했던 보련사와 천룡사의 흥망에 따라 변천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문무왕 때 옛 완장성인 국원소경에 국원성(둘레 2천5백9십2보)을 축조하였다는 기록에서 성의 길이 단위인 보는 약 1.2미터인데, 이로 환산하면 국원성의 길이는 약 3,110미터로 현재 잔존하는 장미산성과 비슷하다. 그리고 보의 단위를  현재의 척관법을 적용하면 약 1.8 미터인데, 이로 환산하면 국원성의 길이는 약 4,712미터로 대림산의 대림산성이나 월악산의 덕주산성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대림산성과 덕주산성은 중원경과는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와 대동지지에는 천용산 고성(天龍山古城) 또는 봉황성(鳳凰城)의 둘레가 6천1백21척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현재의 보련산성의 잔존길이와 비슷하기에 보련산성(천룡성)을 국원성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그리고 일부 향토사학자들이 봉현성을 언급하지만 봉현성은 고문서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고, 다만 조선조 말기와 민담설화로 전해지기에 금봉산성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한다.

  

국원성의 옛 이름인 완장성(薍長城)에 대하여 고찰하면서 민담설화로 중앙탑이 김생사탑으로 전해지고, 중앙탑 공원 주변의 발굴지에서 대형사찰인 김생사지가 나올 것으로 추정하고 발굴하던 일화를 떠올려 본다. 국원성과 중원경의 진실게임에서 아직 실체도 모르는 중원경 치소를 언급하는 것이 참으로 바보같은 발상임을 알면서도 그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오늘날 우리는 문화재의 발굴과 보존으로 왜 과거의 산물에 현재가 충돌하는 것일까 ? 이 글을 마치면서 남한강이 변하는 옛모습들을 연상해본다. 그리고, 현모습이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를  망상해본다.

 

 

 

(참고자료)

 

三國史記 第 四卷(삼국사기 제 04권)  新羅本紀 第 四(신라본기 제 04)

제24대 眞興王(진흥왕)  <540~576  재위기간 36년>

 

十四年春二月(십사년춘이월) : 14년 봄 2월,

王命所司築新宮於月城東(왕명소사축신궁어월성동) :
왕이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黃龍見其地(황용견기지) : 그 터에서 황색의 용이 나타났다.

王疑之(왕의지) :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改爲佛寺(개위불사) : 궁궐을 고쳐 절을 짓고,

賜號曰皇龍(사호왈황용) : 황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秋七月(추칠월) : 가을 7월,

取百濟東北鄙(취백제동북비) :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置新州(치신주) : 신주를 설치하였다.

以阿湌武力爲軍主(이아찬무력위군주) : 아찬 무력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

娶百濟王女爲小妃(취백제왕녀위소비) : 왕이 백제의 왕녀를 맞아 소비로 삼았다.

 

十五年秋七月(십오년추칠월) : 15년 가을 7월,

修築明活城(수축명활성) :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百濟王明襛與加良來攻管山城(백제왕명농여가량래공관산성) :
백제왕 명농(백제 제27대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逆戰失利(군주각간우덕이찬탐지등역전실리) :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신주군주김무력이주병부지) :
신주의 군주 김 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及交戰(급교전) :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急擊殺百濟王(비장삼년산군고우도도급격살백제왕) :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於是(어시) : 이 때

諸軍乘勝大克之(제군승승대극지) :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斬佐平四人(참좌평사인) :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士卒二萬九千六百人(사졸이만구천육백인) :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하였다.

匹馬無反者(필마무반자) :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十六年春正月(십육년춘정월) : 16년 봄 정월,

置完山州於比斯伐(치완산주어비사벌) : 비사벌에 완산주를 신설하였다.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

王巡幸北漢山(왕순행북한산) :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拓定封疆(탁정봉강) : 국경을 정하였다.

 

十一月(십일월) : 11월,

至自北漢山(지자북한산) : 왕이 북한산에서 돌아와

敎所經州郡(교소경주군) : 교서를 내려, 순행했던 주와 군에

復一年租調(복일년조조) : 1년 간의 납세를 면제해주고,

曲赦除二罪皆原之(곡사제이죄개원지) :
해당 지방 죄수 가운데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十七年秋七月(십칠년추칠월) : 17년 가을 7월,

置比列忽州(치비열홀주) : 비열홀주를 설치하였다.

以沙湌成宗爲軍主(이사찬성종위군주) : 사찬 성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十八年(십팔년) : 18년,

以國原爲小京(이국원위소경) : 국원을 소경으로 만들었다.

廢沙伐州(폐사벌주) : 사벌주를 없애고

置甘文州(치감문주) : 감문주를 설치하였다.

以沙湌起宗爲軍主(이사찬기종위군주) : 사찬 기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廢新州(폐신주) : 신주를 없애고

置北漢山州(치북한산주) :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十九年春二月(십구년춘이월) : 19년 봄 2월,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사귀척자제급육부호민) :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으로 이사하게하여

以實國原(이실국원) : 국원을 충실하게 하였다.

奈麻身得作砲弩上之(내마신득작포노상지) : 내마 신득이 포와 노를 만들어 바쳤으므로,

置之城上(치지성상) : 이를 성 위에 설치하였다.

 

三國史記 第 七卷(삼국사기 제 07권)  新羅本紀 第 七(신라본기 제 07)
제30대 文武王 下(문무왕 하)  <661~681  재위기간 20년>

 

十二年春正月(십이년춘정월) : 12년 봄 정월,

王遣將攻百濟古省城克之(왕견장공백제고성성극지) :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二月(이월) : 2월에

攻百濟加林城不克(공백제가림성불극) : 백제 가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秋七月(추칠월) : 가을 7월,

唐將高侃率兵一萬(당장고간솔병일만) : 당 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李謹行率兵三萬(이근행솔병삼만) : 이근행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一時至平壤(일시지평양) : 동시에 평양에 와서

作八營留屯(작팔영유둔) : 여덟 개의 군영을 짓고 주둔하였다.

八月(팔월) : 8월에

攻韓始城馬邑城克之(공한시성마읍성극지) :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進兵距白水城五百許步作營(진병거백수성오백허보작영) :
그들은 군대를 진군시켜 백수성으로부터 5백여 보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我兵與高句麗兵逆戰(아병여고구려병역전) :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그들과 격전을 벌여

斬首數千級(참수수천급) :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高保{侃}等退(고보{간}등퇴) : 고보{간} 등이 퇴각하자,

追至石門戰之(추지석문전지) : 이를 추격하여 석문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我兵敗績(아병패적) :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大阿湌曉川沙湌義文山世阿湌能申豆善(대아찬효천사찬의문산세아찬능신두선) :
대아찬 효천·사찬 의문·사찬 산세·아찬 능신·아찬 두선·

一吉湌安那含良臣等死之(일길찬안나함양신등사지) :
일길찬 안나함·일길찬 양신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築漢山州晝長城(축한산주주장성) :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으니 둘레가 4천 3백 60보였다.

周四千三百六十步(주사천삼백육십보) :

 

十三年春正月(십삼년춘정월) : 13년 봄 정월,

大星隕皇龍寺在城中間(대성운황룡사재성중간) :
큰 별이 황룡사에 떨어지고, 재성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拜强首爲沙湌(배강수위사찬) : 강수를 사찬으로 임명하고,

歲賜組二百石(세사조이백석) : 해마다 벼 2백 석을 주기로 하였다.

二月(이월) : 2월,

增築西兄山城(증축서형산성) : 서형산성을 증축하였다.

夏六月(하육월) : 여름 6월,

虎入大宮庭殺之(호입대궁정살지) :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자 잡아 죽였다.

秋七月一日(추칠월일일) : 가을 7월 1일,

庾信卒(유신졸) : 유신이 사망하였다.

阿湌大吐謀叛付唐(아찬대토모반부당) :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 나라에 붙으려다가,

事泄伏誅(사설복주) : 사건이 누설되어 사형을 받았으며,

妻孥充賤(처노충천) : 처자는 천인에 편입되었다.

八月(팔월) : 8월,

以波珍湌天光爲中侍(이파진찬천광위중시) :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增築沙熱山城(증축사열산성) : 사열산성을 증축하였다.

九月(구월) : 9월,

築國原城(축국원성) : 국원성

古薍長城(고완장성) : 예전의 난완성·

北兄山城召文城耳山城首若州走壤城(북형산성소문성이산성수약주주양성) :
북형산성·소문성·이산성·수약주의 주양성·

一名迭巖城(일명질암성) : 혹은 질암성

達含郡主岑城居烈州萬興寺山城(달함군주잠성거열주만흥사산성) :
달함군의 주잠성·거열주의 만흥사산성·

歃良州骨爭峴城(삽량주골쟁현성) : 삽량주의 골쟁현성을 쌓았다.

王遣大阿湌徹川等(왕견대아찬철천등) :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領兵船一百艘(령병선일백소) :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鎭西海(진서해) : 서해를 수비하게 하였다.

唐兵與靺鞨契丹兵來侵北邊(당병여말갈계란병래침북변) :
당 나라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凡九戰(범구전) : 아홉 번 전투에서

我兵克之(아병극지) :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고,

斬首二千餘級(참수이천여급) :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唐兵溺瓠瀘王逢二河(당병닉호로왕봉이하) : 호로·왕봉 두 강에 빠져

死者不可勝計(사자불가승계) : 죽은 당 나라 군사가 이루 셀 수 없었다.

冬唐兵攻高句麗牛岑城降之(동당병공고구려우잠성항지) :
겨울에 당 나라 군사가 고구려 우잠성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契丹靺鞨兵攻大楊城童子城滅之(계란말갈병공대양성동자성멸지) :
거란과 말갈 군사가 대양성과 동자성을 쳐서 멸망시켰다.

始置外司正州二人郡一人(시치외사정주이인군일인) :
처음으로 주에 2인, 군에 1인의 외사정을 두었다.

初太宗王滅百濟罷戍兵(초태종왕멸백제파수) :
애초에 태종왕이 백제를 멸하고 수자리 군사를 없앴던 것을

至是復置(지시복치) : 이 때 다시 두게 되었다.

 

三國史記 第 九卷(삼국사기 제 09권) 新羅本紀 第 九(신라본기 제 09)
제35대 景德王(경덕왕)  <742~765  재위기간 23년>

 

十六年春正月(십륙년춘정월) : 16년 봄 정월,

上大等思仁病免(상대등사인병면) : 상대등 김 사인이 병으로 사직하자,

伊湌信忠爲上大等(이찬신충위상대등) : 이찬 신충이 상대등이 되었다.

三月(삼월) : 3월,

除內外群官月俸(제내외군관월봉) : 서울과 지방 관리들의 월급제를 폐지하고,

復賜祿邑(복사록읍) : 다시 녹읍을 주었다.

秋七月(추칠월) : 가을 7월,

重修永昌宮(중수영창궁) : 영창궁을 중수하였다.

八月(팔월) : 8월,

加調府史二人(가조부사이인) : 조부에 사 2명을 더 두었다.

冬十二月(동십이월) : 겨울 12월,

改沙伐州爲尙州(개사벌주위상주) :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領州一郡十縣三十(령주일군십현삼십) : 1주 10군 30현을 소속시켰다.

歃良州爲良州(삽량주위량주) : 삽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領州一小京一郡十二縣三十四(령주일소경일군십이현삼십사) :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소속시켰다.

菁州爲康州(청주위강주) :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領州一郡十一縣二十七(령주일군십일현이십칠) : 1주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漢山州爲漢州(한산주위한주) :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領州一小京一郡二十七縣四十六(령주일소경일군이십칠현사십륙) :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소속시켰다.

首若州爲朔州(수약주위삭주) : 수약주를 삭주로 고치고,

領州一小京一郡十一縣二十七(령주일소경일군십일현이십칠) :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熊川州爲熊州(웅천주위웅주) :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領州一小京一郡十三縣二十九(령주일소경일군십삼현이십구) : 1주 1소경 13군 29현을 소속시켰다.

河西州爲溟州(하서주위명주) : 하서주를 명주로 고치고,

領州一郡九縣二十五(령주일군구현이십오) : 1주 9군 25현을 소속시켰다.

完山州爲全州(완산주위전주) :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領州一小京一郡十縣三十一(령주일소경일군십현삼십일) : 1주 1소경 10군 31현을 소속시켰다.

武珍州爲武州(무진주위무주) :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領州一郡十四縣四十四(령주일군십사현사십사) : 1주 14군 44현을 소속시켰다.

(良州一作梁州(량주일작량주) : ) ['良州'는 '梁州'로 쓰기도 한다.]

 

三國史記 第 三十五卷(삼국사기 제 35권) 雜志 第 四(잡지 제 04)

新羅(신라) / 地理 二

 

中原京(중원경) : 중원경은

本高句麗國原城(본고구려국원성) : 원래 고구려의 국원성으로서

新羅平之(신라평지) : 신라가 이를 평정하여

眞興王置小京(진흥왕치소경) : 진흥왕이 소경을 설치하였고,

文武王時築城(문무왕시축성) : 문무왕 때 여기에 성을 쌓았는데,

周二千五百九十二步(주이천오백구십이보) : 둘레가 2천 5백 92보였다.

景德王改爲中原京(경덕왕개위중원경) : 경덕왕이 중원경으로 개칭하였다.

今忠州(금충주) : 지금의 충주이다.

 

三國史記 第 三十七卷(삼국사기 제 37권)  雜志 第 六(잡지 제 06)

高句麗,百濟(고구려,백제) / 地理 四

新羅亦得其南境(신라역득기남경) : 신라에서도 그 남쪽 지방을 차지하여,

以置漢朔溟三州及其郡縣以備九州焉(이치한삭명삼주급기군현이비구주언) :
한주, 삭주, 명주의 3주와 군현을 두어 아홉 주를 설치하였다.

漢山州(한산주) :

한산주

國原城(국원성) : 국원성

一云未乙省(일운미을성) : 미을성 또는

一云託長城(일운탁장성) : 탁장성이라고도 한다.

南川縣(남천현) : 남천현

一云南買(일운남매) : 남매라고도 한다.

駒城(구성) : 구성

一云滅烏(일운멸오) : 멸오라고도 한다.

仍斤內郡(잉근내군) : 잉근내군

述川郡(술천군) : 술천군

一云省知買(일운성지매) : 성지매라고도 한다.

骨乃斤縣(골내근현) : 골내근현

楊根縣(양근현) : 양근현

一云去斯斬(일운거사참) : 거사참이라고도 한다.

今勿內郡(금물내군) : 금물내군

一云萬弩(일운만노) : 만노라고도 한다.

道西縣(도서현) : 도서현

一云都盆(일운도분) : 도분이라고도 한다.

仍忽(잉홀) : 잉홀

皆次山郡(개차산군) : 개차산군

奴音竹縣(노음죽현) : 노음죽현

 

 

세종지리지/경기/⊙ 광주목(廣州牧)

 

○ 일장 산성(日長山城)은 주치(州治)의 남쪽에 있다.[높고 험하며, 둘레가 3천 9백 93보(步)요, 안에 군자고(軍資庫)와 우물 7이 있는데, 가뭄을 만나도 물이 줄지 아니한다. 또 밭과 논이 있는데, 모두 1백 24결(結)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비로소 한산(漢山)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경기 京畿 광주목 廣州牧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남한산성이다.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尉禮城)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또 도읍을 남평양성으로 옮겼다 : 지금의 경도(京都).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없애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신라가 그 땅을 점차 거두어 남한산성을 고쳐 한산주라 하고, 또 남한산주라고도 불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는 한주(漢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는데 광주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절도사를 두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고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가 되었다가 9년에 8목(牧)을 정할 때에 다시 목이 되었다. 본조에서는 이를 따랐다.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산천] 검단산(黔丹山) : 주 동쪽 7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청계산(淸溪山) : 주 서쪽 50리에 있는데 또 과천현 편에 보라.

대모산(大母山) : 주 남쪽 30리에 있다.

일장산(日長山) : 주 남쪽 5리에 있는데 일명 남한산이라고도 한다.

[고적] 온조왕고성(溫祚王古城) : 온조왕 13년에 왕도(王都)에 늙은 할미가 변화하여 남자가 되고, 다섯 호랑이가 성안에 들어왔으며, 왕의 어머니가 돌아갔다. 왕이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적은 데다가, 더욱 지금 요사스러운 조짐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께서 세상을 버리시니 사세가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 없어 반드시 장차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 어제 나가서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여 보니, 토지가 비옥하다. 마땅히 그곳에 도읍하여 오래 편안하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7월에 한산에 나아가 목책(木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기고, 9월에 성과 궁궐을 세웠다.

일장산성(日長山城) : 바로 신라 때 주장성(晝長城)이다. 문무왕(文武王)이 쌓은 것인데, 안에 여섯 우물과 시내가 있다. 주위가 8만 6천 8백 척, 높이는 24척인데 석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혹은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薍長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빼앗았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을 옮겨서 채웠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2년(983)에 목(牧)을 두었다가 14년(995)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예속하였다. 현종(顯宗) 3년(1012)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만들었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만들었고, 고종(高宗) 41년(1254)에 승격하여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세종(世宗) 31년(1449)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산천】천룡산(天龍山)

주 서쪽 50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6백 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다. 가운데에 우물 셋이 있다.


【궁실】 실록각(實錄閣)

객관(客館) 동남쪽에 있다. 본조(本朝)의 실록(實錄)을 보관하고 있는데, 3년마다 사관(史官)을 보내 포쇄(曝曬)한다. 성주(星州)와 전주(全州)도 같다.

【고적】대림산성(大林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6백 3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덕주산성(德周山城)

주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6백 70척이고, 안에 샘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페하였다.

동악성(桐岳城)

주 동쪽 1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백 8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봉황성(鳳凰城)

주 서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천 1백 21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본래는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였다. 낭자성(狼子城)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한다. 명종(明宗) 5년(1550)에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시켰다. 이홍윤(李洪胤)의 난 때문이다.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정묘년(1567)에 다시 복귀시켰다 무옥(誣獄)으로 하옥되었기 때문이다. 광해주 5년(1613)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유인발(柳仁發)이 반역하다가 주륙당했기 때문이다. 인조 원년(1623)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6년에 다시 충원현(忠原縣)으로 강등되었다. 안집중(安執中)이 반역으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15년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25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채문형(蔡門亨)이 반역으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효종 3년(1652)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숙종 6년(1680)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아비를 죽인 죄인 때문이다. 15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영종 5년(1729)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이조겸(李祖謙)이 반역으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14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15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지아비를 죽인 죄인 때문이다. 24년에 복귀되었다가 31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유수원(柳壽垣)이 반역죄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40년에 다시 복귀되었다. 고종(高宗)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금천(金遷)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

복성면(福城面)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

소고(蘇古)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가흥(可興)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

앙암(仰巖)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

금생(金生)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가차산(加次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성지】 천용산 고성(天龍山古城)

봉황성(鳳凰城)이라고도 한다. 둘레는 6천 1백 21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장미산 고성(薔薇山古城)

유적(遺跡)이 있다.

 

 

충주 장미산성[충주디지털문화대전에서]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장미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국시대 산성.

  • [개설]

장미산성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가흥리·하구암리 일대에 솟아 있는 해발 337.5m의 장미산(薔薇山·長尾山) 정상부와 계곡을 포함하여 축조된 둘레 2,940m의 삼국시대의 대규모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이다.

  • [건립경위]

충주산성은 삼국시대 석성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축성 경위를 파악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충주산성과 마찬가지로 남매축성 설화가 전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충주시 노은면가마골이라는 마을에 장미라는 남동생과 보련이라는 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둘 다 명산 정기를 타고나서 장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 집에서 장수가 둘이 출생하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희생을 당해야 한다는 관습에 따라 성 쌓기 내기를 하게 되었다. 누이 보련노은에서, 장미가금에서 각각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들인 장미보다 보련의 속도가 빠르자 어머니는 아들을 돕기 위해 딸이 성을 쌓고 있는 산으로 떡을 해가지고 가서 “네가 너무 빠르니 이 떡 좀 먹고 쉬었다 쌓도록 하라.”며 떡을 펴놓았다.

보련이 떡을 먹으며 쉬었다가 마지막 돌 한 개를 가지고 올라가는 중에 장미는 성 쌓기를 끝냈다. 결국 성 쌓기 내기에서 진 보련은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튿날 저녁 보련의 집을 향하여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부터 보련이 성을 쌓은 산을 보련산, 장미가 성을 쌓은 곳을 장미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미산성에 대한 여러 차례의 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들이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으로 편년되는 점, 토기류 증 한성백제기의 유물이 다수 확인되는 점, 이 시기가 장수왕의 남하정책과 관련된 시기로 주변에 중원고구려비가 남아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이 지역이 일찍이 백제 지역으로 있다가 5세기 말경에 고구려의 영역으로 바뀌었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위치]

장미산성충주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쪽에서 달천과 합류한 한강이 흘러들어 산성의 동쪽을 돌아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서쪽 방면으로 을궁산무쇠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능선을 제외하면 남·동·북의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한강 수로와 육로를 동시에 공제(控制)하는 요충지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산성의 남쪽과 동쪽은 한강과 합류하는 달천이 한눈에 들어오며, 서쪽으로는 장호원 방면에서 충주에 이르는 잣고개노은고개 등의 교통로와 동북쪽으로는 원주·제천으로 통하는 길의 조망이 용이하다. 유적 주변에는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를 비롯하여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제1401호),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를 비롯하여 충주 누암리 고분군(사적 제463호) 등이 위치하고 있어 충주를 중심으로 한 삼국간의 치열한 패권 경쟁을 엿볼 수 있다.

  • [형태]

장미산은 북고남저의 형세를 이루고 있으며, 산성은 자연지세를 따라 능선과 계곡부를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정상부는 남북 방향으로 긴 대지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서 갈라져 각각 동쪽·동남쪽·남쪽으로 뻗은 능선의 정상부 외연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다. 동북쪽과 남향한 계곡을 에워싸고 있는데 남향의 길고 가파른 계곡을 포용하여 남쪽 성벽의 가장 낮은 지점에 남문지와 수구지가 있다.

  • [현황]

1. 성벽

장미산성의 성벽은 석축 성벽 이전에 판축의 토축 성벽이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처음 축성부터 석축으로 축조되었음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성벽은 성벽을 축조할 곳에 계단상으로 암반층을 정리하여 외벽의 기단부터 축조하였는데 안쪽으로 북돌을 채워 넣고 빈틈에는 잡석으로 채워 올리다가 내성벽과 수평이 되는 지점에서부터 내벽과 외벽을 동시에 구축하면서 북돌을 정연하게 채워 넣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외벽이 붕괴되어도 내부 북돌층이 견고하게 남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설축(設築)한 후 성벽 내측의 빈 공간에 점질토와 사질토를 층층이 다져 누수로 인한 성벽의 붕괴를 최소화하였다. 석축의 최하 단위는 성벽 높이 6m, 윗면 너비 3m이며 곳에 따라서 높이 6.9m, 너비 5.1m까지 넓혀 축조하였다.

2. 치성

장미산성의 치성은 북쪽의 능선, 동벽의 능선 3개소와 동남 각부의 능선, 서벽에 3개소, 그리고 북벽 동측 지점에 1개소 등 모두 9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이중 서쪽 성벽이 북쪽으로 이어져 남동쪽 방향으로 회절하는 북서쪽 회절부 외측 지점의 치성은 발굴조사 결과 석축성벽을 쌓은 후 시설한 것으로, 장방형으로 목책을 돌려 마련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장축이 11m 정도이고 폭은 3.7m 가량의 규모이다.

주간거리는 180㎝ 내외로 주혈의 지름이 70㎝~90㎝, 깊이 40㎝~60㎝이다. 이 치성은 북쪽에서 접근하는 적의 관찰을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내만된 계곡부로 침투하는 적을 적절하게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같은 목책의 치성은 청원 남성골 산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3. 배수로

장미산성에는 성벽 내측으로 배수로를 시설하여 침수로 인한 석축성벽의 붕괴를 예방하였다. 배수로는 폭 40㎝~50㎝ 정도의 크기로 성벽 상면보다 조금 낮게 ‘U’자형으로 시설하였는데, 이는 우수가 배수로로 흘러내리도록 배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장미산성의 성벽 조사에서는 성내에서 성벽을 통과하는 수구 시설이 확인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경사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성벽의 윗면을 통과하는 ‘월류식(越流式)’ 배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상 배수되는 성벽의 외측면은 다른 곳보다 치밀하게 축조하였으며, 바닥에는 점질토를 깔고 석재를 놓은 다음 석재 틈을 잡석으로 채워 넣어 성벽 기단부의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게 하였다.

4. 석환 보관을 위한 석곽 시설

석환을 이용한 투석전(投石戰)은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었다. 장미산성 내에는 성벽과 근접하여 석환(石丸)을 비축하기 위한 석곽 시설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석곽은 180㎝×220㎝, 240㎝×240㎝, 260㎝×260㎝ 등 비교적 다양한 크기로 밝혀졌으며, 부정형의 석재와 할석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천석(川石)을 비치하였다.

5. 목탄요(木炭窯)

장미산성 내에서 모두 2기의 탄요가 확인되었다. 30° 가량의 경사면에 암반을 굴착하여 조성하였으며,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반지하식의 구조이다. 장축 3m, 단축 2m, 높이 1.1m의 크기이다. 요 내부에는 판석을 대고 점토를 발라 완성한 연도가 확인된다. 바닥면에서 토기편 등이 발견되지 않고 소성실에 두꺼운 숯층이 깔려 있어 제탄(製炭)을 위한 탄요로 추정되었다.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결과 1호가 1110AD, 2호 1200AD로 측정되었다.

6. 출토유물

장미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가 대부분이다. 토기는 원저단경호를 비롯하여 세격자문이 시문된 토기병, 점열문과 파상문이 새겨진 토기발 등을 비롯하여 각종 구연부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중에서 장미산성의 초축 연대를 알려주는 것으로는 조족문(鳥足紋) 토기를 비롯한 원저단경호 등 한성백제기의 유물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철기류는 대부분 무기류로 일부 농기구가 확인된다. 무기류는 철촉과 갑옷에 사용된 소찰갑 등이며 농기구로는 보습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중에서 철촉은 그 형태로 보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고 있어 토기류와 동일한 시기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의의와 평가]

충주 지역은 원래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다가 5세기 말경 고구려의 영역으로 바뀌었고, 557년(신라 진흥왕 18)에 국원 소경으로 삼고, 이듬해 귀족의 자제와 육부의 호민을 이주시키면서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장미산성백제-고구려-신라로 이어지는 소속국의 변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김규영 편, 『한국의 성곽과 봉수』상(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1989)
• 『중원 장미산성』(충북대학교박물관, 1992)
• 『삼국통일의 격전지 충북의 성곽을 찾아서』(충청북도, 2000)
• 『장미산성 정비예정구간 시굴조사보고서』(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3)
• 『충주 장미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중원문화재연구원, 2006)
• 장준식, 「고구려 국원성치지에 관한 연구」(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2)
• 최근영, 「충주 장미산성고」(『사학연구』55·56, 한국사학회,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