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과 비보풍수론에 대하여
풍수지리란 자연환경과 자연지형을 분석한 생태지리학이다, 풍수이론은 자연지형에 따른 자연환경에 순응하면 흥하고, 역행하면 망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지만, 그 논리를 정립하는 과정과 그를 해석하는 세력에 의해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고, 종교적인 잘못된 주술산법과 좌향론으로 자연의 섭리에 역행함으로 학문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특히,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참위설과 자연의 무궁한 이치를 음양오행과 십간십이지에 의존하는 풍수도참은 지나치게 작은 세계을 해석함으로써 자연법칙의 모순들을 극복하기 보다는 비보풍수라는 것으로 잡귀(雜鬼)를 끌어들여 신뢰성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풍수지리는 자연환경을 지혜롭게 이용하는 옛 사람들의 훌륭한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오늘날에도 신도시계획과 단지계획, 그리고 건축계획을 수립할때도 수많은 풍수이론이 등장한다. 최근의 국책사업인 세종시의 개발에 있어서도 금강과 미호천의 합강머리를 중심으로한 삼태극이 등장하고, 이는 세종시 개발에 편승하는 세력에 의해 이용된다. 조선개국 시에 일어난 계룡산 신도안과 북한산의 한양에 대한 풍수정쟁은 한양으로 종결되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중심으로 존재하지만 계룡산 신도안을 가본 사람이라면 신도안이 도읍지가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천년의 도읍지를 자랑하는 경주와 오백년 도읍지를 자랑하는 개경, 그리고 고조선과 고구려의 도읍지인 평양 뿐만 아니라 전국에는 수많은 읍성과 촌락들이 산재한다. 하지만, 한양의 풍수이론에 해당하는 지역은 경복궁을 중심으로한 도성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한성과 궁궐 내에도 길지와 흉지는 존재한다. 풍수이론으로 이야기하자면 왕궁인 경복궁을 제외한 도성사람들은 길지가 아닌 흉지에서 사는 꼴이 되어 한양사람들은 자연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한양의 풍수에 따른 피해는 현재의 서울시민에게 엄첨난 비용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도 도읍과 촌락과 주택은 구분된다. 아무리 좋은 풍수를 지녔다고 해도 그 지역이 좁으면 촌락이 되는 것이고, 넓으면 대촌을 이루고 읍성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명당자리를 찾아 풍수와 좌향에 따라 주택을 멋있게 마련했는데, 그 주택 주변에 거대한 건물이나 공장 또는 축사가 들어선다면 그 땅은 명당이 아니라, 흉가로 변해버린다. 명당이란 곳도 시대와 주변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아파트에도 로얄층이 있듯이 주택지에도 좋은 집터와 집이 있다. 이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 쾌적한 공간에서 살기 위한 삶의 지혜인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반궁수와 옥대수란 표현을 한다. 오늘날에도 하천곡류에 따른 흐름상태를 도로의 차량에 적용하여 풍살.수살이 아니라 도로살이 대지에 미치는 것을 꺼려한다. 여기에서 최근에 진행된 한강정비사업과 4대강 사업은 풍수지리와 어떻게 다를까 ? 한강정비사업으로 등장하는 잠실, 반포, 여의도 등은 한강의 물길에 따른 흉지가 아니라 최고의 상권으로 변모하고, 강변의 산자락은 풍수와 관계없이 최고의 조망권을 자랑하는 주거지로 변했다. 그리고 하천정비사업으로 축조된 거대한 제방과 매립지들은 홍수로 인한 강물의 범람과 침수를 억제하고, 도시기간시설인 도로, 상하수도, 전기, 통신, 가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도시환경에 적응할 수있는 조건들을 인위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오늘날의 풍수지리학자들은 바람과 물보다는 도로와 상권과 조망을 우선 시하고 최고의 주택지는 숲이 우거진 공원이나 전망이 좋은 산자락을 길지로 본다. 하지만, 이러한 택지는 엄청난 비용과 또 다른 환경문제을 발생한다.
충주의 지형에 관한 풍수는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나타나는데, 택리지는 충주의 지세를 좋게 평가하질 않았다. 그리고,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타난 풍수론에 의하여 충주지역의 민심은 더욱 혼란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충주의 지세에 대하여 죽령과 조령의 두 길이 남한강을 따라 육로와 수로가 한양으로 흘러 탄금대에 살기가 하늘을 찌르고, 햇빛이 보이지 않는 형국이며 충주의 지세가 하류로 빠져나가 살 곳이 못된다고 기술하였다. 이중환의 풍수론에 의하면 충주는 배산임수와 장풍득수의 지형이 아니고, 남한강과 달천의 급류가 충주에 화를 주고 복이 나가 충주에는 큰 부자나 인물이 나지않고 민심이 좋지않다는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때 충주전투의 패배와 남한강 일대의 홍수피해에 따른 선입견 때문이 아닐까한다. 충주를 흐르는 남한강과 달천은 험준한 강원도와 충청도의 산간지역에서 흘러내는 급류을 형성하기에 두 물길이 탄금대 합수머리에 부딪치며 맴돌다가 빠져나가는 지형이라 그에 따르는 홍수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흉지로 본 것이다. 이는 물의 흐름에 따른 풍수로 탄금대 주변의 지형이 상류의 기를 모으지 못한다는 의미로 달천과 남한강 유역에 퇴적된 토사의 상태와 사행하천의 침식과 퇴적현상을 부의 흥망으로 본 풍수설이다. 그러나, 충주의 기후는 중부내륙지역인 원주, 제천, 음성보다는 날씨도 따뜻하고, 바람도 약하며, 물도 많다. 이는 백두대간인 오대산에서 속리산에 이르는 남한강 수계가 탄금대로 흘러 들고, 한남금북정맥의 산줄기가 겹겹으로 북서풍을 막아주고 충주의 산줄기가 남에서 북으로 역행하여 분지를 감싼 지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마와 풍살이 있는 곳에 사람이 산다면 그 피해는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그 마와 살이 지나간 자리는 기암괴석과 곡류가 만들어낸 지형으로 인하여 경관이 뛰어나기에 명소로 변한다. 세계적인 명승지의 대부분은 물과 바위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다. 하지만 명승지는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집들이 모여 촌락을 이루고, 촌락이 번성하여 도시화되면 제아무리 명당이라해도 도시의 병폐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문명은 그 병폐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 뿐만 아니라 쾌적한 생태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기법들을 창출해간다.
남한강물이 부딪치는 흉지에 위치한 김생사라는 절과 중앙탑이라는 석탑과 창동마애불은 왜 만들었을까 ? 탄금대 양진명소의 오룡굿과 목계 별신제 그리고 중앙탑 탑돌이는 무슨 영혼을 달래고 무엇을 기원할까 ? 비보풍수설에 의하면 나쁜 기를 잠재우기 위하여 나무도 심고, 탑과 장승도 만들고, 연못과 제방 등을 축조하기도한다. 경복궁 뿐만 아니라 전통건축물에서는 수많은 비보물들을 찾을 수 있는데, 고건축물을 답사하다가보면 비보물들이 영적인 신비로움을 주기도 하며, 그를 해설하는 역사학자나 고건축가들도 그것이 마치 숨은 비법처럼 자랑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건물에 귀신들만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앙탑이 위치하는 탑평리와 강건너의 오석은 남한강과 달천의 물흐름에 따라 지형이 달라지는 형국이다. 남한강이 세차게 흐르면 오석이 옥대수가 되고, 달천이 세차게 흐르면 중앙탑 부근이 옥대수로 변하며, 충주댐이 건설된 이후에는 남한강의 토사가 유입되지 않아서 목행대교 부근에는 바위가 드러나고, 하류에는 강자갈들이 즐비하다. 즉 충주댐의 건설과 하천정비사업인 제방으로 인하여 생태지형이 변한 것이다. 남한강변에 위치하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을 비보사탑보다는 한반도의 중앙탑이라고 명명하고 설명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은 중원경의 위상을 높이고, 안녕을 기원하는 탑임에는 틀림없다. 중앙탑의 형식과 구조와 크기는 일상적인 문화재 자료에 불과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탑의 건립시기와 목적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중앙탑이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한다. 탄금대 강 건너에 자리한 김생사지는 남한강이 거세게 흐를때 마다 사라져가는 절터로 볼 수 있는데, 김생사지에서 바라보는 남한강과 탄금대의 전경은 정겨우면서도 장쾌하다. 그리고, 중앙탑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은 미지의 세계로 흘러가고 싶은 망상에 들게한다.
택리지 -충주목
사대부의 정자가 많고 의관 차린 사람들이 모이며 배와 수레들도 모여든다. 또 국도의 동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한 고을에서 과거에 급제한 자가 많기로 팔도 여러 고을 가운데 으뜸이니, 이름난 고을이라고 부르기에 넉넉하다. 경상도(에서 서울 가는 길이) 좌도에서는 죽령을 거쳐 (이 고을로) 통하고, 우도에서는 조령을 거쳐 (이 고을로) 통한다. 두 고개의 길이 모두 이 고을로 모여, 물길 또는 육로로 한양과 통한다. 그러므로 이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으로 오가는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다투는 곳이 된다. 참으로 온 나라의 한복판이 되어 중국의 형주나 예주와 같기 때문에, 임진년에 왜적이 신립(申砬)을 또한 여기서 패배시켰다. 보통 때에도 살기가 하늘을 찌르며, 햇빛이 보이지 않는다. 지세가 서북쪽으로 쏟아지며 정기가 머물러 쌓이지 않으므로 부유한 자가 또한 적다. 백성이 많아 항상 구설이 많고 경박하여서 살 곳이 못 된다. 그러나 이는 충주 고을만 가지고 논한 것이다. 충주에서 서쪽으로 달천을 건너면 속리산이고, 속리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한 가지가 음성현 서쪽에 우뚝하게 솟아 가섭산과 부용산이 되었다. 이 산줄기가 하나는 금천에 그쳤고, 다른 하나는 가흥에서 그쳤으며, 나머지 산기슭은 달천 서쪽으로 빙 돈다. 땅은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고, 토질도 매우 기름지다. 산골에 마을이 섞여 있는데, 부유한 자가 많다. 그 가운데서도 금천과 가흥이 가장 번성하다. 금천은 두 강이 마을 앞에서 합친 뒤에 마을 북쪽으로 둘러서 흘러가므로, 동남쪽으로는 영남의 물자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의 생선과 소금을 받아들여, (교역하는) 여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한양의 여러 강마을들과 비슷하다. 배의 고물과 이물들이 잇닿아, 하나의 커다란 도회지를 이루었다. 가흥은 금천 서쪽 1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강이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흘러가고, 마을은 남쪽 언덕에 있다. 부용산 한 가지가 강물을 거스르며 우뚝하게 솟아 장미산이 되었는데, 이 산이 바로 가흥의 주산이다. 나라에서 여기에 창을 설치해③ 고개 남쪽의 경상도 일곱 고을과 고개 북쪽의 충청도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고, 수운판관을 시켜 뱃길로 서울까지 실어 나른다. 주민들은 객주업을 하면서 쌀이 드나들 때 끼여들어 이문을 노리며, 가끔 횡재하는 수도 있다. 두 마을에는 과거에 올라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도 또한 많다. 가섭산 일대에서 속리산 서쪽으로 뻗은 줄기를 소속리산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다시 한 가지가 거슬러 뻗어서 옥장산(玉帳山)과 팔성산(八聖山)이 되었다가 말마리(抹馬里)에서 그쳤는데, 이곳이 바로 기묘사화 때의 명현이었던 십청(十淸)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이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곳이다. 그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대대로 살며, 민가가 수백호인데 모두 넉넉하게 산다. 마을 앞에 커다란 냇물이 있어 물을 대므로, 1묘에 1종씩 거두는 논이 많다. 그래서 옛부터 흉년이 드는 해가 적다. 한양과의 거리가 가까워 200리밖에 안 되고, 게다가 여강과 물길로 통하니 참으로 살만한 곳이다. 이 지방 사람들은 금천․가흥․말마리와 강 북쪽에 있는 내창(內倉)을 충주 4대촌이라고 한다. 충주 고을에서 서북쪽으로 7리쯤 되는 곳에 작은 산 하나가 두 강물이 합치는 곳의 안쪽에 솟아 있다. 신라 때 우륵(于勒) 선인이 가야금을 타던 곳인데, 탄금대(彈琴臺)④라고 부른다. 탄금대에서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면 북창(北倉)이 있는데 강가에 있는 바위의 경치가 좋다. 창 서쪽은 기묘사화의 명현인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1488~1552)이 살던 곳이다. 자손 10대에 걸쳐 끊임없이 과거에 합격하자, 사람들이 “강가의 명당”이라고 하였다.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월탄(月灘)⑤이 되는데, 홍씨들이 사는 곳이다. 또 그 서쪽은 하담(荷潭)인데, 옛판서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이 살던 곳이다. 또 그 서쪽은 목계(木溪)인데, 강을 내려오는 생선배와 소금배들이 정박하며 세를 내는 곳이다.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물산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므로, 주민들이 모두 장사에 종사하여 부유하다. 목계 서쪽은 청룡사 골짜기인데, 서쪽으로는 원주와 경계가 닿아 있다. 동쪽으로는 북창에서 서쪽으로는 청룡사까지를 아울러 강북 여러 마을이라고 하는데, 비록 강가의 경치는 좋지만 땅이 메마르다. 큰강 남쪽에서 달천 서쪽까지의 기름진땅보다 못하다. 목계에서 북쪽으로 10리 되는 곳이 내창촌(內倉村)인데, 천년 동안 이름난 마을이다. 산 속에 들판이 펼쳐져 바람기가 아늑한데다 땅도 매우 넓어서, 대대로 살아오는 사대부들이 많다.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디지털충주문화대전에서)
- [정의]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 [개설]
그 결과 삼국시대 이후 제작된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들이 출토되어 고대시대부터 사람들이 머물렀음을 알려주었다.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寺)’명(銘)의 기와를 비롯하여 고대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나, 석탑의 성격과 건립 시기를 추정할 만한 결정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석탑은 일명 중앙탑(中央塔)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성격과 구체적인 건립 시기를 놓고 다양한 견해들이 나와 있는 상태이다. - [건립경위]
석탑은 사찰 가람의 핵심적인 조형물로 건립되지만 경우에 따라서 표식적(標式的) 기능이나 비보적(裨補的) 성격으로도 건립되었다. 이 석탑은 오래전부터 중앙탑으로 불리고 있으며, 석탑의 위치가 고대의 주요 수로였던 남한강변의 높은 토단 위에 세워진 점으로 보아 순수 불교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탑의 구체적인 건립 시기와 성격에 대해서는 석탑이 세워져 있는 토단(土壇)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할 것으로 판단된다. - [위치]
- [형태]
하층기단은 여러 매의 판석형 석재를 결구하였으며,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였다. 하대갑석은 상면을 경사지게 치석하여 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하였으며, 상부에 호각형으로 2단의 상층기단 괴임을 마련하였다. 상층기단 면석부에도 우주와 탱주를 세워 각 면을 구획하였으며, 상대갑석은 하부에 높은 부연을 마련하여 석탑의 건립 시기가 오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갑석 상면 합각부는 낮은 돋을대를 표현하였으며, 가운데에는 사각형으로 각호각형의 3단 괴임을 두고 그 위에 별도의 높은 탑신석받침을 마련하였다. 이 받침대는 높은 하중의 탑신부를 견고하게 지탱하기 위하여 고안된 시설로 보인다. 탑신부는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일정한 체감을 보이고 있어 안정된 인상을 주고 있다. 탑신석은 좌우에 우주를 세웠으며, 2층 탑신석부터 높이를 급격하게 줄여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의 결구 수법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일정하게 좌우 너비를 줄여 고준함과 동시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옥개받침은 모두 5단으로 마련되었으며, 처마부는 수평으로 치석되었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도록 다듬었고, 합각부 끝에는 반전(反轉)을 살짝 주어 경직성을 탈피하도록 했다. 합각부 처마부에는 풍탁을 달았던 원공이 뚫려있어 최초 건립 당시에는 화려한 외관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륜부는 2층으로 구성된 노반이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위에 가운데가 볼록한 원주형 석재가 있고, 앙화석이 꼭대기에 올려져 있다. 원래의 상륜부를 알 수 없어 아쉽지만, 현재 상륜부에 올려져 있는 부재들도 최초 건립 당시의 부재인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기단 아래와 6층 탑신석에서 사리 장치가 발견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석탑에 대한 수리 공사가 있었는데 6층 탑신석 상면에 사리공(舍利孔)이 있었으며, 사리공은 석재로 제작된 뚜껑으로 막음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리공에서 목제 사리함, 은제 사리호, 고경(古鏡) 2매, 경문(經文)으로 추정되는 종이, 유리병 등이 수습되었다. 또 기단 아래 석탑 기초에서 또 다른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당시 판석형 석재를 제거하자 개석(蓋石)이 나왔고, 이를 제거하자 그 안에 정교한 황동제개부호(黃銅製蓋付壺)가 있었는데, 일부 파손된 부재들이 물기가 있는 바닥에 떨어져 토사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이들 사리구에 대한 일제강점기의 기록에 의하면 6층 탑신석에 봉안된 사리구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 아래에 봉안된 사리구는 통일신라시대 봉안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6층 사리장치는 고려시대에 석탑의 중수나 보수시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대형으로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치석 수법과 정연한 결구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세부적으로 괴임대와 옥개받침의 치석 수법 등이 통일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현황]
- [의의와 평가]
통일신라시대 석탑을 만드는 기술이 총동원되어 응집되어 있는 석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흔히 석탑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 석탑은 그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또한 세부적으로는 기단부와 탑신부의 각부 치석 수법이 정연하고, 당대의 석탑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는 석탑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중원 탑평리사지 발굴조사보고서』(한국교원대학교박물관, 1993) • 박경식, 『탑파』(예경, 2001) • 『충주시지』(충주시, 2001) • 최근영, 「충주 중앙탑의 건탑 시기와 그 성격」(『상명사학』10·11·12, 상명대학교 사학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