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에서/옛날 지명들

[스크랩] 권근의 호 "양촌"은 그가 살았던 충주시 소태면 양촌 마을에서 딴 것이다.

산골어부 2012. 10. 22. 00:06

 양촌(陽村) 권근(權近)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미술학과 2004812027 이형순


1. 권근의 생애 2. 교육사상
3. 철학사상 4. 주요 저서


1. 권근의 생애

고려왕조 말기에서 조선왕조 초기에 활약한 대학자
권근은 고려왕조의 말기에서 조선왕조 초기에 걸쳐서 크게 활약한 대학자이며 문학가이다. 고려 공민왕 원년(1352년)에 검교정승 권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진(晋)이었으며 자는 가원(可遠) 또는 사숙(思叔)이요, 호는 양촌(楊村)이며 시호는 문충공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권근은 두뇌가 명석하고 부지런하며 침착하여 아무리 급할 때에도 당황하는 일이 없었다. 열살에 독서를 시작하여 17세의 소년으로 성균관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인 공민왕 17년(1368년)에 문과의 병과에 급제하였다. 급제한 뒤 바로 춘추검열에 임명되고 벼슬이 점차 올라 우왕 때에는 예문응교 좌사의대부, 성균관대사성, 예의판서 등을 지내고 창왕 때에는 좌대언, 지신사, 첨서밀직사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또한 지제교를 겸하여 왕의 교서문 등 중요한 글을 찬술하였다.

권근은 창왕 원년(1389년) 6월에 윤승순의 부사로 명나라에 들어갔다가 9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그 곳에서 가져온 예부자문이 화인이 되어 죽음에까지 몰렸으나 이성계의 구원으로 모면되고 우봉에 유배되었다. 이것이 권근의 앞으로 6년간의 귀향살이의 시작이다.

여러 곳으로 귀향살이를 옮겨 다니다가 공양왕 2년 5월 소위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마침 청주에 큰 홍수가 나서 왕의 특명으로 면죄되었다. 권근은 잠시 서울에 돌아와 있었으나 다시 익주에 유폐되었다가 풀렸으며 이듬해에 충주 소태면 양촌에 와서 살았다.

권근은 이곳에서 고려와 조선의 두 왕조를 겪게 되었는데 이성계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서 벼슬을 할 때까지 4,5년간 줄곧 야인으로 생활하였다. 이러한 야인 생활 속에서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마음을 가다듬고 정력을 기울여 많은 유생들의 교육과 불후의 저술에 정력을 바쳤다.

유명한 권근의 [입학도설]은 익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지은 것이며 [천견록] 과 [예경]의 고정(考定)은 충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유배지에서나 충주에서나 그의 높은 학문을 사모하여 많은 후생들이 운집하였다.

- 권근의 호 "양촌"은 그가 살았던 충주시 소태면 양촌 마을에서 딴 것이다. -

권근이 조선왕조에 나가게 된 것은 태조 2년부터이며, 태조 5년에는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의 명제로 응제시 24편을 지어 그 우수함을 자신의 문학과 국가의 명예를 아울러 선양하고 외교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여 조선과 명의 관계를 크게 호전시키는 관계를 가져오게도 하였다. 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권근은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르게 되었으니 정계와 학계에서 그의 소신대로 주자학적 유교국가를 만드는 모든 활동을 활발히 수행하게 되었으며 벼슬도 영직에 승진되어 만년에 매우 영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정종이 즉위하자 정당문학, 참찬문하부사를 지냈으며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그는 새 왕조의 왕권확립에 중요한 사병혁파를 주장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일등공신에 서훈되고 길창부원군에 봉하여지는 등 태종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또한 조선 최초의 예문관 대제학 겸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어 학문, 문학, 교육, 수사 등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태종 5년에는 의정부 찬성사에 승진되고 그 이듬해에는 유학제조에 임명되어 유생강권의 일에 특히 주력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동국사략, 경서구결 등 관찬사업을 이루어 놓는 한편 학식을 제정하여 유생의 독서를 규율하고 권학사목팔조를 개진하여 문교시책의 시정과 보완을 다했다.

태종9년(1409) 2월14일에 58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권근은 한번도 외직에 부임된 적이 없으며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문학가로서 혹은 정치가로서 당시 국가와 사회에 공헌함이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권근의 부음을 들은 왕은 몹시 애도하여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치상하게 하는 한편 집을 하사하고 부증(賻贈)을 퍽 후회하였다.

경기도 광주에 임시로 장사지냈으나 뒤에 지금의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으로 천장하였다. 권근이 호를 양촌이라 하였음은 그가 살았던 충주시 소태면 양촌마을에서 딴 것이다.


2. 교육사상

권근의 교육목적은 明人倫을 통한 인재양성에 두고, 수양덕목으로 공, 근, 관, 신을 내세웠다.교육방법은 심리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소학을 인륜에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저서 - 권학사목(소학을 모든 교육의 기초로서 먼저 읽을 것을 권함)향학사목(사학 교사의 관학의 채용을 금지하고 아동을 강제로 관학에 이동을 강제로 사학의 중요성 강조)수창궁 재상서(군왕 지계의 서)입학도설(대학 중용의 천인심성합일설 등을 주돈이의 태극도서를 이용하여 도해로써 알기쉽게 풀이한 해설도 이다. 한국 최초의 시청각 교재)

교육방법 - 가까운 것을 먼저하고 먼 것을 나중에 한다. 성리학적 교육방법 주장함.

도표를 통한 시각적 교육의 효과를 시도한 저서로서 [입학도설]을 저술했다.

향학사목(서당에서 소학교육-도덕교육)
권근의 학문적 업적을 살펴본다면, 그의 저술로는 입학도설 (入學圖說), 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 경서구결 (經書口訣), 동국사략 (東國史略) 등이 있는데, 권근의 성리학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저술은 입학도설 과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 (三峯集)에 실려 있는 <심기리>(心氣理)편과 <심문천답>(心問天答)편의 권근의 주해와 오경천견록 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문집인 양촌집 (陽村集)에서도 다수의 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정도전과 함께 이조의 성리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존재로서 그 뒤의 철학 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조 초기의 성리학자 가운데서 가장 체계적인 이해를 보이고 있는 자료를 남긴 사람은 정도전과 권근이다. 특히 권근은 성리학이 가지는 난해한 철학적 내용을 도식으로 잘 설명하여서, 성리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초학자에게 좀더 쉽게 성리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점에서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16세기에 정추만의 천명도와 도설에 대한 수정에 의해서 퇴계와 고봉 사이에서 시작된 사단칠정론은 멀리 권근의 도설 및 성리학 이론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권근의 심성론을 고찰하면서, 조선 전기 성리학의 철학적 탐구에 있어서의 경향을 살펴보고, 또한 사단칠정론의 선하(先河)로서 권근의 입장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3. 철학사상

권근의 성리학 - 조선 초기에 성리학을 연구하고 토착화시키는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학자를 꼽으라면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을 말할 수 있다. 이 중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학자는 권근이다. 특히 그를 정도전과 비교해 볼 때, 정도전이 치국과 직접 관련된 시각에서 성리학설을 이용한 배불설(排佛說)을 강력히 주창함으로써 성리학의 관학화에 힘을 기울였다면, 권근은 비교적 순수한 이론적 탐구, 따라서 치국과는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성리학설을 개발과 연구에 힘을 기울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권근(權近, 1352-1409)이 일종의 성리학 개설서인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쓴 해는 1390년인데, 이것은 정도전의 「심기리편心氣理篇」(1394)과 「불씨잡변佛氏雜辨」(1398)보다 앞선다. 물론 정도전이 이보다 훨씬 앞선 해인 1375년에 「심문천답心問天答」을 쓰긴 했으나 이 저술은 본격적인 성리학 이론서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권근이 언급하고 있듯이 정도전에게는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라는 저술이 있긴 했지만 그 내용을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 나라의 성리학 이론은 권근에 의해서 그 체계가 완비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권근의 자연관은 정도전과 별 다를 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정도전의 자연관을 권근이 리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틀로 세련화시켰기 때문이다. 권근에 따르면 풍우와 한서는 하늘의 기가 되고 해와 달은 하늘의 눈이 되며,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는 일이 한 가지라도 바른 것을 잃으면 하늘의 풍우와 한서가 반드시 어그러지고 해와 달이 반드시 가려지는 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권근은 인간과 자연의 감응 관계를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희의 이론을 수용하여 그 관계를 마음과 기를 매개로 설명하고 있다. 천지와 만물이 본래 한몸과 같으므로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 또한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조로우면 천지의 기 또한 순조롭다는 것이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천지의 재앙과 상서는 진실로 인간 행위의 자잘못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4. 주요 저서

(양촌집)
구분 : 시문집 목판본
저자 : 권근
시대 : 조선시대
목판본. 40권 10책. 아들 제()에 의해 세종 초년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는데, 이후 여러 차례 복각(覆刻)되어 현재 여러 종류의 판본이 남아 있다. 권근은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스승과 행동을 같이하였으나, 조선 건

국 후에 태조의 부름을 받고 출사(出仕)하였다. 시문(詩文) 가운데 〈계룡일송(鷄龍一頌)〉에서는 왕조의 개국을 칭송하였고, 〈환왕정릉신도비병서(桓王定陵神道碑幷序)〉에서는 고려의 국운이 공민왕에서 끊어졌고, 창왕 이후는 왕씨(王氏)가 아니라 하였는데, 이는 후인들에게 곡필(曲筆)이라는 평을 받았다.
〈응제시(應制詩)〉 24편은 그가 1396년(태조 5) 표전(表箋) 문제로 명나라와의 외교가 어려워졌을 때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지어 올린 것으로, 중국에 문명(文名)을 떨쳤다. 여기에는 특히 단군(檀君) 설화가 언급되어 있어 주목된다.
〈동국사략론(東國史略論)〉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사실(史實) 가운데 문제시되는 사건을 뽑아 자신의 비평을 서술한 사론집이고, 〈동현사략(東賢事略)〉은 허공(許珙) 김방경(金方慶) 등 고려 후기의 명현 24명의 간략한 사적을 적은 전기집이다.
그는 조선 최초의 문형(文衡)으로서 활약하여 많은 표전 소(疏) 계(啓) 차(箚) 서(序) 등을 남겼는데, 문학 의학 지리학 인쇄술 학교 향토 문화재 등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오경천견록)
구분 : 목판본
저자 : 권근
시대 : 조선 전기(1405년)
목판본. 11책 26권. 그 중 《춘추천견록》은 필사본. 권근이 유배지 익주(益州:지금의 전북 익산시)에서 충주로 돌아온 1391년(공양왕 3:40세)에 착수하여 1405년(태종 5:54세)에 완성하였다. 한(漢) 무제(武帝) 이후 유교의 근본성전(聖典)인 5경, 즉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를 《역설(易說)》 《서설(書說)》 《시설(詩說)》 《춘추설(春秋說)》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이라는 명칭으로 주석한 것이다. 권근은 오경의 구조를 체용론적(體用論的)으로 제시하고 역(易) 을 본체[體], 춘추를 용(用)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비판적 창의적 해석을 시도하여 《오경천견록》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유학의 독자적인 학통형성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역천견록》은 보물 제550호로, 《시천견록》 및 《서천견록》은 보물 제573호로 지정되었다.

(동국사략)
권근(權近:1352~1409) 이첨(李詹) 하륜(河崙) 등이 편찬한 한국의 역사서.
지정번호 : 대전문화재자료 제18호
지정연도 : 1989년 3월 18일
소재지 : 대전 대덕구 중리동 165-1
시대 : 조선 태종 3년(1403)
1989년 3월 18일 대전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6권 2책 또는 3책이다. 《삼국사략(三國史略)》이라고도 한다.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내용을 담았는데, 성종 연간에 갑진자로 인쇄된 것이 전해지며 조선 후기는 물론 고종대까지 여러 방식으로 재간행되었다.
조선 전기 전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고 통치 이념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나온 관찬 사서로서, 1402년(태종 2) 권근 하륜(河崙) 이첨(李詹) 등이 왕명을 받아 이듬해 완성하였다. 성리학적 기준에 의한 편년체 형식이며, 동시에 사건의 경중에 따라 기록 형식을 달리하는 강목체(綱目體)를 따르고, 50여 편의 사론(史論)을 붙여 역사 사실에 직접적으로 평가하였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이부(二府) 삼한(三韓) 삼국의 순으로 구성하여 《삼국유사》를 이어받은 고대사 체계를 세웠지만, 삼한까지는 '외기(外紀)'로 간략히 처리하고 삼국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으며 이 때문에 《삼국사략》이라고도 한다.
삼국의 서술에서는 가장 먼저 건국하고 가장 늦게 멸망하였다는 이유로 신라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는데, 고대사의 주류를 기자 마한을 통하여 신라로 이어지는 것으로 체계화하였다. 전체적으로 사대적 윤리강상적 명분론을 강하게 드러냈는데, 그것은 중국의 간섭을 피해 안정된 사회 질서를 수립해야 할 건국 초기의 정치 상황에 비롯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신라 중심적 서술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어 이후의 《동국통감》 등에서 삼국을 대등하게 서술하는 방식으로 극복되었다.
그 밖에 같은 이름의 책이 여러 권 있는데, 이우(李) 박상(朴祥) 유희령(柳希齡) 민제인(閔齊仁) 등이 지은 4종과, 1906년에 현채(玄采)가 지은 교과서 등이다. 이우 민제인의 것은 전하지 않는다.

(주옹설)
이 작품은 손과 주옹과의 문답을 통해 참되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글이다.주옹은 우리 인간이 물 위에서 사는 것처럼 늘 조심스러운 생활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물 위에서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늘 경계하면서 사는 주옹의 생활이, 평탄한 땅을 디디고 느긋하게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함만 추구하는 육지 사람들의 삶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글은 두 가지 의미로 압축된다.
하나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로서, 산다는 것은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배 같으니 항상 마음을 다잡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센 풍랑이 일어도 중심만 잡으면 배가 안전한 것처럼 언제나 자기 삶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되 자기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비유적으로 말한 것으로, 배를 타고 물 위에 떠있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조심할 일과 힘써야 할 일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 글은 평안할 때 훗날의 근심을 생각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다가 나중을 돌보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늘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사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상대별곡)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벼슬한 양촌 권근의 경기체.
상대(霜臺)는 사헌부(司憲府)의 별칭으로서, 그 상대의 모습, 상대의 집무 광경, 집무를 마친 뒤의 연락(宴樂) 등을 모두 5연에 걸쳐 노래한 것이다.
조선 개국 초의 작품으로 관로(官路)의 순탄과 자가과시(自家誇示)를 훤창(喧唱)하였는데,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실려 전한다.

(응제시주)
역사와 지리 > 문화재 > 한국 > 기타 문화재 > 조선시대
조선 태조 때의 문신 권근(權近:1352~1409)의 응제시에 손자 권람(權擥:1416~1465)이 자세히 주석을 붙여 엮은 책.
구분 : 목판본
저자 : 권람 엮음
시대 : 조선 전기
목판본. 1권 1책. 1462년(세조 8) 간행. 조선 개국 초인 1396년(태조 5) 양촌(陽村) 권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홍무제의 어제시(御製詩) 3수를 받고, 응제시(應製詩) 24수를 지어서 바쳤는데, 권람이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내용은 책머리에 이첨(李詹)이 1404년(태종 4)에 쓴 서문, 권근의 행장(行狀), 명나라 명사의 송시(頌詩) 송사(頌辭), 그리고 어제시 3수에 대한 주석, 영곡사(靈谷寺) 주지 현극정선사(玄極頂禪師)와 승우선세부선사(僧右善世薄禪師)의 응제(應制)로 어제시를 차운(次韻)한 것과 그 주석, 권근의 응제시 24수와 그 주석 등으로 되어 있다.
권채(權埰)의 발문과 권근의 후지(後識) 및 권람의 후지를 달았다. 이 책에 수록된 주석의 기사는 사료가 인멸되기 이전 시대의 모든 전적을 충실히 참고한 것이어서 고대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권학사목)
역사와 지리 > 역사 > 한국사 > 조선시대
역사와 지리 > 문화재 > 한국 > 기타 문화재 > 조선시대
조선 초기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하고 있던 대제학 권근(權近)이 태종에게 건의한 과거제 개선 및 학술진흥책.
1407년(태종 7) 8개 조항으로 작성하였으며, 권근의 《양촌집(陽村集)》 상서류(上書類)에 '문과(文科)를 논하는 서(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① 문과 초장(初場)에서 실시하는 강론(講論)은 공부하는 자가 자칫 외는 데만 힘써 의리(義理)의 오묘한 뜻과 문장의 법에 대하여는 소홀하기 쉬우므로 이를 의의(疑義:필답)로 대체할 것,
② 중장(中場)의 고부(古賦)는 초학(初學)의 선비에게는 무리이고 실용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이를 논(論) 표(表) 판(判)의 시험으로 대체할 것,
③ 한문과 이문(吏文)은 사대(事大)에 중요하므로 이를 정과(正科)로 삼을 것,
④ 예문관의 직관(直館) 이상은 조선 사람의 시문 찬집에 힘써, 이를 전서(全書)로 만들 것,
⑤ 관각(館閣)의 관원과 한량문신(閑良文臣)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자는 매일 예문관에 모여 서로 강마(講磨)하게 하고 학문과 글을 짓는 정도에 따라 임용과 천거에 반영할 것,
⑥ 유학제조는 매월 한 차례씩 3관(館) 관원들의 경서읽기 등 면학 정도를 점검하여 이를 인사고과에 반영할 것,
⑦ 서울과 지방의 교수관은 생도들에게 반드시 《소학》을 익힌 다음에 다른 경서를 배우도록 할 것,
⑧ 지방의 유관(儒官)으로서 개인적으로 서재를 두고 후학을 가르치는 자는 함부로 다른 고을의 교수로 정하지 말 것 등이다.

권학사목에 제시된 건의사항들은 과거제도 개선과 학사행정에 크게 반영되어 조선 초기 교육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 남한강 물길 따라
글쓴이 : 산골어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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