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천리 샛강과 저우내
장천리 샛강은 저우내라 하고, 목계솔밭이 있는 하중도는 저우내뜰이라한다. 저우내를 저울대 형(衡)인 형천(衡川)으로 표기하면서 형천에 대한 해석이 다른데, 그 중 하나는 저우내의 형상이 저울대처럼 휘어져 흐른다고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계솔밭의 유래에서 저우내 땅에 목계 사람들이 솔밭을 조성함으로써 그 소유와 관리를 목계에서 함으로 저우내 솔밭이 아닌 목계솔밭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조선의 조운체게가 사라지면서 관창인 가흥창이 사라지고, 사창인 목계창과 목계나루가 번창하면서 지역의 판세가 가흥에서 목계로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목계솔밭과는 무관한 이야기이지만 그리이스 신화에서 정의의 여신인 디케는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 또는 법전을 들고 있다. 그리고, 디케의 여신상에는 눈을 가리고 있지만, 다른 여신상에는 눈을 가리고 않고 있다. 보지 못하는 권력(칼)과 눈으로 보는 권력(법전)은 어떻케 다를까 ? 저우내 목계솔밭에 서서 뜬구름같은 망상에 잠겨본다. 정의의 여신인 디케에 대해서도 그에 대한 해석은 엉청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정의와 진실은 살아있다. 그러나, 정의와 진실이 아닌 것을 디케의 모습과 저울에 비유하며 싸우는 것이 인간들의 모습이다.
'정의의 여신'-디케(dike), 혹은 아스트라이아(astraea), 유스티치아(justitia :로마신화)
(눈을 가리고 칼과 저울을 든 디케의 여신상)
(눈을 뜨고,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는 디케의 여산상)
남한강 장천리 샛강은 저우내가 형천(衡川)으로 변천되면서 저울내로 변한 것은 아닐까 ?
남한강변의 가금면 장천리(長川里)는 장미리(長尾里) 또는 장미산동과 형천(衡川)에서 유래하는데,
장미리(長尾里)는 장미산(長尾山 /薔薇山)에서, 형천(衡川)은 저우내에서 변천된 것으로 추정한다.
장미산성의 축성설화인 장미(薔薇)와 보련(寶蓮)의 전설과 국원성의 옛지명인 완장성(薍長城)에
대한 표기에서 장(長)과 장(薔) 중에서 어느 것이 본래의 지명인지는 규명하기 어렵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완장성(薍長城)애 대한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닐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기록된 장미산(薔薇山)은 후대에 남매의 축성설화가 전래되면서 장미(長尾)가 장미(薔薇)로
변천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천리 샛강은 좁고 긴 샛강으로 본류인 남한강의 유수량에 따라 변화가 심하게 나타나는데,
근래에는 제방공사와 농경지 조성으로 사라질번하다가 4대강 사업으로 다시 태어난 곳이다.
달마실의 저우내와 개치(개터)란 지명유래에서 목계솔밭에 얽힌 민담설화에 저우내 촌장과
목계촌장이 등장하고, 목계솔밭의 소유권 다툼이 등장하는 것은 목계솔발의 경계는 가흥창에
속하지만, 목계나루가 번창하면서 그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상권이 목계에서 주관하기에
목계솔밭이라고 칭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글을 마치면서 형천(衡川)의 지명에 나타난 저울은 저울이라기 보다는 좁고 긴 샛강이라는
장미(長尾:긴꼬리))에서 장저울이 아닌 장여울에서 유래된 것으로 장여울이 장저울로 변하여
저우내로 변한 것으로 추정되며, 장천리 샛강 아래에 있는 막흐래기 여우섬의 유래에서
여우섬도 홍수에 살아난 여우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본래는 여울섬이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길다. 짧지 않다. 오래다. 멀다. 깊다. 크다. 많다. 성(盛)하다. 높다. 아름답다. 길이. 오래도록. 늘. 늘이다. 길게 함. 키. 신장(身長). 지나가다. 통과함. 낫다. 우수함.. 뜻(38개) 더보기
衡 - 저울대 형, 가로 횡 (획수 16, 부수 行)
저울대. 저울. 달다. 저울질함. 쇠뿔의 가름대. 소의 두 뿔에 매어 사람을 뜨지 못하게 하는 나무. 가로나무. 들보. 도리. 또는, 외나무를 가로지른 문. 수레채 끝에 댄 가.. 뜻(21개) 더보기
저우내 달마실과 목계솔밭
http://blog.daum.net/topgwon2002/17181813
중원경과 완장성에 대하여
http://cafe.daum.net/chungjuhoMTB/XrfT/229
지명유래 - 가금면 장천리(長川里)
⊙ 장천-리(長川里)【리】본래 충주군 가흥면(可興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형천리(衡川里), 장미리(長尾里), 부도동(浮圖洞) 일부를 병합하여 장미(長尾)와 형천(衡川)의 이름을 따서 장천리라 해서 가금면에 편입됨.
충주 장미산성 - 향토문화대전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장미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국시대 산성.
장미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가흥리·하구암리 일대에 솟아 있는 해발 337.5m의 장미산(薔薇山·長尾山) 정상부와 계곡을 포함하여 축조된 둘레 2,940m의 삼국시대의 대규모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이다.
충주산성은 삼국시대 석성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축성 경위를 파악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충주산성과 마찬가지로 남매축성 설화가 전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충주시 노은면의 가마골이라는 마을에 장미라는 남동생과 보련이라는 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둘 다 명산 정기를 타고나서 장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 집에서 장수가 둘이 출생하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희생을 당해야 한다는 관습에 따라 성 쌓기 내기를 하게 되었다. 누이 보련은 노은에서, 장미는 가금에서 각각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들인 장미보다 보련의 속도가 빠르자 어머니는 아들을 돕기 위해 딸이 성을 쌓고 있는 산으로 떡을 해가지고 가서 “네가 너무 빠르니 이 떡 좀 먹고 쉬었다 쌓도록 하라.”며 떡을 펴놓았다.
보련이 떡을 먹으며 쉬었다가 마지막 돌 한 개를 가지고 올라가는 중에 장미는 성 쌓기를 끝냈다. 결국 성 쌓기 내기에서 진 보련은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튿날 저녁 보련의 집을 향하여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부터 보련이 성을 쌓은 산을 보련산, 장미가 성을 쌓은 곳을 장미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미산성에 대한 여러 차례의 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들이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으로 편년되는 점, 토기류 증 한성백제기의 유물이 다수 확인되는 점, 이 시기가 장수왕의 남하정책과 관련된 시기로 주변에 중원고구려비가 남아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이 지역이 일찍이 백제 지역으로 있다가 5세기 말경에 고구려의 영역으로 바뀌었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장미산성은 충주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쪽에서 달천과 합류한 한강이 흘러들어 산성의 동쪽을 돌아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서쪽 방면으로 을궁산과 무쇠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능선을 제외하면 남·동·북의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한강 수로와 육로를 동시에 공제(控制)하는 요충지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산성의 남쪽과 동쪽은 한강과 합류하는 달천이 한눈에 들어오며, 서쪽으로는 장호원 방면에서 충주에 이르는 잣고개와 노은고개 등의 교통로와 동북쪽으로는 원주·제천으로 통하는 길의 조망이 용이하다. 유적 주변에는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를 비롯하여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제1401호),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를 비롯하여 충주 누암리 고분군(사적 제463호) 등이 위치하고 있어 충주를 중심으로 한 삼국간의 치열한 패권 경쟁을 엿볼 수 있다.
장미산은 북고남저의 형세를 이루고 있으며, 산성은 자연지세를 따라 능선과 계곡부를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정상부는 남북 방향으로 긴 대지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서 갈라져 각각 동쪽·동남쪽·남쪽으로 뻗은 능선의 정상부 외연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다. 동북쪽과 남향한 계곡을 에워싸고 있는데 남향의 길고 가파른 계곡을 포용하여 남쪽 성벽의 가장 낮은 지점에 남문지와 수구지가 있다.
1. 성벽
장미산성의 성벽은 석축 성벽 이전에 판축의 토축 성벽이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처음 축성부터 석축으로 축조되었음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성벽은 성벽을 축조할 곳에 계단상으로 암반층을 정리하여 외벽의 기단부터 축조하였는데 안쪽으로 북돌을 채워 넣고 빈틈에는 잡석으로 채워 올리다가 내성벽과 수평이 되는 지점에서부터 내벽과 외벽을 동시에 구축하면서 북돌을 정연하게 채워 넣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외벽이 붕괴되어도 내부 북돌층이 견고하게 남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설축(設築)한 후 성벽 내측의 빈 공간에 점질토와 사질토를 층층이 다져 누수로 인한 성벽의 붕괴를 최소화하였다. 석축의 최하 단위는 성벽 높이 6m, 윗면 너비 3m이며 곳에 따라서 높이 6.9m, 너비 5.1m까지 넓혀 축조하였다.
2. 치성
장미산성의 치성은 북쪽의 능선, 동벽의 능선 3개소와 동남 각부의 능선, 서벽에 3개소, 그리고 북벽 동측 지점에 1개소 등 모두 9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이중 서쪽 성벽이 북쪽으로 이어져 남동쪽 방향으로 회절하는 북서쪽 회절부 외측 지점의 치성은 발굴조사 결과 석축성벽을 쌓은 후 시설한 것으로, 장방형으로 목책을 돌려 마련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장축이 11m 정도이고 폭은 3.7m 가량의 규모이다.
주간거리는 180㎝ 내외로 주혈의 지름이 70㎝~90㎝, 깊이 40㎝~60㎝이다. 이 치성은 북쪽에서 접근하는 적의 관찰을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내만된 계곡부로 침투하는 적을 적절하게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같은 목책의 치성은 청원 남성골 산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3. 배수로
장미산성에는 성벽 내측으로 배수로를 시설하여 침수로 인한 석축성벽의 붕괴를 예방하였다. 배수로는 폭 40㎝~50㎝ 정도의 크기로 성벽 상면보다 조금 낮게 ‘U’자형으로 시설하였는데, 이는 우수가 배수로로 흘러내리도록 배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장미산성의 성벽 조사에서는 성내에서 성벽을 통과하는 수구 시설이 확인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경사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성벽의 윗면을 통과하는 ‘월류식(越流式)’ 배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상 배수되는 성벽의 외측면은 다른 곳보다 치밀하게 축조하였으며, 바닥에는 점질토를 깔고 석재를 놓은 다음 석재 틈을 잡석으로 채워 넣어 성벽 기단부의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게 하였다.
4. 석환 보관을 위한 석곽 시설
석환을 이용한 투석전(投石戰)은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었다. 장미산성 내에는 성벽과 근접하여 석환(石丸)을 비축하기 위한 석곽 시설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석곽은 180㎝×220㎝, 240㎝×240㎝, 260㎝×260㎝ 등 비교적 다양한 크기로 밝혀졌으며, 부정형의 석재와 할석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천석(川石)을 비치하였다.
5. 목탄요(木炭窯)
장미산성 내에서 모두 2기의 탄요가 확인되었다. 30° 가량의 경사면에 암반을 굴착하여 조성하였으며,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반지하식의 구조이다. 장축 3m, 단축 2m, 높이 1.1m의 크기이다. 요 내부에는 판석을 대고 점토를 발라 완성한 연도가 확인된다. 바닥면에서 토기편 등이 발견되지 않고 소성실에 두꺼운 숯층이 깔려 있어 제탄(製炭)을 위한 탄요로 추정되었다.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결과 1호가 1110AD, 2호 1200AD로 측정되었다.
6. 출토유물
장미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가 대부분이다. 토기는 원저단경호를 비롯하여 세격자문이 시문된 토기병, 점열문과 파상문이 새겨진 토기발 등을 비롯하여 각종 구연부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중에서 장미산성의 초축 연대를 알려주는 것으로는 조족문(鳥足紋) 토기를 비롯한 원저단경호 등 한성백제기의 유물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철기류는 대부분 무기류로 일부 농기구가 확인된다. 무기류는 철촉과 갑옷에 사용된 소찰갑 등이며 농기구로는 보습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중에서 철촉은 그 형태로 보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고 있어 토기류와 동일한 시기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주 지역은 원래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다가 5세기 말경 고구려의 영역으로 바뀌었고, 557년(신라 진흥왕 18)에 국원 소경으로 삼고, 이듬해 귀족의 자제와 육부의 호민을 이주시키면서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장미산성은 백제-고구려-신라로 이어지는 소속국의 변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 김규영 편, 『한국의 성곽과 봉수』상(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1989) |
• 『중원 장미산성』(충북대학교박물관, 1992) |
• 『삼국통일의 격전지 충북의 성곽을 찾아서』(충청북도, 2000) |
• 『장미산성 정비예정구간 시굴조사보고서』(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3) |
• 『충주 장미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중원문화재연구원, 2006) |
• 장준식, 「고구려 국원성치지에 관한 연구」(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2) |
• 최근영, 「충주 장미산성고」(『사학연구』55·56, 한국사학회, 1998) |
목계 솔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에서 목계 솔밭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가금면 장천리의 저우내마을 아래편으로 아담한 일련의 솔 무더기가 있는데, 이를 ‘목계 솔밭’이라고 한다. 「목계 솔밭」 이야기는 “저우내에 용이 머물 수 있도록 솔밭을 만들라.”는 노인의 음성에 따라 소나무를 심었더니 그 즉시 효험이 있어 비가 내렸으며, 용과 관련하여 목계 솔밭을 조성하게 된 지명유래담이다.
[채록/수집상황]
1982년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전설지』에 실려 있는데, 당시 가금면 장천리에 거주하는 주민 김영덕·김동규·이광우 등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그리고 1981년 중원군에서 간행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와 2002년 충주시에서 간행한『충주의 구비문학』에도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조선 헌종 때 목계 촌장의 꿈에 용이 목을 늘이고 한강물을 마시는데 그 꼬리가 강 건너 가흥땅 장미산에 걸치고 앞발이 목계마을 동산을 딛고 있었다. 이에 촌장이 깨달은 바가 있어 제단을 마련하고 기우제를 지냈다. 그랬더니 “저우내에 용이 머물 수 있도록 솔밭을 가꾸도록 하라.”는 노인의 음성이 촌장 귀에 들렸다. 이 무렵 저우내 촌장도 같은 꿈을 꾸었다. 송림을 만들어 놓으면 이곳에 가뭄을 타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꿈이었다. 그래서 두 마을에서는 마을과 강의 중간 지점에 소나무를 심었다. 그러자 그 순간부터 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다.
이러한 효험을 맛본 두 마을에서는 서로 솔밭을 관리하려고 하였다. 저우내에서는 자기 마을 땅에 있는 것이니 자기네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고, 목계마을에서는 비록 저우내 땅이지만 자기들이 소나무를 심었으니 자기네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두 마을에서 서로 실력행사를 하다가 목계 사람들이 숫적으로 우세해 저우내 사람들이 패하고 관리권은 목계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로부터 목계마을 사람들 손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솔밭이라 하여 ‘목계 솔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티프 분석]
「목계 솔밭」의 주요 모티프는 ‘저우내 촌장의 현몽’, ‘저우내 촌장의 현몽’이다. 목계솔밭 조성에 관한 이야기로서 용과 관련되어 흥미롭다. 목계와 저우내는 남한강이 관류하는 지역으로서 용과 관련한 민속문화의 전승이 활발한 곳이다. 「목계 솔밭」에서도 지역민들의 용신앙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곳에는 용을 상징하는 목계 줄다리기가 유명하며, 마을의 동제에도 용신앙이 나타나고 있다.
장천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미리, 형천리, 부도동 일부가 새로운 법정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큰 마을인 장미와 형천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장천리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가흥면에서는 남한강쪽 상류에 있었기 때문에 상동이라 불렀다. 장천리 지역은 옛날부터 여름에 수해가 잦았기 때문에 물길이 남북으로 길게 뻗쳤고 그 때문에 장미(긴물) 또는 장천이라 불리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장천리는 영조 때 발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오는 가흥면 하동리에 속한다. 그리고 1898년에 나온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보면 가흥면은 상동, 중동, 부도, 장미, 능암, 원동, 형천의 7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장미와 형천 그리고 부도 일부가 현재의 장천리가 되었다. 1912년에 나온 『구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도 가흥면 형천리, 부도동, 장미리가 나오는데 이들이 1914년 통합되어 장천리가 된 것이다. 이후 장천리는 장미산과 형천 2개 행정 마을로 정리되고, 그러한 기본 틀이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자연환경]
장천리는 탑평리 북쪽으로 이어진 남한강 변을 따라 길게 발달한 마을이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형의 지형이다. 동쪽에 북에서 남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있으며, 남한강 유역에 하천 범람으로 인한 퇴적층이 발달해 있다.
[현황]
2008년 3월 1일 현재 면적은 7.70㎢이며, 총 172세대에 378명(남 194, 여 184)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장천리는 형천과 장미산으로 나뉘는데, 형천 지역은 물가이고 장미산 지역은 구릉이다. 북쪽으로는 가흥리가 있고 남쪽으로는 남한강을 건너 금가면 월상리가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남한강을 건너 금가면 하담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장미산을 넘어 봉황리와 하구암리가 있다.
서쪽에 남북으로 지방도 599호선이 지나가고 장미산 뒤로는 유적지인 장미산성이 있다. 장미산성은 삼국시대 포곡식 산성으로 충주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현재 정부에서 계획하고 있는 경부운하 사업이 추진되면 장천리에 화물 복합터미널이 들어설 예정이다.
장자늪(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장천리에서 장자늪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장미산 동에서 동남쪽 사이로 완만한 ㄱ자를 없어 놓은 것 같은 늪이 있는데 이것이 ‘장자늪’이다. 「장자늪」 이야기는 이곳에 살던 천석꾼의 집이었는데 시주 온 노승을 학대하여 집이 함몰되어 늪이 되었다고 하는 장자못 유형의 전설이다.
[채록/수집상황]
1982년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전설지』에 실려 있는데, 이는 당시에 가금면 장천리에 살고 있던 주민 임병철·김석기·김동화 등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1981년 중원군에서 간행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와 2002년 충주시에서 간행한 『충주의 구비문학』에 각각 수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내용]
옛날 장천리에 천석꾼이 장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인색하고 몰인정하고 욕심이 많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노승이 시주를 하러왔는데 때마침 걸음을 내던 장자는 노승 바랑에 쇠똥 한 삽을 넣어 주었다. 그리고 또 목탁과 발을 빼앗아 때려 부셨다. 노승은 합장을 하고 뒤로 돌아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대사님! 대사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노승이 돌아다보니 한 여인이, “저는 이 집 며느리인데 제 아버님의 성격이 과도해서 대신 사과를 드린다”며 쌀 한 바가지를 가지고 왔다. 묵묵히 눈을 감고 여인의 말을 듣고 있던 노승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앞으로 3일 후 신시에 상좌승 하나가 동구 밖 느티나무 밑에서 부인을 기다릴 터이니 꼭 만나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3일 후 동구 밖에 나가보니 상좌승이 기다리고 있다가 지금부터는 소승이 하는 대로만 하여야 된다고 했다. 입을 떼지 말며 무슨 소란이 있어도 그곳을 바라보지 말라고 했다. 며느리가 상좌승을 따라 가다 별안간 찬바람이 뒤에서 성벽을 향해 불어 올라가는가 싶더니 하늘이 무너지듯 굉음이 울렸다. 무의식중에 며느리가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자의 집은 사라져 버리고 호수로 변해 장자가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선 채로 한 개의 부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모티프 분석]
「장자늪」의 주요 모티프는 ‘장자의 시주 거부’, ‘노승의 보복으로 장자 망함’, ‘금기 어겨 부도가 된 며느리’ 등이다. 장자가 학승을 하여 그의 집이 함몰되어 못이 되고 마음씨 고운 며느리는 스님이 들려 준 금기를 어겨 돌이 되고 마는 것이 전형이다. 「장자늪」 전설도 ‘장자못 전설’의 하나로 인색한 장자와 마음씨 고운 며느리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장자는 학승을 하여 그 벌로 살던 집이 함몰하여 늪이 되고 말며, 착한 며느리도 스님이 일러 준 금기를 어겨 부도가 되었다. 착한 며느리가 선채로 돌이 되는 것이 전형인데 부도가 되었다고 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부도로 마을 이름도 부도곡이 되었다고 한다. 장자못 전설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광포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