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설성과 노음죽현에 대하여
음죽현이 있던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음죽골 유래비
산골어부의 설성산성 답사기(http://blog.daum.net/topgwon2002/17181586)
설성과 노음죽현에 대하여
(창고자료) - 마한 54국 중 노람국
노람국[怒藍國]은 마한에 속한 나라로 경기도 이천시 음죽면 일대에 있던 소국이였다.
음죽군(陰竹郡)은 지금의 이천시 남부에 1읍 2면에 걸쳐있던 지역으로 지금의 장호원읍이다. 삼한시대의 노람국(怒藍國)을 삼국시대의 노음죽현(奴音竹縣)에 비정되는데 이는 노람이 노음과 비슷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경기/광주목(廣州牧)/◎ 음죽현(陰竹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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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縣監) 1인.【대개 옛 감무관(監務官) 〈고을〉에는 모두 현감(縣監)을 둔다.】
○ 본래 고구려의 노음죽현(奴音竹縣)인데,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개산군(介山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현종(顯宗) 무오(현종9년, 1018년) 에 충주(忠州) 임내(任內-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있는 군, 현에 덧붙어 있는 지역으로 호장(戶長)이 통치)에 붙였다가, 그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1413년) 계사에 현감(縣監)으로 고쳐서 경기(京畿)에 옮겨 붙이었다.【고려 말에 각 현(縣)에 새로 감무(監務)로 정하여, 모두 참외(參外) 및 권무(權務)로써 각기 이전(吏典)을 맡게 하였는데, 등급이 낮고 사람이 미약해서, 세상이 모두 천하게 여기므로, 홍무(洪武) 21년 무진에 비로소 조관(朝官) 6품 이상을 택하여 보내서 그 임무(任務)를 중하게 하였으나, 모두 감무의 이름은 그대로 두었었는데, 이에 모두 고쳐서 현감으로 하였다. 이 뒤에 “예(例)로 고쳐서 현감으로 하였다.” 한 것은 모두 이 해의 일이다.】
○ 사방 경계[四境]는 동북쪽으로 여흥(驪興)에 이르기 11리, 서북쪽으로 이천(利川)에 이르기 15리, 동남쪽으로 충주(忠州)에 이르기 10리이다.
○ 호수(戶數)는 3백 90호, 인구는 1천 88명이요,
○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중앙에 번(番)을 들러 올라오는 지방의 장정)이 81명,
선군(船軍-해군)이 58명이다.
○ 토성(土姓-그 지방을 본관으로 하는 성)이 4이니, 김(金), 이(李), 환(桓), 문(文)이요, 망성(亡姓-옛 문적에는 있으나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이 1이니, 익(翼)이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간전(墾田)이 3천 1백 63결(結)이다.【논과 밭이 반반이다. 】
○ 토의(土宜-토산물)는 오곡(五穀)과 조, 팥, 녹두, 메밀, 참깨, 뽕나무,
삼[마(麻-삼베 옷을 만드는 삼)]이요,
○ 토산(土産)과 약재(藥材)는 석창포(石菖浦-그천남성과 여러해살이풀 창포), 연밥[연자(蓮子)]이다.
○ 역(驛-공문을 지방에 전달, 외국 사신의 왕래, 벼슬아치의 여행과 부임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던 곳)이 2이니, 무극(無極), 유춘(留春)이다.【본조 태종(太宗) 원년(元年) 신사에 비로소 설치하였다.】
【영인본】 5책 616면
【태백산사고본】
원 문
◎ 陰竹縣: 縣監一人, 【凡右監務官, 皆置縣監。】 本高句麗奴音竹縣, 新羅改今名, 爲介山郡領縣。 顯宗戊午, 屬忠州任內, 後置監務。 本朝太宗十三年癸巳, 改爲縣監, 移屬京畿, 【前朝之季, 各縣新定監務, 皆以參外及權務、各司吏典爲之, 秩卑人微, 世皆賤之。 至洪武二十一年戊辰, 始擇朝官六品以上差遣, 以重其任。 皆監務之名猶在, 至是乃改爲縣監。 後凡言例改爲縣監者, 皆此年事也。】 四境, 東北距驪興十一里, 西北距利川十五里, 東南距忠州十里。 戶三百九十, 口一千八十八。 軍丁, 侍衛軍八十一, 船軍五十八。 土姓四, 金、李、桓、文; 亡姓一, 翼。 厥土肥塉相半, 墾田三千一百六十三結。 【水旱田相半。】 土宜五穀, 粟、小豆、菉豆、喬麥、胡麻、桑麻。 土産藥材, 石菖蒲、蓮子。 驛二, 無極、留春。 【本朝太宗元年辛巳, 始置。】
(신증동국여지승람)제8권 / 경기도 이천도호부 음죽현(陰竹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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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여주 경계까지 16리, 남쪽으로 충청도 충주 경계까지 15리, 서쪽으로 죽산현 경계까지 26리, 북쪽으로 이천부 경계까지 29리이며, 서울까지 1백95리이다.
설성산 설성지(설성산성)
기본정보雪城山(설성산) 主峰(주봉) 능선과 그 東(동)쪽으로 아래편 골짜기 약 2 - 3萬餘(만여) 坪(평)을 에워싸고 있는 石成(석성)으로 그 北(북)쪽 城壁(성벽)에 隣接(인접)하여 神興寺(신흥사)가 있는데, 中間(중간)에 작은 계곡을 包含(포함)하고 있는 包谷式(포곡식) 산성이다. 現存(현존)하는 利川(이천)의 城址(성지)중 가장 뚜렷한 城(성)의 形態(형태)를 保存(보존)하고 있는 곳이 「雪城(설성)」으로, 山(산) 정상에서 南東(남동)쪽으로 가지를 뻗은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20 - 30m씩 길게 城壁(성벽)이 이어진 곳도 있다. 험준한 地勢(지세)와 절벽 등을 利用(이용)하여 쌓은 外壁(외벽)은 그 높이가 4 - 5m에 달하는 높은 곳도 있으며, 1.5 - 2m 높이의 內壁(내벽)의 痕迹(흔적)도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어 성벽의 두께가 대략 5m 안팎에 幅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內外壁(내외벽) 사이에는 雜石(잡석)을 다져넣어 아주 堅固(견고)하게 성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雪城山(설성산) 정상 바로 밑에 建物地(건물지)의 흔적이 남아 있어 瓦片(와편)과 土器片(토기편)들이 출토되어 있으며, 城門(성문)은 제일 낮은 地域(지역)인 東北(동북)면 골짜기 水口(수구)에 隣接(인접)하여 設置(설치)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現在(현재)하는 水口(수구)의 幅은 4m 가량이다. 우물로 推定(추정)되는 곳은 두 군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現在(현재) 神興寺(신흥사)에서 食水(식수)로 使用(사용)하고 있고 그 안에 오래된 石築(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다른 하나는 完全(완전)히 메워진 狀態(상태)이나 石築(석축)의 一部(일부)와 함께 넓이 80cm가량의 批水口(비수구)의 흔적이 완연하다. 이 「雪城(설성)」은 檀國大學校(단국대학교) 古蹟調査團(고적조사단)에 의해 新羅軍(신라군)의 城(성)으로 밝혀진 것 외에는 正確(정확)한 築城時期(축성시기)나 目的(목적)등이 지금까지 밝혀져 있지 않으며, 「雪城(설성)」이라는 名稱(명칭)에 관해서는 神興寺(신흥사)에 비치된 傳說記(전설기)에 그 由來(유래)가 나오는데이를 要約(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雪城(설성)」은 新羅(신라) 第17代 내물왕時 倭賊(왜적)의 侵入(침입)을 防禦(방어)하기 위하여 築城(축성)했다고 전하며, 城(성)을 쌓을 때 城(성)이 쌓여질 자리로만 띠를 두른듯 白雪(백설)이 내려있고 그 자취를 따라 城(성)을 쌓았기 때문에 「雪城(설성)」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물왕때 쌓았다는 그 築城時期(축성시기)와 築城目的(축성목적)등의 根據(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치 않으며, 특히 倭賊(왜적)의 侵入(침입)을 막기 위해 이런 내륙지방에까지 城을 쌓았다는 이야기엔 說得力(설득력)이 不足(부족)하다. |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 16일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설성산 성을 찾은 정영호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장은 한 줄에 10여 점씩, 3줄로 열을 이룬 채 발굴현장에 공개된 토기 30여 점을 바라보고는 다음과 같은 탄성을 질렀다. "이거, 백제토기 전시장이구만, 토기 전시장이야". 지난 수십 년을 발굴 현장에서 보낸 정 관장에게도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소 장 박경식)가 올해 시도한 제3차 설성산성 발굴성과가 놀라웠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 교수는 최영희 전 국사편찬위원장,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장, 최몽룡 서울대 교수, 최인선 순천대 교수 등이 동석한 이날 현장설명회에서 "당 장 국가사적 지정 신청을 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출토 유물로 보아 백제가 쌓은 성곽임이 확실한 이상, 더구나 3차에 걸친 그동 안의 조사에서 막대하게 확인된 백제토기 등을 고려할 때, 설성산성이 국가사적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차 발굴에서도 그러했지만, 이번 3차 발굴 또한 설성산성은 산성으로는 기록적인 토기 출토량을 보이고 있다. 설성산성과 같은 산성은 평야 지대나 구릉지 같은 데서 확인되곤 하는 다른 고 대 유적과는 달리 토기 등의 유물 출토량이 많지 않는 것이 대체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산성이 평시에 많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라, 전쟁 등과 같은 비상시에 집중적으로 활용되는 군사요새이기 때문. 하지만 설성산성은 이러한 종래 산성에 대한 통념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출토유물 중 특히 한성시대 백제토기의 경우, 2-3차 조사에서 원형, 혹은 그에 가까운 완형으로 출토된 것만 70점을 상회한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백제토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설성산성 출토 토기는 교과서적인 구실 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설성산성에서 확인된 이같은 성과는 "구덩이" 유적에서 기인한 것이다. 성곽 안 쪽에서는 현재까지 모두 28개에 달하는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이 중 6곳이 토기 저 장용, 혹은 토기 폐기용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구덩이 4곳에서는 토기들이 고스란히, 더욱이 그득하게 확인됐다. 이들 토기는 시기적으로 보아 서울 풍납토성을 기준으로 할 때는 중상위층에서 출토되는 그것들과 거의 같은 계통에 속하고 있다. 또 서울 몽촌토성 출토품과 비교 할 때는 거의 같은 시기이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속하고 있다. 조사단이 이번 설성산성 발굴성과에서 주목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또 다른 대목 은 돌을 쌓아올려 성벽을 구축한 석성(石城)인 이 설성산성의 축조시기. 조사단은 출토 유물이나 성벽 절개 조사 성과 등을 토대로 설성산성은 4세기에 서 5세기로 넘어가는 단계에 성곽이 완성되었다는 견해를 제출했다. 이는 백제는 한성시대에는 석성을 만들지 않았다는 공식과도 같던 한국 고고학 계의 통설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설성산성을 학계가 주목하는 까닭은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다. <사진있음> taeshik@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