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에서/옛날 지명들

[스크랩] 설성과 노음죽현에 대하여

산골어부 2013. 2. 16. 07:40

음죽현이 있던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음죽골 유래비

 산골어부의 설성산성 답사기(http://blog.daum.net/topgwon2002/17181586)

 

 

설성과 노음죽현에 대하여

 

(창고자료) -  마한 54국 중 노람국

노람국[怒藍國]은 마한에 속한 나라로 경기도 이천시 음죽면 일대에 있던 소국이였다.

음죽군(陰竹郡)은 지금의 이천시 남부에 1읍 2면에 걸쳐있던 지역으로 지금의 장호원읍이다. 삼한시대의 노람국(怒藍國)을 삼국시대의 노음죽현(奴音竹縣)에 비정되는데 이는 노람이 노음과 비슷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감색 감/연보라 감  
감색 야청빛(검은 빛을 띤 푸른 빛) 연보라 반물
11    [등급]상용  [한자검정]1급  [부수]실사部  [자원]형성문자
예문> 紺地(감지) 紺紙(감지) 紺色(감색) 紺瞳(감동) 紺碧(감벽)

 

성낼 노(로)
성내다, 화내다 꾸짖다, 나무라다 세차다, 기세(氣勢)가 오르다 곤두서다 힘쓰다, 떨쳐 일어나다 성, 화 기세(氣勢: 기운차게 뻗치는 형세), 위세(位勢) 가시
9    [등급]중학용  [한자검정]준4급  [부수]마음심部  [자원]형성문자
예문> 大怒(대노) 怒氣登天(노기등천) 怒浪(노랑) 怒雷(노뢰) 怒馬(노마)
쪽 람(남), 볼 감
쪽(여뀌과의 한해살이풀) 남빛(진한 푸른빛) 누더기 절, 사찰 남루하다(襤褸--) 보다 (감)
18    [등급]상용  [한자검정]2급  [부수]초두머리部  [자원]형성문자
예문> 木藍(목람) 銅藍(동람) 奴藍國(노람국) 濃藍(농람) 出藍(출람)

  

 

경기/광주목(廣州牧)/◎ 음죽현(陰竹縣) 
 

자 료 / 하얀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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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현
강화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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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군
김포현
양천현
교동현
통진현

현감(縣監) 1인.【대개 옛 감무관(監務官) 〈고을〉에는 모두 현감(縣監)을 둔다.】
○ 본래 고구려의 노음죽현(奴音竹縣)인데,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개산군(介山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현종(顯宗) 무오(현종9년, 1018년) 에 충주(忠州) 임내(任內-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있는 군, 현에 덧붙어 있는 지역으로 호장(戶長)이 통치)에 붙였다가, 그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1413년) 계사에 현감(縣監)으로 고쳐서 경기(京畿)에 옮겨 붙이었다.【고려 말에 각 현(縣)에 새로 감무(監務)로 정하여, 모두 참외(參外) 및 권무(權務)로써 각기 이전(吏典)을 맡게 하였는데, 등급이 낮고 사람이 미약해서, 세상이 모두 천하게 여기므로, 홍무(洪武) 21년 무진에 비로소 조관(朝官) 6품 이상을 택하여 보내서 그 임무(任務)를 중하게 하였으나, 모두 감무의 이름은 그대로 두었었는데, 이에 모두 고쳐서 현감으로 하였다. 이 뒤에 “예(例)로 고쳐서 현감으로 하였다.” 한 것은 모두 이 해의 일이다.】
○ 사방 경계[四境]는 동북쪽으로 여흥(驪興)에 이르기 11리, 서북쪽으로 이천(利川)에 이르기 15리, 동남쪽으로 충주(忠州)에 이르기 10리이다.
○ 호수(戶數)는 3백 90호, 인구는 1천 88명이요,
○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중앙에 번(番)을 들러 올라오는 지방의 장정)이 81명,
선군(船軍-해군)이 58명이다.
○ 토성(土姓-그 지방을 본관으로 하는 성)이 4이니, 김(金), 이(李), 환(桓), 문(文)이요, 망성(亡姓-옛 문적에는 있으나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이 1이니, 익(翼)이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간전(墾田)이 3천 1백 63결(結)이다.【논과 밭이 반반이다. 】
○ 토의(土宜-토산물)는 오곡(五穀)과 조, 팥, 녹두, 메밀, 참깨, 뽕나무,
삼[마(麻-삼베 옷을 만드는 삼)]이요, 
○ 토산(土産)과 약재(藥材)는 석창포(石菖浦-그천남성과 여러해살이풀 창포), 연밥[연자(蓮子)]이다.
○ 역(驛-공문을 지방에 전달, 외국 사신의 왕래, 벼슬아치의 여행과 부임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던 곳)이 2이니, 무극(無極), 유춘(留春)이다.【본조 태종(太宗) 원년(元年) 신사에 비로소 설치하였다.】
【영인본】 5책 616면
【태백산사고본】



원 문
◎ 陰竹縣: 縣監一人, 【凡右監務官, 皆置縣監。】 本高句麗奴音竹縣, 新羅改今名, 爲介山郡領縣。 顯宗戊午, 屬忠州任內, 後置監務。 本朝太宗十三年癸巳, 改爲縣監, 移屬京畿, 【前朝之季, 各縣新定監務, 皆以參外及權務、各司吏典爲之, 秩卑人微, 世皆賤之。 至洪武二十一年戊辰, 始擇朝官六品以上差遣, 以重其任。 皆監務之名猶在, 至是乃改爲縣監。 後凡言例改爲縣監者, 皆此年事也。】 四境, 東北距驪興十一里, 西北距利川十五里, 東南距忠州十里。 戶三百九十, 口一千八十八。 軍丁, 侍衛軍八十一, 船軍五十八。 土姓四, 金、李、桓、文; 亡姓一, 翼。 厥土肥塉相半, 墾田三千一百六十三結。 【水旱田相半。】 土宜五穀, 粟、小豆、菉豆、喬麥、胡麻、桑麻。 土産藥材, 石菖蒲、蓮子。 驛二, 無極、留春。 【本朝太宗元年辛巳, 始置。】

 

 

(신증동국여지승람)제8권 / 경기도 이천도호부 음죽현(陰竹縣)

 

동쪽으로 여주 경계까지 16리, 남쪽으로 충청도 충주 경계까지 15리, 서쪽으로 죽산현 경계까지 26리, 북쪽으로 이천부 경계까지 29리이며, 서울까지 1백95리이다.

건치연혁
본디 고구려 노음죽현(奴音竹縣)인데, 신라가 음죽으로 고쳐 개산군(介山郡)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충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고쳐 현감으로 삼아 충청도로부터 경기도에 붙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1명이다.
군명
노음죽(奴音竹)ㆍ설성(雪城).
성씨
음죽 : 김(金)ㆍ이(李)ㆍ항(恒)ㆍ문(文)ㆍ익(翌).
형승
산천이 융합하고 맺혔다. -정이오(鄭以吾)의 향교기(鄕校記)에 있다.
산천
성산(城山) :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백족산(百足山) :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영악산(靈岳山) : 현 북쪽 7리 지점에 있다.
추택(楸澤) : 현 동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만불지(萬佛池) :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천민천(天民川) : 현 남쪽 16리 지점에 있다.
토산
순채(蓴菜) -추택(楸澤)에서 나온다.
누정
죽남루(竹南樓) : 객사 동쪽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記)에, "음죽 관아는 누각이 아직도 없어서 사신이 임금의 일에 분망하고, 무더운 더위에 더욱 시달리면서도 막히고, 답답한 것을 소통하고 맑고 밝은 것을 맞아들일 수가 없었다. 임군(林君) 휘목(諱穆)이 현감으로 온 뒤에 정사가 통하여 폐단이 없어지자 백성이 즐겨 일에 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백성을 부리는 데도 법금(法禁)이 있으므로 끝내 틈을 내지 못하더니, 기유년 가을에 기회를 얻어 감사(監司) 이명덕(李明德)에게 보고하였다. 조정에 청하여 노는 사람을 일 시켜 관아 동쪽에다 누각 몇 칸을 일으켰는데, 등마루와 서까래를 높이 하여 바라보기를 휘어지게 하고, 단청은 얇게 하여 검소하게 하였다. 하루는 임군이 손과 함께 가 오르니, 부드러운 아지랑이와 첩첩이 싸인 봉우리와 긴 내와 편편한 산기슭과, 궤와 책상 사이에 비쳐 들리 듯한 이웃의 여러 산이, 흐릿하고 어슴푸레하여 구름 하늘과 연기 물 밖으로 숨고는 나타나고 나왔다가는 들어가곤 하였다. 임군이 돌아보고 즐거워하여 수연(修然)히 티끌세상을 벗어난 듯한 감상을 느꼈다. 편지를 보내 내게 기문을 부탁하였으므로, 나는 임군 편지를 읽고 이 다락의 좋은 경개를 알고 있으나 누워서 놀던 때가 오래되었다. 또 생각하니, 누각이란 다만 보기 아름다움만 말함이 아니라, 대개 사신을 예로써 시중들며 다락에서 일을 듣는 것이다. 대개 기운이 번거로우면 생각이 어지러워지고 보는 게 막히면 뜻도 막히기에, 군자는 높고 밝은 곳에 살면서 보고 바라는 것을 멀리하여 어지러운 생각과 막힌 뜻이 들어올 수가 없게 하여야만 이치를 통달하여 일이 이루어진다. 이 현이 신라 시대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현을 다스린 이가 몇이나 되기에 어째서 누정이 이처럼 없었는가. 국조에 이르러 승격시켜 경기도가 되고 임군을 얻어 새로 누관을 지었으니, 옛날에 짓지 못하고 지금 얻었으니 어찌 우연할 뿐이리오. 무릇 이 다락에 오르는 사람은 다만 분망한 수고로움을 잊을 뿐 아니라, 한 번 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보는 사이에 기쁘게 그 즐거움을 얻을 것이니 참으로 산천은 맑고 곱구나. 아, 임군이 한 고을을 다스림이 마땅히 영천(潁川)과 촉군(蜀郡)에 내리지 않을 것이니, 쓸 만한 게 한 가지가 아니고 많을 것이다. 이미 전날에는 학교를 설치하고, 또 뒤에는 이 다락을 지어 법을 어기지 않고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며 성취한 바가 있으니, 이 두 가지 일만 보아도 또한 마음 씀씀이가 부지런하고 일 처리가 정밀함을 알 수 있으며, 열심히 일하는 관리로서 최상으로 부름 받아, 전성시대에 날개를 펼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뒤를 이어 일을 보는 사람은 근심이 없을 테고, 혹시라도 경개를 탐해 빠져들어 의리를 해치고 가르침을 상하게 한다면, 이 사람이 말하기를 부끄러운 짓이니, 어찌 다락을 지은 뜻이겠는가. 삼가야 하리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2리 되는 곳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記)에, "음죽현이 삼국 시대에는 죽주(竹州) 속현이었는데, 고려에 와서 쪼개 현관(縣官)으로 만들었다. 국초에 태조께서 도읍을 한양에다 정한 뒤에는 떼어내 기내(畿內)로 들어와 적현(赤縣, 경기도 군현)이 되었으니, 어찌 천시(天時)ㆍ풍토(風土)가 고금의 변함이 있겠으며, 사람의 일이 따라서 옮겨지고 달라질 것인가. 이것은 음죽현이 두 번째 시초 된 것이다. 표창하고 장려하며 교화하고 인도하는 시설이 마땅히 여러 현에 앞장서서 먼저 사람의 눈과 귀를 가다듬게 하여야 하는데 홀로 문묘와 학교를 설립하지 않았으니, 아직 기다렸던 것인가. 보안(保安) 임목(林穆)이 현감이 되어, 개연히 개설할 뜻이 있어 땅을 잡아 터를 다지기 시작하였으나, 감히 백성의 힘을 경솔히 빌리지 못하여 구부리고 우러르며 탄식하더니, 현 안에 있는 생도 손순지(孫順之) 무리가 연명으로 말을 합해 장문(狀文) 올리기를, '백성 부림이 이미 법금이 있으니, 청컨대 각각 생도의 힘을 빌려 역사하면 또한 이룸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후는 감사에게 고하였다. 지금의 대사헌 김효수(金孝修)가 다시 임금께 아뢰어 윤허하여 내리기를, '생도의 각 호(戶)에 잡역(雜役)을 면제하여 경영하게 하라.' 하였다. 명을 듣고 모두 기뻐하여 재목을 모으고 돌을 모아 무신년 8월 12일에 일을 시작하여 다투어 서로 권하였다. 임후는 날마다 감독하면서 여기서 일을 보니, 아전과 군졸이 또한 모두 분주하여, 첫머리로 대성전 3칸을 짓고 동서무(東西廡)는 모두 3칸이며, 남쪽 문루는 3칸이었다. 담장을 둘러서 얼마 안 되어 성취하였는데, 곧 9월 그믐이었다. 역사를 동독한 사람은 학장(學長) 김담(金憺)과 현리(縣吏) 이장(李萇)이요, 공사에 임한 사람은 김을부(金乙夫)와 손경(孫景)이었는데, 이듬해 기유년 여름에 임후가 편지를 보내 글로 기록하기를 구하였다. 요즘 고을 관리들은 부서(簿書)와 기회(期會)에 급하여 정치할 겨를이 없거늘, 더군다나 교화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임후가 현을 다스리자 학교를 중히 할 줄을 알았으니, 어찌 하늘의 이치를 붙들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세우는 데 하루도 빠질 수 없지 않은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상서(庠序, 주나라 학교) 학교를 베풀어 가르치는 것은 모두 인륜(人倫)을 밝힘이다.' 하였다. 대개 도(道)가 천하에 있는 것이, 그 실상은 하늘이 명한 성품에 근원 한 것인데, 군신ㆍ부자ㆍ부부ㆍ형제ㆍ붕우 사이에 행하되 하루도 그만두면 안 된다. 사람의 도가 어찌 이 다섯 가지 말고 무엇이 있으랴. 그러나 밝히면 펴지고 그렇지 않으면 무너진다. 옛 성현이 사람에게 학문하는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이 이치를 연구하고 밝혀 그 몸을 닦고 나서 미루어 사람에게 미치는 것 아님이 없는데, 한갓 기억하고 외기에만 힘쓰고 사장(詞章)을 지어 명예를 낚시질하거나 이록(利祿)을 취할 뿐 아니라, 근세 이래로 학교를 두고 가르치는 일이 오직 사조(詞藻)만을 소중히 여기고, 천리와 인륜은 일찍이 연구하고 밝히지 않으니 옳은 일인가. 이제 다행히 성명(聖明)께서 위에서 가르침을 주장하여 큰 뜻을 밝히시자, 나라나 고을이나 작거나 크고 할 것 없이, 모두 학교를 세워 세상에서 살아가는 교훈을 붙들어 유지하게 되었다. 아, 성명의 세상에 나서 성명의 선비가 되었으니, 솔개처럼 날고 고기처럼 뛰는 정리[鳶飛魚躍]가 어떠하겠는가. 또 이 현은 경기의 첫머리로 착함을 내세우는 땅에 들어왔고, 또 산천이 화하고 뭉치고 풍기(風氣)가 완전하고 정밀하니, 백성으로 그 사이에서 나는 자는 반드시 진실하고 근신하는 바탕이 있어 쉽게 감화시킬 수 있을 것이니, 그 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진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 이제부터 스승과 생도가 여기에서 외고 익혀, 한결같이 회암(晦庵, 주자)의 백록동(白鹿洞, 서원) 규칙을 준수하고, 겸하여 안정(安定)의 호학(湖學)의 체용(體用)을 밝혀 그 몸을 책망하여 덕을 이루고, 재목을 달성하여 백성을 감화하며, 풍속을 이루는 공을 다른 날에 거둔다면, 위로는 성군(聖君)의 학문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뜻에 맞고 아래로는 임후가 학교를 세운 장구한 생각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역원
유춘역(留春驛) :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무극역(無極驛) :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부민원(富民院) :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관사원(貫寺院) : 현 남쪽 13리 지점에 있다.
장해원(長海院) : 현 동쪽 13리 지점에 있다.
불우
석남사(石南寺) : 백족산에 있다.
정수사(淨水寺)ㆍ호천사(昊天寺) : 모두 영악산에 있다.
백족사(百足寺) : 백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 북쪽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잘아촌처[迲村處] : 현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다.
○ '잘아'[迲]는 고금의 운서(韻書)에 없다. 우리나라 사투리에, "풀을 섶같이 묶은 것이 잘아다."고 하는데, 자을아(玆乙阿) 세 글자를 합하여 훈(訓)으로 삼고 음(音)과 뜻은 없다.
명환
   고려
김이(金珥) : 충렬왕이 용안역(用安驛)에 머물러 김이의 정사가 최상임을 듣고, 특별히 뽑아 도평의안독원(都評議案牘員)으로 삼았다.
   본조
권준(權蹲).
제영
설성천고지(雪城千古地) -이수강(李守綱)의 시에, "설성은 천고의 땅인데 아름다운 기운이 다시 어리었도다." 하였다.

[문헌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성지
설성(雪城) : 서쪽으로 5리에 있는데, 성산(城山)이라 하고 둘레는 5리이다.
방면
현내(縣內) : 1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이 15리, 끝이 23리이다.
무극(無極)ㆍ하율(下栗) : 모두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상율(上栗) : 남쪽으로 30리이다.

 

설성산 설성지(설성산성)

소재지 :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931(설성산)
지정번호 :경기도 지방기념물 제76호
재료 :석축, 토축 혼합
규모(수량) :둘레 약 1,300m, 높이 4 - 5m
시대 :삼국시대(신라)
지정일 :1984. 10. 25

기본정보

雪城山(설성산) 主峰(주봉) 능선과 그 東(동)쪽으로 아래편 골짜기 약 2 - 3萬餘(만여) 坪(평)을 에워싸고 있는 石成(석성)으로 그 北(북)쪽 城壁(성벽)에 隣接(인접)하여 神興寺(신흥사)가 있는데, 中間(중간)에 작은 계곡을 包含(포함)하고 있는 包谷式(포곡식) 산성이다. 現存(현존)하는 利川(이천)의 城址(성지)중 가장 뚜렷한 城(성)의 形態(형태)를 保存(보존)하고 있는 곳이 「雪城(설성)」으로, 山(산) 정상에서 南東(남동)쪽으로 가지를 뻗은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20 - 30m씩 길게 城壁(성벽)이 이어진 곳도 있다.
험준한 地勢(지세)와 절벽 등을 利用(이용)하여 쌓은 外壁(외벽)은 그 높이가 4 - 5m에 달하는 높은 곳도 있으며, 1.5 - 2m 높이의 內壁(내벽)의 痕迹(흔적)도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어 성벽의 두께가 대략 5m 안팎에 幅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內外壁(내외벽) 사이에는 雜石(잡석)을 다져넣어 아주 堅固(견고)하게 성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雪城山(설성산) 정상 바로 밑에 建物地(건물지)의 흔적이 남아 있어 瓦片(와편)과 土器片(토기편)들이 출토되어 있으며, 城門(성문)은 제일 낮은 地域(지역)인 東北(동북)면 골짜기 水口(수구)에 隣接(인접)하여 設置(설치)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現在(현재)하는 水口(수구)의 幅은 4m 가량이다. 우물로 推定(추정)되는 곳은 두 군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現在(현재) 神興寺(신흥사)에서 食水(식수)로 使用(사용)하고 있고 그 안에 오래된 石築(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다른 하나는 完全(완전)히 메워진 狀態(상태)이나 石築(석축)의 一部(일부)와 함께 넓이 80cm가량의 批水口(비수구)의 흔적이 완연하다.
이 「雪城(설성)」은 檀國大學校(단국대학교) 古蹟調査團(고적조사단)에 의해 新羅軍(신라군)의 城(성)으로 밝혀진 것 외에는 正確(정확)한 築城時期(축성시기)나 目的(목적)등이 지금까지 밝혀져 있지 않으며, 「雪城(설성)」이라는 名稱(명칭)에 관해서는 神興寺(신흥사)에 비치된 傳說記(전설기)에 그 由來(유래)가
나오는데이를 要約(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雪城(설성)」은 新羅(신라) 第17代 내물왕時 倭賊(왜적)의 侵入(침입)을 防禦(방어)하기 위하여 築城(축성)했다고 전하며, 城(성)을 쌓을 때 城(성)이 쌓여질 자리로만 띠를 두른듯 白雪(백설)이 내려있고 그 자취를 따라 城(성)을 쌓았기 때문에 「雪城(설성)」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물왕때 쌓았다는 그 築城時期(축성시기)와 築城目的(축성목적)등의 根據(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치 않으며, 특히 倭賊(왜적)의 侵入(침입)을 막기 위해 이런 내륙지방에까지 城을 쌓았다는 이야기엔 說得力(설득력)이 不足(부족)하다.

 

<한성시대 백제토기 전시장 설성산성>  연합뉴스|입력 2003.11.19 09:39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 16일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설성산 성을 찾은 정영호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장은 한 줄에 10여 점씩, 3줄로 열을 이룬 채 발굴현장에 공개된 토기 30여 점을 바라보고는 다음과 같은 탄성을 질렀다. "이거, 백제토기 전시장이구만, 토기 전시장이야". 지난 수십 년을 발굴 현장에서 보낸 정 관장에게도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소 장 박경식)가 올해 시도한 제3차 설성산성 발굴성과가 놀라웠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 교수는 최영희 전 국사편찬위원장,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장, 최몽룡 서울대 교수, 최인선 순천대 교수 등이 동석한 이날 현장설명회에서 "당 장 국가사적 지정 신청을 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출토 유물로 보아 백제가 쌓은 성곽임이 확실한 이상, 더구나 3차에 걸친 그동 안의 조사에서 막대하게 확인된 백제토기 등을 고려할 때, 설성산성이 국가사적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차 발굴에서도 그러했지만, 이번 3차 발굴 또한 설성산성은 산성으로는 기록적인 토기 출토량을 보이고 있다. 설성산성과 같은 산성은 평야 지대나 구릉지 같은 데서 확인되곤 하는 다른 고 대 유적과는 달리 토기 등의 유물 출토량이 많지 않는 것이 대체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산성이 평시에 많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라, 전쟁 등과 같은 비상시에 집중적으로 활용되는 군사요새이기 때문. 하지만 설성산성은 이러한 종래 산성에 대한 통념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출토유물 중 특히 한성시대 백제토기의 경우, 2-3차 조사에서 원형, 혹은 그에 가까운 완형으로 출토된 것만 70점을 상회한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백제토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설성산성 출토 토기는 교과서적인 구실 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설성산성에서 확인된 이같은 성과는 "구덩이" 유적에서 기인한 것이다. 성곽 안 쪽에서는 현재까지 모두 28개에 달하는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이 중 6곳이 토기 저 장용, 혹은 토기 폐기용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구덩이 4곳에서는 토기들이 고스란히, 더욱이 그득하게 확인됐다. 이들 토기는 시기적으로 보아 서울 풍납토성을 기준으로 할 때는 중상위층에서 출토되는 그것들과 거의 같은 계통에 속하고 있다. 또 서울 몽촌토성 출토품과 비교 할 때는 거의 같은 시기이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속하고 있다. 조사단이 이번 설성산성 발굴성과에서 주목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또 다른 대목 은 돌을 쌓아올려 성벽을 구축한 석성(石城)인 이 설성산성의 축조시기. 조사단은 출토 유물이나 성벽 절개 조사 성과 등을 토대로 설성산성은 4세기에 서 5세기로 넘어가는 단계에 성곽이 완성되었다는 견해를 제출했다. 이는 백제는 한성시대에는 석성을 만들지 않았다는 공식과도 같던 한국 고고학 계의 통설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설성산성을 학계가 주목하는 까닭은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다. <사진있음> taeshik@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출처 : 남한강 물길 따라 이어지는 MTB 여행
글쓴이 : 산골어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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