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탄금대 토성을 돌아보며

산골어부 2013. 2. 21. 15:02

 

탄금대를 다녀간 사람 중에 탄금대 토성을 보거나 탄금대 토성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단지, 탄금대가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고,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패하여 남한강에 빠져 죽은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탄금대에 세워진 신립장군에 대한 비석들과 유래비는 모두 최근에 세워진 것들이다. 충주의 역사에서 임진왜란의 패전은 큰 수모였기에 충주의 역사에서 임진왜란의 충주전투나 고전장터에 관한 기록조차도 남기질 않았다. 그런데, 왜 갑짜기 신립 장군이 충주의 인물로 등장하고, 그에 관한 비석들이 임진왜란의 전쟁터였던 달천뜰과 달천강변이 아니라  신성한 탄금대 토성에 설치되었을까 ?  탄금대 토성과 양진명소는 명산대천에서 제를 지내기 위한 소도와 같이 신성시 여기는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탄금대 토성은 군사들이 주둔하여  남한강 물길을 통제하고 나루를 관리하는 곳이 아니였을까 ? 탄금대에서 유일하게 잔존하는 유적지는 탄금대 토성 뿐이지만, 탄금대 토성에 대한 안내판이나 보호책조차도 없이 묘지의 훼손을 방지하는 철망과 왜곡된 비석들만 가득한 것이 탄금대의 현실이다. 그리고 탄금대 공원을 다녀간 사람들은  우륵, 강수, 김생 등을 배출한 중원문화의 향기가  아니라, 패장인 신립의 눈물 속에 흘러나오는 구슬픈 "주현미의 탄금대 사연"이라는 노래를 머리에 떠올린다.

 

탄금대는 왜 슬픈 역사로 변질되었는가 ?  탄금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주읍성에 있던 천운정을 탄금대 토성 내의 탄금정 자리에 옭겨 "육각정"이라는 정자를 설치하면서 탄금대 공원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탄금대는 1970년에 충주문화원과 음악당 등이 설치된 이후에 우륵문화제와 양진명소 오룡굿 등을 재현하면서 중원문화의 계승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1978년 탄금대 열두대가 부여의 낙화암처럼 신립장군이 떨어져 죽었다는 "신립장군순국지지비"와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가 탄금대 토성에 설치되면서  탄금대의 역사는 우륵의 탄금대에서 임진왜란의 전쟁터와 배수진으로 변질되었고, 그로 인해  지금은 "주현미의 탄금대 사연"이란 노랫가락이 울려퍼지는 것이다. 또한 탄금대의 왜곡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 이후 군사정권 시대에 충주를 이끈 충주의 유지들과 향토문인들에 의해 신립장군의 무용담으로 미화되어 아직도 그 왜곡돤 굴레를 답습하고 있다.

 

탄금대 토성을 돌아보면은 참으로 한심하다. 탄금대 토성은 누각. 묘지. 비석,사찰, 도로, 탐방로 등의 조성으로 인하여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는데, 탄금대 토성을 훼손은 탄금대의 소유주와 그를 관리하는 충주시에 의해 벌어졌다는 것이다. 사유지인 탄금대가 조상들이 국가로 부터 하사받은 땅이라 법적으로는 개인땅이라고 하지만, 국가의 명승지를 영의정 지낸 관리에게 하사한 것은 명승지를 잘 관리하라는 의미는 아니였을까 ? 또한 신립장군순절비를 세우면서 탄금대의 역사를 조금만 고려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청산문제에서 사유권 재산 때문에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탄금대의 소유권과 관리의 문제가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의 개국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이제는  토지 소유주와 관리자인 충주시가 지혜롭게 풀어 나아가야할 숙제이다. 탄금대 공원의 소유권 문제는 단지 개인의 재산권 문제가 아니라, 충주시민의 지존심인 것이다. 조선왕조가 사라진 지금에 당시 왕으로부터 재산을 하사받았다는 이유로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은 가문의 조상들을 욕되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국공유지와 같은 사적공원의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고, 관리책임을 전가하는 현행법도 개선되어야할 문제이다.

 

이정표와 안내판도 없는 탄금대 토성을 돌아보며 탄금대 토성에 설치된 조잡한 시설물들을 철거하여 다른 구역으로 정비하고, 토성과 양진명소의 제단과 오룡굿 전수관을 설치했으면한다. 토성 내에 있는 묘지조성과 신립장군순절비의 설치로 훼손된 탄금대 토성을 복원하고, 임진왜란과 신립장군에 관련된 시설들은 충혼탑과 팔천고혼비 주변으로 옮기고, 우륵과 권태응 선생의 노래비는 충주 문화원과 음악당 주변으로 정비하여 시대와 영역별로 구분하는 것을 구상해 본다. 

 

탄금대 공원정비사업에서 탄금대 토성 지역은 고대의 소도와 같이 신성한 지역으로 분리하여 보존하고, 양진과 양진나루터로 추정되는 곳은 양진명소와 양진나루터를 복원하여 양진명소 오룡굿의 전수관과 제단을 설치하여 탄금대가 명산대천에 제를 올리는 명소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국궁장과 체력단련장이 있는 구역은 우륵의 가야금, 강수와 김생 등이 꽃피운 중원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을 만들어 탄금대와 남한강 물길이 중원문화 산실이라는 공간으로 만들고, 남한강과 달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 부근 산정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남한강과 달천강을 조망할 수 있게하여 탄금대 대문산이 남한강 물길의 관문이며, 충주의 미래를 제시하면 어떨까 한다. 또한 충혼탑과 팔천고혼비 주변은 전략적 요충지인 충주지역의 시대별 전쟁사를 보여줄 수있는 공간을 조성하여 국가와 충주를 위해 죽어간 영령들의 혼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는 구역으로 만들고, 충주문화원과 야외 음악당 주변은 탄금대 내에 산재한 비석들과 조형물들을 정리하여 충주의 근.현대사의 문화와 예술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근린공원과 차별화된 중원문화의 역사공원을 조성하는 망상에 잠겨본다.

 

1970년대에 탄금대를 떠올려본다. 하지만, 지금의 탄금대는 조잡하고 무질서하게 설치된 기념비와 조형물, 그리고 탄금대의 지형과 특성들을 감안하지않고 조성된 공원시설물로 인하여 탄금대의 역사를 알리기보다는 향토문화에 회의가 느껴진다. 따라서 탄금대의 상징인 우륵과 가야금, 그리고 대문장가 강수와 명필 김생의 기념물들을 세우고, 진흥왕 때 우륵이 하림궁에서 가야금 연주을 하는 모습을 담아내기를 바라며 ~~~~~

 

 

우륵선생의 탄금대비

 

 

 

탄금정

 

 

탄금정

 

 

남한강과 용섬

 

 

대흥사

 

 

탄금대 토성 남측 전경

 

 

탄금대 토성 동측 전경

 

 

 

 

탄금대 토성 남측(토성 내 묘지 진입로)

 

 

탄금대 토성 남측(토성 내 묘지 진입로)

 

 

탄금대 토성 남측(훼손된 토축-강자갈과 토기편)

 

 

탄금대 토성 남측(훼손된 토축-강자갈과 토기편)

 

 

탄금대 토성 남측(훼손된 토축)

 

 

탄금대 토성 동측(훼손된 토축)

 

 

탄금대 토성 남측(훼손된 토축)

 

 

증 영의정 안동 김공지순 지묘, 배 정경부인 여흥민씨 부좌

 

 

증 영의정 안동 김공지순 지묘, 배 정경부인 여흥민씨 부좌

 

 

탄금대 토성 남측(묘지 진입로와 성토로 사라진 토축)

 

 

탄금대 토성 남측(묘지 진입로와 성토로 사라진 토축)

 

 

탄금대 토성 남측(묘지 진입로와 성토로 사라진 토축)

 

 

토성에서 바라본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

 

 

탄금대 토성 서측(신립장군순절비 공사로 훼손된 토축)

 

 

탄금대 토성 서측(신립장군순절비와 대흥사)

 

 

탄금대 토성 서측(신립장군순절비 공사로 훼손된 토축)

 

 

탄금대 토성 서측(신립장군순절비 공사로 훼손된 토축)

 

 

탄금대 토성 서측(신립장군순절비 공사로 훼손된 토축)

 

 

탄금대 토성 서측(신립장군순절비 공사로 훼손된 토축)

 

 

탄금대 토성 서측(신립장군순절비 공사로 훼손된 토축)

 

 

탄금대 토성 서측(신립장군순절비 공사로 훼손된 토축)

 

 

 

탄금대기비

 

 

신립장군순국지지비

 

 

탄금대 팔천고혼위령탑

 

 

탄금대 팔천고혼위령탑

 

 

 

탄금대 팔천고혼위령탑

 

탄금대 토성(디지털충주문화대전에서)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대문산에 있는 고대 토성.

  • [개설]

탄금대 토성남한강달천이 합류하는 낮은 구릉에 위치한 고대 토성이다. 탄금대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우륵(于勒)신라로 망명한 후 이곳 국원(國原)에 안치되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싸운 전적지이다.

  • [건립경위]

탄금대 토성은 여러 차례의 조사 결과를 통해 4세기 중후반에 탄금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철을 생산하는 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순수 백제 유물만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고구려신라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이전에 백제계 세력에 의해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위치]

탄금대 토성이 위치한 충주시 칠금동 산1번지는 동북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달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과거에는 남한강충주천,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샛강이 매립되기 전까지 독립된 섬이었다. 토성은 탄금대의 동북쪽 가장 높은 지점의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멀리 동쪽으로는 계명산남산이 솟아 있고 그 아래로 충주시가지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금가면, 서쪽으로는 조정지 댐 일원과 탑평리 칠층석탑이 위치한다.

  • [형태]

탄금대 토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로 길다란 불규칙한 말각장방형 내지 타원형이다. 동서 길이 150m, 남북 너비 100m 정도이다. 전체 둘레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는 남한강변의 북쪽 절벽지대를 포함하여 약 415~420m로, 이중에서 토루가 축조된 구간은 동서남벽의 234m이다.

  • [현황]

탄금대 토성은 동북쪽의 가장 높은 곳에서 서향하여 낮아지는 사면을 둘러싼 토루(土壘)로, 현재는 토성 내부에 사찰·비각·묘지 및 탄금대공원 조성으로 인해 원상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1991년 충주공업전문대학 박물관과 2002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의 지표조사에서 토성의 존재를 확인하고, 무문토기를 비롯한 돌칼·돌도끼 등의 선사시대 유물은 물론 백제 토기편들을 다량으로 확인하였다.

2007년 발굴조사를 통해 토성의 축조방법과 경영시기 등이 밝혀지게 되었다. 먼저 탄금대 토성은 토루의 내측 하부에 강돌을 이용하여 계단상을 이루도록 5~6단의 석열을 축조하여 석심토루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축조 방법은 아직까지 보고된 예가 없는 경우이다. 토층 양상으로 볼 때 중심부에 계단상으로 석열을 축조하면서 동시에 석열을 중심으로 내측은 소토와 숯이 다량 포함된 흑갈색 내지 회갈색토를 성토하였고, 외측은 점토를 판축한 후 석열 윗부분의 중심토루 부분에 일정한 너비를 수평 판축하면서 내외측으로 경사를 이루도록 내외피 토루를 동시에 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성내 시설물로는 3기의 주거지와 저수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 내지 말각장방형의 수혈주거지로 특히 2호 주거지에서는 용해로 또는 단야로와 관련된 송풍관편과 슬래그 등이 함께 수습되어 공방시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저수시설은 성내 북쪽 중앙부를 향하여 완만해지는 지점에 위치하는데, 평면 형태는 부정타원 또는 말각장방형으로 중앙부가 깊은 바가지 모양이다.

규모는 500×530㎝로 깊이는 60㎝이다. 이곳에서 40여 점에 이르는 철정(鐵鋌)이 수습되기도 하였다. 성내와 성벽 판축토 내부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백제 토기 일색으로 고구려신라의 토기는 전혀 출토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백제 또는 백제의 통제를 받는 지방 세력에 의해 축조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 [의의와 평가]

탄금대 토성은 축조 방법에 있어 강돌을 이용한 이른바 석심토루를 구축하였는데, 이는 성곽 유적에서 아직까지 조사된 예가 없는 특이한 방법이다. 또한 순수 백제 유물만 출토되고 있어 백제에 의해 축조되어 경영된 고대 토성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충주 일대에 분포하는 많은 제철유적과 관련하여 제철 관련 공방시설을 찾은 점도 주목된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김규영 편, 『한국의 성곽과 봉수』상(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1989)
• 『탄금대 지표조사보고서』(충주공업전문대학박물관, 1991)
• 『삼국통일의 격전지 충북의 성곽을 찾아서』(충청북도, 2000)
• 『충주시지』(충주시, 2001)
• 『충주 탄금대토성 발굴조사약보고서』(중원문화재연구원, 2007)
• 조순흠, 「충주 탄금대토성 발굴조사 개보」(『중원문화 정립을 위한 조사연구 방향』,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08)

 

 

 

 

 

 

 

 

 

 

 

 

 

 

칠금동 양진명소 오룡굿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양진명소사에서 봄가을 치제할 때 수신에게 지내는 마을 굿.

  • [신당/신체의 형태]

양진명소의 제신(祭神)인 오룡(五龍)에게 제사 지낸다.

  • [연원 및 변천]

예부터 나라에서 양진명소사(楊津溟所祠)에 향과 축문을 내려 향사하고 제신인 오룡을 제사하던 굿판을 벌였다. 그런데 조선 말기부터 양진명소사신립 장군 사당이라고 오인되어 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양진명소단(楊津溟所壇)이라 칭하고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양진명소 오룡굿은 원래 선박의 안전 운항과 어민의 풍요를 빌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굿판이었다.

  • [절차]

무당이 양진명소의 제신인 오룡을 제청(祭廳)으로 맞아들인 후 제사를 지내고, 굿을 하며 오신(娛神)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면서 온 마을 사람들이 즐겁게 논다. 제의 는 영신(迎神)굿, 오신(娛神)굿, 송신(送神)굿 순서로 진행된다.

영신굿이 시작되면 주무(主巫)가 무악(巫樂)에 맞추어 용왕풀이를 하면서 강가에서 노래를 한다. 용왕풀이가 끝난 다음 빨간 바가지로 강물을 떠서 빨간 필목을 따라서 물동이로 가져다 물을 부은 다음에 노란 바가지로 노란 필목, 하얀 바가지로 하얀 필목, 파란 바가지로 파란 필목, 검은 바가지로 검은 필목을 따라 물동이에 물을 붓는 순으로 진행하며 신을 맞이한다. 오룡을 상징하는 물 다섯 바가지를 담은 물동이를 들고 무악에 맞추어 부정풀이를 하면서 신청(神廳)으로 옮긴다.

영신굿에 이어 오신굿에서는 제관들이 유교식 제사를 지낸다. 제사가 끝나면 굿이 계속되다가 무가(巫歌)와 덕담(德談)이 이어진 뒤 마을 주민들의 축원 소지가 진행된다. 다시 굿이 이어지고 마을 주민들의 풍물 가락에 맞추어 노래와 춤이 펼쳐진다.

송신굿에서는 제관들이 다시 유교식 제사를 지낸다. 제사가 끝나면 무당들이 신체(神體)를 모시고 무가를 부르며 양진명소로 옮긴다. 양진명소에서 물동이 속에 있는 오색 바가지를 꺼내 색깔에 맞추어 강물로 다시 옮기고 오색 바가지는 강물에 떠내려 보낸다. 무당·풍물패·마을 주민 모두가 기원과 함께 송신한 뒤, 마을 주민은 풍물패를 앞세우고 귀가한다.

  • [현황]

1979년 제2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장려상을 받았으며, 우륵문화제 때 재현하고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충주의 지명』(충주시·예성문화연구회, 1997)
• 『한국의 제당』4-충청북도편(국립민속박물관, 2000)
• 어경선 외, 『충주의 향토사』-마을신앙편(충주문화원, 2001)
• 『충주시지』(충주시, 2001)

 

 

 

 

 

 

 

 

 

 

 

 

탄금대 토성(참고자료)

 

 탄금대 http://c0c.wo.ro

 

  탄금정(彈琴亭)

과거의 탄금대 육각정이 새로 이층 콘크리트 건축으로 단장된 후 이름까지 탄금정으로 바뀌었다.

탄금정이란 정자는 2층으로 누각형태의 정자다. 탄금대 열두대 가는 길목 전망이 좋은 곳에 서 있다. 탄금정의 1층은 2단의 기단을 만들고 한 변의 길이가 7m의 정방형 위에 한 변의 길이가 80cm이 정방형의 주초석(柱礎石)을 놓고 그 이에 사방 50cm크기의 사각기둥을 각각 280cm 거리에 4개를 놓아 2층 누각을 지탱하고 있으며 폭 120cm의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다. 2층은 720cm를 한 변의 길이로 하는 정방형으로 가운데 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가에는 난간을 둘러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으며 네 기둥사이에는 지름 60cm의 원형콘크리트 기둥을 세워 초익공(初翼工) 계통의 공포를 구성하였다.

이 정자의 내력을 보면 본래 천운정(天雲停)으로 1903년(광무7년) 충청북도 관찰사 김양규씨가 자기조부가 충주목사로 재임당시 지금의 교육청자리에 있던 연못(당시는 상연당이라고 했다)가운데에 석가산을 쌓고 그위에다 육각정을 세우고 천운정이라 이름짓고 매년 7-8월이 되면 수령과 유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즐기던 곳이었다.

광무10년(1906)에 충주공립보통학교(현교현초등학교)를 이곳에 건축하고 운동장으로 사용키 위해 상연정을 메우게 되며 육각정은 사직산으로 옮기고 임시 석영으로 사용하다가 , 1955년 당시 충주읍장이었던 박승두가 이 정자가 사직산에 이건되어 있던 것을 탄금대 열두대 위로 옮긴 것이다. 목조로 된 이 정자는 낡아서 1976년 6월 이 자리에 현재의 탄금정을 세우고 6각형이던 천운정은 1977년 호암지 3번 국도 옆 동산에 콘크리트 건물로 6각정 정자가 다시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