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그늘 아래서/흔적을 찾아서
[스크랩] 공민왕과 홍건적 - 안동도호부
산골어부
2013. 5. 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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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10년(1361), 원 지정 21년 |
○ 9월에 호부상서 주사충(朱思忠)을 원 나라에 보내어, 도로가 다시 통한 것을 하례하게 하였다.
○ 정동성 관리를 다시 두었다.
○ 원 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난리가 일어났다 하여 사신을 보내와서 사면령을 반포했다.
○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켜 천호 임자부(任自富)와 김천룡(金天龍)을 죽이니, 형부상서 김진(金璡)에게 가서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 겨울 10월 무자일에 지진이 있었다.
○ 김진이 증병을 청하니, 이때 우리 태조(太祖)는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으로서 동북면 상만호였는데, 왕이 김진을 구원하라고 명하였다. 태조가 군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니, 박의는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강계(江界)로 도망해 들어갔는데, 모두 잡아서 죽였다.
○ 정유일에 홍두적(紅頭賊)의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ㆍ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주원수(朱元帥) 등 10여 만의 무리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삭주(朔州)를 침범하니, 추밀원부사 이방실(李芳實)을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 삼고, 동지추밀원사 이여경(李餘慶)을 보내서 절령(岊嶺)에 책(柵)을 세웠다.
○ 학성후(鶴城侯) 서(諝)를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는데, 길이 중도에서 막혀 가지 못하였다.
○ 사신을 보내어 여러 도의 군사를 점검하고, 국내의 절에 명령하여 전마(戰馬)를 차등 있게 내게 하였다. 서울 사람을 모아서 성문을 수리하였다.
○ 임인에 홍두적이 이성(泥城)을 침범하니,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정당문학 김득배(金得培)를 도병마사로, 동지추밀원사 정휘(鄭暉)를 동북면 도지휘사로 삼았다.
○ 모병(募兵)하는 방에, “모집에 응하는 자 중에, 사삿집 노비를 제외하고 선비나 향리에게는 벼슬을 주고, 궁(宮)ㆍ사(司)의 노예는 양민으로 삼든지 돈과 비단을 상주든지 그들의 소원에 따르리라." 하였다.
○ 지숙주사(知肅州事) 강려(康侶)가 민가를 불태우고 도망했다.
○ 11월에 홍두적이 무주(撫州 평북 영변(寧邊))에 둔을 치니, 저 쪽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다 하여 이방실이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서, 순(順)ㆍ은(殷)ㆍ성(成) 3주(州)와 양암(陽巖 평남 양덕(陽德))ㆍ수덕(樹德 평남 양덕(陽德))ㆍ강동(江東)ㆍ삼등(三登 평남 강동(江東))ㆍ상원(祥原 평남 중화(中和)) 5현의 백성과 곡식을 절령(岊嶺)으로 옮기자고 청하니, 이를 승낙하였다. 이방실이 판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 좌승(左丞) 유계조(柳繼祖), 대장군 최준(崔準) 등을 박천(博川)으로 보내어 적을 쳐서 이겼다. 이방실은 지휘사(指揮使) 김경제(金景磾)와 더불어 개주(价州 평남 개천(价川))에서 적을 쳐 1백 50여 명을 베었다.
○ 염제신(廉悌臣)을 파면하고, 홍언박(洪彦博)을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을묘일에 안우가 보낸 조천주ㆍ정이(鄭履) 등이 보병과 기병 4백 명을 가지고 박주(博州 평북 박천(博川))에서 적을 쳐서 적 1백여 명을 베었다. 기병 1백 명을 거느린 이방실은 연주(延州)에서 1천여 명을 쳐서 20명을 베었다. 안우는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나가 둔을 치고 첩보(捷報)를 올리니, 왕이 명하여 안우를 도원수로 삼았다.
○ 병진일에 적이 안주를 습격하자 우리 군사가 패하여, 상장군 이음(李蔭)과 조천주가 죽었다. 적은 지휘사 김경제를 사로잡아 그들의 원수로 삼고 글을 보내기를, “군사 1백 10만을 거느리고 동으로 갈 테니 속히 나와 항복하라." 하였다.
○ 공(公)ㆍ후(侯) 이하에게 전쟁에 쓸 말을 차등 있게 내놓으라고 명하였다.
○ 참지정사 정세운(鄭世雲)을 서북면 군용체찰사(西北面軍容體察使)로 삼고, 전 밀직제학 정사도(鄭思道)ㆍ김두(金㪷)를 보내어 절령(岊嶺)의 책(柵)을 지키게 하며, 평장사 이공수(李公遂)에게 죽전(竹田)에서 둔을 치게 하였다.
○ 우리 태조가 적의 왕원수(王元帥) 이하 1백여 명을 베고, 한 사람을 사로잡아 바쳤다.
○ 계해에 평장사 김용(金鏞)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전 형부상서 유연(柳淵)을 병마사로 삼았다. 적은 이날 밤에 군사 1만여 명을 절령 책 옆에 매복시켰다가, 닭이 울자 철기(鐵騎) 5천 명으로 책문(柵門)을 공격하여 깨뜨리니,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안우와 김득배 등이 단기로 도망해 돌아왔다.
○ 을축일에 안우가 군사를 수습하여 김용 등과 함께 금교역(金郊驛)에서 둔을 친 다음, 김용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최영을 왕께 보내어 서울 군사를 청하니, 왕이 일이 급함을 알고서 피난을 생각하여 먼저 서울에 사는 부녀들과 늙고 약한 자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하자,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 날, 적의 선봉이 흥의역(興義驛 황해 우봉(牛峯))에 이르렀다.
○ 병인일에 왕과 공주가 태후를 모시고 장차 남쪽으로 파천하려 하는데, 날이 밝기 전에 김용ㆍ안우ㆍ이방실 등이 달려와서 모두 아뢰기를, “경성은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최영이 가장 통분하여 크게 부르짖기를, “주상께서는 조금 더 머무르셔서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사를 지키소서." 하니, 재신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날이 밝자, 왕의 일행은 민천사(旻天寺)로 거둥하였다. 근신들을 각각 거리로 나누어 보내서 큰 소리로 의병을 모집하게 하니, 서울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모집에 응한 자는 겨우 몇 사람뿐이었다. 안우 등도 어찌할 수 없어 왕에게 아뢰기를, “신등이 여기 머물러 적을 막을 것이오니, 주상께서는 출행하소서." 하였다. 이에 왕이 숭인문(崇仁門)을 나서니,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어미는 자식을 버리고, 짓밟히고 깔린 자가 들판에 가득하였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왕의 일행이 통제원(通濟院)에 이르자 경성에서 오는 자가 아뢰기를, “적이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하니, 임진강을 건넜다. 공주는 연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次妃) 이씨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하여 보는 자가 모두 울었다. 왕이 신하를 돌아다보며 원송수(元松壽)ㆍ이색에게 이르기를, “풍경이 이와 같으니, 경 등은 마땅히 연구(聯句)를 지을 만하다." 하였다.
○ 상주 판관(尙州判官) 조진(趙縉)이 군사 1천 4백 명을 데리고 왔으므로, 대장군 김득제(金得齊)가 거느리게 했다. 사평원(沙平院)에 이르니, 개령감무(開寧監務)가 와서 쇄마(刷馬) 1백여 필을 바쳤다. 광주(廣州)에 이르러 유탁(柳濯)을 경상도 도순문 겸 병마사(慶尙道都巡問兼兵馬使)로, 이춘부(李春富)를 전라도 도순문 겸 병마사로, 이성서(李成瑞)를 양광도 도순문 겸 병마사로, 강석(姜碩)을 교주ㆍ강릉도 도순문 겸 병마사로 삼았다. 중랑장 임견미(林堅味)가 재ㆍ추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경성에 들어왔으니, 임진강 북쪽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모든 도의 군사를 뽑아 적을 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재ㆍ추들이 응하지 않으므로 임견미는 눈물을 흘리면서 왕에게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지금 창졸간에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 신미일에 눈이 내리는데 이천현(利川縣)에 다다르니, 왕의 옷이 젖고 얼어서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녹였다. 이날 적이 경성을 함락시켰는데, 여러 달 동안 둔병하면서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성(城)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음을 얼리니,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했다. 또 사람을 잡아서 굽거나 임부(姙婦)의 젖을 구워서 먹는 등 잔학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다.
○ 임신일에 왕이 음죽현(陰竹縣)에 다다르니, 관리와 백성은 모두 도망해 숨었다. 판각문사(判閣門事) 허유(許猷)가 쌀 두 말을 바치니, 왕이 안렴사 안종원(安宗源)과 안무사 허강(許綱)이 음식과 장막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하여 이지태(李之泰)를 안종원의 대임으로 삼았다.
○ 장군 홍선(洪瑄)이 자청해서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려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남경윤 양광도관군 상만호(南京尹楊廣道管軍上萬戶)로 발탁하고, 조희고(趙希古)를 광주목사 양광도 부만호로 삼았다.
○ 12월 임진일에 왕이 복주(福州 경북 안동(安東))에 이르렀다. 정세운(鄭世雲)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하였다. 왕이 파천한 뒤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히 여겨서,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시킬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겨 여러 번 왕에게 청하기를, “속히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시어 징병을 독려시키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왕이 정세운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고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천하가 편안하면 좋은 정승을 임명하는 데에 뜻을 두고, 천하가 위태하면 좋은 장수를 임명하는 데에 뜻을 둔다. 시세의 경중은 오직 사람에게 달려 있는데 어찌 삼가지 않으리오. 공경히 생각건대, 태조께서 국가를 이룩하시고 여러 성왕(聖王)이 서로 계승하여 백성들을 길러 오셨는데, 과인에게 이르러서는 태평시대에 익숙해져서 군사의 일은 폐하고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두적의 침범을 입어서 파천하여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매양 종사를 생각하면 가슴아프고 쓰라림을 어찌 견디리오. 이제 모든 장수를 나누어 보내니, 군사를 합하여 적을 쳐라. 정세운에게 절월(節鉞)을 주는 명을 내리니, 가서 군사를 감독하며 명령을 듣고 안 듣는 자를 가려 상주고 벌주라." 하였다. 정세운이 도당에 나아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는 심히 한미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도 재상이 되었으니 국가가 당연히 어지럽다." 하고, 유숙(柳淑)에게 말하기를, “내일 군사를 출발시킬 터이니 공은 돌아가서 군사를 점검하시오." 하니, 유숙이 말하기를, “군사가 이미 죽령 대원(竹嶺大院)에 이르렀다" 하였다. 정세운이 다시 말하기를, “만일 군사가 기한까지 당도하지 못하면, 공도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하고, 김용(金鏞)에게 말하기를, “지금 두 정승이 적을 구경만 하고 치려 하지 않으니, 누가 이런 행태를 본받지 않으리오. 만일 적을 소탕하지 못하면, 산골짜기에 도망해 숨을지라도 어떻게 살겠으며,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겠는가." 하였다. 시중 이암이 말하기를, “이제 적이 몰래 들어와서 왕과 신하들이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은 그대가 절월을 가지고 군사를 거느려 떠나는데, 사직(社稷)이 다시 편안해지는 것은 이번 한 싸움에 있으니, 공은 오직 힘쓰라." 하였다.
○ 왕이 영호루(映湖樓)에 거둥하여 얼마 동안 경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누에서 내려와서 배를 타고 놀므로, 구경하는 자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혹은 돌아서서 탄식하는 자도 있었다.
○ 정세운을 중서평장사로 삼았다.
○ 염주(鹽州 황해 연백(延白)) 사람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김장수(金長壽)가 주동이 되어서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적을 막아, 적 유기(遊騎) 1백 4십여 명을 죽이고, 적의 위방(僞榜)을 그 고을 사람 최영기(崔英起)에게 주어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보고하게 하니, 김장수를 상장군 겸 만호(上將軍兼萬戶)로, 최영기를 서해도 안무사(西海道安撫使)로 삼았다.
○ 적 3백여 기가 원주(原州)를 함락시키니, 목사 송광언(宋光彦)이 죽었다. 적 29명이 안변부(安邊府)에 이르렀는데, 이때 고을 사람이 항복하는 체하고 술을 대접하여, 세 순배가 돌자 모두 때려 죽였다. ○ 강화부(江華府)도 적에게 거짓 항복하고, 적의 비장(裨將) 왕동첨(王同簽)에게 음식을 주다가 복병을 매복시켜 모두 죽이니, 적이 감히 그 고을 경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 정동성 관리를 다시 두었다.
○ 원 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난리가 일어났다 하여 사신을 보내와서 사면령을 반포했다.
○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켜 천호 임자부(任自富)와 김천룡(金天龍)을 죽이니, 형부상서 김진(金璡)에게 가서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 겨울 10월 무자일에 지진이 있었다.
○ 김진이 증병을 청하니, 이때 우리 태조(太祖)는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으로서 동북면 상만호였는데, 왕이 김진을 구원하라고 명하였다. 태조가 군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니, 박의는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강계(江界)로 도망해 들어갔는데, 모두 잡아서 죽였다.
○ 정유일에 홍두적(紅頭賊)의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ㆍ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주원수(朱元帥) 등 10여 만의 무리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삭주(朔州)를 침범하니, 추밀원부사 이방실(李芳實)을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 삼고, 동지추밀원사 이여경(李餘慶)을 보내서 절령(岊嶺)에 책(柵)을 세웠다.
○ 학성후(鶴城侯) 서(諝)를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는데, 길이 중도에서 막혀 가지 못하였다.
○ 사신을 보내어 여러 도의 군사를 점검하고, 국내의 절에 명령하여 전마(戰馬)를 차등 있게 내게 하였다. 서울 사람을 모아서 성문을 수리하였다.
○ 임인에 홍두적이 이성(泥城)을 침범하니,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정당문학 김득배(金得培)를 도병마사로, 동지추밀원사 정휘(鄭暉)를 동북면 도지휘사로 삼았다.
○ 모병(募兵)하는 방에, “모집에 응하는 자 중에, 사삿집 노비를 제외하고 선비나 향리에게는 벼슬을 주고, 궁(宮)ㆍ사(司)의 노예는 양민으로 삼든지 돈과 비단을 상주든지 그들의 소원에 따르리라." 하였다.
○ 지숙주사(知肅州事) 강려(康侶)가 민가를 불태우고 도망했다.
○ 11월에 홍두적이 무주(撫州 평북 영변(寧邊))에 둔을 치니, 저 쪽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다 하여 이방실이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서, 순(順)ㆍ은(殷)ㆍ성(成) 3주(州)와 양암(陽巖 평남 양덕(陽德))ㆍ수덕(樹德 평남 양덕(陽德))ㆍ강동(江東)ㆍ삼등(三登 평남 강동(江東))ㆍ상원(祥原 평남 중화(中和)) 5현의 백성과 곡식을 절령(岊嶺)으로 옮기자고 청하니, 이를 승낙하였다. 이방실이 판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 좌승(左丞) 유계조(柳繼祖), 대장군 최준(崔準) 등을 박천(博川)으로 보내어 적을 쳐서 이겼다. 이방실은 지휘사(指揮使) 김경제(金景磾)와 더불어 개주(价州 평남 개천(价川))에서 적을 쳐 1백 50여 명을 베었다.
○ 염제신(廉悌臣)을 파면하고, 홍언박(洪彦博)을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을묘일에 안우가 보낸 조천주ㆍ정이(鄭履) 등이 보병과 기병 4백 명을 가지고 박주(博州 평북 박천(博川))에서 적을 쳐서 적 1백여 명을 베었다. 기병 1백 명을 거느린 이방실은 연주(延州)에서 1천여 명을 쳐서 20명을 베었다. 안우는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나가 둔을 치고 첩보(捷報)를 올리니, 왕이 명하여 안우를 도원수로 삼았다.
○ 병진일에 적이 안주를 습격하자 우리 군사가 패하여, 상장군 이음(李蔭)과 조천주가 죽었다. 적은 지휘사 김경제를 사로잡아 그들의 원수로 삼고 글을 보내기를, “군사 1백 10만을 거느리고 동으로 갈 테니 속히 나와 항복하라." 하였다.
○ 공(公)ㆍ후(侯) 이하에게 전쟁에 쓸 말을 차등 있게 내놓으라고 명하였다.
○ 참지정사 정세운(鄭世雲)을 서북면 군용체찰사(西北面軍容體察使)로 삼고, 전 밀직제학 정사도(鄭思道)ㆍ김두(金㪷)를 보내어 절령(岊嶺)의 책(柵)을 지키게 하며, 평장사 이공수(李公遂)에게 죽전(竹田)에서 둔을 치게 하였다.
○ 우리 태조가 적의 왕원수(王元帥) 이하 1백여 명을 베고, 한 사람을 사로잡아 바쳤다.
○ 계해에 평장사 김용(金鏞)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전 형부상서 유연(柳淵)을 병마사로 삼았다. 적은 이날 밤에 군사 1만여 명을 절령 책 옆에 매복시켰다가, 닭이 울자 철기(鐵騎) 5천 명으로 책문(柵門)을 공격하여 깨뜨리니,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안우와 김득배 등이 단기로 도망해 돌아왔다.
○ 을축일에 안우가 군사를 수습하여 김용 등과 함께 금교역(金郊驛)에서 둔을 친 다음, 김용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최영을 왕께 보내어 서울 군사를 청하니, 왕이 일이 급함을 알고서 피난을 생각하여 먼저 서울에 사는 부녀들과 늙고 약한 자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하자,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 날, 적의 선봉이 흥의역(興義驛 황해 우봉(牛峯))에 이르렀다.
○ 병인일에 왕과 공주가 태후를 모시고 장차 남쪽으로 파천하려 하는데, 날이 밝기 전에 김용ㆍ안우ㆍ이방실 등이 달려와서 모두 아뢰기를, “경성은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최영이 가장 통분하여 크게 부르짖기를, “주상께서는 조금 더 머무르셔서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사를 지키소서." 하니, 재신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날이 밝자, 왕의 일행은 민천사(旻天寺)로 거둥하였다. 근신들을 각각 거리로 나누어 보내서 큰 소리로 의병을 모집하게 하니, 서울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모집에 응한 자는 겨우 몇 사람뿐이었다. 안우 등도 어찌할 수 없어 왕에게 아뢰기를, “신등이 여기 머물러 적을 막을 것이오니, 주상께서는 출행하소서." 하였다. 이에 왕이 숭인문(崇仁門)을 나서니,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어미는 자식을 버리고, 짓밟히고 깔린 자가 들판에 가득하였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왕의 일행이 통제원(通濟院)에 이르자 경성에서 오는 자가 아뢰기를, “적이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하니, 임진강을 건넜다. 공주는 연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次妃) 이씨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하여 보는 자가 모두 울었다. 왕이 신하를 돌아다보며 원송수(元松壽)ㆍ이색에게 이르기를, “풍경이 이와 같으니, 경 등은 마땅히 연구(聯句)를 지을 만하다." 하였다.
○ 상주 판관(尙州判官) 조진(趙縉)이 군사 1천 4백 명을 데리고 왔으므로, 대장군 김득제(金得齊)가 거느리게 했다. 사평원(沙平院)에 이르니, 개령감무(開寧監務)가 와서 쇄마(刷馬) 1백여 필을 바쳤다. 광주(廣州)에 이르러 유탁(柳濯)을 경상도 도순문 겸 병마사(慶尙道都巡問兼兵馬使)로, 이춘부(李春富)를 전라도 도순문 겸 병마사로, 이성서(李成瑞)를 양광도 도순문 겸 병마사로, 강석(姜碩)을 교주ㆍ강릉도 도순문 겸 병마사로 삼았다. 중랑장 임견미(林堅味)가 재ㆍ추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경성에 들어왔으니, 임진강 북쪽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모든 도의 군사를 뽑아 적을 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재ㆍ추들이 응하지 않으므로 임견미는 눈물을 흘리면서 왕에게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지금 창졸간에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 신미일에 눈이 내리는데 이천현(利川縣)에 다다르니, 왕의 옷이 젖고 얼어서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녹였다. 이날 적이 경성을 함락시켰는데, 여러 달 동안 둔병하면서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성(城)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음을 얼리니,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했다. 또 사람을 잡아서 굽거나 임부(姙婦)의 젖을 구워서 먹는 등 잔학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다.
○ 임신일에 왕이 음죽현(陰竹縣)에 다다르니, 관리와 백성은 모두 도망해 숨었다. 판각문사(判閣門事) 허유(許猷)가 쌀 두 말을 바치니, 왕이 안렴사 안종원(安宗源)과 안무사 허강(許綱)이 음식과 장막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하여 이지태(李之泰)를 안종원의 대임으로 삼았다.
○ 장군 홍선(洪瑄)이 자청해서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려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남경윤 양광도관군 상만호(南京尹楊廣道管軍上萬戶)로 발탁하고, 조희고(趙希古)를 광주목사 양광도 부만호로 삼았다.
○ 12월 임진일에 왕이 복주(福州 경북 안동(安東))에 이르렀다. 정세운(鄭世雲)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하였다. 왕이 파천한 뒤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히 여겨서,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시킬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겨 여러 번 왕에게 청하기를, “속히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시어 징병을 독려시키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왕이 정세운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고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천하가 편안하면 좋은 정승을 임명하는 데에 뜻을 두고, 천하가 위태하면 좋은 장수를 임명하는 데에 뜻을 둔다. 시세의 경중은 오직 사람에게 달려 있는데 어찌 삼가지 않으리오. 공경히 생각건대, 태조께서 국가를 이룩하시고 여러 성왕(聖王)이 서로 계승하여 백성들을 길러 오셨는데, 과인에게 이르러서는 태평시대에 익숙해져서 군사의 일은 폐하고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두적의 침범을 입어서 파천하여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매양 종사를 생각하면 가슴아프고 쓰라림을 어찌 견디리오. 이제 모든 장수를 나누어 보내니, 군사를 합하여 적을 쳐라. 정세운에게 절월(節鉞)을 주는 명을 내리니, 가서 군사를 감독하며 명령을 듣고 안 듣는 자를 가려 상주고 벌주라." 하였다. 정세운이 도당에 나아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는 심히 한미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도 재상이 되었으니 국가가 당연히 어지럽다." 하고, 유숙(柳淑)에게 말하기를, “내일 군사를 출발시킬 터이니 공은 돌아가서 군사를 점검하시오." 하니, 유숙이 말하기를, “군사가 이미 죽령 대원(竹嶺大院)에 이르렀다" 하였다. 정세운이 다시 말하기를, “만일 군사가 기한까지 당도하지 못하면, 공도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하고, 김용(金鏞)에게 말하기를, “지금 두 정승이 적을 구경만 하고 치려 하지 않으니, 누가 이런 행태를 본받지 않으리오. 만일 적을 소탕하지 못하면, 산골짜기에 도망해 숨을지라도 어떻게 살겠으며,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겠는가." 하였다. 시중 이암이 말하기를, “이제 적이 몰래 들어와서 왕과 신하들이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은 그대가 절월을 가지고 군사를 거느려 떠나는데, 사직(社稷)이 다시 편안해지는 것은 이번 한 싸움에 있으니, 공은 오직 힘쓰라." 하였다.
○ 왕이 영호루(映湖樓)에 거둥하여 얼마 동안 경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누에서 내려와서 배를 타고 놀므로, 구경하는 자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혹은 돌아서서 탄식하는 자도 있었다.
○ 정세운을 중서평장사로 삼았다.
○ 염주(鹽州 황해 연백(延白)) 사람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김장수(金長壽)가 주동이 되어서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적을 막아, 적 유기(遊騎) 1백 4십여 명을 죽이고, 적의 위방(僞榜)을 그 고을 사람 최영기(崔英起)에게 주어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보고하게 하니, 김장수를 상장군 겸 만호(上將軍兼萬戶)로, 최영기를 서해도 안무사(西海道安撫使)로 삼았다.
○ 적 3백여 기가 원주(原州)를 함락시키니, 목사 송광언(宋光彦)이 죽었다. 적 29명이 안변부(安邊府)에 이르렀는데, 이때 고을 사람이 항복하는 체하고 술을 대접하여, 세 순배가 돌자 모두 때려 죽였다. ○ 강화부(江華府)도 적에게 거짓 항복하고, 적의 비장(裨將) 왕동첨(王同簽)에게 음식을 주다가 복병을 매복시켜 모두 죽이니, 적이 감히 그 고을 경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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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 11년(1362), 원 지정 22년 |
○ 봄 정월에 구묘(九廟)의 가주(假主)를 복주향교(福州鄕校)에 봉안하였다.
○갑자일에 안우ㆍ이방실ㆍ황상(黃裳)ㆍ한방신(韓方信)ㆍ이여경(李餘慶)ㆍ김득배ㆍ
안우경(安遇慶)ㆍ이귀수(李龜壽)ㆍ최영 등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 둔을 쳤다.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이 모든 장수를 독려하고 진군시켜 경성을 포위하게 하고, 정세운은 물러나와 도솔원(兜率院)에 둔을 쳤다. 이때 진눈깨비가 내리는데, 적의 방비가 해이해졌다. 이여경이 숭인문(崇仁門)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의 휘하 호군(護軍) 권희(權僖)가 적을 정탐하여 이것을 알고 말하기를, “적의 정예 군사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니, 만일 우리가 불시에 공격한다면 가히 이길 것입니다." 하였다. 을축일 동틀 무렵에, 권희가 군사 수십 기를 거느리고 돌입해 들어가면서 떠들썩하게 북을 치며 날쌔게 공격하니, 적의 무리가 깜짝 놀랐다. 이때 우리 태조가 휘하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대파하였는데, 해질 무렵에 적의 괴수 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 등을 베니, 적의 무리들이 저희끼리 서로 밟아 쓰러진 시체가 성 안에 가득하였다. 적의 머리를 벤 것이 대개 10여만 명이요, 원 나라 황제의 옥새 2개, 금보(金寶) 1개, 금은ㆍ동인(銅印)과 병기 등의 물건을 노획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도둑을 모두 소탕시킬 수는 없다." 하고, 숭인(崇仁)ㆍ탄현(炭峴) 두 문을 열어 놓으니,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 등 10여만 명이 도망하여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니, 적이 평정되었다. 성을 공격하던 날, 적은 형세가 궁해졌으나 누벽(壘壁)을 쌓고 굳게 지켰는데, 날이 저물자 우리 군사가 진군해 근접해서 포위했다. 태조가 길가 어느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들이 포위를 뚫고 달아나니, 태조가 동문으로 달려갔다. 적과 우리 군사가 문을 고수하느라고 뒤섞여서 나가지 못했는데, 뒤에서 오던적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사세가 심히 급박했다. 이에 태조가 칼을 빼어 앞에 있는 적 7, 8명을 베고, 말을 타고 성을 뛰어 넘었으나 말이 넘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 일찍이 김용은 정세운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고, 안우ㆍ이방실ㆍ김득배 등이 큰 공을 이루어 왕의 신임이 두터워질까 두려워서, 안우 등에게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왕에게 참소하여 그들에게 죄를 씌워 모두 죽이려 하였다. 이에 왕의 교지를 위조하여 글을 써서, 자기 조카 전 공부상서 김림(金琳)을 시켜 비밀히 안우 등을 달래서 그들이 정세운을 죽일 것을 도모하게 하고 말하기를, “정세운이 본래 경들을 싫어하니, 적을 물리친 뒤에는 반드시 그대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째서 먼저 그를 죽이지 않는가." 하였다.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의 장막에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정세운이 적을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않고 있으며, 김용이 전하는 글이 이와 같으니, 이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니, 김득배가 말하기를, “이제 겨우 도적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우리끼리 스스로 해치리오. 옛날 사마양저(司馬禳苴)는 제 마음대로 가(莊賈)를 죽였으나위청(衛靑)은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은 것은 고금의 밝은 귀감이니, 가히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만일 부득이하면, 그를 대궐 뜰에 잡아다 놓고 주상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옳지 않겠소" 하였다. 이에 안우와 이방실이 물러가 자기들 영(營)으로 돌아가더니, 밤이 되자 다시 와서 말하기를, “정세운을 죽이라는 것은 임금의 명령이니, 우리들이 공을 이루고서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가 후환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김득배는 굳이 고집하고 반대하였으나, 안우 등은 기어코 행하려 하였다. 술자리를 차리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초청하고, 정세운이 도착하자 안우 등이 장사(壯士)들에게 눈짓하여 좌중에서 때려죽였다.
○ 대장군 김한귀(金漢貴)와 중랑장 김경(金景)이 정세운이 보낸 노포(露布)를 가지고 행재소에 이르니, 왕이 기뻐하여 김한귀에게 금 25냥과 비단 2필을 하사하고, 김경에게는 비단 2필을 하사했다. 내첨사(內詹事) 이대두리(李大豆里)를 보내서 정세운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고, 참정 이인복(李仁復)을 보내서 국사(國史)와 비서(祕書 국가에서 비장한 도서)를 회수하게 했다.
○ 장군 목충(睦忠)이 군전(軍前)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여러 장수가 정세운을 죽였는데, 이 일을 비밀로 하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왕이 문하시중 홍언박(洪彦博), 평장 김용(金鏞)ㆍ경천흥(慶千興), 찬성사 유탁(柳濯), 추밀원사 유숙(柳淑)을 불러 의논하여, 직문하(直門下) 김진(金鎭)을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용서한다는 뜻을 반포하고, 행재소로 오기를 권해서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려 하였다. 복주수(福州守) 박지영(朴之英)이 재추소(宰樞所)에서 말하기를, “이방실이 정세운ㆍ안우 등을 베려다가 해를 입었다." 하였다. 다른 변이 생길까 두려워 인심이 흉흉하니, 김진 등을 불러서 군사를 일으켜 치고자 하였다. 판태의감사(判太醫監事) 김현(金賢), 상장군 홍사우(洪師禹)가 와서, 여러 장수가 정세운을 논한 글을 바치니, 왕이 이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김현 등에게 금은과 포목과 비단을 하사했다. 또다시 김진 등을 보내서 여러 장수를 용서한다는 명령을 반포하고, 박지영을 불러 책망하기를, “네 어찌 망녕된 말을 하는가. 내 그대가 늙음을 생각하여 법으로 다스리지는 않겠다." 하고, 벼슬을 파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 지주사(知奏事) 원송수(元松壽)를 여러 장수들에게 보내어 의복과 술을 하사했다.
○ 2월에 조소생(趙小生)이 나하추(納哈出)를 꾀여서 삼살(三撒 함남 북청(北靑))ㆍ홀면(忽面 함남 홍원(洪源)) 지방을 침범하였는데, 동북면 도지휘사가 여러 번 싸웠으나 패하니, 우리 태조(太祖)를 보냈다. 이때 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나하추가 심양(瀋陽) 땅을 점령하고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일컬었다.
○ 고용보(高龍普)를 죽였다.
○ 동경윤(東京尹) 배천경(裵天慶)이 와서 왕에게 잔치를 올리고 동경으로 거둥하기를 청했다.
○ 왜가 진주 악양현(岳陽縣 경남 하동(河東))을 불태웠다.
○ 왕이 복주(福州 경북 안동(安東))에서 상주(尙州)로 거둥하니, 목사 최재(崔宰)가 왕에게는 정성껏 공진(供進)하였으나 좌우 측근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았으므로, 측근들이 헐뜯어 파면되었다.
○ 안우ㆍ안우경이 개선하여 행궁으로 나아가 왕을 뵙고자 중문으로 들어가려 하니, 김용이 문지기로 하여금 그의 머리를 몽둥이로 치게 하였는데, 안우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세 번이나 자기가 찬 주머니를 가리키면서 크게 소리치기를, “잠깐 참아라. 주상 앞에 나가서 주머니에 든 글을 바치고 나서 죽음을 받겠다." 하였으나, 몽둥이를 가진 자가 다시 쳐서 죽여 뜰 아래로 끌어내렸다. 왕은 이 일을 미처 알지 못하고 전지를 내려 이르기를, “너희들이 맘대로 정세운을 죽여서 몸과 머리가 따로 떨어지게 하였다. 이제 너희를 베지 않는 것은 큰 공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안우의 주머니에 있는 글이란, 김용이 안우 등에게 주어, “정세운을 죽이라." 한 글이었다. 김용은 제 조카 김림(金林)이 음모를 누설할까 두려워 먼저 죽였다. 김용이 왕에게 아뢰기를, “안우 등이 제 마음대로 주장을 죽인 것은 전하를 왕으로 여기지 않은 소치이오니, 그 죄를 용서할 수가 없나이다." 하고 품하니, 전지를 내려 방을 붙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안우 등은 불충하여 제 마음대로 정세운을 죽였는데, 안우는 이미 처단되었다. 김득배ㆍ이방실을 잡는 자가 있으면 3급을 건너뛰어 쓰리라" 하고, 대장군 오인택(吳仁澤),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 만호(萬戶) 박춘(朴椿)ㆍ김유(金庾) 등을 나누어 보내어 잡게 하였다. 이날 이방실이 용궁현(龍宮縣 경북 예천(醴泉))에 이르렀는데, 박춘이 전지를 전하니 이방실이 뜰에 내려서 꿇어앉았다. 오인택이 칼을 빼어 쳐서 옷을 벗기니, 거꾸러져 기절했다가 한참 만에 다시 살아나서 담을 넘어 달아났다. 박춘이 쫓아가 잡았다. 이방실이 박춘의 칼을 빼려는데, 지상 등이 뒤에서 칼로 쳐 죽였다. 김득배는 기주(基州 경북 영주(榮州))에 이르러 변을 듣고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 문경산양)에 숨었으나, 김유(金庾)ㆍ정지상(鄭之祥) 등이 찾아서 베고 상주(尙州)에서 효수하니, 보는 이 중에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모귀(毛貴)가 의주를 침범할 적에, 안우가 기병 7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움터로 나가서 산에 올라 말을 쉬게 하였는데, 마침 적병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장사(將士)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얼굴빛을 잃었으나, 안우는 태연하게 담소하고, 오줌 누고 세수하고 양치질한 다음, 조용히 말에 올라 군사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가서 적과 시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적병 몇몇 기병이 창을 휘두르면서 용맹을 과시하므로, 우가 진격해서 대패시켜 마침내 홍두적을 섬멸시켰으니, 경성을 수복한 것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 뒤에, 나이가 겨우 10여 세인 안우의 아들이 거리에서 놀면 사람들이 다투어 먹을 것을 주면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편안하게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모두 세 원수(元帥)의 공이다." 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 3월에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총병관 정세운이 나를 대신하여 군사를 지휘했는데, 안우 등이 감히 저희들 마음대로 죽였으니, 이는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적을 파한 공은 한때에 혹 있을지 모르나, 왕을 왕으로 보지 않은 죄는 만대에 용납할 수 없으니, 이들을 놓아 주고 베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뒷세상에 기강을 보이리오. 그러므로 유사에게 명하여 도원수 안우, 원수 김득배ㆍ이방실 등을 바르게 법대로 처단하였으나, 그래도 전날의 공을 생각하여 죄를 처자까지는 미치지 않게 하노라. 그의 부하였던 대소 관원들은, 모두 유사로 하여금 공을 따져서 등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 평장사 이공수(李公遂), 참정 황상(黃裳), 추밀원사 김희조(金希祖)를 보내어 경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시켰는데, 공수가 재주를 헤아려서 관직을 맡기고 방략(方略)을 지시하여 유민들을 편안히 안정시키며, 생도(生徒)를 교양(敎養)하였다.
○ 사령을 내렸다.
○ 큰 잔치를 행궁에서 베풀어, 전쟁에 나갔던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 갑자일에 지진이 있었다.
○ 관제를 고쳤다.
○ 이암이 사퇴할 것을 청하므로, 유탁(柳濯)을 좌정승으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요양행성동지(遼陽行省同知) 고가노(高家奴)가, 패하여 도망가는 홍두적을 공격하여 4천여 명을 베고, 사신을 보내어 적의 괴수 파두반(破頭潘)을 사로잡았음을 사신을 보내 보고해 왔다.
○ 왕이 서문에 나가 활쏘는 것을 사열하고, 잡희(雜戲)를 구경하고, 포목 50필을 하사하였다.
○ 복주목(福州牧)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안성현(安城縣)을 군(郡)으로 높이고, 수원부(水原府)는 군으로 낮추었다. 왕이 복주에 머물렀을 때 복주 사람들이 성심껏 공궤하고, 마침내 여러 도의 군사를 불러 경성을 수복하였다. 홍두적이 양광도(楊廣道)를 꾀어 항복받을 적에, 수원이 가장 먼저 항복하니 남은 고을들이 감히 적의 예봉을 꺾지 못하였는데, 안성만은 조그만 읍(邑)이면서 계교를 내어 적을 섬멸하니, 적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수원의 4부곡(部曲)을 떼내 안성에 붙였다.
○ 용문창(龍門倉)의 곡식 1만 석을 내어, 경기(京畿)의 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 병신일에 지진이 있었다.
○ 밀직부사 이귀수(李龜壽)를 전라도 진변사(全羅道鎭邊使)로, 전리판서(典理判書) 최영을 양광도 진변사로 삼고, 우리 태조를 상호군(上護軍)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았다.
○ 5월에 원 나라에서 보낸 태자첨사원첨동(太子詹事院僉同) 기전룡(奇田龍)이 와서 왕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했다.
○ 6월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안우경(安遇慶)을 서북면 도병마사로 삼았다.
○ 신사일에 혜성이 나타났는데 그 후 3일 동안 보였다.
○ 감찰사(監察司)에서 아뢰기를, “큰 난리를 치른 후로 공사(公私)의 재물이 모두 떨어졌사온데, 전하의 행차를 따라갔던 관원들로서 곡식을 타먹는 자들이 한 달에 3천여 석을 소비하고 있사오며, 조정 관리와 위사(衛士)들도 녹봉을 감할 수가 없습니다. 환관의 무리들은 정액이 없어 곡식을 소비하는 것이 너무 많사오니, 직무에 종사하는 자 이외에는 모두 태거(汰去)하소서. 전하께서 일찍이 충용위(忠勇衛)를 두시고, 장사(將士)들의 녹을 팔위(八衛)와 등급을 같이한 것은, 창졸간에 일이 생겼을 때 효력을 보자는 것이었는데, 남쪽으로 거둥하실 때에 한 사람도 행차를 따라간 자가 없었사오니, 진실로 헛되이 설치하여 창고의 곡식만 축낸 것입니다. 이것도 없애시옵소서. 또 듣자오니, 어가가 수원으로 거둥하시려 한다 하온데, 수원은 바닷가여서 왜가 침범할까 걱정되옵고, 홍두적을 맞아 항복한 곳이라 사람들의 마음을 믿기 어렵사옵니다. 청주(淸州)는 3도의 요충지에 있어 곡식을 운반하기 쉽고, 또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행차가 머무르시기에 여기보다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또 국가에 적병의 침입이 해마다 연달아 있사온데, 군사가 단합되지 않아서 항상 위급한 상황을 당했을 때에 농민들 사이에서 군사를 모으는 것은,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창졸간에 닥친 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오니, 지금부터 장정을 뽑아서 훈련시켜 위급한 상황에 대비시키소서." 하였다.
○ 전법판서(典法判書) 이자송(李子松)을 원 나라에 보내어 홍두적을 평정한 일을 고하고, 노획한 옥새와 금보(金寶), 금ㆍ은ㆍ동인(銅印), 금ㆍ은패(銀牌) 등을 바치게 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 이자송을 전송하였는데,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목인길(睦仁吉)이 술에 취하여 자송을 욕하니, 감찰사(監察司)에서 탄핵하였으나, 목인길은 자기의 공로만 믿고서 교만하고, 방자하게 도리어 왕에게 호소했다. 대간이 재삼 탄핵하니, 왕이 마지못해서 목인길을 파직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 감찰대부(監察大夫) 김속명(金續命)이 관직을 사퇴했으나, 왕이 승낙하지 않았다.
○ 가을 7월에 나하추(納哈出)가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탁도경(卓都卿)ㆍ조소생(趙小生) 등과 함께 홍원(洪原) 달단동(韃靼洞)에 둔을 치고, 하라만호(哈刺萬戶) 나연첩목아(那延帖木兒)와 동첨(同僉) 백안보하(伯顔甫下)에게 1천여 명의 군사를 지휘시켜 선봉이 되게 하였다. 태조가 덕산동 원평(德山洞院平)에서 이들과 만나 공격하였다. 달아나는 적을 함관(咸關)과 차유(車踰) 두 고개 너머까지 추격하여 거의 섬멸시켰는데, 버려진 투구와 병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태조는 이날 군사를 답상곡(答相谷)으로 물러나 둔을 쳤더니, 나하추가 노해서 군사를 덕산동으로 옮겼다. 태조가 밤을 타서 습격하여 물리치니, 나하추는 달단동으로 돌아가고, 태조는 다시 사음동(舍音洞)에 둔을 쳤다. 태조가 보낸 척후(斥候)가 차유령에 이르러서 보니, 산에 올라 나무를 하는 적이 매우 많았다. 척후병이 돌아와 아뢰니 태조가 이르기를, “병법에 '마땅히 먼저 약한 자를 공격하라' 하였다." 하고, 드디어 군사들을 시켜서 사로잡아 거의 베었다. 태조 자신이 정기(精騎) 6백 명을 거느리고 계속 고개를 넘어 고개 밑에 이르니, 적들이 기미를 알아채고 맞아서 싸우려 하였다. 태조가 10여 기병을 거느리고 적중에 뛰어들어, 그들의 비장(裨將) 한 사람을 활로 쏘아 죽였다. 처음에 태조가 이곳에 와서 여러 장수들에게 여러 번 패한 까닭을 물으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매양 싸움이 한창일 때면, 적장 하나가 철갑에 붉은 모미(旄尾)를 장식하고 창을 휘둘러 돌진해 왔는데, 모든 군사가 쓰러져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그 사람을 찾아 혼자서 맡아 싸우다가 거짓 패해 달아나니, 그 사람이 과연 앞으로 달려와 창으로 몹시 급히 찌르려 하므로, 태조가 몸을 움직여 말다래에 붙이니, 적장은 창을 헛찌르고 창과 함께 거꾸러졌다. 태조가 곧 안장에 의지하여 활을 쏘아 죽이니, 적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태조가 이들을 추격하여 적병의 둔친 곳에 이르렀으나, 날이 저물었으므로 돌아왔다. 나하추의 아내가 나하추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천하에 횡행한 지 오래되었지만, 이같은 장군이 있었습니까. 피하여 속히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나, 나하추는 듣지 않았다. 나하추의 누이가 군중에 있다가 태조의 신기한 무술을 보고 마음속으로 탄복하여 역시 말하기를, “이 사람을 대적할 이가 천하에 없다." 하였다. 며칠 후에 태조가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바로 달단동에 이르니, 나하추가 진을 펴서 서로 대치하고 10여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오므로, 태조도 10여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와 서로 대치하였다. 나하추가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여기 온 것은 본래 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반성(潘誠) 등을 쫓아서 온 것이지, 귀국의 국경을 침범하려 함이 아닙니다. 이제 내 여러 번 싸움에 패하여 군사 만여 명을 잃었고 비장 몇 명을 잃어 형세가 심히 궁하게 되었으나, 싸움을 그만두고 그대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이때 적병의 형세가 심히 왕성하였다. 태조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그들을 항복하게 하려고 나하추의 옆에 서 있는 한 장수를 활로 쏘니, 시위 소리와 함께 땅에 거꾸러졌다. 또 나하추의 말을 쏘아 넘어뜨리니, 말을 바꾸어 탔으나 또 쏘아 거꾸러뜨렸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크게 싸웠는데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태조가 급히 나하추를 쫓으니 나하추가 다급하여 말하기를, “이만호(李萬戶)여, 우리 두 장수가 이렇게 서로 핍박할 것이 무엇이오."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태조가 또 그 말을 쏘아 넘어뜨리니 그의 휘하에 있던 군사 하나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나하추에게 주어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이때 날이 저물어 태조가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면서 스스로 전(殿)이 되었다. 산길이 여러 층으로 구불구불한데 환자(宦者) 이파라실(李波羅實)이 제일 밑 층에 있다가 급히 부르기를, “영공은 사람을 구하소서. 영공은 사람을 구하소서." 하였다. 태조가 맨 윗층에 있다가 보니 은갑(銀甲)을 입은 적장 두 사람이 파라실을 뒤쫓아오는데 그 창 끝이 거의 몸에 닿게 되었다. 태조가 말에서 내려 활을 쏘아 두 장수를 모두 거꾸러뜨리고 연이어 20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다시 군사를 돌려 공격하여 쫓는데, 한 적장이 태조를 향해 창을 겨누어 찌르려 하므로 태조가 홀연 몸을 기울여 말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모습으로 말에 붙어서 위를 쳐다보면서 그 사람의 겨드랑이를 쏘아 맞추고, 곧 말을 돌려 돌아오려고 하는데 또 한 적장이 내달려 와서 태조를 향해 활을 쏘므로 태조가 곧 일어나서 말등에 서니 화살이 가랑이 사이로 빠져 나갔다. 태조가 말을 달려 활을 쏘아 적장의 무릎을 맞히고 냇가에서 한 적장을 만났는데, 갑옷입고 투구쓰고 면구(面具)를 얼굴에 쓰며 턱 갑옷을 만들어 입을 벌리기에 편하게 하고 온몸을 빈틈 없이 보호하여 심히 견고했기 때문에 화살을 맞출 데가 없었다. 이에 태조가 일부러 그 말을 쏘니 말이 엉겁결에 뛰어 적장이 힘을 주어 말 고삐를 끌어당기느라고 입이 벌어지니 태조가 그 입을 맞혔다. 이렇게 적장 3명을 쓰러뜨리니 적이 크게 패해 달아났다. 태조가 철기(鐵騎)로 적병을 무찌르니 적들은 저희들끼리 서로 밟히고 깔렸다. 매우 많은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군사를 돌려 정주(定州)에 둔을 치고 수일 동안 군사를 쉬게 한 다음, 먼저 군사를 요충지에 매복시켰는데,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좌군은 성관(城串)으로 나가고, 우군은 도련포(都連浦)에서 나가며, 태조 자신은 중군을 거느리고 송원(松原)에 이르러 나하추와 함흥평(咸興平 함북 함흥(咸興))에서 마주쳤다. 태조가 단기로 용감하게 돌진하여 적의 형세를 시험하니 날쌘 적장 3명이 함께 달려 앞으로 나왔다. 태조가 거짓 패해 달아나는 체하면서 말고삐를 잡아 당기고 채찍질을 하여 마치 말에 재갈 물리는 모양을 하니, 세 장수가 다투어 쫓아와 거의 다 근접하였다. 태조가 홀연히 말을 빼어 오른쪽으로 나오니, 세 장수가 말을 멈추지 못하고앞으로 나가는데 태조가 뒤에서 활을 쏘니 시위 소리와 함께 모두 거꾸러졌다. 이에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싸워서 그들을 요충지로 유인하니 좌우에 매복시켰던 군사가 모두 나와 같이 쳐서 크게 이겼다. 나하추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달아났다. 노획한 은패(銀牌)와 동인(銅印) 등의 물건을 거두어 왕에게 바쳤다. 이리하여 동북쪽 오랑캐가 모두 평정되었다. 환조(桓祖)가 예전에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갔을 때, 길에서 나하추를 만나 태조의 재주를 칭찬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하추가 패배하고 돌아가서 말하기를, “이(李) 환조(桓祖)의 휘 가 저번에 나를 보고 재주있는 아들이 있다고 하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더라." 하였다. 뒤에 나하추가 사람을 보내어 통호(通好)하고, 말을 왕에게 바치고 비고(鞞鼓)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태조에게 보내어 예를 표했는데, 이는 그가 심복했기 때문이었다.
○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이 방물을 바쳤다.
○ 8월에 왕이 양광도 안렴사 이지태(李之泰)에게 명하여 폐인(嬖人)들에게 공주 창고 쌀 50석을 주라고 하였다. 이지태가 생각하기를 왕의 명령은 반드시 양부(兩府)에 명령을 내려서 시행학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고, 군량을 헛되이 보통 사람들에게 줄 수 없다 하여 왕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지 않으니 폐인들이 왕에게 호소하여 왕이 노해서 이지태를 묶어 오게 하였으나 유숙(柳淑)이 힘써 구해서 면했다.
○ 을유일에 왕이 상주(尙州)를 떠나 임진일에 청주(淸州)에 이르렀다.
출처 : 남한강 물길 따라 이어지는 MTB 여행
글쓴이 : 산골어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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