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무열왕은 강수선생이라 부르지않고 임생이라고만 했다.

산골어부 2015. 6. 8. 13:19

 

 

강수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발췌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우두(牛頭) 혹은 자두(字頭). 석탈해왕(昔脫解王)의 18세손으로 아버지는 육두품 11관등 내마(柰麻) 석체(昔諦)이다. 강수의 조상은 경상남도 고령의 대가야 출신으로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무열왕은 강수선생(强首先生)이라 부르지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강수의 아버지가 석체(昔諦)로 나타나며, 강수는 본래 이름이 우두(牛頭)였는데, 신라 태종 무열왕이 우두(牛頭)의 두골을 보고 강수선생(强首先生)이라 부르고자 했지만, 글이 너무 뛰어나 강수선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강수의 본명은 무식하게 말하면 "소대가리(牛頭)"인데, 유식하게 한문으로 "쇠머리(强首) 선생"이라고 했지만, 그의 재능이 너무 뛰어난 것을 알고, 강수선생이 아니라, 임생(任生)이라고만 불렀다는 것이다.  임생(任生)이란 무슨 뚯일까 ?  임생(任生)은 오늘날 임 선생님이 아니라, "선사와 스승"과 같은 극존칭이거나 왕과 동격인 "자네"라는 호칭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역사서에는 강수의 성씨가 임(任)씨가 되여 임강수로 기록되고, 현재의 충주 향토사에서는 강수가 석탈해왕(昔脫解王)의 18대손이라는 궤변으로 나타난다. 즉 강수는 조선시대에는 임강수가 되고, 충주향토사에서는 석강수가 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강수 열전에서 임생(任生)과 임나(任那)는 임강수(任强首)와 임나가야(任那加耶)로 변질되어 대가야인 고령가야로 왜곡되고, 일본사에서는 임나일본부라는 역사왜곡에 악용된다. 이에 임생(任生)과 임나가량(任那加良)에 대한 개인적인 소견을 적어본다.

  

强首(강수) : 강수(强首)는
中原京沙梁人也(중원경사양인야) : 중원경 사량인(沙梁人)이다.
父昔諦奈麻(부석체나마) : 아버지는 나마 석체(昔諦)이다.

 

우리가 한국의 고대사를 삼국사기에 의지한 것은 고대사에 대한 기록들이 없기 때문이다. 고려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많은 역사서를 참조하였겠지만, 그 역사서들이 현존하지 않기에 그에 대한 해석들이 더 어렵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동사강목에 나타나는 임강수(任强首)란 표기도 당시에 잔존한 역사서를 바탕으로 서술되었겠지만, 그 진위를 알 수가 없다. 역사서라는 것이 사관의 관점으로 기술되기에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서술되는 오류가 흔히 발생된다.  강수선생(强首先生)은 임생(任生) 또는 임나(任那) 등으로  인하여 임강수(任强首)였을 수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그를 입증할만한 사료가 없다.  또한 강수의 아버지인 석체(昔諦)가 성씨가 석(昔)씨인지 ? 석탈해왕(昔脫解王)의 후손인지는 더욱 입증할 수가 없다. 강수 열전에서 등장하는 인명과 지명의 풀이로 인하여 수많은 추리가 난무한다. 향토자료의 대부분은 민담에서 채록된 것들과 문헌의 기록들을 고증없이 해석하여 본래의 의미가 왜곡된 것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향토역사를 위해 타지역의 역사들도 여과없이 끌어들인다.

 

臣本任那加良人(신본임나가량인)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식민사관에 반한 민족사관으로 많은 부분들이 굴절되어 있다. 어찌 보면은 이는 조선말기 동학사상의 한 흐름으로도 인식되어진다. 그리고, 신채호는 고향인 충청도에 대한 지나친 애향심으로 인해 임나가량이나 사량 또는 사열이현 등에 대한 지명들이 충청도를 중심으로 해석되어진 측면이 있다. 임나가량(任那加良)이 임나가야(任那加耶)로 해석되어 고령가야(대가야)가 되고, 이는 충주가 임나국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는 단재 신채호의 사관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등장하는 역사관의 흐름일 수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해설서인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는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였다. 낭자성(狼子城)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한다."

라는 기록에서도 낭자곡성과 낭성은 청주에서 충주로 해석되기도 하고, 충주와 인연이 깊은 다산 정약용도 성열현을 사열이현으로 해석하여 청풍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소나(素那)는 금천(金川)과 같은 뜻이다, 한국어의 차자표기법이나 지명에서 소나(素那)와 임나(任那)에서 연상되는 것은 임나가량(任那加良)이 임나가야(任那加耶) 또는 임나국이 아니라 중원경 사량의 또 다른 소지명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고대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상상일 뿐이다. 소나(素那)와 임나(任那)를 연관짓는 것도 애향심에서 나온 발상일 수도 있다.  용비어천가에서 탄금대 연천(淵遷)을 소(沼)로 해석하여 "쇠벼라"라고 읽는다. 연천(淵遷)과 금천(金遷)에서 소나(素那)와 임나(任那)는 고대국어를 해석하는 논란거리 중 하나이다.

 

충주향토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향토사학이 지역인사들에 의하여 진행되기에 역사서에 등장하는 기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인용하게 되고, 그 향토자료가 또 다른 왜곡으로 인용되면서 지역의 민담 또는 전설과 연게되어 역사적 사실과 멀어지게 된다. 특히, 향토사학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지역의 지명이나 인물 등 민속학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여 전설이나 민담을 근거로 향토역사의 우월성을 부각시킨다. 충주의 3대 성인이라는 "우륵,강수,김생"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향토역사학자들의 식견이나 내공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임생(任生) 또는 임나(任那) 등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고대사에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의 연구가 필요하고, 그를 판단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오류와 편견으로 기술된 문헌과 유물에서 그 진위를 입증해야 하지만 역사적 사실보다는 지역정서인 애향심에 호소하는 것이 향토사의 한계이다. 이는 기존의 문화재나 발굴조사에서 그를 분석하기보다는 지역의 골동품으로 취급되어 자화자찬만 기술하게 된다. 탄금대와 충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특히 향토사가 고대사에 대한 연구로 확대되지 못하고, 국보급 문화재 등의 유물 예찬론으로 기술된다. 발굴된 고대 유적지가 보존되지 못하고 훼손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국원성 또는 중원경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역정서에 반하는 글을 자제하므로 인하여 같은 범주에 있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역사의 문외한으로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사진 몇장으로 흥미 위주로 답사기를 쓰다가 생각에 반한 글을 보면 "왜"란 화두를 던지면서 그를 반증하는 것이 역사의 매력으로 느껴진다. 어찌 보면은 전공인 건축도 제대로 모르면서 역사를 논하는 것이 또 다른 궤변일 수도 있다. 학창시절에 보기 싫던 책들을 안경너머로 쳐다보는 것은 나의 부족한 식견과 내공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편견의 시작일 수도 있다. 강수 열전에서 흥미로운 것이 강수의 결혼과 처에 관한 기사인데, 그 내용이 부각되지 못한 것은 "왜" 일까 ? 한국사나 향토사가 유교란 관념에 빠져서 강수 처의 낮은 신분으로 인하여 강수 아버지인 석체의 생각처럼 강수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을 꺼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을 마치면서 임생(任生) 또는 임나(任那)라는 고대어에 대한 해석이 풀어지기를 ~~~

 

 

 

 

 

 

 

 

三國史記 第 四十六卷(삼국사기 제 46권) 列傳 第 六(열전 제 06)

 

154.强首(강수)

 

强首(강수) : 강수(强首)는
中原京沙梁人也(중원경사양인야) : 중원경 사량인(沙梁人)이다.
父昔諦奈麻(부석체나마) : 아버지는 나마 석체(昔諦)이다.
其母夢見人有角(기모몽견인유각) : 그 어머니가 꿈에 뿔이 달린 사람을 보고
而妊身及生(이임신급생) : 임신하여 낳았더니
頭後有高骨(두후유고골) : 머리 뒤편에 뼈가 불쑥 나와 있었다.
昔諦以兒就當時所謂賢者(석체이아취당시소위현자) :
석체가 아이를 데리고 당시 어질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

問曰(문왈) : 묻기를
此兒頭骨如此(차아두골여차) : “이 아이의 머리뼈가 이러하니
何也(하야) : 어떻습니까?” 하니,
答曰(답왈) : 대답하였다.
吾聞之(오문지) : “내가 들으니
伏羲虎形(복희호형) : 복희(伏羲)는 호랑이 모습이고,
女媧蛇身(여왜사신) : 여와는 뱀의 몸이며,
神農牛頭(신농우두) : 신농(神農)은 소의 머리 같았고,
皐陶馬口(고도마구) : 고요(皐陶)는 입이 말과 같았으니
則聖賢同類(칙성현동류) : 성현은 다 같은 유(類)로서
而其相亦有不凡者(이기상역유부범자) : 그 골상도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은 바가 있었다.

又觀兒首有黶子(우관아수유염자) : 그런데 아이의 머리에 검은 사마귀가 난 것을 보니
於相法(어상법) : 골상법에
面黶無好(면염무호) : 얼굴의 검은 사마귀는 좋지 않으나
頭黶無惡(두염무악) : 머리의 사마귀는 나쁠 것이 없으니
則此必奇物乎(칙차필기물호) : 이는 반드시 기이한 것이리라!”
父還謂其妻曰(부환위기처왈) :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자기 아내에게 이르기를
爾子非常兒也(이자비상아야) : “이 아들은 보통 아이가 아니니
好養育之(호양육지) : 잘 길러
當作將來之國士也(당작장래지국사야) : 앞으로 나라의 재목으로 만들자.”고 하였다.
及壯(급장) : 나이가 들자
自知讀書(자지독서) : 저절로 책을 읽을 줄 알아
通曉義理(통효의리) : 의리를 통달하였다.
父欲觀其志(부욕관기지) : 아버지가 그 뜻을 알아보고자 하여
問曰(문왈) : 묻기를
爾學佛乎(이학불호) : “너는 불교를 배우겠느냐?
學儒乎(학유호) : 유교를 배우겠느냐?” 하고 물었다.
對曰(대왈) : 이에 대답하였다.
愚聞之(우문지) : “제가 들으니
佛世外敎也(불세외교야) : 불교는 세속을 도외시한 가르침인데,
愚人間人(우인간인) : 저는 인간 세계의 사람으로서
安用學佛爲(안용학불위) : 어찌 부처가 하는 것을 배우겠습니까?
願學儒者之道(원학유자지도) : 유교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父曰(부왈) : 아버지가 이르기를
從爾所好(종이소호) : “네가 좋은 대로 하라!” 하였다.
遂就師讀孝經(수취사독효경) : 드디어 스승을 찾아가 효경,
曲禮(곡례) : 곡례(曲禮),
爾雅(이아) : 이아(爾雅),
文選(문선) : 문선(文選)을 읽었는데
所聞雖淺近(소문수천근) : 들은 바는 비록 낮고 비근하여도
而所得愈高遠(이소득유고원) : 얻는 바는 높고 깊어서
魁然爲一時之傑(괴연위일시지걸) : 우뚝 솟은 당시의 인걸이 되었다.
遂入仕歷官(수입사력관) : 드디어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
爲時聞人(위시문인) :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 되었다.
强首嘗與釜谷冶家之女野合(강수상여부곡야가지여야합) :
강수가 일찍이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하였는데

情好頗篤(정호파독) : 서로 사이가 자못 좋았다.
及年二十歲(급년이십세) : 나이가 20세가 되었을 때
父母媒邑中之女有容行者(부모매읍중지여유용행자) :
부모가 중매를 통하여 고을의 용모와 덕행이 있는 여자와

將妻之(장처지) : 결혼시키려 하니
强首辭不可以再娶(강수사부가이재취) : 강수가 사양하여 다시 장가들 수 없다고 하였다.
父怒曰(부노왈) : 아버지가 성내며 말하기를
爾有時名(이유시명) : “너는 이름난 사람이어서
國人無不知(국인무불지) : 나라 사람이 모르는 이 없는데
而以微者爲偶(이이미자위우) : 미천한 자를 짝으로 삼으니
不亦可恥乎(부역가치호) : 또한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하니,
强首再拜曰(강수재배왈) : 강수가 두 번 절을 하고 말하였다.
貧且賤非所羞也(빈차천비소수야) :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닙니다.
學道而不行之(학도이부행지) : 도를 배우고 실행하지 않음이
誠所羞也(성소수야) : 실로 부끄러운 바입니다.
嘗聞古人之言曰(상문고인지언왈) :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들으니
糟糠之妻(조강지처) : ‘강지처(糟糠之妻)는
不下堂(부하당) : 뜰 아래에 내려오지 않게 하며,
貧賤之交不可忘(빈천지교부가망) : 가난하고 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했으니
則賤妾所不忍棄者也(칙천첩소부인기자야) : 천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
及太宗大王卽位(급태종대왕즉위) : 태종대왕이 즉위하였을 때
唐使者至(당사자지) : 당나라 사신이 와서
傳詔書(전조서) : 조서(詔書)를 전하였는데,
其中有難讀處(기중유난독처) : 그 글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王召問之(왕소문지) : 왕이 그를 불러 물으니,
在王前(재왕전) : 왕의 앞에서
一見說釋無疑滯(일견설석무의체) : 한번 보고는 해석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王驚喜(왕경희) : 왕이 크게 기뻐하여
恨相見之晩(한상견지만) : 서로 늦게 만남을 한스러이 여겼다.
問其姓名(문기성명) : 그 성명을 물으니
對曰(대왈) : 대답하기를
臣本任那加良人(신본임나가량인) :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名牛頭(명우두) :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 하니,
王曰(왕왈) : 왕이 말하기를
見卿頭骨(견경두골) : “그대의 두골(頭骨)을 보니
可稱强首先生(가칭강수선생) : 강수(强首)선생이라 불러야겠다.” 하고,
使製廻謝唐皇帝詔書表(사제회사당황제조서표) :
그로 하여금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감사하는 답서를 쓰게 하였다.

文工而意盡(문공이의진) : 글이 잘되고 뜻을 다 폈음으로
王益奇之(왕익기지) : 왕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不稱名(부칭명) : 이름을 부르지 않고
言任生而已(언임생이이) : 임생(任生)이라고만 불렀다.
强首未嘗謀生(강수미상모생) : 강수는 일찍이 생계를 도모하지 않아서
家貧怡如也(가빈이여야) : 집이 가난하였으나 즐거워하였다.
王命有司(왕명유사) :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歲賜新城租一百石(세사신성조일백석) : 해마다 신성(新城)의 조(租) 100섬을 주게 하였다.
文武王曰(문무왕왈) : 문무왕이 말하였다.

强首文章自任(강수문장자임) : “강수는 문장을 잘 지어
能以書翰致意於中國及麗(능이서한치의어중국급려) : 능히 중국과 고구려, 백제
濟二邦(제이방) : 두 나라에 편지로 뜻을 다 전하였으므로
故能結好成功(고능결호성공) : 우호를 맺음에 성공할 수 있었다.
我先王請兵於唐(아선왕청병어당) : 나의 선왕이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以平麗濟者(이평려제자) :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雖曰武功(수왈무공) : 비록 군사적 공로라 하나
亦由文章之助焉(역유문장지조언) :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니
則强首之功(칙강수지공) : 강수의 공을
豈可忽也(기가홀야) :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授位沙飡(수위사손) : 사찬의 관등을 주고
增俸歲租二百石(증봉세조이백석) : 봉록을 매년 200섬으로 올려 주었다.
至神文大王時卒(지신문대왕시졸) : 신문대왕 때에 이르러 죽으니
葬事官供其賻(장사관공기부) : 장사지내는 비용을 관에서 지급하였으며,
贈衣物匹段尤多(증의물필단우다) : 옷가지와 물품을 더욱 많이 주었는데
家人無所私(가인무소사) : 집사람이 이를 사사로이 쓰지 않고
皆歸之佛事(개귀지불사) : 모두 불사(佛事)에 바쳤다.
其妻乏於食(기처핍어식) : 그 아내는 식량이 궁핍하여져
欲還鄕里(욕환향리) :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大臣聞之(대신문지) : 대신이 이를 듣고
請王賜租百石(청왕사조백석) : 왕에게 청하여 조(租) 100섬을 주게 하였더니
妻辭曰(처사왈) : 그 아내가 사양하여 말하였다.
妾賤者也(첩천자야) : “저는 천한 사람입니다.
衣食從夫(의식종부) : 입고 먹는 것은 남편을 따랐으므로
受國恩多矣(수국은다의) : 나라의 은혜를 받음이 많았는데,
今旣獨矣(금기독의) : 지금 이미 홀로 되었으니
豈敢再辱厚賜乎(기감재욕후사호) : 어찌 감히 거듭 후한 하사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遂不受而歸(수부수이귀) : 끝내 받지 않고 돌아갔다.
新羅古記曰(신라고기왈) : 신라 고기(古記)에
文章則强首(문장칙강수) : “문장으로는 강수,
帝文(제문) : 제문(帝文),
守眞(수진) : 수진(守眞),
良圖(양도) : 양도(良圖),
風訓(풍훈) : 풍훈(風訓),
骨沓(골답) : 골답(骨沓)이 유명하다.” 하였으나,
帝文已下事逸(제문이하사일) : 제문 이하는 행적이 전하지 않아
不得立傳(불득립전) : 전기를 세울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인물】

신라

임강수(任强首)

그 어머니가 꿈에 뿔 있는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낳자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고 또 사마귀가 있었다. 장성하자 아버지 석체(昔諦)가 묻기를, “네가 불도를 배우겠느냐, 유도를 배우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불도는 세상 밖의 교이고 나는 인간 세상의 사람이니, 어찌 불도를 배우겠습니까. 유도를 배우겠습니다.”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네가 좋은 대로 하라.” 하였다. 드디어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孝經)》ㆍ《곡례(曲禮)》ㆍ《이아(爾雅)》ㆍ《문선(文選)》을 읽어서 우뚝이 당대의 준걸이 되었다. 태종왕(太宗王)이 즉위하자, 당 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는데 해득하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왕이 강수를 불러 물으니 한 번 보고 막힘 없이 다 해설하였다. 왕이 놀라고 기뻐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고 회사표문(回謝表文)을 짓게 하니, 문장이 교묘하고 할 말을 다하였다. 왕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항상 임생(任生)이라고 칭하였다. 집이 가난해도 태연하였는데,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新城) 조세(租稅) 1백 석(石)을 하사하였다. 문무왕(文武王) 때에 사찬(沙飡)을 제수하고 녹봉(祿俸)으로 벼 2백 석을 더 주었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죽으니 관가에서 그 장사를 치렀다. 대신이 그 아내가 먹고살기가 궁핍하여 시골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왕께 청하여 벼 1백 석을 내려 주니, 사양하기를, “첩은 천한 사람으로서 남편을 따라 입고 먹었으니 나라 은혜를 받은 것이 많습니다. 이제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다시 후하게 주심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받지 않았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본래는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였다.

낭자성(狼子城)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한다.

 

동사강목 제4상

 

기유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 3년, 고구려 왕 장(藏) 8년, 백제 왕 의자(義慈) 9년-을사 신라 경덕왕(景德王) 24년 107년간

갑인년 신라 진덕 여주 8년ㆍ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원년, 고구려 왕 장 13년, 백제 왕 의자 14년(당 고종 영휘 5, 654)

 

5월 신라가 국원(國原 충주(忠州)) 사람 임강수(任强首)에게 곡식을 내렸다.

강수는 중원경(中原京)의 사량(沙梁) 사람으로, 내마(奈麻) 석체(昔諦)의 아들이다. 처음에 그의 어머니가 꿈에 뿔난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낳고 보니 머리 뒤에 솟은 뼈가 있었다. 아버지가 관상장이에게 보이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복희(伏羲)는 범의 형상이었고, 여와(女媧)는 뱀의 몸뚱이었고, 신농(神農)은 소의 머리였고, 고요(皋陶)는 말의 입이었다 하니, 예로부터 성현들은 그 상(相)이 특이하였습니다. 이제 이 아이는 머리가 뾰족하면서 사마귀가 있으니, 대체로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것은 좋지 않으나 머리에 있는 것은 나쁘지 않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영특한 인물일 것입니다.”
하므로, 드디어 우두(牛頭)라 이름 지었다. 자라나면서 글을 읽을 줄 알고 뜻을 깨달아 알기에, 아버지가 그 뜻을 알아보느라고 묻기를,
“불(佛)을 배우려느냐? 유(儒)를 배우려느냐?”
하니,
“불은 세외교(世外敎 세속에 초연한 교학)이니, 유를 배우고 싶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孝經)》ㆍ《곡례(曲禮)》ㆍ《이아(爾雅)》ㆍ《문선(文選)》 등을 읽고 얻은 것이 더욱 많았다. 이때에 당에서 온 책조(冊詔 책봉하는 조서) 가운데에 해독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었는데, 우두가 능히 해독하므로, 왕이 놀랍고 기뻐서 그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臣)은 본디 임나(任那) 가량(加良) 사람으로 상고하건대, 중원(中原)은 지금의 충주(忠州)이며, 옛 임나국이다. 우두(牛頭)라 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경의 두골(頭骨)을 보니, 강수(强首 굳센 머리)라 할 만하다.”
하고, 사표(謝表 사례하는 표문(表文))를 짓게 하였더니, 글이 공교하고 뜻도 곡진하므로 왕은 더욱 기특하게 여겨서 ‘임생(任生)’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강수가 생업에 힘쓰지 아니하여 집이 가난하므로, 왕이 신성(新城)의 조(租) 1백 석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강수가 일찍이 대장장이 집의 딸에게 장가들었었는데, 부모가 예를 갖추어 다시 장가들이려 하매, 강수가 옳지 않다 하니, 아버지가 노하여,
“네가 이제 명성이 있는데 미천한 자를 배필로 삼는 것은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니냐?”
하니, 강수가 말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의 말에 ‘조강지처는 내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미천할지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동사강목 제4하

 

계유년 문무왕 13년(당 고종 함형 4, 673)

춘정월  임강수(任强首)를 사찬(沙飡)으로 삼았다.
왕이 말하였다.

“강수는 능히 문사(文辭)로써 뜻을 중국에 전하였으니,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무공(武功)이라고 하나 문사의 도움도 있었다.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하랴! 이 직(職)을 제수하고 세봉(歲俸)으로 조(租) 2백 석을 더한다.”


동사강목 제4하

 

임진년 신문왕 12년 효소왕(孝昭王) 원년(당 무후 여의(如意) 원년, 또 연호를 장수(長壽)라고 고쳤다. 692)

8월  사찬 임강수(任强首)가 죽었다.

왕이 예장(禮葬)하여 부의를 매우 후히 주었으나 집사람은 모두 사사로이 소유한 것 없이 다 불사(佛事)에 돌렸다. 그의 아내가 먹을 것이 모자라서 향리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왕이 그 소문을 듣고 벼 1백 석을 내려 주니, 처가 사양하기를,
“첩은 천한 사람입니다. 의식(衣食)은 지아비를 좇아 국은(國恩)을 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지금 비록 지아비를 따라 죽지는 못하였으나, 어찌 감히 다시 두터운 하사(下賜)를 바라겠습니까?”
하고 끝내 받지 않고 돌아갔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문장으로 말하면, 강수ㆍ제문(帝文)ㆍ수진(守眞)ㆍ양도(良圖)ㆍ풍훈(風訓)ㆍ골향(骨香)이었는데, 제문 이하는 사적이 빠져서 전하지 않는다.”
라고 적혀 있다.


조선상고사 - 단재 신채호 

 

밈라가라는 여섯 가라 중에서 그 건국 이후에 가장 신라와 악전고투 하던 작은 강국이었다 . 처음에는 거의 신라와 싸울 때마다 이기다가 신라 내해이사금 ( 奈解尼師今 ) 14 년 기원 209 년에 그에 소속되어 있던 포상팔국 ( 浦上八國 : 대개 지금의 南海 ·泗川  등지 )이 배반하여 연맹군을 일으켜서 밈라에 침입 , 크게 승리하고 천 명을 포로로 하므로 밈라왕이 그 왕자를 신라에 볼모로 보내고 구원병을 빌려 , 신라의 태자 석우로 ( 昔于老 ) 가 6 부의 정병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 포상팔국의 장군을 죽이고 포로 6 천 명을 빼앗아 밈라에 돌려주었다 . 그 뒤로부터 밈라는 국세가 허약해져서 신라에 대항하지 못하였다 . 그러나 중간에 신라와 합세하여 고구려의 광개토왕도 돕고 , 네 나라 동맹에 참가하여 백제도 구원하여 주었는데 , 신라의 지증 ( 智證 ) · 법흥 ( 法興 ) 두 대왕이 안라가라 등을 토멸하자 그 제6대 가실왕 ( 嘉實王 ) 이 두려워서 신라 귀골 ( 貴骨 ) 비조부 ( 比助夫 ) 와 결혼하여 스스로 보전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신라의 습격을 당하여 망하고 , 그 뒤에 가실왕이 왕족과 신라에 복종치 않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미을성 ( 未乙城 ) ---지금의 충주 ( 忠州 ) 로 달아나서 백제에 의지하여 신라를 막고 미을성으로 서울을 삼았다 . 기원 554 년에 백제 성왕 ( 聖王 ) 이 구양 ( 狗壞 : 音-- 글래 ), 지금의 백마강 ( 白馬江 ) 상류에서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 밈라의 군사도 이를 따라갔다가 신주군주 ( 新州軍主 ) 김무력 ( 金武力 : 신가라의 왕 仇亥의 아 들 ) 의 복병을 만나 양국의 연합군이 전멸하였다 . 이것은 제10편에서 자세히 서술하려니와 기원 564년에 신라 병부령 ( 兵部令 ) 김이사부와 화랑 사다함 ( 斯多含 ) 이 침입하여 이 옮겨앉은 밈라가라까지 멸망시켰다 . 전사 ( 前史 ) 에는 모두 대가야 ( 大伽倻 ) 곧 밈라가라가 지금의 고령 ( 高靈 ) 에 건국하였다가 고령에서 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 이제 어느 책에 의거하여 밈라가 지금의 충주 ( 忠州 ) 에 웅거하였다 하는 것인가 ? 삼국사기 열전 ( 列傳 ) 에 “강수 ( 强首 ) 는 중원경 ( 中原京 ) 사량부 ( 沙良部 ) 사람이 다 . ( 强首中原京沙良部人也 ) ”라고 하고 , 또 강수의 진술을 기록하여 “신은 본래 임나가량 ( 任那加良 ) 사람입니다 . ( 臣本任那 加良人也 ) ”라고 하였으니 중원경은 곧 충주요 , 임나가량은 곧 밈라가라이니 밈라가라가 충주에 천도하였던 한 증거요 , 악지 ( 樂志 ) 에 “우륵 ( 于勒 ) 은 본래 성열 ( 省熱 ) 사람이다 .( 于勒省熱人 ) ”이라 하였는데 , 우륵은 밈라가라의 악공 ( 樂工 ) 이요 성열현 ( 省熱縣 ) ---지금의 청풍( 淸風 : 丹陽 ) 은 당시에 충주 곧 미을성에 딸린 땅이었으니 , 밈라가라가 충주에 천도했던 또 하나의 증거요 , 신라 본기 진흥왕 ( 眞興王 ) 15 년 , 기원 554 년에 “백제와 가라가 와서 관성 ( 管城 ) 을 공격하였다 . ( 百濟---與加良來攻管山城 ) ”고 했는데 , 가량 ( 加良 ) 은 또한 밈라가라를 가리킨 것이고 , 관성 ( 管城 ) 은 백제의 고시산 ( 古尸山 ) ---지금의 옥 천 ( 沃川 ) 구양 ( 狗壞 ) 부근이니 이때의 밈라가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옥천을 친 것은 장차 지금의 영동 ( 永同 ) 을 지나 추풍령 ( 秋風領 ) 을 넘어서 고령 ( 高靈 ) 의 옛 서울을 되찾으려다가 패해 망한 것이니 , 이는 밈라가라가 충주에 천도한 셋째 증거이다 . 밈라가라는 비록 멸망하였으나 강수 ( 强首 ) 의 문학과 우륵의 음악으로 이름을 전하여 여섯 가라 중에서 가장 일컬을 만한 나라였다 . '구지' '별뫼' '고링' 세 가라는 삼국사기 지리지 ( 地理志 ) 에 다만 “신라에게 멸망하였다 .”고 하고 어느 때임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 '구지 '는 밈라가라와 가까우니 그 운명이 밈라가라와 같았을 것이다 . 여섯 가라가 이미 멸망하니 신라가 계립령 ( 鷄立嶺 ) 이남을 전부 통일하여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혈전이 시작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왕이 강수라는 이름을 내려 주다

 

왕이 놀라 기뻐하더니, 서로의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며 그의 성명을 물었다. 〔강수가〕 대답하길, “신(臣)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001 사람이며,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길, “경(卿)의 두골을 보니 강수선생(強首先生) 002이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註 001임나가량(任那加良): 임나와 가량, 즉 가야가 합해진 말이다. 임나는 본서와 금석문, 『일본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 임나는 한반도 남부, 가야 여러 나라,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와 같은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3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이영식, 162쪽). 국내 기록으로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영락(永樂) 10년(400)조의 ‘임나가라(任那加羅)’, 본서 강수전의 ‘임나가량’,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924)의 ‘임나왕족(任那王族)’이 있다. 강수전의 임나가량에 대해 고령의 대가야(가라국)으로 보는 견해와 김해의 금관국(가락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林炳泰, 84~89쪽; 李基白, 212쪽; 張俊植, 125쪽). 특히 우륵은 대가야가 멸망하기 전인 550년에 신라에 투항하여 중원지역에 사민되었으므로, 중원경에 살던 강수도 우륵과 같은 대가야의 후예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林炳泰, 85쪽; 주보돈, 156~157쪽). 한편 국원소경이 557년(진흥왕 18)에 설치된 후 이듬해 왕경의 귀척자제(貴戚子弟)와 6부 호민(豪民)을 이곳으로 사민시켰다. 당시의 경주에는 532년에 항복한 금관국의 왕족과 후손이 살고 있었으므로 강수는 금관국 출신으로 국원소경 설치 당시에 그들의 일족과 함께 왕경에서 국원소경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金泰植, 65~66쪽). 「광개토왕릉비」의 임나가라를 금관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이영식, 159쪽; 백승옥, 113~117쪽), 특히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의 진경대사의 속성(俗姓)이 ‘신김씨(新金氏)’이며 김유신의 먼 후손이라는 기록은 ‘임나’가 곧 김해 금관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의 유력한 근거가 된다.
〈참고문헌〉
李基白, 1986,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張俊植, 1998, 『新羅中原京硏究』, 學硏文化社
이영식, 2016, 『가야제국사 연구』, 생각과종이
林炳泰, 1967, 「新羅五小京考」, 『歷史學報』 35·36
金泰植, 1994, 「廣開土王陵碑文의 任那加羅와 安羅人守兵」, 『韓國古代史論叢』 6
주보돈, 2016, 「강수」,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22-신라를 빛낸 인물들』, 경상북도
백승옥, 2020,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과 고대 부산」, 『항도부산』 40,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註 002강수선생(強首先生): 우두(牛頭)를 훈독하면 ‘소머리’, ‘쇠머리’가 되며, ‘쇠’의 의미를 바꾸어 ‘센 머리’, 즉 강수(强首)라 한 것이다(金昌謙, 2006, 「强首와 新羅 社會」, 『震檀學報』 101, 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