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산과 개천안에 대하여
개천산과 개천안에 대하여
옥녀봉에 잘못 세워진 부산 표지석
지난 추석연휴에 충주시 동량면에 있는 부산(婦山)으로 산행을 다녀왔다. 부산은 다섯번째 다녀온 산이기에 등산지도나 이정표가 없더라도 여유롭게 산행할 수 있는 산이 되었다. 이번 산행에서 느낀 것은 옥녀봉에 설치된 부산 표지석처럼 지역에 관련된 등산자료나 지명유래들을 바로 잡았으면 한다. "개천산 정토사"란 지명이 국보급 문화재에 금석문으로 명기되어 있는데도, 그를 알지 못하고, 부산이니, 면위산이니 하는 민담과 정상 표지석을 정상도 아닌 부봉인 옥녀봉에 설치하는 어리석은 촌극은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산천조에는 개천산을 정토산이라고도 하지만, 청풍현 산천조에서는 부산이라고 기록한다. 개천산과 부산은 동일한 산이지만, 면산, 면위산, 옥녀봉, 덕봉 등으로 불리우며, 옥녀봉은 제1옥녀봉과 제2옥녀봉 등으로 구분하지만 고문헌에 나타나는 지명은 개천산일 뿐이다. 하지만, 충주시에서는 부산이라는 정상 표지석을 옥녀봉에 설치하여 지역 주민과 등산객들에게 혼란만 주고 있으며, 하곡마을 유래비도 개천안의 솟대와 토정 이지함의 유래로 미화하여 본래 의미를 훼손시키고 있기에, 이에 개천산과 개천안에 관한 자료를 정리해본다.
개천산(開天山)을 왜 부산(婦山)이라고 하는가 ?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부산을 처음 산행할 때는 부산의 유래를 일제강점기에 면서기의 실수로 면위산(免危山)이 며느리산으로 잘못 인식되어 부산(婦山)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후 충주호 순환도로와 제천천(삼탄강) 등을 따라 두루 살피고 다니면서 주변 지역들의 지명유래를 고찰하여보니, 지명유래가 뒤섞여 잘못 와전된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개천산 정토사"라는 지명이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재인 법경대사 자등탑비(보물17호)와 홍법국사 실상탑비(보물359호)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정 이지함과 일제강점기의 일화를 빌어 부산(婦山) 또는 면위산(免危山) 등으로 변천된 것은 내 고장의 향토역사도 모르는 수치일 것이다. 부산(婦山)이란 의미도 극락정토를 지칭하는 부처가 있는 산으로 풀이하면 정토산에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고, 금잠(金岑)에서 쇠를 상징하는 부산(釜山)이 변형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개천산과 정토산과 부산은 극락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개천산이었다가, 훗날 정토산과 부산으로 변경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개천산과 정토산, 개천사와 정토사, 개천사지와 정토사지 등 사찰과 산에 관련된 지명들이 혼재하고,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소재 불명)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보물17호),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국보 102호)과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비(보물359호),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천등산의 "개천사비(불명)" 등의 유적지나 문화재 명칭이 여과없이 변경되어 더욱 혼란을 주고 있다. 특히 하곡마을에 조성된 법경대사 자등탑비는 충주댐 건설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것으로 자등탑은 사라지고, 탑비만 남아 있는 것이다. 또한 홍법대사 실상탑(모조품)도 조각공원의 소품처럼 전시되고 있으며, 자등탑은 비만 서있고, 실상탑은 비가 없어 두 문화재 모두가 부조화를 이룬다. 사적지라기보다는 일본식 조각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의 현실정이다.
또한 토정 이지함의 민담과 더불어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따른 지명유래까지도 현재의 지명을 근거로 해석하여 회자되고 있으며, 천등산, 지등산, 인등산에 등장하는 지관 "황규"에 관한 민담과 천등산, 개천산, 박달산(시랑산) 등에서 고유신앙과 단군사상이 깃들여진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지역의 지명유래는 향토학자들까지도 고찰없이 인용하여 지명유래의 본래 의미를 훼손시키고 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조 후기의 지도에서도 개천산과 정토산과 부산이 혼재하여 기록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산천조에는 개천산과 정토산이 같은 산으로 기록되고, 청풍현 산천조에는 부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조선후기의 고지도에는 정토산이 현재의 인등산으로 표기되어 있어 동량면 손동리 사지와 동량면 말흘산 용두사지 등과도 혼선을 초래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화로 나타나는 청풍면의 부산리 유래와 면산 또는 면위산에 대한 유래는 근래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리고 토정 이지함이 동국여지승람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이후인 조선 중기의 인물이기에 이 지역의 고지명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가 없다. 다만 토정 이지함이 처가인 충주에서 머물렸다는 기록이 있기에 그에 따라 개천산이 옥녀봉으로 변천되고, 만지, 독지 등의 마을 지명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고려말 도은 이숭인의 시에서 정토산 개천사란 지명과 고려말에 있었던 충주사고가 개천사에 있었다는 기록에서 개천산이 정토산으로 바뀌고, 정토사가 개천사로 바뀌었거나, 두개의 사찰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한다. 고문서나 이숭인의 시에 나타난 정토사나 개천사는 일반 대중들이 드나드는 사찰이 아니라, 수도승들이 입산수도하여 정진하는 사찰로 보여지며, 신라말기에서 조선조 초기까지 이어지는 대사찰로 신라와 고려시대의 국사나 왕사들이 머물렸던 사찰이기도 하다. 하지만, 향토자료나 문화재 발굴자료에서도 법경대사에 따른 유적지와 홍법대사에 따른 유적지가 동일한 곳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지역에서 출토된 것인지가 불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를 두 개의 사찰로 볼 것인가 ? 아니면, 본사(큰 절골)에 딸린 말사(작은 절골)로 볼 것인가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 특히 고려말과 조선초에 목은 이색이나 양촌 권근의 글에서 개천사가 등장하는 것도 충주사고에 수장되었던 고려시대의 서책들 때문인데, 이는 조선조 초기에 충주읍성에 있던 충주사고 덕분에 고려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를 전할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충주의 향토사학자나 시민들에게는 충주사고에 대한 인식이 극히 미미할 뿐이다.
개천안과 솟대에 대하여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정토사 법경대사탑비 사적지를 둘러보고, 개천안 마을유래비를 다시금 읽어본다. 누가 이런 글을 썼을까 ? 바로 앞에 서있는 법경대사탑 비문에 "개천산 정토사"라는 문구가 있는데, 그리고 홍법국사탑 비문에도 "개천산 정토사"라고 기록되었는데, 왜 ! 민담을 더 우선 시하여 마을 자랑비를 썼을까 ? 멀리 "2015 개천안 솟대문화제"란 현수막이 보인다. 어찌보면 역사적 기록보다는 더 좋은 마을이라는 것을 내세우려는 애향심 때문은 아닐까 ? 국보급 문화재와 보물급 문화재가 3점 또는 4점이나 있던 마을에서 도난 당한 법경대사 자등탑과 밀반출되어 모조품으로 외롭게 서 있는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국보제102호) 옆에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을 설명하는 탑비의 모조품이라도 건립하는 것이 더 절실한 것은 아닐까 ? 하는 생각이 문득든다. 사라진 법경대사 자등탑에 대한 자료는 없다. 비록 지역의 작은 마을축제인 개천안 솟대문화제를 하면서 사라진 문화재와 지명의 복원이 머지않아 이루어지지 않을까하는 기대 아닌 기대를 해볼 뿐이다.
고문서인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축당섭필에서는 “충주(忠州) 개천(開天) 내촌(內村)에 있는 개천사비(開天寺碑)"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개천안(開天安)은 개천(開天) 내촌(內村)으로 개천 안골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있는 중앙탑면 내동과 마찬가지로 안골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개천산 기슭의 절골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곡(荷谷)이란 지명은 개천(開天)이라는 뜻과 달리 개천(河川)이라는 어색한 어감 때문에 연꽃을 의미하는 하천(荷川)으로 차용한 것이 아닌가한다. 하지만, 개천안이란 지명은 계룡산의 신도안처럼 마치 도인들이 사는 동네를 연상케 하지만, 신도안의 지명유래도 신도읍지란 뜻일 뿐이다. 동량면 하천리 지명유래에서 개천안 또는 개천안 열두 마을이라고 한다. 하지만, 개천안은 개천산 정토사가 있는 주변의 촌락을 의미한다. 또한 솟대거리란 것도 저잣거리나 성황당처럼 요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목은 이숭인의 싯구처럼 조용한 산사의 당간지주나 마을 어귀나 마을 동제를 지내는 곳에 성스럽게 서있는 솟대를 의미한다. 하천리의 솟대거리는 솟대의 본래 의미와는 달리 무질서하게 전시된 느낌을 받는다. 좁은 공간에서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다가 보니, 그 의미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밀반출된 유물들과 수몰지에 흩어진 유물들을 새로이 정비하고, 개천과 솟대라는 의미를 재정립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상고시대에 등장하는 소도(蘇塗)와 솟대의 의미를 되새기며, 천군 또는 천손사상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인간이 하늘에 기원하는 경천사상(敬天思想)은 수많은 신앙으로 나타난다. 특히, 구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강한 신앙심이 존재한다. 솟대에 따른 마을 동제는 마을의 안녕과 동민의 단결을 위한 축제이다. 최근에 하천리의 솟대가 재현된 것도 개천산(開天山) 또는 개천사(開天寺)란 지명 때문이다. 개천산 북쪽에 있는 천등산과 박달산(시랑산)도 단군신화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한민족이 살던 곳이면 단군에 얽힌 설화와 지명들이 잔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개천과 솟대란 풍습도 하천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수많은 민족들이 이에 해당된다. 하천리 솟대거리가 부각된 것도 솟대 작가인 윤영호씨 덕분일 것이다. 솟대란 것이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지만, 그를 민속예술로 승화시킨 분이기도하다. 가끔 들려서 차도 마시고, 세상이야기도 나누던 소박한 추억들이 떠오른다. 상고시대의 풍속인 솟대가 오늘날까지 전승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민족이나 국가를 외치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개천안 솟대문화제도 개천골 주민들의 소중한 희망을 나타내는 축제일 것이다. 솟대문화제가 단순한 지역행사가 아니라, 지역문화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참고자료]
보물 제359호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비(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
종목 | 보물 제35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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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
소재지 | 국립중앙박물관 |
지정일 | 1963.01.21 |
수량 | 1기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국립중앙박물관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정토사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개천산에 있었던 절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를 세운 태조로부터 국사의 예우를 받았던 법경대사 현휘(玄暉)가 주지스님으로 있다가,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가 제자들을 지도하였던 대사찰이다.
홍법국사의 탑비로 원래 정동사터에 남아있던 것을 1915년에 홍법국사 실상탑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선덕왕대에 태어나 12살의 나이에 출가하였고, 당나라를 다녀온 뒤 선(禪)을 크게 일으켰다. 그 후 정토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고려 목종은 ‘자등(慈燈)’이라는 탑명을 내려 손몽주에게 비의 글을 짓도록 하였다.
제액(題額)은「실상지탑(實相之塔)」의 4자(字)를 2행(行)으로 배열한 해서(楷書)이며, 자경(字徑) 약 8㎝, 신석(身石) 천계(天界)에는 비액(碑額)을 좌횡(左橫)으로「개천산정토사고국사홍법대선사지비(開天山淨土寺故國師弘法大禪師之碑)라 전서(篆書)하였다. 자경(字俓) 약 8㎝. 문면(文面)에는 종횡세선(縱橫細線)으로 네모 반듯한 행간(行間)을 새겼었으나 지금은 풍화(風化) 마손(磨損)되어 각자(刻字)와 함께 거의 판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비문(碑文)은 자경(字俓) 2.2㎝,「대송고려국중원부개천산정토사원광편소홍법대선사…(大宋高麗國中原府開天山淨土寺圓光遍炤弘法大禪師…)」로 시작되어「세차정사(歲次丁巳) 구월(九月) 일입(日立)」으로 끝맺어져 있다.
홍법(弘法)은 나말(羅末) 여초(麗初)의 승(僧)으로 신라(新羅) 신덕왕대(神德王代)에 출생, 12세(歲)에 출가(出家)하여 「장흥원년(長興元年) 중려월조북산마사단수구족계(仲呂月造北山摩詞壇受具足戒)」하였다. 장흥(長興) 원년(元年)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13년(年)(930)이다.
그 후 입조사시랑(入朝使侍郞)현신(玄信)을 따라 당(唐)에 들어가 각지(各地)를 두루 다니고 돌아와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振作)하였다. 성종(成宗)은 대선사(大禪師)의 호(號)를 내렸으며, 목종(穆宗)은 국사(國師)의 호(號)를 가하여 봉은사(奉恩寺)에 이주(移住)하게 하였다.
비문(碑文)의 마멸로 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채 시멸(示滅)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 몰년(沒年)은 명백치 않다. 목종(穆宗)은 국서(國書)와 함께 돈과 재물을 내렸으며, 시호(諡號)를 홍법(弘法), 탑 이름을 실상(實相)이라 하였다. 찬자(撰者)는 손몽주(孫夢周), 필자(筆者)는 불명이며, 비교적 정연한 구체(歐體) 해서(楷書)이다.
뒷면에는 입실제자(入室弟子) 및 재가제자(在家弟子)의 이름을 열거한 자경(字經) 약 3㎝의 행서(行書) 음기(陰記)가 있으나, 앞뒤 문면(文面)은 심한 풍화(風化)로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 대부분이다.
얕은 비좌(碑座)는 운각반중(雲刻盤中)에 조출(彫出)되었고, 각면(各面)에 안상(眼象)을 새겼다.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한 함주개구형(含珠開口形)이며 반룡(蟠龍)의 조형은 다른 비(碑)에 비하여 구체적이고 힘차다. 이수(이首) 전액(篆額)에 해서(楷書)를 새겨넣은 것은 보기 드문 예이다.
이 비는 원래 충북(忠北) 중원군(中原郡) 동량면(東良面) 하천리(荷川里)의 개천산(開天山) 정토사(淨土寺) 터에 있던 것을 1915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경복궁으로 이전하였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산천】 대림산(大林山)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말흘산(末訖山) 주 북쪽 30리에 있다. 심항산(心項山)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주 서쪽 30리에 있다. 망이산(望夷山) 주 서쪽 91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천룡산(天龍山) 주 서쪽 5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풍류산(風流山) 주 남쪽 23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주 서쪽 45리에 있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천등산(天燈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 오동산(梧桐山) 주 동쪽 7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주 동쪽 5리에 있다. 종당산(宗堂山) 주 북쪽 13리에 있다. 이상한 돌이 생산되는데 세밀하여 비갈(碑碣)을 만들 만하다.
【불우】 보련사(寶蓮寺) 천룡산(天龍山)에 있다. 용두사(龍頭寺) 말흘산(末訖山) 밑에 있다. 삼국시대 때에 북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므로, 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기도하였다. 고려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승 법경자등탑비(僧法鏡慈燈塔碑)가 있다. ○ 이숭인(李崇仁)이 송도생상인(送道生上人)시에, “개천(開天) 서쪽 억정(憶井) 동쪽에 높직하게 이 절이 있다. 산은 평야를 둘렀으니 새벽 구름이 희고, 강은 성긴 숲을 둘렀으니 단풍잎이 붉도다. 상인(上人)은 오늘에 돌아가는 돛대를 움직이고, 노는 손은 옛날에 울린 종소리를 들었노라. 동방(同榜)인 비서(祕書)가 아마 잘 있을 것이니, 조만간 편지가 도달할 것이라 말하여 다오.” 하였다. 개천사(開天寺) 정토산(凈土山)에 있다. ○ 고려(高麗) 역대 왕조의 실록(實錄)을 처음에는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간직했다가 왜구(倭寇)로 인하여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에 옮기고, 또 이 절에 옮기고, 또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에 옮겼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그 땅이 바닥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이 절에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종(世宗) 때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모두 서울로 운반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이 권 사군(權使君)을 보내는 시에, “정토산이 대단히 좋다. 개천사가 징거할 만하네. 문에 이르는 이는 속(俗)된 손이 없고, 벽(壁)을 향한 이는 높은 중이러라. 백 척 높은 대(臺)는 물에 임하고, 천 년의 나무는 등넝쿨에 누웠다. 그대 돌아가 여가가 있거든 하나하나 찾아보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청풍군(淸風郡)
【산천】 인지산(因地山) 군 남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무암산(茂巖山) 군 동쪽 10리에 있다. 창고(倉庫)의 예전 터가 있는데, 고려 때에 경상도의 전부(田賦)를 이곳에 옮겼다. 삼방산(三方山) 군 북쪽 3리에 있다.금곡산(金谷山) 군 서쪽 26리에 있다. 저성산(猪城山) 군 동쪽 5리에 있는데, 돌 성이 있다. 병풍산(屛風山) 군 북쪽 1리에 있는데, 바람 구멍이 있다. 부산(婦山) 군 서쪽 15리에 있다.성황산(城隍山) 군 동쪽 3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군 남쪽 50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월형산(月兄山)이라고 일컬었다. 소사(小祀)로 되었다. 전산(箭山) 전소산(箭所山)에 있다. 백야산(白夜山) 군 남쪽 33리에 있다. 쌍암산(雙巖山) 군 동쪽 5리에 있다. 취산(鷲山) 군 남쪽 2리에 있는데, 군창(軍倉)이 있다. 장선현(長善峴) 군 서쪽 20리에 있다. 가라현(加羅峴) 군 서쪽 16리에 있는데, 지극히 험하고 막히었다. 북진(北津) 병풍산 밑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고교천(高橋川) 군 북쪽 8리에 있다. 근원이 제천현(堤川縣) 경계에서 나와서 북진(北津)으로 들어간다. 월천(月川) 군 서쪽 40리에 있다. 근원이 부덕산(夫德山)에서 나와 충주(忠州) 진포(辰浦)로 흘러 들어간다.
도은집 제2권 시(詩)
권 사군이 충주에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 고을 북쪽에 개천사가 있는데, 이곳은 내가 옛날에 노닐었던 곳이다.〔送權使君之任忠州 州北有開天寺是僕舊遊之地〕 |
정토산은 좋은 곳이 많지만 / 淨土山多好
개천사는 특히 한번 가볼 만 / 開天寺足徵
산문에 속객은 찾아오지 않고 / 踵門無俗客
오직 벽을 향하고 있는 고승뿐 / 面壁有高僧
강물을 내려다보는 백 척의 누대 / 百尺臺臨水
등나무 덩굴에 누워 있는 천 년의 고목 / 千年木臥藤
그대 부임하면 한가한 날 많으리니 / 君歸足暇日
내가 놀았던 곳 하나하나 찾아보소 / 一一訪吾曾
도은집 제2권 시(詩)
우음을 적어서 방외의 벗인 천봉에게 증정하다〔偶唫錄奉千峯方外契〕 |
시내와 뫼 수려한 정토산 속에 / 淨土溪山勝
개천사 원우가 청정하게 자리했네 / 開天院宇淸
소싯적에 일찍이 머물렀던 곳 / 少年曾寄迹
오늘날 어디보다 마음이 끌린다오 / 今日最關情
이내의 푸르름은 일천 봉우리 색깔이요 / 嵐翠千峯色
솔에 부는 바람은 일만 골짜기 소리로세 / 松風萬壑聲
향수 찾아 떠나고 싶은 이 마음 / 擬尋香穗去
이미 삼생에 서원(誓願)을 했소이다 / 結願已三生
진완은 먼 옛날 신선이 노닐던 곳 / 眞婉仙遊遠
고대에 그 자취 아직도 남아 있네 / 高臺勝迹留
무쇠 깎은 바위에는 학이 둥지 틀고 / 鶴巢巖削鐵
기름 도는 물에는 용이 누워 있다오 / 龍臥水旋油
험난하기도 하여라 돌고 도는 오솔길 /
삼엄하기도 하여라 길게 벋은 고목들 / 森嚴古木脩
신령스러운 바람이 온종일 부는지라 / 靈飆吹盡日
올라가 바라보면 수염이 휘날린다오 / 登眺鬢颼颼
한 봉우리 동천(洞天)을 굽어보는 곳 / 一峯臨洞府
옛 비갈(碑碣)이 숲 위로 뚫고 나왔네 / 遺碣出林梢
스승의 예법은 전고에 융숭하고 / 師禮隆前古
선종의 가풍은 허공에 떨치도다 / 禪風振泬寥
흘러 전하는 문장은 봉을 토한 듯 / 流傳辭吐鳳
움직여 나는 글자는 용이 서린 듯 / 飛動字蟠蛟
묵본이 누구에게 혜택을 준다 할까 / 墨本誰能惠
창가에 앉아 있는 바로 이 늙은 도은 / 明窓坐老陶
환암 선사(幻菴禪師)는 내가 경외하는 분 / 幻菴吾所畏
묘한 경지는 세상에서도 알고 있지 / 妙處世猶知
생사(生死)의 큰일을 마친 일숙각이요 / 了事一宿覺
인연에 따른 왕사(王師)의 자리로세 / 隨緣王者師
구름 보며 혼자서도 즐기시겠지만 / 看雲應自悅
결사도 약속한 듯 이루어지겠지요 / 結社會如期
머리 들면 산이 겹으로 막혀 있으니 / 矯首山重隔
바람결에 유치한 시나 부칠 수밖에 / 因風寄惡詩
우연히 나눈 하룻밤의 대화인데도 / 浪作一宵話
며칠을 두고 계속해서 생각이 나네 / 却爲多日思
오래된 우물처럼 명징한 선사의 마음이요 / 禪心澄古井
가을철 실오리처럼 날리는 객의 수염이라 / 客鬢颯秋絲
곤이 변화하기는 어렵게 된 처지에서 / 鯤化已難得
뱁새의 둥지가 오히려 편하게 여겨지오 / 鷦棲還自怡
남화가 묘한 비결 남겨놓았으니 / 南華遺妙訣
토론하며 한 수 배워보고 싶기도 / 討論要相師
[주D-002]흘러 …… 듯 : 서한의 문학가 양웅(揚雄)이 명작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적에, 입으로 토해 낸 봉황이 그 책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西京雜記 卷2》
[주D-003]생사(生死)의 …… 일숙각(一宿覺)이요 : 불교 최고의 경지에 오른 선승이라는 말이다. 당나라 영가 현각 선사(永嘉玄覺禪師)가 육조(六祖) 혜능(慧能)을 찾아갔을 때 그의 깨달음의 경지가 육조와 계합(契合)이 되자 육조가 하룻밤만이라도 머물다 가라고 청했기 때문에 그를 일숙각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5 溫州永嘉玄覺禪師》 또 불교에서는 생사 문제를 가장 중대한 문제로 보고 이를 해결하는 것을 장부의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데,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이른바 생사사대(生死事大)와 본심반야(本心般若)에 대한 법문이 수록되어 있다.
[주D-004]결사(結社) : 여기서는 승려와 유자의 모임을 뜻한다. 진대(晉代)에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 혜원(慧遠)이 승속의 18현과 함께 염불 결사를 하였는데, 그 절의 못에 백련이 있었으므로, 백련사(白蓮社) 혹은 연사(蓮社)라고도 칭한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주D-005]곤(鯤)이 …… 여겨지오 : 붕정만리(鵬程萬里)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게 된 만큼, 이제는 안분지족의 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뜻의 자조적인 표현이다. 《장자》 〈소요유〉에, 북명(北冥)의 곤(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붕(鵬)이라는 거대한 새로 변한 뒤에 구만 리 창공으로 올라가 남명(南冥)으로 긴 여행을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또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둥지를 틀 때에는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다.〔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남화(南華) : 남화진인(南華眞人)의 준말로, 장자(莊子)의 별칭이다. 당 현종이 천보(天寶) 원년(742)에 장자에게 남화진인의 봉호를 내리고, 《장자》를 《남화진경(南華眞經)》으로 부르게 하였다.
도은집 제2권 시(詩)
도생 상인이 충주 용두사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道生上人歸忠州龍頭寺〕 |
생각나네 개천사의 서쪽 우물의 동쪽 / 開天之西憶井東
높이 솟은 산 위에 있는 범왕의 궁전 / 岧嶢有此梵王宮
산이 에워싼 평야에는 흰 새벽 구름이요 / 山圍平野曉雲白
강이 휘도는 성근 숲엔 붉은 단풍잎이라 / 江遶疏林霜葉紅
상인이 오늘 노 저어 돌아가는 곳은 / 上人今日動歸楫
유자가 왕년에 종소리 익히 들었던 곳 / 遊子昔年聞鳴鍾
급제 동기생 비서는 응당 잘 계시겠지 / 同榜秘書應好在
조만간 서신 띄우겠다고 말 전해 주오 / 爲言早晩達書筒
[주D-002]유자(遊子)가 …… 곳 : 도은이 숙식을 하며 독서했던 절이라는 말이다. 당나라 왕파(王播)가 어려서 가난하여 양주(楊州) 혜소사(惠昭寺) 목란원(木蘭院)의 객이 되어 글을 읽으며 승려들을 따라 재식(齋食)을 얻어먹었는데, 승려들이 염증을 내어 재가 모두 파한 뒤에야 종을 치곤 했다는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唐摭言 起自寒苦》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죽당섭필 하(寒竹堂涉筆下) |
신라ㆍ고려의 석각(石刻) |
성사집 대중(成士執大中 사집은 대중의 자)이 일찍이 성호(星湖) 이익(李瀷)의《사설(僿說)》에 실려 있는 고비(古碑)를 적어서 나에게 보여 주면서, 영남(嶺南)의 고적(古蹟)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성대중이 보여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D-002]《대동금석록(大東金石錄)》 :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부터 조선 선조(宣祖) 때까지의 비(碑)ㆍ탑(塔)ㆍ석당(石幢)ㆍ석각(石刻) 등의 탁본집. 정편(正編) 5책, 속편 2책, 도합 7책이다. 저자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는 서화(書畫)에 능하였으며 이 책 외에도 《대동명필첩(大東名筆帖)》 등 많은 책을 편했다. 《성호사설》에는 이의 저자가 낭원군(朗原君)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낭원군은 낭선군의 친 아우이다.《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주D-003]실직(悉直) :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의 옛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