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영원산성에서
원주 영원산성에서
치악산 남대봉에 위치하는 상원사와 영원산성을 다녀왔다. 늦은 시각에 산행을 시작하여 카메라도 못 챙기고, 핸드폰 배터리도 방전되어 영원산성 답사과정들을 사진으로 남기질 못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남대봉 상원사 산행과 영원산성 답사는 등산로를 따라 진행되어 영원산성을 제대로 답사할 수는 없었지만, 복원된 영원산성에서 산성복원 문제를 다시금 떠올려 본다. 복원된 많은 산성들이 축성된 시기나 축조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정체불명의 성곽으로 복원시켜 본래의 특징이 사라지고, 성돌을 다른 지역의 석재를 사용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깨트리고 있었는데, 영원산성의 성벽복원은 무너져 내린 성돌을 그대로 사용하여 영원산성의 마지막 형태을 담아낸 것처럼 보인다.
영원산성의 축조시기는 산성의 지리적 위치나 배치로 보면, 고구려가 처음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이 없기에 영원사와 상원사의 창건시기와 유사한 통일신라로 시대로 추정할 뿐이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서 "치악산 석남사"가 등장한다. 특히 영원산성에 잔존하는 석축들이 정교하게 축조되지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수많은 전란 속에서 수없이 파괴되고 재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몽항전의 승전지인 충주의 대림산성도 대부분 거칠게 축조된 것처럼 보이지만, 잔존한 성벽 일부와 성벽하부를 보면 허물어진 성벽을 재축성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강 유역에 있는 정양산성, 온달산성, 적성산성, 장미산성, 파사성 등과 태화산성, 월악산성, 와룡산성, 천룡성(보련산성) 등은 무엇이 다를까 ? 영원산성에 따른 역사의 기록들을 정리하여 본다. 고려시대 말기에 몽고가 침락하기 이전인 거란족의 침입에 따른 김취려 장군의 박달현(박달재) 전투가 고려사절요에 나타난다. 김취려 장군의 박달현 전투와 대몽항전은 무슨 연관성을 있을까 ?
三國史記 第 五十卷(삼국사기 제 50권) 列傳 第 十(열전 제 10)
183.弓裔(궁예)
弓裔(궁예) : 궁예는
新羅人(신라인) : 신라인이니
姓金氏(성김씨) : 성은 김씨이다.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고제사십칠헌안왕의정) : 아버지는 제 47대 헌안왕이요,
母憲安王嬪御(모헌안왕빈어) :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失其姓名(실기성명) :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或云(혹운) : 혹자는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사십팔경문왕응렴지자) :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以五月五日(이오월오일) : 그는 5월 5일
生於外家(생어외가) : 외가에서 태어 났는데,
其時(기시) : 그 때
屋上有素光(옥상유소광) : 지붕에 흰빛이 있어서
若長虹(약장홍) : 긴 무지개와 같았는데
上屬天(상속천) : 위로는 하늘에 닿았었다.
日官奏曰(일관주왈) : 일관이 아뢰기를
此兒以重午日生(차아이중오일생) :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에 났고,
生而有齒(생이유치) : 나면서 이가 있으며
且光焰異常(차광염이상) :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恐將來不利於國家(공장래불리어국가) :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宜勿養之(의물양지) :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王勅中使(왕칙중사) : 왕이 중사로 하여금
抵其家(저기가) : 그 집에 가서
殺之(살지) :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使者取於襁褓中(사자취어강보중) :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投之樓下(투지루하) :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乳婢竊捧之(유비절봉지) : 젖 먹이던 종이 그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誤以手觸(오이수촉) :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眇其一目(묘기일목) : 이리하여 그는 한 쪽 눈이 멀었다.
抱而逃竄(포이도찬) :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劬勞養育(구로양육) : 고생스럽게 양육하였다.
年十餘歲(년십여세) : 그의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遊戱不止(유희불지) :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其婢告之曰(기비고지왈) : 종이 그에게 말했다.
子之生也(자지생야) : "네가 태어났을 때
見棄於國(견기어국) :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予不忍(여불인) :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竊養以至今日(절양이지금일) : 오늘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而子之狂如此(이자지광여차) : 그러나 너의 미친 행동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必爲人所知(필위인소지) :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則予與子俱不免(칙여여자구불면) : 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화를 면치 못 할 것이니
爲之奈何(위지내하) : 그이를 어찌 하랴?"
弓裔泣曰(궁예읍왈) :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若然則吾逝矣(약연칙오서의) : "만일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나
無爲母憂(무위모우) :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便去世達寺(편거세달사) : 그는 말을 마치고 곧 세달사로 갔다.
今之興敎寺是也(금지흥교사시야) : 지금의 흥교사가 바로 그 절이다.
祝髮爲僧(축발위승) :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自號善宗(자호선종) : 스스로 선종이라고 불렀다.
及壯(급장) : 그가 장성하자
不拘檢僧律(불구검승률) : 중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軒輊有膽氣(헌지유담기) : 방종하였으며 뱃심이 있었다.
嘗赴齋(상부재) : 어느 때 재를 올리러 가는 길에
行次有烏鳥銜物(행차유오조함물) :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와서
落所持鉢中(락소지발중) : 궁예의 바리대에 떨어뜨렸다.
視之(시지) : 예가 그것을 보니
牙籤書王字(아첨서왕자) : 궁점을 치는 산가지였는데 거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則秘而不言(칙비이불언) : 궁 예는 그것을 비밀에 부쳐 소문을 내지 않고
頗自負(파자부) : 자못 스스로 자만심을 가졌다.
見新羅衰季(견신라쇠계) : 신라 말기에
政荒民散(정황민산) : 정치가 거칠어지고 백성들이 분산되어
王畿外州縣(왕기외주현) : 왕기의 밖에 있는 주현 중에서
叛附相半(반부상반) : 신라 조정을 반대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遠近羣盜(원근군도) : 그리고 도처에서 도적이
蜂起蟻聚(봉기의취) : 벌떼처럼 일어나던가 개미같이 모여 들었다.
善宗謂乘亂聚衆(선종위승란취중) : 선종은 이를 보고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可以得志(가이득지) :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以眞聖王卽位五年(이진성왕즉위오년) : 진성왕 재위 5년,
大順二年辛亥(대순이년신해) : 대순 2년 신해에
投竹州賊魁箕萱(투죽주적괴기훤) : 그는 죽주에 있는 반란군의 괴수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箕萱悔慢不禮(기훤회만불례) : 그러나 기훤이 오만무례하므로
善宗鬱悒不自安(선종울읍불자안) : 선종의 마음이 침울하여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潛結箕萱摩下元會申煊等爲友(잠결기훤마하원회신훤등위우) :
기훤의 휘하인 원회, 신헌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景福元年壬子(경복원년임자) : 그는 경복 원년 임자에
投北原賊梁吉(투북원적량길) : 북원의 반란군 양 길의 휘하로 들어갔다.
吉善遇之(길선우지) : 양 길은 그를 우대하고
委任以事(위임이사) : 일을 맡겼으며,
遂分兵(수분병) : 군사를 주어
使東略地(사동략지) :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於是(어시) : 이에
出宿雉岳山石南寺(출숙치악산석남사) : 선종은 치악산 석남사에 묵으면서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행습주천내성울오어진등현) :
주천, 나성, 울오, 어진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皆降之(개항지) : 모두 항복시켰다.
고려사절요 제21권 충렬왕 3(忠烈王三) |
신묘17년(1291), 원 지원 28년 |
○ 봄 정월에 합단의 군사가 장차 철령(鐵嶺)에 이르려 하니, 방수만호(防守萬戶) 정수기(鄭守琪)가 소문만 듣고 도망해 왔으므로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다. 철령은 길이 좁아 겨우 한 사람밖에 통하지 못하여, 합단의 군사가 모두 말에서 내려 한 사람씩 줄지어 올라왔다. 이때 적들은 몹시 굶주렸으나, 수기가 버리고 간 양곡을 거두어 수일 동안 진탕 먹고, 북을 울리며 전진해서 드디어 고개를 넘어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오니, 김흔(金忻) 등이 모두 지키지 않고 달아났다. 적은 곧 양근성(楊根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갑인일에 합단이 원주(原州)에 주둔하고, 50명의 기병(騎兵)이 치악성(雉岳城) 아래에 이르러 소와 말을 약탈해 갔다. 원주 별초 향공진사(原州別抄鄕貢進士) 원충갑(元沖甲)이 보병 6명을 인솔하고 이를 추격하여, 적의 말 8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 무오일에 적 도라도(都剌闍)ㆍ독어내(禿於乃)ㆍ발란(孛蘭) 등이 군사 4백 명을 거느리고 또 성 아래에 이르러, 운반하는 본주의 녹봉미(祿俸米)를 획득하고 매우 기뻐하였는데, 충갑이 결사대 중산(仲山) 등 7 명과 함께 나아가서 이를 엿보고 있다가, 중산이 먼저 적 속에 뛰어들어 한 사람의 목을 베고, 이어 형문(荊門) 밖까지 추격하였다. 적이 모두 안장한 말을 버리고 달아나 말 25필을 얻으니,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가 크게 기뻐하여 노획한 안장한 말을 그에게 주었다.
○ 기미일에 적이 또 와서 기[旗]와 북[鼓]을 앞세워 기세를 올리며, 먼저 한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와서 유도하였다. 충갑이 나아가 편지를 가지고 온 자를 베고, 그 편지를 머리에 매달아 던졌는데, 적이 모두 물러가 성을 공격할 기구를 더욱 정비하니, 성중 사람들이 동요하며 두려워하였다.
○ 경신일에 적이 양근성에서 잡아간 여자 두 사람을 보내어 성 아래에서 유인하자, 충갑이 또 이들의 목을 베니, 적은 북과 함성을 울리고 전진하면서 온갖 계략을 써서 성을 공격하였다. 화살이 빗발같이 쏟아져서 성이 거의 함락 직전에 놓여 있었는데,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曹愼)이 성 밖으로 나가 마주 싸우고, 충갑이 돌연 동쪽 봉우리에 올라가 적 한 명을 베니, 적이 점차 혼란스러워졌다. 별장 강백송(康伯松)이 종 도니(道尼) 등 30여 명과 함께 싸움을 도왔고, 고을의 아전 원현(元玄)ㆍ부행란(傅行蘭)ㆍ원종수(元鍾秀)가 국학 양정재(國學養正齋)의 유생 안수정(安守貞) 등 1백여 명과 함께 서쪽 봉우리로부터 내려가서 합세하여 공격하는데, 조신이 북채를 잡고 북을 울리다가 날아온 화살이 바른 팔뚝을 관통하였으나 북소리는 여전하였다. 적의 앞 대열이 조금 퇴각하니, 뒤에 있는 자들이 놀라고 소란스러워져서 저희들끼리 서로 짓밟았다. 이에 고을의 군병이 힘을 합해 공격하니, 함성이 산악에 진동하였다. 도라도 등 68명을 베고, 사살한 자가 거의 반이나 되었다. 이로부터 적의 예기(銳氣)가 꺾이어 감히 다시 공격해 오지 못했고, 여러 성도 또한 굳게 지켜 비로소 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생겼으니, 이는 모두 충갑의 공이었다.
선조 25년 임진(1592,만력 20) 10월21일 (정미) | ||
비변사가 아뢰기를,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 남정유(南挺蕤)는 적군과 마주쳐 죽음을 당하였는데 충의의 절개가 옛사람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아들 남철(南澈)은 끝까지 그의 아비를 안고 부축하다 두 곳에 창을 맞았습니다. 원주 목사(原州牧使) 김제갑(金悌甲)은 산성(山城)을 굳게 지키다가 적의 칼에 죽었고 온 집안이 도륙당하였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포장하여 증직하게 하고 남철에게는 벼슬을 제수하소서. 또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조헌(趙憲)은 힘껏 싸우다 진중에서 죽었고 의병 승장(僧將) 영규(靈奎)도 적들과의 싸움에 나아갔다 죽었으니 아울러 포장하여 증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21 집 558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전쟁(戰爭) / *군사-특수군(特殊軍)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
선조수정실록 25년 임진(1592,만력 20) 8월1일 (무자) | ||
적병이 원주(原州) 영원 산성(鴒原山城)을 함락시켰는데, 목사 김제갑(金悌甲)이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관동(關東)의 주현(州縣)이 모두 적에게 노략질을 당하였으나 원주만은 온전하였다. 적이 이미 원호(元豪)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드디어 곧바로 원주로 침입하니, 원주 목사 김제갑이 고을 안의 사대부와 서민 그리고 온 가족을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갔는데 험한 지세만 믿고 설비를 하지 않았다. 적이 두세 번 성 밖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므로 성 안의 사람들은 더욱 그들을 앝잡아보았다. 하루는 적이 잠깐 퇴각하는 체하다가 곧바로 군사를 돌려 헛점을 틈타 습격하였으므로 성이 금방 함락되었다. 김제갑은 굴하지 않고 전사하였는데, 처자(妻子)도 모두 따라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문(家門)에 충효열(忠孝烈)이 나왔다고 하였다. 왜적이 드디어 원주에 주둔하고 군영을 지평현(砥平縣)까지 연결하여 경성에 이르는 길을 확보하였다. 【원전】 25 집 627 면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가족-가족(家族) |
재조번방지 1(再造藩邦志 一)
길성중륭(吉盛重隆)이 또 철령으로부터 나누어 관동으로 향하였다가 도로 흡곡(歙谷)으로부터 바다를 따라 평해(平海)에까지 이르러 다시 영서(嶺西)를 넘어 각 고을을 짓밟고 장차 원주(原州)를 핍박하게 되었다. 목사(牧使)는 김제갑(金悌甲)이니 자는 순초(順初)요, 본관은 안동이다. 살결이 희고 키가 크고 말과 웃음이 적었다. 가정(嘉靖) 계축년(1553)에 과거에 올라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에 출입하였는데 얼굴빛을 바로 하고 아첨하지 아니하였으며, 여러 번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간 곳마다 교체된 뒤에 백성들이 그를 생각하였다.
원주에 부임한 지 겨우 1년에 일이 아직 자리잡히지 않았는데 적이 충주(忠州)에 들어왔을 때 원주에서 거리가 멀지 아니하므로 정예 군사와 쓸 만한 무기를 다 내어 충주로 구원하러 보냈으므로 성중에는 믿을 것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적이 둔마다 진마다 앞뒤에 서로 잇달아서 징소리와 북소리가 서로 닿았다. 김제갑이 이에 기(旗)를 세워 부대(部隊)를 정돈하고 민정(民丁)을 뽑고 군량을 저축하였으나, 다만 통솔할 만한 용맹스러운 장수가 없었다. 본 고을에 성이 정(鄭)가인 사람이 날래고 용맹스럽기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여러 번 고을 사람에게 배척을 받고 억울하게 지낸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말하기를,
하니, 정(鄭)이 꿇어앉아 대답하기를,
하였다. 김제갑이 크게 노하여 꾸짖기를,
하고, 인하여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하고, 드디어 말을 타고 선도(先導)하여 앞장서서 군사들을 거느리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즐겁게 달려와서 노약자들이 지거나 이고 벼랑에 붙어서 올라가고, 서울로부터 온 자들도 또 붙들고 이끌고 들어와서 수일이 못 되어 성내가 가득 찼다. 그 성은 사면이 모두 절벽이요, 앞에만 한 가닥의 길이 통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꿴 물고기처럼 올라왔다.
이에 안으로는 양식과 기계를 저축하고 땔나무를 쌓고 우물을 파서 수개월 준비를 하고 밖으로는 수레를 걸치고 함정을 설치하여 돌을 실어 공중에 달아매어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성첩(城堞) 위에는 굳센 활과 독한 화살을 벌여 놓고 화총(火銃)을 사이에 끼워놓고 밤낮으로 몸소 순시하니 성중에서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 또 서울에서 온 박(朴)가란 사람과 약속하기를,
하니, 박씨가 승낙하고 가서 한 군사를 시켜 적이 오는가를 정탐하게 하였더니 군사가 가지 아니하고 중로에서 돌아와서 속이기를,
하였다. 박씨가 그 말을 믿고 안장을 풀고 갑옷을 벗고 냇가에서 쉬면서 적이 이미 그 뒤를 습격할 줄을 몰랐다가 몸만 빠져 나와 달아났다. 적이 이미 본주(本州)에 들어오니 여러 사람이 다 벌벌 떨었으나 김제갑은 요동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맹세하여 더욱 가다듬으니 여러 사람이 의기에 감동되어 울었다.
적이 이쪽의 방비가 있는 줄을 알고는 글을 써서 긴 나무끝에 매달아서 들여보내어 이익으로 꼬이고 위엄으로 협박하였다. 김제갑이 칼을 빼어 손수 적의 심부름꾼을 베고 도로 걸상에 걸터앉는데 머리털이 꼿꼿하게 서고 어깨가 솟아 산처럼 높고 무거웠다.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고, 늠름하여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튿날에 적이 반드시 크게 덮쳐올 것을 알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5리쯤 되는 다섯 봉우리 위에다 각기 군사 한 사람씩 벌여 세워 망을 보아서 적이 오면 각(角)을 불게 하였더니 날이 밝을 무렵에 다섯 군데의 각이 다 불어서 보고하는데 적의 창과 칼날이 산을 덮고 북을 두드리고 부르짖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밖에서는 미미한 구원병조차 믿을 데가 없고 성첩을 지키는 군사는 5천을 넘지 않으니 성중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이날 저녁에 왜적이 결사대 수십 명을 풀어서 절벽의 틈으로 기어올라 몰래 나와서 성에 구멍을 뚫고 올라와 고함을 지르며 돌진하고 대병을 지휘하여 성을 넘으니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김제갑이 오히려 군복을 입고 걸상에 앉아 내려오지 아니하고 활을 당겨 장차 적을 쏘려하니 적이 먼저 쏘아 맞추어 화살이 등에 꽂혔으나 오히려 내려오지 않았다.
적이 김제갑을 협박하여 걸상에서 내려 절하게 하니 김제갑이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드디어 부인 및 한 아들과 함께 죽었다. 적이 그의 굴종하지 않는 것을 의롭게 여겨서 슬퍼하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의 막하사(幕下士) 조문벽(趙文璧)이 죽지 않고 벗어났다가 김제갑 및 부인과 아들의 시체를 수습하여 산기슭에 매장하였는데, 지금까지 길가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제갑의 나이 68세였다.
원주 영원산성(자료: 원주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