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공주 마곡사에서
문화유산 답사기들을 보면 자기 자신의 느낌보다는 이미 알려진 유래나 연혁, 그리고 안내표지판 등과 유명한 사학자나 건축가들이 쓴 글을 인용하여 나도 이런 곳을 다녀 왔다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사진 몇장으로 갈음되는 답사기는 큰 의미가 없다. 내가 5년 전에 갔다온 마곡사를 다시 다녀온 것은 마곡사의 가람배치 때문이다. 마곡사의 가람배치에서 전각들의 위치나 규모에 따른 공간구성과 대웅보전으로 진입하는 동선의 흐름은 계획된 것이라기 보다는 사찰을 확장하면서 배치와 동선이 변한 것이 아닌가한다. 계곡의 합류지점을 중심으로 세개의 영역으로 구분되는 배치와 해탈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배치는 대웅전이 중심이 아니라, 대광보전이 사찰의 중심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곡사의 주존불이 석가모니가 아닌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이다. 마곡사의 배치나 동선의 부조화도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보전을 대광보전 뒤에 배치하면서 두 건물 사이의 고저차를 극복하지 못한데서 발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곡사의 유래와 배치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것에 비하면 단지 두번의 답사로 그 느낌을 쓴다는 것이 어찌보면 성급한 결론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곡사의 유래와 배치에 대한 개인적인 소견을 적어본다
마곡사를 처음 다녀갈 때와 다시 다녀오면서 느끼는 것은 사찰이 위엄이 있다기보다는 숲 속에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곡사의 유래는 숲 속에 숨어 있는 절이란 뜻이 아닌가 싶다. 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마곡사 입구가 아닌 요사체가 먼저 보이기 시작하지만 숲과 요사체의 건물에 가려져 본당인 대광보전이나 대웅보전이 보이질 않는다. 계곡 건너편에 있는 마곡사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곡사의 해탈문으로 향한다. 영산전과 명부전은 평지가 아닌 서측 산기슭에 위치하여 이중적인 동선으로 분리된다. 이는 평지에 있어야할 전각들이 계곡의 홍수로 인하여 재해에 안전한 산기슭으로 재배치된 것이 아닐까하는 추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곡사 전각들의 배치에서 계곡을 끼고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근래에 축조된 것들 뿐이다. 천왕문에서 대광보전 사이에 위치한 극락교도 본래의 위치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마곡사의 가람배치는 화재나 홍수로 인하여 훼손된 전각들을 재축하면서 그 배치가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발굴조사 등을 통하여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마곡사를 중심으로 본 개인적인 느낌이기에 더 많은 조사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더 많은 공부를 한 뒤에 마곡사를 다시 찾아 갔을 때는 어떤 느낌으로 보일 것인지 궁금하다. 같은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그를 보는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마곡사 대광보전에서
마곡사 대광보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불상은 독특한 배치를 하고 있다. 마곡사 대광보전의 비로자나불은 대광보전 뒤에 대웅보전이 있기에 대광보전의 비로자나불을 옆으로 모신 것이지만,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은 왜 ! 법당의 중앙이 아닌 측면에 배치되어 있을까 ? 일부에서는 무량수전이 금당이 아닌 강당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그에 대한 해석은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다. 불교가 처음 전래된 삼국시대에는 금당 뒤에 강당이 배치되었지만, 부석사 무량수전을 강당으로 추정했을때, 금당은 어디에 존치하고 있었을까 ? 우리나라 가람배치에서 가장 혼돈을 주는 곳은 화엄사의 각황전과 대웅전일 것이다. 일반적인 가람배치에 따른 명칭으로 보면 화엄사의 각황전은 대웅보전이라고 해야 하고, 대웅전은 비로전이라고 해야한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역사와 화엄사의 연혁을 살펴보면, 화엄사의 4사자3층석탑은 적멸보궁이기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각황전과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웅전이란 명칭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찰에서 석탑은 대웅전 앞에 설치된다. 화엄사 4사자3층석탑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사탑이기에 화엄사의 대웅보전에 석가모니불을 모신다는 것이 모순일 수도 있으나, 훗날 석가모니불을 모신 장육전을 축조하고, 소실된 장육전터에 대웅전을 재축하면서 대웅보전이 아닌 각황보전으로 명명하고,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이 있는 비로전(적광전)을 대웅전으로 명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며, 한국불교의 역사와 사찰의 중수에 따른 변천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통도사 대웅전에는 뒷편의 금강계단이 있어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이 없지만, 적멸보궁이라는 대부분의 사찰에는 대웅전에 석가모니불 또는 아미타불 등을 배치하고있다. 한국불교의 가람배치는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작은 암자에서 시작하여 대사찰로 변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혼란으로도 보여진다. 만다라의 표현이라는 가람배치가 특정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시대에 따른 변천일 것이다. 근래에 건립되는 신흥사찰들이 불교박물관 또는 백화점처럼 변한 것도 특정종파의 교리보다는 모든 종파를 포옹하려는 흐름과 자본주의 산물인 수익 때문일 것이다.
마곡사의 유래와 배치에 대하여
마곡사(麻谷寺)에서 마(麻)는 수풀이 우거진 곳을 의미한다. 마곡사의 안내판과 달리 마(麻)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하늘재의 옛지명인 계립령(마골재)에서 계립은 마(麻)의 꼅질의 방언인 겨릅 또는 겨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문경새재의 옛지명인 상모(上毛) 또는 상초(上草)가 수풀이 우거진 곳을 의미하는 것처럼 마(麻)가 우거진 곳을 의미한다. 하늘재에 인접한 포암산의 포(布)는 산의 형상이 마(麻)로 짠 베옷처럼 보이는 바위를 표현한 것으로도 추정한다. 하지만 계립령은 그와 무관한 계(鷄)로 표기되었기에 신라의 땅이라는 계림(鷄林)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지명이다. 마곡사의 유래에서 마(麻)는 마곡사가 번창하였다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마곡사가 창건되기 이전에 계곡이 만나는 절터가 수풀이 우거졌다는 표현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마곡사의 가람배치에서 풍수지리나 도참사상의 삼태극에 대한 유래도 명당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설화일 뿐이다. 마곡사의 가람배치를 보면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동시대에 축조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여지며, 사찰의 입구인 해탈문과 천왕문 옆에 영산전과 명부전이 위치하는 것도 마곡사의 가람배치가 본래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라, 작은 규모의 사찰이 대사찰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단순한 가람배치가 동양의 대표적인 도교사상의 풍수와 도참의 영향을 받아 궁궐과 같은 배치로 변하면서 극락정토인 만다라를 추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마곡사의 지리적 입지조건은 계곡의 합류지점을 중심으로 세계의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가람배치는 계곡의 극락교를 경계로 하여 두개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해탈문과 천왕문에서 대광보전으로 이어진 중심축과 달리 대웅전의 배치는 극락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하여 중심축에서 기울어져 있으며,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진입통로도 대웅전 중앙이 아닌 측면으로 우회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과 대중에게 설법을 하는 영산전은 해탈문과 천왕문 옆에 있어 사바세계로 들어가는 교화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마곡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대광보전이 사찰 중심에 자리하고 있지만, 비로자나불은 대광보전 중앙에 모셔지질 않고 측면으로 위치한다. 이는 본래부터 측면에 있던 것인지 아니면 뒷편에 대웅전을 세우면서 불상의 위치가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기에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앞서 말한 부석사 무량수전의 불상의 배치와 달리 대웅전의 불상을 배려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대웅전을 세우면서 비로자나불의 위치 측면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마곡사의 대광보전은 대웅전보다 크게 보인다. 마곡사 대웅전은 대광보전보다 작으면서도 멀리 위치하여 더욱 작게 보이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웅전을 2층으로 축조하여 위상을 높이고,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을 우회시키긴 했지만, 그 시각효과는 어색한 느낌이다. 또한 대웅전과 대굉보전이 대칭을 이루지 않는 것도 극락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보정한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극락교에서 바라보는 이미지는 대웅보전보다는 대광보전이 중심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마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