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충주 보련사지에 대하여

산골어부 2016. 5. 8. 17:51



충주 보련사와 천룡성에 따른 기록들을 살펴보면은 보련산의 옛지명은 천룡산이다,  하지만 천룡산 보련사가 있던 절터는 천룡사지가 아니라, 보련사지일 것이다, 그리고, 천룡산이 현재의 지명인 보련산으로 변천되면서 고려사절요에 나타나는 천룡성 또는 천룡산성도 보련산성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의 기록에는 천룡산(고)성은 봉황성으로 전해진다. 다시 말하면 가장 오래된 고려사절요의 기록으로 보면은 천룡(산)성이고, 현재의 지명으로 보면은 보련산성이 된다. 더 쉽게 말하면 시대변천에 따라 노은 보련골에서 보면은 보련산성이고, 수룡의 천룡에서 보면은 천룡산성이고, 가흥의 봉황골에서 보면은 봉황성이 되는 것이다. 즉 지명의 변천은 그 주변의 중심지나 사건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근래에 향토사학자의 일부가 수룡리 천룡마을 뒷산 기슭에 위치한 절터의 지표조사에서 발견된 "天龍" 등의 명문와를 근거로 천룡사 또는 천룡사지로 추정하고, 그를 근거로 충주 보련사의 옛절터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서에서 천룡사나 천룡사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수룡리 천룡마을 뒷산 기슭에 위치한 옛절터를 보련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천룡사로 볼 것인가는 정밀한 발굴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어야만 가능하기에 이를 보련사지나 천룡사지로 단정짓는 것과 보련산에 보련사만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다. 고려의 대몽항전에서 인근의 장미산성이 아니라 천룡성에서 충주목 여주민들이 칩거하여 항전했다는 사실은 천룡성이 장미산성보다 후대까지 유지관리되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천룡마을의 절터는 보련사일 수도 있지만, 보련사에 딸린 말사일 수도 있고, 고구려시대나 통일신라 또는 고려의 대몽항전 이전에 존재했던 보련사와 관련없는 또 다른 폐사지로도 볼 수가 있다. 보련산 주변에서 발견된 "건흥오년명금동광배"는 고구려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며, 보련산 보련골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도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기에 조선시대에 기록된 보련사나 천룡성에 대하여 집착하기보다는 고구려의 국원성, 중원고구려비, 봉황리마애불상군, 장미산성 등과 같은 고대유적 등에 대한 고찰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조의 건국이념인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원을 정리한 사사혁파에 나타나는 충주 보련사는 조선이 건국하기 이전인 고려시대에도 보련산 기슭에 존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사사혁파에 나오는 "결"이란 단위를 환산하면 약 3천평에서 6천평에 이르는 경작지로 세종실록에 기록된 사원전 150결, 승려 70명과 노비 70명으로 제한했다는 것은 대규모 사찰이거나, 주변의 소규모 사찰을 통폐합하여 중수시킨 사찰일 것이다. 특히, 보련산 일대에서 대규모 폐사지의 석조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왕명에 의한 국가사업의 대사찰이기보다는 승려들이 산간오지의 폐산성 일대를 선원으로 하고, 산성에 딸린 토지를 사원전으로 삼은 것으로도 추정된다.  입보용 산성을 답사하다가 보면은 산성 내에 사찰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승군에 대한 걔념과 조선시대의 승군에 대한 개념은 전혀 다르고, 조선시대의 승군은 억불정책에 따라 개국초기부터 군대라기보다는 국가의 토목사업에 강제로 동원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승군의 활약 등으로 그들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오지의 산성들이 승군의 주둔지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충주 보련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인 성종 5년(1474년)에 여주 신륵사로 이관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충주 보련사는 조선시대의 승군과는 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도은 이숭인이나 점필재 김종직의 시에 나타난 보련사도 불심보다는 은둔이라는 피신처로 보일 뿐이다. 보련사가 천룡마을의 절터에 있던 후대 사찰일 수도 있지만, 조선시대에 나타난 기록은 보련사에 대한 기록으로 보련사지에 관한 것 뿐이기에, 보련산 주변에서 발견된 "건흥오년명금동광배"와 보련산 보련골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은 조선시대의 충주 보련사보다는 그 이전에 있었던 사찰과 관련된 유물일 것이며, 현재의 보련산이나 보련산성 그리고 보련사지는 충주 보련사에 의한 변천된 명칭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수룡리 천룡마을 뒷산 기슭에 위치한 절터가 농경지로 훼손되어 오다가 사방댐 건설로 인하여 충주의 향토사학계와 환경단체에서 공사중단과 더불어 발굴조사를 요구하고 있지만, 노은지역의 유지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은 충주 보련사나 천룡성에 대한 역사적 가치는 관심조차도 없는 실정이다. 노은면의 지명유래에서 국망산의 유래가 명성황후의 민담으로 변질되고 있었는데, 임오군란 당시 7일에 불과한 중군전의 임시 피난처에 행궁터를 건립한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고종으로 부터 거절 당하고, 건립비 문제로 소송을 제기한 지역 유생들과 그를 빙자하여 유허지 기념비와 명성황후 노래비, 그리고 특정인의 공적비가 건립된 것처럼 역사적 사실보다는 잘못된 애향심에 호소하는 향토사학은 역사왜곡일 뿐이며, 근시안적인 역사관이다. 국망산은 국원성과 중원경에 우뚝 솟아 국원성을 우러러보는 산이고, 천룡산으로 불리우던 보련산은 국원경을 지켜온 산인데, 지역민들이 자기 고장에서 발견된 "건흥오년명금동광배"와 보련산 보련골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같은 유물은 물론이고, 보련산성이나 보련사지의 보존이나 발굴조사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노은의 향토역사가 변질된 민담으로 왜곡된 사례를 살펴보면은 국망산 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에서 유래한 원통산이 원한 맺힌 산과 고려장으로 변질되고, 수리산이 수레의산으로 변질되는가 하면, 노은면의 지명유래조차도 조선 중기의 인물로 변질되는 등 수없이 많다.  역사란 지나간 기록일 뿐이지만, 그를 개인이나 가문 또는 지역이기주의에 따라 왜곡할 수는 없다. 수없이 많은 유적지가 흔적없이 사라졌다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참고자료 1]충주 보련사 기록들(http://cafe.daum.net/chungjuhoMTB/ia4o/141)

 

(국역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 갑진(1424,영락 22)

 

 

4월5일 (경술)
불교의 혁파에 관해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36개소의 절만을 남겨두자는 예조의 계

예조에서 계하기를,
“석씨(釋氏)의 도는 선(禪)·교(敎) 양종(兩宗)뿐이었는데, 그 뒤에 정통과 방계가 각기 소업(所業)으로써 7종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잘못 전하고 거짓을 이어받아, 근원이 멀어짐에 따라 말단(末端)이 더욱 갈라지니 실상 그 스승의 도에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또 서울과 지방에 사사(寺社)를 세워, 각 종(宗)에 분속(分屬)시켰는데, 그 수효가 엄청나게 많으나, 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절을 비워두고 거처하는 자가 없으며, 계속하여 수즙(修葺)하지 않으므로 점점 무너지고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계(曹溪)·천태(天台)·총남(摠南) 3종을 합쳐서 선종(禪宗)으로, 화엄(華嚴)·자은(慈恩)·중신(中神)·시흥(始興) 4종을 합쳐서 교종(敎宗)으로 하며, 서울과 지방에 중들이 우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36개소의 절만을 두어, 양종에 분속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전지를 넉넉하게 급여하고 우거하는 중의 인원을 작정하며 무리지어 사는 규칙을 작성하여, 불도(佛道)를 정하게 닦도록 할 것입니다. 이어 승록사(僧錄司)를 혁파하고, 서울에 있는 흥천사(興天寺)를 선종 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 도회소(敎宗都會所)로 하며, 나이와 행동이 아울러 높은 자를 가려 뽑아 양종의 행수 장무(行首掌務)를 삼아서 중들의 일을 살피게 하기를 청합니다. 이제 분속하려는 서울과 지방의 사사(寺社)와 우거하는 중의 정원과 급여할 전지의 결수(結數)를 가지고 낱낱이 아룁니다.
선종에 예속된 것으로는 절이 18개소, 전지(田地)가 4천 2백 50결입니다. 서울 흥천사는 원속전(元屬田)은 1백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항거승(恒居僧)은 1백 20명입니다. 유후사(留後司) 숭효사(崇孝寺)는 원속전이 1백 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항거승은 1백명이며, 연복사(演福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항거승은 1백명이며, 개성 관음굴(觀音堀)은 원속전이 45결인데, 경기 이번에 1백 5결과 수륙위전(水陸位田) 1백결을 더 주고, 항거승은 70명이며, 경기 양주(楊州) 승가사(僧伽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항거승은 70명입니다. 개경사(開慶寺)는 원속전이 4백결이고, 항거승이 2백명이며, 회암사(檜巖寺)는 원속전이 5백결이고, 항거승이 2백 50명이며, 진관사(津寬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과 수륙위전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고양(高陽) 대자암(大慈菴)은 원속전이 1백 52결 96복(卜)인데, 이번에 97결 4복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입니다. 충청도 공주(公州) 계룡사(鷄龍寺)는 원속전이 1백 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 입니다. 경상도 진주(晉州) 단속사(斷俗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경주(慶州) 지림사(祗林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전라도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태인(泰仁) 흥룡사(興龍寺)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7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강원도 고성(高城) 유점사(楡岾寺)는 원속전이 2백 5결인데, 이번에 95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50명이며, 원주(原州) 각림사(覺林寺)는 원속전이 3백결이고, 거승은 1백 50명입니다. 황해도 은율(殷栗) 정곡사(亭谷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함길도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는 원속전이 2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입니다.
교종(敎宗)에 소속된 것으로는 절이 18개소, 전지가 3천 7백 결입니다. 서울 흥덕사는 원속전이 2백 50결이고, 거승은 1백 20명이며, 유후사 광명사(廣明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신암사(神巖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개성(開城) 감로사(甘露寺)는 원속전이 40결인데, 이번에 1백 6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경기 해풍(海豊) 연경사(衍慶寺)는 원속전이 3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주고, 거승은 2백명이며, 송림(松林) 영통사(靈通寺)는 원속전이 2백결이고, 거승은 1백명이며, 양주(楊州) 장의사(藏義寺)는 원속전이 2백 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이며, 소요사(逍遙寺)는 이번에 속전이 1백 50결이고, 거승은 70명입니다. 충청도 보은(報恩) 속리사(俗離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1백 4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충주(忠州) 보련사(寶蓮寺)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7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경상도 거제(巨濟) 견암사(見巖寺)는 원속전이 50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1백 2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입니다. 전라도 창평(昌平) 서봉사(瑞峯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전주(全州) 경복사(景福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강원도 회양(淮陽) 표훈사(表訓寺)는 원속전이 2백 1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50명입니다.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월정사(月精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는 원속전이 2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입니다. 평안도 평양(平壤) 영명사(永明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2 집 591 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국역조선왕조실록)성종 5년 갑오(1474,성화 10)

 

7월15일 (무진)

호조에 전지하여 보련사와 장의사의 위전 중에서 일부를 신륵사에 옮겨 주다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
보련사(寶蓮寺)의 위전(位田) 1백 40결(結)과 장의사(藏義寺)의 위전 중에서 1백 결을 신륵사(神勒寺)에 옮겨 주고, 또 매년 봄·가을에 소금 20석(碩)을 주고, 정인사(正因寺)에도 봄·가을에 소금 5석을 주라.”
하였다.
【원전】 9 집 130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농업-전제(田制) / *사상-불교(佛敎)


[주D-001]결(結) : 토지 면적의 단위. 모든 전지는 토성(土性)의 비척(肥瘠)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양전(量田) 곧 토지 측량에 사용하는 전척(田尺)의 길이도 토지의 등급에 따라 상이(相異)하였음.

 

 

 

세종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자기소(磁器所-사기그릇을 굽는 곳)가 1이니, 주의 서쪽 보련동(寶蓮洞)에 있고,
○  보련사(寶蓮寺)【교종(敎宗)에 붙이고, 전지 1백 50결을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도 / 충주목

 

【불우】 보련사(寶蓮寺) 천룡산(天龍山)에 있다.

 

도은집 제3권 시(詩)

 

 

보련사 주지에게 부치다〔寄寶蓮住持〕

 


보련사 안에 청정한 낙이 있는데 / 蓮社有淸樂
도인이 밖에서 구할 게 있으리오 / 道人無外求
머리를 돌리니 저녁 해 뉘엿뉘엿 / 回頭日欲暮
산의 푸른 이내 멀리서 아른아른 / 山翠遠浮浮

 

점필재집 시집 제9권 시(詩)

 

 

보련사의 주지로 가는 공상인을 보내다[送空上人住持寶蓮寺]

 


바쁠 때는 보따리 메고 조용할 땐 참선하여라 / 忙裏挑包靜裏禪
공사의 가고 머무름은 인연을 따를 뿐이네 / 空師去住只隨緣
잠깐 한 석장이끌어 천령을 하직하고서 / 暫携一錫辭天嶺
스스로 삼승호위하러 보련사로 들어가누나 / 自衛三乘入寶蓮
풀밭에 앉으면 서리 바람이 방석에 불 게고 / 草坐霜風侵白氎
숲속을 걷노라면 여울물이 행전에 뿌려지리라 / 林行石瀨濺靑纏
쇠잔한 성 병든 태수는 제대로 작별 못해주니 / 殘城病守難爲別
누가 한공이 태전 사랑했다 괴이하게 여기랴 / 誰怪韓公愛太顚


 

[주D-001]석장 : 중이나 도사(道士)가 짚는 지팡이를 이르는데, 또는 선장(禪杖)이라고도 한다.
[주D-002]삼승 : 불교(佛敎)의 용어로,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세 가지 교법(敎法)을 말한다.
[주D-003]누가 한공이……여기랴 : 한공(韓公)은 당(唐) 나라 한유(韓愈)를 이르는데, 그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어 있을 적에 태전(太顚)이라는 중이 썩 위인이 훌륭하므로 그를 불러서 같이 노닐고 또 서로 왕래도 하였으며, 그 후 조주(潮州)를 떠날 적에는 그에게 의복(衣服)을 남겨주고 작별을 하기까지 하여, 어떤 사람들에게 한유가 불씨(佛氏)를 숭봉(崇奉)한다는 오해를 받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이 내용은 한유가 상서(尙書) 맹간(孟簡)에게 준 편지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참고자료 2] 천룡산과 천룡성에 대한 기록들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계축 40년(1253), 송 보우(寶祐) 원년ㆍ몽고 헌종 3년

 

 

○ 몽고 군사가 양근성(楊根城)을 포위하자 방호별감 윤춘(尹椿)이 무리를 거느리고 나가서 항복하였다. 몽고 군대에서 정예병 6백 명을 뽑아 춘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몽고 군사 3백 명을 머물러 진압하며 벼를 베어 군량을 준비하였다. 윤춘이 원주(原州) 방호별감 정지린(鄭至麟)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지린이 듣지 않고 성 지키기를 더욱 굳게 하니, 몽고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갔다.
○ 이현(李峴)이 몽고 군사와 더불어 천룡산성(天龍山城)을 치자,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과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이 나와 항복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갑인 41년(1254), 송 보우 2년ㆍ몽고 헌종 4년

 

○ 봄 정월에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 안경공 창이 몽고군이 주둔한 곳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갖추어 군사를 먹였다. 아모간이 군사를 되돌려 갔다.
○ 경성에 계엄(戒嚴)을 해제하고, 소경 곽여익(郭汝翼)ㆍ낭장 정자여(鄭子璵) 등을 보내어 몽고 군사가 돌아가는지 돌아가지 않는지를 탐지하고, 겸하여 천룡성과 양근성을 안무하게 하였다.
○ 이현을 저자에 내어 죽이고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그 아들 지서(之瑞)ㆍ지송(之松)ㆍ지수(之壽)ㆍ지백(之栢)ㆍ영년(永年) 등을 모두 바다에 던지고, 현의 아내ㆍ누이ㆍ사위는 모두 섬에 귀양보냈다. 현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사람을 중상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어 뇌물을 많이 받으니, 사람들이 '은상서(銀尙書)'라고 별명을 지었다. 몽고에 사신가서 2년 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에 야굴(也窟)에게 유세하기를, “우리나라 도성이 섬 속에 끼어 있어서 공부(貢賦)가 모두 주군(州郡)에서 나오니, 대군이 만일 가을 전에 갑자기 국경에 들어간다면 도성 사람들이 위급하게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금패(金牌)를 받은 것을 인하여 야굴을 인도하여 와서 항상 몽고군을 따라다니며 여러 성을 달래어 항복시키고, 또 양근과 천룡 두 성을 협박하여 말하기를, “양산ㆍ동주ㆍ춘주 등 여러 성이 모두 항복을 하지 않다가 도륙을 당하였으니, 빨리 나와 항복해야 할 것이다. 만일 지키는 장수가 허락하지 않거든 곧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라." 하였다. 항복하자 스스로 다루가치가 되어 드디어 그 백성을 거느리고 충주를 쳤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몽고 군사가 돌아가자 현이 왔는데, 그동안 군중에서 노획한 부녀와 재물 보화를 전부 자기 몫으로 만들어 은비녀가 한 상자에 가득하고 다른 물건도 이와 비등하였다. 그가 형(刑)을 받자, 어떤 사람이 그의 입을 차며 말하기를, “몇 사람의 은과 비단을 먹어 치웠느냐?" 하였다.
○ 2월에 양주와 동주를 강등하여 현령이 다스리는 고을로 만들고 금성(金城)은 감무(監務)가 다스리는 고을로 만들었으며, 천룡성 별감 조방언(趙邦彦)과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을 섬에 귀양보냈다.
○ 정준(鄭準)ㆍ최평(崔坪)ㆍ임경필(林景弼)을 모두 추밀원 부사로, 충주산성 별감 낭장 김윤후를 감문위 섭상장군으로 삼고, 그 나머지 전공(戰功)이 있는 자와 관노와 백정도 또한 차등 있게 벼슬을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산천】 대림산(大林山)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말흘산(末訖山) 주 북쪽 30리에 있다. 심항산(心項山)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주 서쪽 30리에 있다. 망이산(望夷山) 주 서쪽 91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천룡산(天龍山) 주 서쪽 5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풍류산(風流山) 주 남쪽 23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주 서쪽 45리에 있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 오동산(梧桐山) 주 동쪽 7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주 동쪽 5리에 있다. 종당산(宗堂山) 주 북쪽 13리에 있다. 이상한 돌이 생산되는데 세밀하여 비갈(碑碣)을 만들 만하다.

 

【불우】 보련사(寶蓮寺) 천룡산(天龍山)에 있다.

【고적】봉황성(鳳凰城) 주 서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천 1백 21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 천용산 고성(天龍山古城) 봉황성(鳳凰城)이라고도 한다. 둘레는 6천 1백 21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장미산 고성(薔薇山古城) 유적(遺跡)이 있다.


 

[참고자료 3] 청주박물관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 유물번호신수1714
  • 국적/시대한국-통일신라
  • 크기높이 10.1cm
  • 출토지충청북도 충주시 연하동
  • 재질금속- 금동
  •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보관 앞에 작은 부처인 화불(化佛)이 있으나 녹이 많이 슬고 마멸이 심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양 어깨로 드리워 졌으며, 천의(天衣)는 어깨와 굽혀진 팔 안쪽으로 늘어져 있는데 오른손과 오른쪽 천의 일부는 떨어져 나갔다. 광배는 없으나 이를 달기 위한 돌기가 뒷면 중앙에 남아 있다. 얼굴은 둥글지만 전체적으로 곡선미와 세련미가 나타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제작 기법을 잘 따르고 있다.

청주박물관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참고자료 4]청주박물관 '건흥 5년'이 새겨진 금동 광배 ('建興五年'銘金銅光背)

  • 유물번호M335-6
  • 국적/시대한국-고구려
  • 크기높이 12.4cm
  • 출토지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 재질금속- 금동
  • 지정번호
  • 불상 뒤에 연결되었던 배 앞머리 형태의 광배(부처의 몸에서 나는 빛 장식)이다. 가운데 아래쪽에 뚫려있는 사각형 구멍은 불상을 끼워 고정했던 구멍이다.
    좌우 끝에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본래 삼존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꽃무늬의 머리 광배를 가운데 배치하였고, 그 위로 조각된 불꽃무늬와 앉은 자세의 작은부처[화불(化佛)]는 화려함과 장엄함을 더해 준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X'자형의 천의(天衣)를 입고 있으며,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불상을 만들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건흥(建興)’은 고구려의 연호(年號)로 보이며, 충주고구려비와 함께 충북지역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고구려 유물이다.

    建興五年歲在丙辰
    佛弟子淸信女上部
    兒奄造釋迦文像
    願生生世世値佛聞
    法一切衆生同次願
    건흥 5년 병진년에 부처님의 제자이자 청신녀인
    상부의 아엄이 석가모니상을 만들다
    원하건대 태어나는 세상마다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듣게 하옵소서
    모든 중생도 이 소원과 같이 하옵소서


건흥5년명금동광배(국립청주박물관) 

 

건흥5년명금동광배 뒷면

이 광배는 충주 노은면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현재 가운데에 끼웠던 주존불은 없어지고 네모난 구멍만 남아 있다. 부처와 2구의 협시보살로 조성된 일광삼존불의 배치와 치솟는 불꽃무늬 등은 고구려 불상과 비슷하다. 뒷면에는 아래와 같은 발원문이 있다. 연호와 불상의 형식으로 보아 이 광배는 고구려계 불상으로 생각되며, 중원고구려비와 함께 충북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고구려계 유물이다.



광배의 뒷면에는 "건흥5년(536년 또는 596년) 병진년에/불제자 청신녀.상부아암이 /석가모니상을 만들다./세상에 태어나도 불법을 듣기를 기원하며/모든 중생도 이렇게 기원한다" 는 내용의 5행 39자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광배의 중앙에는 단순한 두광과 신광을 새기고 좌우에 협시보살상이 함께 주조되었다. 주연부의 화염문은 매우 강한 율동감을 가지고 있으며 화불(化佛) 3구가 부조되어 있다. 부처와 2구의 협시보살로 조성된 일광삼존불(하나의 대형 광배면에 삼존불을 배치)의 배치와 치솟는 불꽃무늬, 보살상에 보이는 율동적인 조형성, 명문의 형식이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1963년 7월 경상 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고구려불상)과 비슷하며 충주지역이 한때 고구려의 영토였음으로 미루어 고구려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흥5년명금동광배 앞면

 


 

[참고자료 5] - 천룡사지

 

-위치: 충주시 노은면 수룡3리

-시대: 고려시대

-내용:

   보련산 동남사면의 계곡에 위치하는 천룡마을의 윗쪽 산 40번지와 339-1번지 밭을 중심으로 과수원과 주변 밭 일대 약 3,000여 평이 사지로 추정된다. 지표 상에서는 고기뼈무늬·격자문·무문계의 와편이 산포되어 있고 장방형이나 방형의 전과, 청자, 백자, 토기편 등이 수습된다. 지표조사시 암막새와 숫막새편을 수습하였으며 많은 평와편 중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기와편도 확인할 수 있었다. 명문와에는 '大天龍…' '天用' '天龍' 등의 글씨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천룡(보련)산성과 관련된 천룡사터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사역은 보련산 동남사면 기슭의 경사면을 3-4단의 석축으로 구분한 모습으로 약 3,000여 평에 달한다. 석축은 정치한 방형의 석재를 사용하여 쌓아올린 모습이며, 암·수막새기와, 명문와, 전이 사용된 고급스런 대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지의 앞쪽으로는 보련산에서 흘러나온 맑은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곳을 경계로 하여 사역을 구분하는 높이 5m 정도의 석축을 축조하고 있다. 사지 내에는 초석으로 보이는 대형의 석재들과 돌 확 등이 산포되어 있는데, 경작할 때 많은 주초석이 발견되어 밭의 구석으로 치워져 있는 상태이다. 주민들은 이 일대를 절터골이라고 부르며 천룡사터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곳 사역은 정남향의 포근한 지점에 위치하며 멀리 평풍산을 안산으로 하고 있다.

  이곳 사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고려시대 몽고와의 싸움에서 분전한 '天龍山城' 이라는 곳을 지금의 보련산 정상에 있는 보련산성이라 비정하는 것과 비교해 보련산과 천룡산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寶蓮寺在天龍山"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보련과 천룡은 같은 곳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현재 수습되는 명문와편으로 보아 이곳이 천룡사지임이 명확하다고 할 때 기록에 보이는 보련사가 바로 이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보련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1424년) 4월 5일(경술일)에 기록된 불교를 교·선 양종으로 나누고 36개소의 절만 남기자는 건의를 받아들이는 내용에 나온다. 즉 교종에 소속된 18개의 사찰 가운데 보련사가 남게 되는데 150결의 법주사의 200결, 100명의 거승과 비교되는 큰 사찰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현재 노은면 보련산 기슭에서 이곳 천룡사지 정도되는 규모의 사찰을 찾을 수 없고, 보련사지라고 추정하였던 사지가 기록과 비견할 수 없는 정도의 작은 암자터라면 이곳을 보련사지로 추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재 경작 등으로 인하여 사지의 일부가 보다 빠르게 훼손되고 있으므로 정밀조사 및 발굴을 시행하여 사지의 성격을 밝히고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