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암리 고분군에서
누암리 고분군에서
역사에 흥미를 느끼면서 무심코 바라보던 무덤들이 궁금해졌었다. 유람삼아 다니던 고건축답사나 산책하듯 둘러보던 산성답사와 달리 고분답사는 답답하면서도 신기했다. 고대역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중원문화권의 무덤들을 찾아 다니기를 되풀이 했다. 백제와 신라와 가야 고분들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지만 비전문가의 눈에는 고분들을 구분하는 것조차도 쉽지않고 의구심만 커져갔다. 어찌 보면는 민족과 국가를 내세운 한국사나 역사교육에 세뇌가 된 역사관을 떨치지 못하고 그를 이해하려던 것과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과 안내문, 발굴보고서와 논문, 애향심에 충실한 향토사 등은 내게 더 큰 혼란만 안겨준 것같았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내가 무덤에 대한 이야기나 글을 쓸 수 있을까 ? 수없이 둘러본 누암리 고분이지만 또 다시 바라본다. 이 글은 고분의 형식이나 발굴된 유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누암리 고분군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본다.
고분과 말무덤에 대하여
고려장지나 말무덤에 대한 민담은 우리나라 전역에 퍼져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무덤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다. 말무덤이란 보편적인 무덤보다 큰무덤을 말한다. 큰무덤의 주인들은 권력과 부를 상징처럼 여겨 사후의 세계조차도 자신의 권력과 부를 누리고자 하며, 그들의 후손들에 의하여 가문의 영광처럼 묘역이 조성되기도 한다. 고려장지는 옛무덤들이 산재한 곳이다. 옛도시와 촌락 주변이나 전쟁터 등에 조성되었던 무덤들이 가문이나 왕조가 몰락하면서 유지관리되지 못해 무덤의 내력을 알 수 없기에 큰무덤 또는 옛무덤들이라는 의미로 말무덤과 고려장지라고 전해지는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 비문에 쓰여진 것처럼 대왕의 무덤이 대대손손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권력이 사라지면 왕릉이라 할지라도 폐허가 되고, 도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진시왕릉도 산자들에 의해 관광용 진열대 위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현재의 국립묘지 뿐만 아니라, 공동묘지도 그 지위와 부에 따라 묘역을 달리하고, 묘지의 크기도 다르다. 우리가 살고있는 현재의 장묘문화는 고대문명의 장묘문화보다도 더 복잡하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나 왕보다도 더 큰 묘지들이 조성되기도 한다. 김해의 고분들을 답사하면서 최근에 조성된 노무현의 묘지를 둘러본 적이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에 다른 대통령과 달리 특이한 묘지와 묘역을 조성한 곳이다. 그에 대한 평가를 우리의 후손들은 어떻게 할까 ? 하는 의문을 던져보기도 했다. 가야세력의 종주국이었던 김해의 금관가야의 고분군들은 인접한 지역들의 고분군보다 미약하다. 대성동 고분군은 봉분의 형상마저도 구분하기 어렵지만, 김수로 왕과 왕비릉은 국가가 아닌 김해김씨의 문중에서 관리되어 왔기에 당시의 무덤보다도 더 화려하고 크게 남아 있다. 가야고분 중에서 김해의 금관가야 고분군이 가장 초라한 것은 금관가야가 가장 먼저 멸망했으며, 자치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신라에 복속되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고분군들이 신라의 고분군들보다 작게 보이는 것도 신라나 가야고분처럼 국가로 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더 일찍 잊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왕릉들이 도굴과 발굴조사 대상에 제외된 것도 국가로 부터 보호를 받았다기보다는 경주를 본향으로하는 박.석.김이라는 왕족의 후예들에 의해 유지관리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왕릉의 명칭과 실제 왕릉의 주인이 다른 것도 조선시대 중기에 형성된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는 족보와 무덤 때문일 것이다.
중원경과 누암리 고분군에 대하여
누암리 고분군 뿐만 아니라, 중앙탑면 일대에는 수많은 고분들이 산재한다. 누암리 고분군은 신라의 고분군 중에서 한강유역에 잔존하는 가장 큰 고분군이다. 서울 방이동 고분이나 여주의 매룡리 고분군 등은 중원경 영역에 속한 소규모 고분군에 지나지 않으며, 낙동강 상류인 함창, 문경 고분군도 누암리 고분군보다 규모가 작게 나타난다. 그리고, 신라의 무덤양식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가장 늦은 신라말기까지 조성된 고분형태로 알려져 있다. 신라 중앙의 고분형식이 불교나 중국 영향을 받아 변한 것과 달리 지방의 고분들은 옛방식을 그대로 존속하여 왔다는 것이다. 이는 이 지역 뿐만 아니라, 낙동강 일대의 신라와 가야계 고분들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누암리 고분군이 더 늦은 시기까지 같은 고분형태를 유지했다는 것은 중원경에 있었던 지방호족들의 세력이 타지역보다 더 오래 지속됐다는 것이다. 방이동 고분군을 백제고분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내 눈에는 석촌동 고분군과 전혀 다른 신라계 고분으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가야계 고분들도 원삼국초기의 김해(금관가야)와 함안(아라가야)의 고분들을 제외하면 신라의 고분군들로 보일 뿐이다. 물론 지역의 향토사에서는 자기 지역의 독자성과 우월함을 세우려 하겠지만, 역사학자나 학계까지도 이에 편승하여 역사를 왜곡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누암리 고분보다도 하구암리 일대의 고분군은 더 넓은 지역에 더 많은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지만, 대부분 도굴되어 있으며, 사적지 지정이나 보호책도 없이 방치되어 훼손되고 있다. 그리고, 병마직골과 애강공장부지에서 발굴된 고분도 보호되지 못하거나 도로변에 복원되어 일반인들은 인식조차도 할 수가 없다. 지난 해에도 중앙탑면 일대의 산과 들을 찾아 다니며 고분들의 실태를 둘러본 적이 있었는데, 다른 지방의 자치단체와 달리 문화재 보호와 지정에 충청북도나 충주시가 더 소홀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강수.김생.우륵이라는 인물과 국보급 문화재를 3점 또는 4점이나 보유했기에 도굴된 고분들이 하찮게 보여지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싶다. 고대국가들의 수도인 왕경과 달리 지방권력에서 왕릉급의 무덤이 조성된 사례는 거의 드물지만, 발굴조사를 하면서 왕릉급의 유물들을 기대한다, 그리고, 신라가 국가체계를 갖추고, 불교가 정착된 후에 신라왕릉에서도 사라진 금동관 같은 유물을 기대하는 것같이 보인다. 국립충주박물관의 추진이 지지부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원문화권의 역사를 정립하고, 사적지 보호와 역사문화를 보존하지도 못하면서 중원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적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충주 하구암리고분군 분포 현황(2009년 5월 GPS측량 결과)
신라. 백제.가야 고분군들의 답사를 마치고, 그를 정리하면서 둘러 본 누암리 고분에는 토요일이었지만 방문객도 안내자도 없이 찬바람만 불고 었었다. 야산에 방치됐던 옛무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했다. 중원경이라는 지방권력이 중앙탑면 일대에 만들어낸 중원문화는 무엇일까 ? 영산강 일대에 형성된 고분군 세력이나 낙동강 유역에 형성된 신라와 가야계 고분과 누암리고분군은 무엇이 다를까 ? 수많은 발굴조사서와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정립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역사나 유적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모두가 다르겠지만, 무덤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의 관점이 아니라,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고구려도 신라도 백제도 가야도 아닌 자기 자신들의 이야기를 흔적으로 남겼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