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그늘 아래서/흔적을 찾아서

달천교와 달천보의 역사

산골어부 2019. 3. 17. 19:45

 

 

 

 

달천교와 달천보의 역사

 

 남한강의 지류인 충주 달천의 역사를 살펴보면은 단월동 강수욕장 부근에 달천보와 관개수로를 개설하려다가 포기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그리고, 달천교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절요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 등에 나타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저수지인 대제(함지)와 소제(연지)가 나타난다. 달천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몽고와 일본의 침략에 따른 충주전투일 것이다. 달천교와 달천보와 수로는 당시의 전투상황을 추정하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달천보와 그에 따르는 관개수로는 태안반도의 굴포운하와 비슷한 시기에 축조 또는 포기한 것으로 나타난다. 산성이나 저수지 제방과 달리, 수로의 개설은 암반굴착 시 암반이 단단하여 당시의 공법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달천보와 달천수로는 홍수기와 갈수기에 대한 수위의 편차나 단단한 암반을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계획 때문에 포기했을 것이다.

 

 

충주(忠州) 달천(達川)은 지금 수심(水深)이 3척(尺)이고 너비가 1백 50척(尺)이니, 만약 제방(堤防)을 쌓아 물을 끌어 들인다면, 뚝의 높이는 모름지기 10척(尺) 8촌(寸)이어야 하고, 뚝의 길이는 모름지기 4백 척(尺)이 된 뒤에야 흐르는 물을 끌어 댈 만합니다. 하지만 도랑을 칠 곳은 암석(巖石)이 험조(險阻)하여, 물이 통하도록 뚫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가령 제방을 쌓고 도랑을 친다 하더라도 달천(達川)은 발원(發源)이 깊고 길며 수세(水勢)가 사납고 급하니, 만약 우수(雨水)가 창일(漲溢)하게 되면 방죽과 도랑이 다 허물어져서 남음이 없을 터이니, 장구(長久)한 이익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물며 그 관개(灌漑)한 곳은 공한(空閑)한 묵정의 땅이 아니고, 이것이 다 기름진 땅[膏腴田]이겠습니까? 갑자기 대우(大雨)라도 있어 범람하여 복사(覆沙)하게 되면 도리어 그 해(害)를 받을 것입니다. 신의 소견(所見)으로는 천방(川防)은 편하지 않을 것 같으며, 아울러 도형(圖形)을 올립니다.(조선왕조실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