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충주 미륵대원지의 미륵당과 석불입상에 대하여

산골어부 2019. 6. 7. 00:10

 

 

 

 

 

(참고자료 사진: 발굴조사 전 모습)

 

 

 

1. 충주 미륵대원의 석불입상은 미륵불인가 ? 약사불인가 ?

 

충주 미륵대원지는 왜 ! 미륵대원지일까 ? 충주 미륵대원지에 있는 석불은 미륵불이 아니라, 약사불처럼 보인다. 약사불과 미륵불의 차이는 무엇일까 ? 우리나라에 잔존하는 석조미륵불을 조사해도 충주 미륵대원지의 석불과 유사한 불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똑같은 불상들이 절마다 있다면 기분은 어떨까 ? 주조된 금동불과 달리 불상마다 개성미가 넘치는 것이 석조불상의 특징이다. 요즈음은 조각술이 너무 뛰어나 초대형 석조물도 공예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예술적 작품성이 떨어지는 공산품같아 보인다. 충주 미륵대원지의 석불은 너무 단순하여 불상의 종류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손에 든 지물 뿐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손에 든 지물의 형상조차도 알 수가 없기에 석가모니불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서 지물의 형상을 자세히 보아도 약사불의 약사발(약합)인지 미륵불의 구슬(보주)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일반인들은 미륵불이라고 하면 미륵불인가보다 하고, 약사불이라하면 약사불인가보다 한다. 그리고, 전문가를 자처하는 분들도 보는 관점에 따라 불상의 종류를 다르게 해석한다. 답사를 하면서 미륵불이 보주를 손에 든 수인을 한 불상은 아직까지 찾아보질 못했다. 미륵불과 관련된 보주는 미륵불을 보좌하는 협시보살이 든 보주와 미륵불을 보호하는 용에서 보주를 발견할 뿐이다. 문화재청의 문화재 명칭에서 석불을 구체적으로 분류하지 않은 것도 판단이 모호하기 때문이지만, 충주 미륵리에는 미륵이란 대명사가 지배를 한다. 미륵사와 미륵당 뿐만 아니라, 왜 미륵대원이라고 할까 ? 미륵불이 사라지고, 약사불로 대체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미륵보살보다는 약사보살이나 지장보살이 더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보살이다. 하지만, 미륵불이 더 유행한 것은 권력자들이 미륵세상인 것처럼 민심을 호도하고, 대중들이 그를 따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사진 : 미륵대원지 석불입상의 지물)

 

충주 미륵대원의 석불입상이 미륵불이든 약사불이든 불상에 관한 논쟁은 큰 의미가 없다.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도 미륵불이라고 부른다. 나타나지 않은 미륵불을 본 사람도 없다. 미륵불의 형상도 상상 속에 있다. 꿈 속에 나타난 미륵불은 무엇일까 ? 미륵불 뿐만 아니라, 현세를 살다간 석가모니불도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조형된다. 석가모니의 진리를 증명하러 나타난 다보여래는 또 어떻게 생겼을까 ? 충주 미륵대원의 석불이 손에 든 지물이 약사발인지 구슬인지는 큰의미가 없다. 불상의 모자인 갓이 사각인지, 팔각인지, 둥근 원형인지도 불상의 복잡한 의미를 더 할 뿐이지, 석불입상과는 관련이 없다. 미륵리 불상이나 원평리 불상을 미륵불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듯이, 인간에게는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상을 구원해주는 구세주가 보이는 것이다. 길모퉁이의 바위도 산신으로 보면 산신령이 되고, 부처로 보면 부처바위가 되지만, 인간의 심리가 그를 증명하고, 그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허접한 이야기를 만든다. 미륵사지의 공깃돌 바위가 보주로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륵대원지가 있는 미륵리에는 미륵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륵세상을 바라는 희망이 존재한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미륵불은 왜 북쪽을 바라볼까 ? 미륵불은 왜 뽀얀 얼굴일까 ?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자연지형에 따른 배치와 자연조건에 따른 환경변화에 지나질 않는다. 모든 세상이 불국정토인데, 무엇 때문에 북쪽을 바라본다는 것인가 ?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일 뿐이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살아서 돌아와도 미륵불은 그 자리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미륵대원지의 불상은 사람처럼 몸과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볼 수 없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  세월이 흐른 지금은 솔깃한 이야기로 상상할 뿐이다.

 

 

 

2. 충주 미륵대원의 석불입상은 왜 갓을 쓰고 있을까 ?

 

충주 미륵대원지의 석불입상은 왜 머리에 갓(보개)를 쓰고 있을까 ? 머리에 모자를 썼다는 것은 실내가 아닌 외부에 있다는 의미다. 법당 내에서 비와 햇빛을 가리는 모자를 쓴 불상은 잘못 표현된 것이다. 충주 미륵대원지의 석불입상은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처럼 팔각형의 갓을 쓰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갓의 모양이 사각, 팔각, 원형인 것은 별의미가 없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불입상의 외형은 원평리 석불입상을 단순화시킨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특히 팔공산의 갓바위 불상은 석가모니불처럼 보이면서 약사발(약합)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지만, 수인의 형상과 달리 불상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보리수 아래서 고행하는 석가모니의 모습이다. 암릉에 조형된 마애불이나 불상 위에도 보관 또는 관모가 설치된 것은 무슨 의미일까 ?  미륵대원의 본존불이 있는 미륵당의 평면은 주실과 전실로 구분된 배치가 아니라, 미륵당 앞에 회랑같이 생긴 한칸짜리의 전각이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미륵당의 평면은 고구려의 석실고분이나 석굴암에서 나타나는 전실과 주실의 개념과는 다른 배치를 보여준다. 미륵대원의 석실인 미륵당에는 지붕을 씌운 목조 건축물이 있었을까 ? 없었을까 ?  미륵대원지의 미륵당의 석실은 지붕이 필요없는 구조물이다. 미륵당의 배치와 조형은 본존불을 모신 대웅전이란 고정관념을 탈피한 옥외 구조물로 추정할 수 있다. 마치 산성 입구의 느티나무 아래에 서있는 돌장승이나 지장보살같은 느낌이다. 미륵당의 석실을 대웅전과 같은 목구조물로 계획했다면 그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를 보강하여 축조했어야 하지만, 그에 대한 흔적은 보이질 않는다. 미륵당의 석실에 보호각을 세우기 위하여 석불입상 주위에 있는 초석에 기둥을 세우면 내.외부의 공간구성이 어떻게 변할까 ?  한칸짜리 면적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구조와 천정으로 인하여 불상이 기둥 속에 갇혀 있는 옹색한 공간을 연출할 것이다. 마치 성곽 위에 선 높은 망루처럼 보일 것이다. 석실의 내.외부 공간을 고려치 않은 상상 속의 미륵당의 전각은 내.외부 공간을 모두 망쳐놓을 것이다.

 

금산사의 미륵전과 관촉사 미륵불을 비교하면 어떨까 싶다. 한국전통건축을 연구한 김봉렬선생이 1999년도에 쓴 책(한국건축의 재발견 2 앎과 삶의 공간)에 실린 "폐허 속의 상상력 미륵대원"에서는 미륵대원의 복원을 추정한 배치도와 복원도가 소개되고, 미륵당의 추정단면도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그 내용도 상상과 추정에 불과하지만 미륵대원지의 석불입상이 돌로 축조되고 갓을 쓴 것은 관촉사의 미륵불처럼 야외 전시를 전제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사의 미륵전처럼 목구조물을 미륵당 석실 위에 축조하면 시각적인 효과는 물론이고, 상부구조물을 지탱할 수 없는 하부구조물인 석축이 불안정하다.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화재의 흔적과 미륵당에 남아 있는 초석의 배치가 목구조물이 있었다는 반증일 수 있지만, 미륵당의 본당인 석실에 있는 초석은 목구조물을 위한 주초석이 아니라, 석불입상을 봉양하기 위한 석조물의 받침대나 석실과 석불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석불입상 앞에 있는 석단도 후대에 추가로 설치된 것처럼 보인다. 석실의 석단도 석실의 면적과 미륵불의 높이를 감안하면 석실 밖으로 나와 있어야 한다. 금산사의 미륵불과 미륵전의 높이를 비교하여 미륵당의 모습을 상상하면 더 쉬울 것같다. 미륵당을 목구조물로 폐쇄하면 석실을 만든 의미도 사라지고, 미륵불과 석실이 보여주는 공간미도 사라진다. 옥외 공간을 배경으로 축조된 야외 조형물을 건물 속에 가두려는 발상도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 속에서 나온 상상이 아닐까한다.

 

3. 충주 미륵대원의 석불입상은 옥외 전시물일까 ? 옥내 전시물 일까 ?

 

상상으로 그려진 미륵당의 추정단면도를 보면서 떠오르는 문화재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복도 끝에 있는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처럼 고달픈 문화재가 또 있을까 ? 아직까지는 사라지지 않고 박물관 모퉁이에서 화려함을 뽑내며 수많은 관람객들에게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지만, 국가적인 수치다. 국립박물관을 설계할때는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박물관 중앙 로비에 세우려고 했으나, 구구한 사연으로 구석으로 밀려난 문화재다. 문화재의 연혁도 모르면서 국립 박물관의 대표작으로 내세우려한 국가기관과 역사학자들도 한심스럽고, 비좁은 공간에 전시된 석탑도 불쌍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일까 ? 문화재의 오염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실내에 배치되긴 했으나, 야외에 있는 석탑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지를 못한다. 경천사지 석탑은 경천사지에 있어야 하지만, 경천사지에 있을 수 없어서 허접한 수장고에 갇힌 것이다.

 

 

(안성 매산리 석불입상)

 

 

충주 미륵대원지의 석불입상은 돌로 만든 장벽에 설치된 무대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충주 미륵대원지의 석불입상은 돌로 만들어진 야외 무대의 불상이지 대웅전이라는 법당 내에 모셔진 불상이 아니다. 법당 내에 숨은 석불입상의 존재가치는 떨어진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은 법당 내에 석불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미륵당의 경우와는 다르다. 목조구조물은 불상을 봉양하고 관리하면서 기후와 날씨에 따른 불편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설치된 후대의 전각 정도로 추정한다. 미륵당의 추정단면도처럼 법당을 조성한다면, 그 재원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감실과 불상도 정교하게 조형할 수 없는 석공술로 그를 계획하고 축조할 수는 있었을까하는 의문도 든다. 미륵당의 추정복원도와 추정단면도가 폐허 속에서 상상한 것에 불과 하지만, 미륵사지의 배치나 공간 그리고, 폐사지가 보여주는 시공능력을 감안하지 않고 추정했을 것이다. 법주사의 팔상전이나 금산사의 미륵전같은 전각을 상상하는 것도 좋지만, 폐허일지라도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가장 좋다. 수백 미터의 초고층 건물이 올라가는 시대에 황룡사지 구층탑이나 바벨탑과 같은 구시대의 복제품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전통건축은 무엇일까 ?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일 것이다. 논리적인 측면이나 예술적인 측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건축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나치게 계획적이고 정교하여 빈틈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학자나 건축가들이 영주의 부석사를 왜 최고의 전통미로 극찬할까 ? 불국사나 석굴암은 자연환경에 순응하지 못하고, 인위적인 물리력으로 치밀하게 조성되어 산 속에서 느끼는 신비한 정취나 부처님의 자비보다는 국가와 종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이고, 당나라와 서역에 이르는 국가까지 당시의 신기술과 사상을 총망라하여 40여 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축조되었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당대 최고의 걸작인 건축물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축적된 고도의 기술과 기법은 왜 전승되지 못했을까 ?  불국사와 석굴암 뿐만 아니라, 경주의 춘양교와 월정교, 그리고 안압지 등에서 축적된 기술은 천 년을 지나온 한국사에서 왜 ! 발견할 수 없을까. 신라의 왕경과 왕궁유적도 황룡사나 불국사보다 더 크고 화려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꿈 속에서나 그려 볼 일이다. 하지만, 나 자신도 문화재의 무분별한 발굴이나 복원에는 관심이 없다. 복원된 문화재는 유적이라기 보다는 상업화된 관광용 또는 전시용 재현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남겨진 문화유산들의 훼손을 방지하고 발굴된 상태로 보존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상상하는 것이 더 좋다. 대한민국이라는 현시점에서 신라나 조선시대의 왕궁과 성곽을 복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그 보다는 조선왕궁 뒤에 숨은 청와대와 같은 짝퉁전통건축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문화와 지혜가 깃든 건축문화를 창출해야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고유의 사상과 기법들이 계승되어야 새로운 전통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문화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기에 첨단의 신기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습성은 변하여도 본성은 미래에도 변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