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그늘 아래서/자취를 밟으며

석수동 마애종을 바라보며

산골어부 2021. 1. 25. 10:47

석수동 마애종을 바라보며

 

(자료사진 : 부석사 범종루)

 

마애종이란 것을 처음으로 봤다.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마애불과 마애비는 자주 보았지만, 마애종은 처음이다. 마애종이란 희귀한 문화재를 바라보며, 마애종을 만든 사람의 생각을 더듬어 본다. 마애종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 왜 불상이 아닌 범종을 택했을까 ? 특히, 범종을 치는 스님은 누구일까 ? 석수동 마애종은 다른 마애불상과 달리 중초사와 안양사를 축조하면서 필요한 석재를 채취하던 채석장의 암벽에 새겨진 암각화이기에 마애종의 의미가 더 궁금해진다. 마애종에 관한 자료는 이미 사학자들에 의해 고찰되었기에 생략하고, 이 글은 산골어부가 석수동 마애종을 바라보며 문득 떠오른 망상을 쓴 이야기일 뿐이다.

 

안양 석수동에 있는 마애종 유적지 주변을 살펴보니, 채석장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마애종 유적지 옆에는 유유산업 공장터에서 폐허 속에서 되살아난 중초사지와 안양사지가 있다. 중초사와 안양사를 축조하면서 필요한 석재를 채취하던 채석장이 마애종 유적지다. 채석장 암벽에 새겨진 마애종은 중초사든 안양사든 사원을 구성하는 석탑이나 불상과는 무관한 암각화로 추정된다. 단지, 중초사와 안양사 옆에 있기에 중초사나 안양사에 딸린 유적으로 분류할 뿐이다. 사찰의 배치에서 범종각이나 범종루는 대웅전 앞 출입문 옆에 위치한다. 사찰 내에 마애불이 존재하는 것은 작은 암자에서 마애불을 만들고, 후대에 전각들을 축조한 것이 대부분이다. 석수동 마애종도 바로 옆에 있는 대웅전에 부처님이 있기에 주존불이 아닌 범종을 치는 스님을 조각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른 사찰에서도 사찰 영역을 벗어난 계곡이나 암자에 지장보살이나 약사불 등의 마애불이 있는 것은 종종 볼 수가 있다. 석조물 중에서 석조불상을 만드는 것과 마애불상을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자연암석이나 암벽에 암각을 하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석재를 채취하여 불사가 이루어지는 절터까지 석재을 운반하고 조각한 부재를 쌓아 올리는 것은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범종을 치는 스님은 채석이 끝난 채석장에서 불사를 위해 채석장에서 고생한 자신과 석공들의 극락왕생을 염원한 것은 아닐까 한다. 석수동 마애종은 불상이 아닌 범종을 암각하고 범종을 치는 당목을 든 스님을 기둥 하단에 배치하고 있다. 마애종의 전체 구도에서 범종과 당목이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당목을 든 스님은 종각의 기둥과 중첩되어 범종이 주제가 되고, 범종을 치는 스님을 부제로 표현하고 있다. 범종을 치는 스님을 주제로 하여 자화상처럼 표현하려면 기둥과 범종 사이에 범종을 치는 스님을 배치하는 것이 조화로울 것이다. 암각화의 특성상 표현이 제한적이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은 만든 사람이나 마애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성에 따라 상상할 뿐이다.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문화재적 가치나 예술성은 미흡하지만, 마애종을 만든 석공이나 범종을 치는 스님의 모습에서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아낸다. 어쩌면, 범종의 소리처럼 채석장에 얽힌 자신과 석공들의 극락왕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 한다. 부석사의 안양루에 올라서면 사바의 세계를 내려보는 느낌이 든다. 부석사 안양루 아래에 있는 범종루에는 범종이 아닌 법고가 있고, 범종은 그 옆 범종각에 있다. 부석사 범종루에 범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범종의 무게 때문에 법구사물(범종.법고.운판.목어)에서 범종의 자리를 법고에게 내어준 것으로 추정한다.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부석사 범종루와 달리 채석장 암벽에 숨어 있는 느낌이다. 또한 시대의 변천으로 도시화되어 신성한 이미지가 사라졌다. 마치 채석장의 애환처럼 도시의 삶을 달래보려고 삼성산과 관악산을 찾는 도시민들에게 작은 깨달음이라도 느끼며 쉬어가라는것처럼 보인다.

 

 

[참고자료]

도은집 제4권 / 문(文) 금주 안양사 탑의 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

 

불씨(佛氏)가 처음 중국에 들어온 것은 한(漢)나라 때 축법란(竺法蘭)이란 스님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뒤로 마침내 천하에 퍼지게 되었는데, 우리 동방은 아도(阿道)란 스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이는 실로 신라 시대의 일이었다. 그 교설(敎說)을 보면 규모가 거창하고 방대한 데다가 또 화복(禍福)의 일을 가지고 사람들을 격동시키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영예(英睿)한 임금이나 충의(忠義)의 신하라고 할지라도 왕왕 사우(寺宇)를 세우는 것을 숭상하면서 그 교화를 널리 펼치곤 하였는데, 이는 대개 방가(邦家)를 위해 복전(福田)의 이익을 구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이 또한 군자가 후덕하게 마음을 쓴 일이었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가 개국하던 초기에 불자(佛者)가 비보설(裨補說)을 가지고 그럴듯하게 건의하자, 그 말을 자못 신용하여 탑묘(塔廟)를 많이 세웠는데, 지금 이야기하는 금주 안양사의 탑과 같은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자은종사(慈恩宗師)인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 임공(林公)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안양사의 탑은 성조(聖祖) 때에 세워진 것이다. 이 탑이 과거에 허물어졌는데, 문하시중(門下侍中)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 최공(崔公 최영(崔瑩))과 현재 주지로 있는 대사(大師) 혜겸(惠謙)이 중수하여 새롭게 한 것이다. 혜겸이 나의 문도라서 나를 통하여 선생에게 기문(記文)을 구하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혜겸이 반드시 잘 말해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혜겸이 나에게 와서 부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이 절에 주지로 있은 지 지금 몇 년째 됩니다. 사승(寺乘)을 살펴보건대, 옛날에 태조가 반항하는 자들을 정벌하려고 행차할 적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산머리의 구름이 오색찬란한 것을 바라보고는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사람을 시켜 그곳에 가서 살펴보게 하였답니다. 그러고는 구름 아래에서 능정(能正)이라는 이름의 노승(老僧)을 얻고 나서 그와 이야기를 해 보았더니 뜻이 맞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절이 세워진 유래입니다.

이 절의 남쪽에 탑이 있는데, 이는 벽돌로 쌓은 칠층탑으로서 기와를 덮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의 한 층은 12칸의 회랑(回廊)으로 둘렀는데, 하나의 벽마다 불(佛)ㆍ보살(菩薩)ㆍ인(人)ㆍ천(天)의 형상을 그려놓았으며, 그 외부에는 난간을 세워서 출입을 제한하였으니, 거대하고 화려한 장관은 다른 사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을 맞다 보니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제가 아침저녁으로 목도하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중수하여 새롭게 하고 싶은 생각이 오래전부터 간절하였습니다만, 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신유년(1381, 우왕7) 가을 7월에 시중(侍中) 최공(崔公)을 찾아뵙고서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공이 이르기를 ‘내가 소싯적에 언젠가 한번 이 탑 아래에서 묵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성조(聖祖)가 처음에 경영했던 그 일을 우러러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서원을 세우기를 「내가 뒷날 현달(顯達)하게 되었을 적에 만약 이 탑을 중수하여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있는 영령이 가만두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의 지위가 백관의 으뜸이 되었고 보면 현달했다고 일컬을 만하니, 내가 나의 서원을 저버리지 않고 행해야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에게 이첩(移牒)해서 군조(軍租)를 감하여 그 비용을 대게 하고 장정을 징발하여 그 공사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저도 바랑 속에 비축해 두었던 자금을 모두 내놓고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서 쌀과 콩과 비단과 포목을 모두 약간씩 마련하는 한편, 저와 같이 손을 놀리고 있는 자들 약간 명을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모(某) 갑자(甲子)에 공사를 시작해서 9월 모 갑자에 일을 마무리하고, 겨울철 10월 모 갑자에 낙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날 전하께서 내시(內侍) 박원계(朴元桂)를 보내어 향을 내리시고, 승려 1000명으로 불사를 대대적으로 행하게 하셨으며, 사리 12과(顆)와 불아(佛牙) 하나를 탑 속에 봉안하게 하셨습니다. 이 공사에 보시한 사중(四衆)은 무려 3000명에 달했습니다.

이 탑에 단청을 입힌 것은 임술년(1382, 우왕8) 3월이었고, 각종 형상의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은 계해년(1383) 8월이었습니다. 탑 내부의 사방 벽에 동쪽에는 약사회(藥師會), 남쪽에는 석가 열반회(釋迦涅槃會), 서쪽에는 미타 극락회(彌陀極樂會), 북쪽에는 금경 신중회(金經神衆會)를 그렸으며, 회랑의 12칸에는 하나의 벽마다 하나의 형상을 그려서 이른바 십이행년불(十二行年佛)을 이루었습니다.

무릇 동원한 인부가 400명이 넘었고, 쌀은 595석(石), 콩은 200석, 포목은 1155필(匹)에 달했습니다. 아, 이처럼 비용이 엄청난 거대한 역사(役事)를 마침내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우리 시중공(侍中公)의 서원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공은 오직 국가의 복리만을 구하였을 뿐이니, 어찌 사적으로 자신의 몸 하나를 위해서 한 것이겠습니까. 이를 후세에 불후(不朽)하게 전하려고 도모한다면 문사(文辭)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선생께서 글을 지어주셨으면 합니다.”

이상과 같은 혜겸의 말을 듣고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불씨(佛氏)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들어가서 배워 볼 겨를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내가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의 신분인 만큼, 무슨 공사를 일으킬 때마다 반드시 기록하게 되어 있으니〔興作必書〕 이는 나의 직분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 탑을 통해서 성조(聖祖)와 현상(賢相)이 후덕하게 마음을 쓴 것을 볼 수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만하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석수동 마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