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충주 용두사지에 대하여

산골어부 2021. 1. 30. 12:04

충주 용두사지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에는 정토사 법경대사비가 용두사 법경대사비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천등산에 있다는 개천사비도 비문을 판독할 수 없다는 표현에서 비명과 비문의 내용을 알 수 없기에 당시의 속언을 채록한 오기로 추정된다. 도은 이숭인과 목은 이색의 시에 나타난 용두사는 동량면 말흘산(末訖山)에 있었던 사찰로 추정하지만, 그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충주 용두사는 이숭인의 시에 "개천 서쪽 억정 동쪽"이라는 표현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말흘산 아래에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980년 7월에는 관동대학교 학술조사단이 발굴 조사하여 70㎝ 가량의 축대와 가로 80㎝, 세로 60㎝의 받침돌 두개, 비천상이 조각된 기와 5매를 찾아냈으며, 용두사를 황룡사. 사천왕사 등과 함께 신라의 호국 사찰이며,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에 있었던 대전사지(내동사지)로 추정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말흘산(현재 용천산) 일대에서 그를 입증할 유물은 찾을 수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사찰은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른 사사혁파 이후에 기록된 것이기에 충주 용두사는 충주 보련사와 같은 대사찰이라기 보다는 사사혁파에서 살아남은 암자로 추정되며, 폐사된 억정사, 개천사(정토사) 등에 관한 기록들을 용두사로 오기한 것으로 추정하며, 목은 이색의 시에 나타난 용두사는 동량의 개천사(정토사)와는 다른 사찰로 보여지며, 이색의 아들인 이종선 등이 수학하던 곳으로 억정사에 딸린 암자로 추정할 뿐이다. 고려말기에 도은 이숭인과 목은 이색과 양촌 권근 등이 충주 일대에 등장하는 것도 개천사에 보관되었던 고려왕조의 서고인 충주사고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개천사비"는 속설에 따른 오기로 추정되며, 그 내용도 삼국시대나 당나라 개원이 아니라, 정토사 법경대사비에 나타난 비문처럼 고려왕조 시조인 태조 왕건의 일화와 충주 최씨의 유래가 뒤섞여 와전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대전사지 또는 내동사지로 추정되는 곳은 충주 최씨의 세거지이며, 충주 최씨의 시조 사당인 영모사가 후대에 건립되어 있다. 충주향토자료인 지명유래에서 말흘산과 용천산은 같은 산으로 동량에서는 말흘산으로 부르고, 산척면에서는 용천산이라 부른다. 동량면 대전리 내동보다는 산척면 영덕리 용암에서 용(龍)이란 지명이 잔존하고 있다.

 

[참고자료]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유진(有晉)1) 고려(高麗) 중원부(中原府) 고(故) 개천산(開天山)2) 정토사(淨土寺) 교시법경대사(敎謚法鏡大師) 자등비명(慈燈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태상(太相)3) 검교(檢校)4) 상서(尙書)5) 좌복야(左僕射)6) 전수병부시랑(前守兵部侍郞)7) 지한림원사(知翰林院事)8) 신(臣) 최언위(崔彦撝)9)가 왕명을 받들어 찬하고,
사찬(沙粲)10) 전수흥문감경(前守興文監卿)11) 사비은어대(賜緋銀魚袋)12) 신(臣) 구족달(具足達)13)은 왕명에 의하여 쓰다.

(중략)

 

임금의 불심(佛心)은 더욱 돈독해지고 스님을 자주 친견하려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여 가까운 곳인 중주(中州) 정토난야(淨土蘭若)에 주지(住持)토록 청하였다. 스님은 스스로 생각하되 “방금 입당유학(入唐遊學)을 마치고 창명(滄溟)을 헤쳐 귀국하여 항상 주석(住錫)할 만한 유곡(幽谷)을 생각하던 터이라 이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리요”하고는 문득 행장(行裝)을 정돈하였다. 한광(漢廣)을 건너고 유유히 산을 넘어 그곳에 가서 주석하니, 주변이 매우 아름답고 산천(山泉)이 수려(秀麗)하였다. 중주(中州)에 소문을 듣고 기꺼운 마음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백천(百千)이나 되었다. 스님이 자리를 정하고 선탑(禪榻)을 펴자마자 사방으로부터 오는 대중이 모당(茅堂)을 가득히 채웠으며, 마치 도마죽위(稻麻竹葦)와 같이 그 수가 한량이 없었으나, 스님은 가르침에 있어서는 조금도 권태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뒤에는 얻어가지게 되어 마치 안개처럼 모였다가 구름같이 돌아갔으며, 스님의 지도 또한 학류(學流)를 유인(誘引)한 다음 종지(宗旨)를 일러 주었으니, 진리는 깊고 미묘(微妙)하나 말씀은 간결하며,119) 관찰력은 예리하고, 뜻이 깊어 육도(六度)의 모범이며 인천(人天)의 으뜸이었다. 이 때 좌승(佐丞)인 유인설(劉權說)이란 신하가 있었는데, 이는 마치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재상(宰相)인 부설(傅說)120)과 같았다. 나라의 충신이며 재가(在家)의 제자(弟子)였다. 니부(尼父)121)인 공자(孔子)를 찬양하는 선비이니 마치 안연(顔淵)의 무리와 같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신봉(信奉)하였으니 아울러 아난(阿難)과 같은 류(類)라122)하겠다. 특히 선경(禪境)에 이르러123) 스님을 친견하고 문득 피석(避席)의 의례(儀禮)를 폈으며, 깊이 구의(摳衣)124)의 정성을 오롯하게 하였다.
그 후 하국(下國)125)의 어진 군자(君子)들이 인(仁)을 구하러 모이고, 중원(中原) 지방의 선비들이 스님의 덕(德)을 흠모하여 무리를 이루어 찾아와서 공경히 스님을 친견하였으니, 마치 백련(白蓮)이 안계(眼界)에서 핀 것과 같았고, 공손히 법문을 듣는 이에게는 감로수가 심원(心源)에 내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스님은 스님 중의 스님이라고 할 만하였다. 천군(天君)이라는 법형(法兄)이 말하되 “스님은 선림(禪林)에서 대중을 거느리고 길을 열어 주었고, 천자(天子)의 관헌(官軒)에서는 보수(寶樹)가 우뚝 솟은 것과 같았으니 요부(澆浮)한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법왕(法王)의 교화를 펴신 분이다”라고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상법(上法)을 알기는 쉬우나 상법(上法)을 행하기는 어려우며, 상법(上法)을 닦기는 쉬우나 상법(上法)을 깨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만행개공(萬行皆空)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수행(修行)을 주장하는가”라고 하니, 대답하되 “본래 고락(苦樂)이 없건만 망습(妄習)이 그 원인이 되어 고통을 받게 되므로 중생들의 망심(妄心)이 없어지면 나의 고통(苦痛)도 따라서 사라지리니, 다시 어느 곳에서 아직도 보리(菩提)를 찾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 조정(朝廷)의 사류(士流)들이 왕명을 받들고 왕래하되, 중부(中府)인 중원(中原)의 길을 밟는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으며, 사류(士流) 중에는 만에 하나라도 왕사(王事)에 분망하여 스님이 계시는 문턱을 밟지 못한 것을 큰 수치로 여기기도 하였다.

(중략)

 

임종하시기 직전 왕에게 표(表)를 받들어 고하니, “노승(老僧)이 뜻하였던 바를 이룩하지 못하고 영원히 성상(聖上)을 하직하려 하여 인사에 대신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표상(表狀)을 펼쳐 보시고 크게 애도하면서 시호(謚號)를 법경대사(法鏡大師), 탑명(塔名)을 자등지탑(慈燈之塔)이라고 추증(追贈)하였다.

(중략)

 

천복(天福) 8년152) 세차계묘(歲次癸卯) 6월 정미삭(丁未朔) 5일 신해(辛亥)에 세우다.
휴자승(鑴字僧)은 광예(光乂), 장초(壯超), 행총(幸聰), 행초(行超) 등이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도은집 제2권 / 시(詩)

권 사군이 충주에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 고을 북쪽에 개천사가 있는데, 이곳은 내가 옛날에 노닐었던 곳이다. 〔送權使君之任忠州 州北有開天寺是僕舊遊之地

 

정토산은 좋은 곳이 많지만 / 淨土山多好
개천사는 특히 한번 가볼 만 / 開天寺足徵
산문에 속객은 찾아오지 않고 / 踵門無俗客
오직 벽을 향하고 있는 고승뿐 / 面壁有高僧
강물을 내려다보는 백 척의 누대 / 百尺臺臨水
등나무 덩굴에 누워 있는 천 년의 고목 / 千年木臥藤
그대 부임하면 한가한 날 많으리니 / 君歸足暇日
내가 놀았던 곳 하나하나 찾아보소 / 一一訪吾曾

 

도은집 제2권 / 시(詩)

 

도생 상인이 충주 용두사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道生上人歸忠州龍頭寺〕

 

생각나네 개천사의 서쪽 우물의 동쪽 / 開天之西憶井
높이 솟은 산 위에 있는 범왕의 궁전 / 岧嶢有此梵王宮
산이 에워싼 평야에는 흰 새벽 구름이요 / 山圍平野曉雲白
강이 휘도는 성근 숲엔 붉은 단풍잎이라 / 江遶疏林霜葉紅
상인이 오늘 노 저어 돌아가는 곳은 / 上人今日動歸楫
유자가 왕년에 종소리 익히 들었던 곳 / 遊子昔年聞鳴鍾
급제 동기생 비서는 응당 잘 계시겠지 / 同榜秘書應好在
조만간 서신 띄우겠다고 말 전해 주오 / 爲言早晩達書筒

 

도은집 제3권 / 시(詩)

보련사 주지에게 부치다〔寄寶蓮住持〕

 

보련사 안에 청정한 낙이 있는데 / 蓮社有淸樂
도인이 밖에서 구할 게 있으리오 / 道人無外求
머리를 돌리니 저녁 해 뉘엿뉘엿 / 回頭日欲暮
산의 푸른 이내 멀리서 아른아른 / 山翠遠浮浮

 

목은시고 제14권 / 시(詩)

동갑(同甲)인 개천사(開天寺)의 담선사(曇禪師)가 보낸 서찰(書札)과 차(茶)를 얻다.

 

개천사는 아득히 하늘 한쪽에 있는지라 / 開天渺渺在天涯
연래에 남쪽 바라보다 두 귀밑이 희었는데 / 南望年來兩鬢華
스스로 꿈인가 했더니 꿈은 분명 아니로다 / 自訝夢耶非是夢
두어 줄의 서찰과 한 봉의 차가 왔네그려 / 數行書札一封茶

 

목은시고 제18권 / 시(詩)

 

억정사(億政寺)의 선진 대선사(禪軫大禪師)를 보내다.

 

고독한 나 또한 은거하려 하는데 / 孤生將避地
억정사는 절로 속진이 없으리라 / 億政自無塵
혁혁한 문벌 가문의 후예로서 / 奕奕衣冠冑
정처 없는 운수의 몸이 되었네 / 飄飄雲水身
여강은 여행할 만한 곳이거니와 / 驪江可行李
치악산은 바로 가까운 이웃일세 / 雉岳是比鄰
어느 날에나 전원으로 돌아가서 / 何日歸田去
계산에서 새로이 한번 웃어 볼꼬 / 溪山一笑新

 

목은시고 제18권 / 시(詩)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존성(金存誠), 판관(判官) 김조(金肇)에게 부쳐 올리다.

 

푸른 이끼 버들골에 방문객을 거절하고 / 蒼苔柳洞絶來轅
수년 간 병석에 누워 문 길이 닫았는데 / 臥病數年長掩門
오늘 용두사로 아이가 떠나는 것을 보니 / 今日龍頭小童去
내 문생이 중원에 있음을 비로소 알겠네 / 始知吾黨在中原

중원의 산수는 가장 맑고 시원하거니와 / 中原山水最淸涼
하늘가의 봉화 또한 조용하기만 한데 / 烽火天涯轉渺茫
잘 다스려 공사가 적은 게 더욱 기뻐라 / 更喜臥治公事少
승방에 가서 홀로 노닒도 무어 해로우랴 / 獨游何害到僧房

 

요즘 세상엔 승방 또한 분주 다사하여 / 僧房近世亦忙奔
수많은 새로운 일이 날마다 번거로우니 / 新事如毛逐日繁
원컨대 마음 갈앉히고 편히 앉았게 하여 / 願使安心且安坐
참선의 향 연기가 천지에 가득게 하기를 / 香煙一穟滿乾坤

 

목은시고 제18권 / 시(詩)

 

용두사(龍頭寺)로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수많은 산 풀 우거진 곳에 아침 해 돋을 제 / 亂山初日草萋萋
높고 낮은 산길에 가는 말을 보내노니 / 山路高低送馬蹄
두 소년이 서로 쫓아서 말을 달리어라 / 兩箇少年相逐去
검은 옷 입은 승통이 정히 데려가누나 / 黑衣僧統政携提

비가 와서 요즘은 길에 괸 물도 많거니와 / 雨作邇來行潦多
들쭉날쭉한 관도는 강가에 비껴 있는데 / 參差官道傍江斜
아마도 오늘은 양주 땅을 경과할 테니 / 計程今日楊州過
삼각산에 머리 돌리면 저녁놀이 붉겠지 / 回首三山映落霞

 

기억건대 내 어려서 한산에서 글 읽을 때 / 記我韓山幼讀書
아버님은 중국에 어머님은 송도에 계셨지 / 父游中國母松都
당시 일편단심 어버이 생각하던 그 땅이 / 當時一片思親地
내 종신토록 탄탄대로를 열어 주었단다 / 與我終身作坦途

 

조모께서 당시에 나를 양육하던 마음은 / 祖母當時鞠育心
하늘도 그보단 덜 넓고 바다도 덜 깊으리 / 靑天難闊海難深
몸은 양부에 오르고 나이는 오십인데도 / 身登兩府年知命
아직도 구구하게 한 치 그늘을 아끼노라 / 尙爾區區惜寸陰

 

용과 돼지의 변화는 배움 속에 있는 거라 / 龍猪變化學中存
이부의 탁월한 견해는 세상이 다 높이네 / 吏部能言世所尊
오늘 너는 의당 더욱 노력할지어다 / 今日汝當尤努力
우리가 바로 문효공의 자손이란다 / 此身文子又文孫

 

목은시고 제18권 / 시(詩)

 

용두사(龍頭寺)의 주지(住持) 생공(生公)을 보내다.

 

더위 무릅쓰고 멀리 용두사로 석장 날려라 / 龍頭冒暑遠飛錫
빗줄기는 바람 따라 어지러이 벽에 뿌리네 / 雨脚隨風亂灑壁
송악산의 구름은 화려한 비단이 붉은 듯 / 松岳之雲錦繡紅
금천의 물은 흡사 푸른 유리 빛 같으리 / 金遷之水琉璃碧
일찍이 승록 되어 가장 체통 얻었거니 / 曾爲僧錄最綉體
부처 은혜 갚자면 속연을 떨쳐야 하고말고 / 欲報佛恩須拂迹
당에 올라 설법하면 천둥을 떨치거니와 / 升堂說法振雷音
붓 잡고 불경을 써서 묵적도 남기었는데 / 把筆寫經留墨蹟
누런 먼지 도성 거리 꿈을 막 깨고 나서 / 黃埃紫陌夢初醒
붉은 절벽 선경으로 마음 다시 향하였네 / 碧洞丹崖心更適
다만 지금 흙탕길은 여행자의 걱정거리요 / 只今泥濘行者愁
곳곳의 계곡들은 건너기도 어려울 테지 / 到處澗溪難可歷
머지않아 가을바람이 들녘에 불어오면 / 秋風不久吹郊原
이른 벼가 아마도 여관에 채워질 테니 / 早稻可知充館驛
여행 중 음식 이걸로 하면 괜찮겠거니와 / 行廚得此亦不惡
돌아갈 계획 결정했는데 어찌 다시 바꾸랴 / 歸計決矣那復易
여강의 두 언덕엔 전토가 매우 많은지라 / 驪江兩岸田甚多
한산의 고독한 인생 내가 좋아한 바이니 / 馬邑孤生心所懌
거룻배 띄워 가서 스님을 찾고자 하는데 / 扁舟便欲去尋師
서로 만나면 누가 칠 년을 격조했다 말하랴 / 會面誰云七年隔

 

목은시고 제19권 / 시(詩)

 

용두사(龍頭寺)의 대선(大選)이 서신을 가지고 오다.

 

용두사의 대선이 배를 타고 올라와서 / 龍頭大選上舡回
선동의 마음이 활짝 열렸다고 아뢰네 / 來報善童心孔開
처음 당시 펴놓고 짧은 것부터 읽으면서 / 始讀唐詩從短少
절간에 단정히 앉아 높은 산에 부쳤구나 / 端居梵刹寄崔嵬
듣건대 영월이 자주 와서 먹여준다 하니 / 似聞寧越頻來饋
포도주 빛 여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네 / 欲泝驪江初發醅
어느 날에나 이 회포를 능히 이루어서 / 何日此懷能得遂
그림 배에 북 울리며 금술잔 기울일꼬 / 畫舡槌鼓倒金杯

 

목은시고 제21권 / 시(詩)

 

용두사(龍頭寺)에서 편지가 와서 종선(種善)이 쓴 큰 글자 한 장을 보다.

 

어린아이가 용두사서 수학을 하는지라 / 小兒受學在龍頭
노모는 아이 생각을 잠시도 놓지 못하네 / 老母相思不暫休
붓 잡고 이미 큰 글자를 쓸 줄 알았으니 / 把筆已知書大字
봄이 오거든 성균관에 와서 유학해야지 / 春風芹館好來游

 

목은시고 제22권 / 시(詩)

용두사(龍頭寺)의 대사(大師)에게 부치다.

 

길거리 아동들 부러워하는 곳에 / 街童歆艶處
갈도하며 시가를 행진할 때로세 / 呵喝綴行時
방방할 날이 초구일로 잡혔으니 / 放牓當初九
돌아올 기약을 늦추지 말지어다 / 歸期請勿遲

 

목은시고 제23권 / 시(詩)

 

청풍(淸風)

 

맑은 바람이 높은 숲에 불어오니 / 淸風動高林
작은 비가 막 개고 난 때이로다 / 小雨初晴時
선동은 유학하는 데서 돌아왔고 / 善童游學回
늙은이는 한창 시를 읊는 중일세 / 老翁方詠詩
속마음이 얼굴에 다 나타나거늘 / 中情見於面
웃고 말하긴 어찌 그리도 더딘고 / 笑語何遲遲
늙은이와 어린애가 당 아래 서니 / 老幼立堂下
기색이 화평하고도 마냥 즐겁네 / 氣和顔甚怡
기다린 지 오래라고 서로 말하니 / 共言徯之久
부모의 기쁨을 진정 알 만하구나 / 父母喜可知
인생은 은의를 중히 여기는 건데 / 人生重恩義
이것을 풍화의 기초라 이르나니 / 是曰風化基
바라건대 경박하게 굴지 말아서 / 願言勿偸薄
타고난 본성을 잘 보전할지어다 / 保玆初秉彝

 

목은시고 제24권 / 시(詩)

 

이 장원(李狀元) 문화(文和) 과 함께 가는 용두사(龍頭寺)의 스님을 보내다.

 

용두사의 승통이 송경을 나감에 미쳐 / 龍頭僧統出松京
나이 젊은 용두가 동행을 하게 되었네 / 年少龍頭作伴行
와병중인 용두를 서글프게 바라보면서 / 臥病龍頭空悵望
동문 밖에 오르니 아침 해가 막 돋누나 / 上東門外日初生

 

목은시고 제30권 / 시(詩)

 

용두(龍頭)를 봉송하며 그의 시에 차운하다. 이때 곽 동년(郭同年)과 최 계장(崔契長)도 그곳에 있었다.

 

듣자니 연형의 머리 온통 하얗게 변한 채 / 聞設年兄白盡頭
전주와 날마다 함께 어울려 노닌다는데 / 全州日日得同遊
스님이 지금 또 강변의 절에 주석하신다니 / 師今又住江邊寺
나도 따라가 달빛 아래 뱃놀이를 하고 싶소 / 我欲相尋月下舟
괜히 어깨가 들썩이는 설렁설렁 가을 소리 / 瑟瑟秋聲生逸興
허튼 시름 자아내는 맑디맑은 물빛이라 / 澄澄水色浼閑愁
늙은 이 몸 손자들을 다시 안아 보고픈데 / 老翁更抱兒孫念
어느 때나 내왕하며 함께 누대에서 자 볼거나 / 來往何時共枕樓

 

목은시고 제35권 / 금주음(衿州吟)

 

판조계사(判曹溪事)인 죽암(竹菴) 진공(軫公)이 내원(內院)에서 물러 나와 주석(住錫)하고 있는 억정사(億政寺)로 돌아갈 적에 암곶(岩串)에 머물면서 반야탕(般若湯)과 소채오성(蔬菜五星)을 가지고 와서 나의 삼출(三黜)을 위로해 주었는데, 이때 마침 나의 새 집이 이루어졌으므로 해 그림자가 옮겨갈 때까지 함께 앉아 있다가 떠났다.

 

공은 벌열 출신으로 금선을 좋아하여 / 公生閥閱樂金仙
조계의 일미선 맛을 꿰뚫어 맛보신 분 / 勘破曹溪一味禪
일만 승려의 영수로서 벽립만인의 기상이요 / 領袖萬僧如壁立
육조대사를 본받아 의발의 전수를 그쳤도다 / 規模六祖止衣傳
염부제의 세상 위에 명성은 한껏 드높고 / 閻浮世上聲名極
반야의 탕 가운데에 기미도 온전하시도다 / 般若湯中氣味全
추억건대 옛날 그때 만금대 위의 달이 / 回首萬金臺有月
청천에 걸려 밤마다 우리를 따라다녔었지 / 相隨夜夜掛靑天

 

조선왕조실록 세종 8년 병오(1426) 10월 27일(정해)

 

사헌부의 계에 따라 혁파한 절에서 경작하던 토지를 모두 평민들에게 주게 하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석씨(釋氏)의 도(道)는 맑고 깨끗하고 욕심이 적은 것으로 종지(宗旨)를 삼아서, 산사(山寺)에 살면서 심신(心神)을 닦고 연마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것인데, 이제 각 종(宗)의 승도(僧徒)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돌보지 아니하고, 큰 절에 살기만 구하고 여색(女色)을 범간(犯奸)하여 마음대로 음란한 짓을 행하여, 스스로 그 도(道)를 무너뜨려서 여러번 국가의 법을 범하오니, 마땅히 모두 머리를 길러서 군역(軍役)에 보충시켜야 할 것입니다. 다만 〈백성의 불교에 대한〉 습속이 오래 되어서 차마 갑자기 없애지 못하고, 다만 각 종파(宗派)를 혁파하여 두 종파(宗派)로 나누어서 〈소속의〉 각 절을 상정(詳定)하였고 모두 토전(土田)을 주었습니다. 혁파하여 버린 사사(寺社)에서 경작하던 전지를 절에 들어가 사는 중들로 하여금 전과 같이 경작하도록 하여 각각 그 생활을 편안하도록 하였고, 경외(京外)의 승도(僧徒)들을 모두 역(役)을 시키지 못하게 하였사와 성상의 은혜가 망극(罔極)하였으니, 마땅히 조심조심하여 제 본분을 지켜 향화(香火)로써 성상을 축복하면서 그 도(道)에 진력해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 충청도 충주 엄정사(嚴政寺) 중 해신(海信)ㆍ전 주지(住持) 해명(海明)ㆍ억정사(億政寺) 전 주지(住持) 성조(性照)ㆍ해순(海淳) 등은 종문(宗門)의 도회(都會)에서 살지 않고, 이미 혁파(革罷)한 사사(寺社)를 제 마음대로 점령하고 살면서 토지를 경작하고 재물을 늘이며, 이익을 탐하고 살기를 도모해서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는 등 하지 않는 짓이 없사오니, 그 청정(淸淨)의 도(道)에 어떻다 하겠습니까. 청컨대 이미 일찍이 상정(詳定)한 것 이외(以外)의 혁파(革罷)한 절에 경작하던 토지를 거두어 모두 평민(平民)들에게 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들을 모두 다 속인(俗人)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혁파한 사사(寺社)의 토지를 빼앗아 평민들에게 주는 것이 옳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중들은 땅이 없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먹고 살란 말인가.”

하였다. 대사헌 최사강(崔士康)이 계하기를,

“중들이란 본래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터가 아니오니 토지는 무엇에 쓰겠습니까.”

하고, 대언(代言)들도 계하기를,

“각 종(各宗)의 중들이 사사로이 사사(寺社)를 점령하고 농사를 짓는 것이 속인(俗人)보다 배나 되오며, 아내와 첩이 마주 앉아 있어 제 마음대로 불의(不義)를 행하여 맑고 깨끗한 도(道)에 어긋남이 있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각 종파(宗派)의 중들이 사사로이 점령한 절 토지를 농토 없는 평민(平民)들에게 옮겨 주는 것이 옳겠다. 또 그 죄를 범한 중은 법에 의하여 장형(杖刑)에 처하여 환속(還俗)시키고, 60세 이상이 된 자는 다만 장형(杖刑)에 처하되 속인(俗人)을 만들지는 말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3 집 46 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농업-전제(田制) / 금융-화폐(貨幣) / 윤리(倫理)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산천】

말흘산(末訖山) 주 북쪽 30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정토산(淨土山)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천등산(天燈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

 

【불우】

용두사(龍頭寺) 말흘산(末訖山) 밑에 있다. 삼국시대 때에 북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므로, 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기도하였다. 고려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승 법경자등탑비(僧法鏡慈燈塔碑)가 있다. ○ 이숭인(李崇仁)이 송도생상인(送道生上人)시에, “개천(開天) 서쪽 억정(憶井) 동쪽에 높직하게 이 절이 있다. 산은 평야를 둘렀으니 새벽 구름이 희고, 강은 성긴 숲을 둘렀으니 단풍잎이 붉도다. 상인(上人)은 오늘에 돌아가는 돛대를 움직이고, 노는 손은 옛날에 울린 종소리를 들었노라. 동방(同榜)인 비서(祕書)가 아마 잘 있을 것이니, 조만간 편지가 도달할 것이라 말하여 다오.” 하였다.

개천사(開天寺) 정토산(凈土山)에 있다. ○ 고려(高麗) 역대 왕조의 실록(實錄)을 처음에는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간직했다가 왜구(倭寇)로 인하여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에 옮기고, 또 이 절에 옮기고, 또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에 옮겼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그 땅이 바닥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이 절에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종(世宗) 때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모두 서울로 운반하였다.○ 이숭인(李崇仁)이 권 사군(權使君)을 보내는 시에, “정토산이 대단히 좋다. 개천사가 징거할 만하네. 문에 이르는 이는 속(俗)된 손이 없고, 벽(壁)을 향한 이는 높은 중이러라. 백 척 높은 대(臺)는 물에 임하고, 천 년의 나무는 등넝쿨에 누웠다. 그대 돌아가 여가가 있거든 하나하나 찾아보소.” 하였다.

 

[충주지명유래] 동량면

 

▣ 동량-면(東良面)【면】츙주시 13개 면의 하나. 본래 충주군의 지역으로서, 대한제국 시대에는 동량곡(東良谷)이라 불렀고, 경술국치(1910년) 이후 동량면(東良面:동량곡)이라 하여 운교(雲矯), 용대(龍垈), 대야(大也), 사천(沙川), 배일(排日), 마흘(馬屹), 황전(黃田), 장선(長善), 모천(毛川), 건지(乾地), 조돈(早遯), 손력(遜力), 탄동(炭洞), 화암(花岩), 지동(紙洞), 만천(萬川), 하곡(荷谷)의 17개 리동을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교(龍橋), 대전(大田), 조동(早洞), 손동(遜洞), 화암(花岩), 지동(紙洞), 하천(荷川)의 7개리로 개편 관할함. 1987년 1월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제천군 한수면 사기(沙器), 명오(鳴梧), 서운(瑞雲), 포탄(浦灘), 함암(咸岩), 호운(好雲)리가 새로 편입되어 13개 리동을 관할하게 되었음.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에 따라 충주시에 편입됨. 남쪽은 목행동(牧杏洞), 서쪽은 금가면(金加面), 북쪽은 산척면(山尺面), 동쪽은 제천시(堤川市) 한수면(寒水面)에 각각 닿음.

 

대전리(大田里)

⊙ 대전-리(大田里)〔한밭, 황밭, 대전, 황전〕【리】동량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동량면의 지역으로 큰 밭이 있으므로 한밭, 황밭, 또는 대전(大田), 황전(黃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야리(大也里), 사천리(沙川里), 배일리(排日里), 마흘리(馬屹里), 황전리(黃田里)를 병합하여 대야와 황전의 이름을 따서 대전리라 함. 현재 행정리동으로 수회, 내동, 마흘, 배일, 황전, 사천, 대미가 있음.

 

* 내동(內洞, 안골)

●내-동(內洞)[안골]【마을】대전리 행정리동의 하나. 수회 마을 북서쪽 0.6㎞ 지점에 위치함. 마흘(멀미) 동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1997년 8월 조사시 29호, 119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자연마을로 양지말과 음지말이 있음. 옛날에 관청이 있었다고 함. 논·밭농사를 주로하며 밭농사로는 고추를 주로 재배함.
●절-골【골짜기】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가늠골 동쪽에 있음. '대전사'라는 절이 있었다 함.
●충주-영모사【사묘】충주 최씨 사묘. 충주 최씨 시조인 최승(崔陞) 등 선조 8위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고 있음. 1922년 후손들에 의하여 창건됨,
●풍무-골[품무골]【골짜기】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바람이 없어서 '풍무골'이라 했다 함.


* 마흘(馬屹, 멀미)

●마-흘[말흘, 멀미, 흘살]【마을】대전리 행정리동의 하나. 내동에서 서쪽으로 0.5㎞ 지점에 형성된 마을. 수회 서쪽에 있는 배일과 내동 사이에 위치함. 1997년 조사시 42호, 138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동녘말과 서녘말 등의 자연마을이 있음. 이곳이 대전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임.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하며 밭농사로는 고추를 많이 재배함.

 

[충주지명유래] 산척면

 

▣ 산척-면(山尺面)【면】충주시 13면의 하나. 본래 충주군의 지역으로서, 천등산(天登山)이 있어 본래부터 산척면(山尺面)이라하여 정암(鼎岩), 방대(方垈), 명돌(明乭), 삼탄(三灘), 도덕(道德), 서대(西垈), 신담(新潭), 명암(明岩), 합천(合川), 만지(晩知), 석문(石門), 원서(院西), 매촌(梅村), 가정(佳亭), 소월(小月), 상산(上山), 증촌(曾村), 소강(小江), 대강(大江), 광동(廣洞), 송정(松亭), 행정(杏亭), 도봉(道峯), 소림(小林), 월현(月峴), 둔대(屯垈), 독동(篤洞), 용전(龍田), 덕해(德海), 계척(桂尺), 상영(上永), 백악(白岳), 성암(聖岩), 서곡(黍谷), 하영(下永), 용암(龍岩), 온금(溫今)의 37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서(明西), 석천(石川), 원월(院月), 송강(松江), 영덕(永德)의 5개 리로 개편 관할함. 198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원월리 응평, 원서, 매촌, 대월, 소원, 재현, 가정등 7개 마을이 제원군 백운면으로 편입됨. 동쪽은 제천시 봉양면, 남쪽은 동량면, 서쪽은 엄정면, 동북쪽은 제천군 백운면에 각각 닿음.

 

영덕리(永德里)

⊙ 영덕-리(永德里)【리】본래 중원군 산척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둔대리(屯垈里), 독동(篤洞), 용전리(龍田里), 덕해리(德海里), 계척리(桂尺里), 상영리(上永里), 백악리(白岳里), 성암리(聖岩里), 서곡리(黍谷里), 하영리(下永里), 용암리(龍岩里), 온금리(溫今里), 월현리(月峴里)와 엄정면의 율곡(栗谷)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상영과 덕해의 이름을 따서 영덕리라 함. 현재 행정리동으로 둔대, 덕해, 독동, 용전, 상영, 계척, 서곡, 하영, 용암이 있음.

 

* 용전(龍田)
●용-전(龍田)【마을】영덕리 행정리동의 하나. 531번 리도를 사이에 두고 독동과 접하며, 독동의 서편에 위치함. 마을 뒷산인 용천산의 용자를 따서 용전이라 했음. 1997년 8월 조사시 25호, 77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신대말, 범아골 등이 있음.
●범바-골1【마을】용전에 속한 자연마을의 하나. 용전 본동 남쪽에 위치함.
●신대-말【마을】용전에 속한 자연마을의 하나. 독동 수풍거리 남서쪽에 위치함.
●참샘-골[찬샘골]【골짜기】범바골과 사태밑지 사이의 서쪽으로 뻗은 골짜기. 옛날 옻이 올랐을 때 효험이 있는 샘이 있었다 함.

 

* 용암(龍岩)
●용-암(龍巖)【마을】영덕리 행정리동의 하나. 하영남쪽 19번 도로변에 형성된 마을. 예날 기우제를 지내면 용이 내려와서 비가 오도록 하는 바위가 있어 용바위라 하였고, 용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용암(龍巖)이라 하였다 함. 1997년 8월 조사시 60호, 198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참샘골, 개터, 팔매울, 성암 등이 있음.
●개-터【마을】용암에 속한 자연마을의 하나. 19번 도로에서 207번 리도 입구에 위치한 마을. 옛날 단양 우씨 묘자리를 개가 잡아 불리워진 이름.
●성-암【마을】객고개 동쪽에 있는 용암에 속한 자연마을의 하나.
●참샘-골【마을】용암에 속한 자연마을의 하나. 하영 서편에 위치함. 샘이 있어 현재도 상수원으로 사용하고 있음.
●팔매-울【마을】개터 동쪽에 있는 용암에 속한 자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