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담소/추억과 생각

충주에는 三多가 있는데, 石多人多言多이다.

산골어부 2021. 2. 2. 23:58

 

而俗諺相傳曰。忠邑有三多。石多人多言多。

 

나의 고향은 충주 노은이다. 국망산 아래 닥밭골에서 대대로 300여년을 살아 왔기에 원조 촌놈이다. 환갑이 된 나이에도 충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 충주형승변증설을 읽다가 문득, 제주 삼다도가 아닌 "삼다촌"이란 말이 떠오른다. 충주시에서도 홍보문구로 삼색도시(사과:빨강,담배:황색, 남한강:청색)와 삼색온천(수안보,문강,능암)이라고 홍보하던 것이 떠오른다. 삼다도가 아닌 "삼다촌"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 "삼다도"란 이름도 근세에 생겨난 것이다.

 

쾌지나 칭칭의 노래 가사 중에서

 

하늘에는 잔별도 많다 쾌지나 칭칭 나네

시내 물가에 자갈도 많다 쾌지나 칭칭 나네

솔밭에는 공이도 많다 쾌지나 칭칭 나네

대밭에는 마디도 많다 쾌지나 칭칭 나네

살림살이는 말도 많다 쾌지나 칭칭 나네

 

조선후기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 충주형승변증설“충주에는 三多가 있는데, 石多人多言多이다.”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는 이규경이 풍수지리 등을 재해석하면서 충주에 떠도는 말을 변증한 것이다. 사람이 많이 산다는 것은 살기가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병폐가 민심이 각박해지고, 구설수에 따라 민심이 흉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끄러운 곳은 어딜까 ? 서울일 것이다. 어쩌면 도시병폐의 순위는 인구수에 따라 이어질 것이다. 이를 달리 보면 현대인들 대부분이 흉지에 산다고 볼 수 있다. 충주는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의 국원소경, 그리고 통일신라 때는 중원경이 있던 곳이다. 고려시대의 중앙집권제에 따른 지방제도의 변혁에서도 충주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고, 거란족, 몽고족, 왜에 따른 침략에도 충주를 지킬 수 있었으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충주전투의 패배 이후에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타난 것처럼 "신립의 패전지"란 선입견으로 충주를 바라보게 된다. 역사서에는 치욕적인 충주전투를 구체적으로 남기질 않았으나, 충주를 지나는 시인묵객들은 패전의 원인들을 조롱하며 글을 남겼다. 충주민이나 충주전투에서 전사한 분들의 후손들에게는 굴욕적 표현이지만, 떠도는 속언으로 충주의 풍수지리까지 빌어 지역민심을 흔들어 버렸다.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지만, 말이 많다는 것은 그리 좋은 표현은 아닐 것이다.

 

“충주에는 三多가 있는데, 石多人多言多이다.”라는 말을 알게된 것이 중학교 1학년 정도로 기억한다. 그 당시 노은면 유지들이 “노은촌에는 세가지가 많은데, 돌도 많고 인물도 많고 말도 많다.”라고 빗댄 것을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다. 노은이라는 산골짜기에 돌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고, 인재가 많다는 것도 맞는 것 같은데, 하필이면 왜 ! 말도 많다는 것일까 ? 차라리, "쾌지나 칭칭나네"처럼 "잔별도 많다."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 지금도 삼다도 노래를 들으면 "노은촌"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규경이 쓴 충주형승변증설처럼 사람이 많으면 말이 많은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로 인하여 민심을 흔드는 것은 나쁜 발상이다. 특히 도참사상이나 참위설로 혹세무민하는 행위는 더 나쁜 행위일 것이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라는 말처럼 자연의 현상에 따라 지혜롭게 사는 것이 인간이다. 노은촌놈이자 충주촌놈인 내게는 산도 좋고, 물도 좋고, 돌도 좋아서 살기 좋은 고향일 뿐이다. 자연재해를 극복하는 것도 인간의 지혜다. 자연현상과 재해가 두렵다면 어디로 가야하나, 재난을 피하는 곳이 십승지일까 ? 노은이라는 지명도 숨어서 산다는 곳이지만, 숨어서 살았다기 보다는 산도 좋고, 물도 좋은 조용한 산골짜기였을 뿐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 天地篇○地理類 / 州郡 忠州形勝辨證說

 

忠州。乃我東名府也。故新羅置國原小京。高麗設藏史祕閣。其形勝有足可稱者。
《地志》。忠州在漢陽東南三百里。俗離九遙八曲之水。北至淸州山。東爲靑川。至槐山爲槐江。至邑治西爲㺚川。北至金遷前。與淸風江合焉。壬辰天將過㺚川也。嘗水味曰。廬山水同。邑爲漢水上流。水路便於往來。故京師士大夫多卜居於此。自㺚川南泝至槐江。東泝至淸風。而多士族亭榭。冠冕聚會。舟車走集。且居國都巽方。故一邑科第之多。甲於八路諸郡。足稱名都。然嶺南右道。由竹嶺而通。左道由鳥嶺而通。二嶺竝會于邑治。而以水陸始通漢都。故邑治獨當畿湖往來之衝。若當有事。爲必爭之地。實爲一國中央。如中國之荊州。故壬辰倭賊之敗申砬也。亦於此地。而常時殺氣衝天。白日無光。地勢走瀉西北。無停蓄之氣。故亦少富厚者。人民稠衆。常多口舌浮薄。不可久居之地。然此以邑治論耳。自邑治西渡㺚川。則俗離北行一支。自陰城縣西。特起爲迦葉山。爲芙蓉山。一止於金遷。一止於嘉興。餘麓盤回於㺚川之西。地宜草綿五穀。土極饒沃。山水間村塢錯居。多富饒者。而其中金遷、嘉興。最爲繁盛。金遷則二江合於前而繞出村北。東南受嶺南貨物。西北通漢陽魚鹽。閭閻櫛比。恰似漢江諸江村。舳艫聯絡。爲一大都會也。嘉興則在金遷西十餘里。江自東南趨西北。而村在南岸。芙蓉一支。逆江特起爲薔薇山。是爲嘉興之主鎭。朝家設倉於此。收嶺南七邑、嶺外七邑田賦。使水運判官漕至京師。居民以主客與米出入時。多射利出奇羨。二村亦多科甲貴顯之家。薔薇山上有古城。而術士言古人築城。以眞人閉六戊法。至今有神氣若魚腹浦八陣然。有數處頹缺。術士之行法者。更爲修補。則於國於家。可作保障陰雨之備。而人無知者。圮城中有人入葬。五世螟孫。蓋壓於神祟而然云。迦葉一帶外。俗離西行者。名小俗離山。自此一支逆行爲玉帳、八聖等山。止於秣馬里。卽己卯名宰十淸金世弼退居之地。子孫至今世居。而閭閻櫛比。皆饒給。前有大川。灌漑水田。多畝種。故自古少値凶歉。距王京近三百餘里。且通驪江水路。實可居處。而近者山川變改。民戶生利。殆不如古云。土人以金遷、嘉興、秣馬里與江北內倉。爲忠州四大名塢。自邑治西北七里許。一小山在二江合襟內。卽新羅時于勒仙人彈琴處。有十二層巖。以此名之曰彈琴臺。其下爲楊津溟所。祠在臺中。沈虎頭骨於溟中。祈雨有驗。申砬於壬亂。背水陣於此。兵敗。致命於玆。其越邊相望之岸。名聽琴亭。作一小洞天如蝸殼。可寄數戶處也。自臺渡江而北爲北倉。有臨江巖石之勝。倉西卽己卯名賢灘叟李延慶之所居。子姓十世科甲不絶。人以爲江干名基。沿江而西爲月灘。卽洪氏所居。又西爲荷潭。卽故判書金時讓所居。又其西爲木溪。是卽下江魚鹽船停泊出貰之所。而東海魚鮮嶺峽貨物。皆聚於此。居民皆以販賣致富。木溪西爲靑龍寺洞。洞頗幽邃。爲許相積舊傳之基。寺是麗朝普覺國師住持古刹。寺額金生筆也。寺碑權陽村近所製。普覺浮屠。則自國朝命立。師與我太祖潛龍時故舊故也。純廟朝中葉爲人所扞。移其浮圖卜葬。而寺亦被燬。寺之洞壑。西與原州接壤。東自北倉。西至靑龍。竝稱江北諸村。雖有臨江勝槪。皆土薄不及大江以南㺚川西之饒沃矣。木溪北十里爲內倉村。是自羅、麗爲千年名村。山中開野。風氣關鎖。土地甚廣。多世居士族。而近爲山圮水決。洞府湮改。不如舊。村落稀少焉。
義相《山水祕記》。忠原之京。殼山高峻。故多富厚長者。星湖李瀷《僿說》。忠州之俗纖嗇。蓋俚諺有忠州子蘭古非之稱。卽古之癖於鄙吝人名也。今看其俗則近是。而嶺南甚近。故其風氣自然效襲而然歟。監營初設於今邑治。故有觀風閣遺址。宣祖壬寅。移設於公州邑治。牧府城石築。周三千六百五十尺。今但有此。北邊有拱北門之稱。距邑數里。有御林及日影臺之名。而臺則尙存。此是新羅設小京之時遺蹟。府後鎭山。名曰雞足。上有古城遺址。內有井泉。若修築。可以淸野入保。而俗諺相傳曰。忠邑有三多。石多人多言多。蓋邑中多磊磧。村多人聚。比他邑殷盛。人多。故作謊誕之說。爲口舌場。至今尙然。則俗諺非誣傳矣。雖然近京三百里。水陸俱通。五穀、菜果、桑綿、六畜、魚鮮、釜鼎、鏵犁之屬。民生日用百物。無不俱備。東西南北之財貨相通。兼以簪纓聚居。文物彬彬。則卜築頗宜。而復有內四郡之險阻。則治亂可居之地云爾。

 

 

택리지 -충주목

 

 

충주는 청주에서 동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청주에서 청안(淸安)의 유령(楡嶺)을 넘고 괴산을 지나 달천을 건너면 충주읍이 되는데, 한양에서 동남쪽으로 300리에 있다. 속리산 구요팔곡(九遙八曲)의 물이 북에서 청주 산동(山東)에 이르러 청천이 되고, 괴산에서 괴강(槐江)이 되며, 고을 서쪽에 이르러 달천이 되었다가, 다시 북쪽으로 금천(金遷)① 앞에 이르러 청풍강과 합쳐진다.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廬山) 폭포의 물맛과 같다”고 하였다. 고을이 한강 상류에 있어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하므로 서울의 사대부들이 옛부터 여기에 살 곳을 정하였다. 달천②에서 남쪽으로 (물을) 거슬러 가면 괴강에 이르고, 동쪽으로 거슬러 가면 청풍에 이르는데, 사대부의 정자가 많고 의관 차린 사람들이 모이며 배와 수레들도 모여든다. 또 국도의 동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한 고을에서 과거에 급제한 자가 많기로 팔도 여러 고을 가운데 으뜸이니, 이름난 고을이라고 부르기에 넉넉하다. 경상도(에서 서울 가는 길이) 좌도에서는 죽령을 거쳐 (이 고을로) 통하고, 우도에서는 조령을 거쳐 (이 고을로) 통한다. 두 고개의 길이 모두 이 고을로 모여, 물길 또는 육로로 한양과 통한다. 그러므로 이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으로 오가는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다투는 곳이 된다. 참으로 온 나라의 한복판이 되어 중국의 형주나 예주와 같기 때문에, 임진년에 왜적이 신립(申砬)을 또한 여기서 패배시켰다. 보통 때에도 살기가 하늘을 찌르며, 햇빛이 보이지 않는다. 지세가 서북쪽으로 쏟아지며 정기가 머물러 쌓이지 않으므로 부유한 자가 또한 적다. 백성이 많아 항상 구설이 많고 경박하여서 살 곳이 못 된다. 그러나 이는 충주 고을만 가지고 논한 것이다. 충주에서 서쪽으로 달천을 건너면 속리산이고, 속리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한 가지가 음성현 서쪽에 우뚝하게 솟아 가섭산과 부용산이 되었다. 이 산줄기가 하나는 금천에 그쳤고, 다른 하나는 가흥에서 그쳤으며, 나머지 산기슭은 달천 서쪽으로 빙 돈다. 땅은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고, 토질도 매우 기름지다. 산골에 마을이 섞여 있는데, 부유한 자가 많다. 그 가운데서도 금천과 가흥이 가장 번성하다. 금천은 두 강이 마을 앞에서 합친 뒤에 마을 북쪽으로 둘러서 흘러가므로, 동남쪽으로는 영남의 물자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의 생선과 소금을 받아들여, (교역하는) 여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한양의 여러 강마을들과 비슷하다. 배의 고물과 이물들이 잇닿아, 하나의 커다란 도회지를 이루었다. 가흥은 금천 서쪽 1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강이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흘러가고, 마을은 남쪽 언덕에 있다. 부용산 한 가지가 강물을 거스르며 우뚝하게 솟아 장미산이 되었는데, 이 산이 바로 가흥의 주산이다. 나라에서 여기에 창을 설치해③ 고개 남쪽의 경상도 일곱 고을과 고개 북쪽의 충청도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고, 수운판관을 시켜 뱃길로 서울까지 실어 나른다. 주민들은 객주업을 하면서 쌀이 드나들 때 끼여들어 이문을 노리며, 가끔 횡재하는 수도 있다. 두 마을에는 과거에 올라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도 또한 많다. 가섭산 일대에서 속리산 서쪽으로 뻗은 줄기를 소속리산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다시 한 가지가 거슬러 뻗어서 옥장산(玉帳山)과 팔성산(八聖山)이 되었다가 말마리(抹馬里)에서 그쳤는데, 이곳이 바로 기묘사화 때의 명현이었던 십청(十淸)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이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곳이다. 그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대대로 살며, 민가가 수백호인데 모두 넉넉하게 산다. 마을 앞에 커다란 냇물이 있어 물을 대므로, 1묘에 1종씩 거두는 논이 많다. 그래서 옛부터 흉년이 드는 해가 적다. 한양과의 거리가 가까워 200리밖에 안 되고, 게다가 여강과 물길로 통하니 참으로 살만한 곳이다. 이 지방 사람들은 금천․가흥․말마리와 강 북쪽에 있는 내창(內倉)을 충주 4대촌이라고 한다. 충주 고을에서 서북쪽으로 7리쯤 되는 곳에 작은 산 하나가 두 강물이 합치는 곳의 안쪽에 솟아 있다. 신라 때 우륵(于勒) 선인이 가야금을 타던 곳인데, 탄금대(彈琴臺)④라고 부른다. 탄금대에서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면 북창(北倉)이 있는데 강가에 있는 바위의 경치가 좋다. 창 서쪽은 기묘사화의 명현인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1488~1552)이 살던 곳이다. 자손 10대에 걸쳐 끊임없이 과거에 합격하자, 사람들이 “강가의 명당”이라고 하였다.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월탄(月灘)⑤이 되는데, 홍씨들이 사는 곳이다. 또 그 서쪽은 하담(荷潭)인데, 옛판서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이 살던 곳이다. 또 그 서쪽은 목계(木溪)인데, 강을 내려오는 생선배와 소금배들이 정박하며 세를 내는 곳이다.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물산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므로, 주민들이 모두 장사에 종사하여 부유하다. 목계 서쪽은 청룡사 골짜기인데, 서쪽으로는 원주와 경계가 닿아 있다. 동쪽으로는 북창에서 서쪽으로는 청룡사까지를 아울러 강북 여러 마을이라고 하는데, 비록 강가의 경치는 좋지만 땅이 메마르다. 큰강 남쪽에서 달천 서쪽까지의 기름진땅보다 못하다. 목계에서 북쪽으로 10리 되는 곳이 내창촌(內倉村)인데, 천년 동안 이름난 마을이다. 산 속에 들판이 펼쳐져 바람기가 아늑한데다 땅도 매우 넓어서, 대대로 살아오는 사대부들이 많다. 동쪽은 월은령(月隱嶺)과 맞닿았는데, 고개 동쪽은 바로 제천과의 경계이다. 충주 동쪽은 청풍부(淸風府)인데, 강가에 한벽루(寒碧樓)가 있다. 자못 상쾌한데다 경치까지도 그윽해, 상류에서 이름난 누각이라고 불린다. 청풍부 서쪽에 있는 황강촌(黃江村)은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살던 곳이다. 청풍 동쪽은 단양이고, 단양 북쪽은 영춘이다. 이 세 고을은 모두 시내와 골짜기가 험하고 들판이 적다. 충주 동북쪽은 제천인데, 고을 사면에 산이 둘려 있다. 산 위에 터를 잡았는데, 안으로 들판이 펼쳐진데다 산이 낮아서 훤하고 명랑하며, 역시 대대로 사는 사대부 집안이 많다. 그러나 지대가 높아서 바람이 차고, 땅이 메말라 목화를 가꾸지 못하므로, 부자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다. 북쪽에 의림지(義林池)⑥가 있는데, 신라 때 큰 둑을 쌓고 물을 막아서 온 고을의 논에다 물을 대었다. 못 서쪽에 후선정(後仙亭)이 있는데, 김씨 집안의 소유물이다. 비록 영동의 여러 호수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배를 띄어 놀기에는 넉넉하다. (제천) 북쪽은 평창과 가깝고 동쪽은 영월과 닿아 있다. 첩첩 산 속에 있는 깊은 골짜기이므로 참으로 난리를 피하고 속세를 피할 만한 곳이다. 연풍(延豊)은 충주 남쪽에 있는데, 높은 벼슬을 지낸 자는 없다. 그러나 땅이 기름지고 물대기가 쉬어서 목화 가꾸기에는 상등 밭이다. 연풍 서쪽은 괴산인데, 땅이 새재와 유령 두 고개 사이에 있어 지세가 비좁고 울퉁불퉁하다. 그러나 살기를 조금은 벗었다. 동쪽으로는 큰 강을 마주하여 경치 좋은 곳과 이름난 마을이 많으며, 또 높은 벼슬을 지낸 자도 많다. 땅은 오곡과 목화를 가꾸기에 알맞다. 북쪽으로는 금천과 가까워, 역시 살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새재를 넘으면 (경상도) 문경이고, 서쪽으로 유령을 넘으면 음성이다. 서쪽으로는 죽산․음죽과 경계가 닿아 있다. <지은이 이중환, 옮긴이 허경진,『택리지』, 한양출판, 1996, pp. 13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