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발길이 머무는 곳에서

노태우 대통령 생가에서

산골어부 2022. 3. 13. 08:22

이런 시골집에서도

대통령이 태어났네요.

이제는 가고없는 대통령.

 

정치적인 평가는

역사의 몫으로 남겨두고

~~~~~~~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에서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해 팔공산에 백일기도를 드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결혼 후 9년만에 노태우를 낳았다. 노태우는 그 근본 자체는 삼국지의 오나라 참모인 노숙의 후손으로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의정부의 영의정을 지낸 문광공 노사신의 15대손이다. 5년 뒤 동생 노재우가 태어났다.

어머니가 노태우를 임신했을 때 꿈을 꾸었는데 어머니가 콩밭에 김을 매던 중 밭에 큰 구렁이가 숨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집으로 도망 오는데 구렁이가 따라와서 부엌에 숨어있는 노태우 어머니의 발뒤꿈치를 물고 온 몸을 휘감아서 놀라서 깨었다 한다. 할아버지는 이 구렁이가 용이라 하여 원래 아이의 이름을 '태룡'(泰龍)이라고 지으려 했으나 일제 시대였으므로 꿈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어리석을 우'(愚)를 붙여 이름을 '태우'(泰愚)라고 지었다.

유년 시절[편집]

아버지 노병수는 소학교 학력이 전부였으나 신문물에 일찍 눈을 떴으며, 189cm의 훤칠한 키를 가진 사람이었다. 또한 음악적 재질이 뛰어났으며 한문을 잘 하여 면서기를 지냈다. 아버지는 노태우와 노재우 두 형제를 무릎에 앉히고 특별히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어려서 들은 유성축음기 노래 덕에 그는 일찍부터 노래를 잘 불렀으며, '베사메무초'와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노태우가 노래를 잘 부르게 된 것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노래 실력이었다.

어머니 김태향은 학식은 없었으나 신앙심이 두터운 불교 신자로서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1939년 아버지 노병수는 동생(노태우의 숙부) 노병상(盧秉祥)의 중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노태우는 끼니를 거르는 등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자신으로 인해 형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숙부는 아버지 이상으로 조카들을 키웠고 사촌 형제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는 아버지의 유품인 퉁소를 즐겨 불면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고 음악적 기량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노태우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처럼 어리광을 피우며 자라기는 어려웠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며 말을 아끼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학창 시절[편집]

그의 집은 팔공산 근처에 있었다. 1939년 3월 집근처에서 6km 떨어진 공산소학교에 입학했으며, 직접 걸어서 통학하며 다녔다. 형편이 넉넉치 않아 그는 맨발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성격이 유순하였던 그는 화를 잘 내지 않았는데 학창시절의 별명은 스마일이었다고 한다. 화내는 것을 잘 볼 수 없고 언제나 싱글벙글이었다고 한다. 귀가 크고 듣기를 잘 했다고도 한다.

1945년에 공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소학교 동창 101명 중 중학교로 진학한 학생은 남학생 1명, 여학생 2명으로, 그가 유일하게 중학교로 진학했던 것이다. 중학교 5학년 무렵에는 싸우는 친구를 설득하여 화해시키고 잘 조정하여 조선 세종때의 황희 정승에서 따서 "노(盧) 정승"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부친의 사후 그의 집안은 이렇다할 공직에 몸담던 인물이 없어서, 그의 집안은 창씨개명에 참여하지 않고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소학교 시절 노태우는 성적이 상위권이었으나 형편이 어려웠기에 그의 6학년 때의 담임선생은 특별히 저녁 늦게까지 보충수업을 가르쳤으며, 그는 밤길에도 혼자 산을 넘어서 집에 도착하여 밤늦게까지 공부하곤 했다. 그는 점차 말수가 적고 독서에만 흥미를 두게 되었다.

청소년기[편집]

중고교 시절[편집]

1945년 3월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재학 중 학질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와 열병으로 고생했으나 극적으로 생존하였다. 그리고 대구고보 4학년 편입시험에 10대 1의 경쟁률에서 상위 성적을 얻고, 경북중에 편입학하였다. 재학 초기 학생들 중에는 정치 활동에 참여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학생은 학업에 전념해야 된다'며 거절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몸집도 작고 싸움을 싫어하였으며 정치 이념문제에 개입하지 않은 덕에 순탄한 학교생활을 하였다.

당시 정치인들 중 그는 김구를 특별히 존경했다.[3] 이후에도 대화 도중 김구가 한 발언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4학년 당시 성적은 224명 중 102등이었으나 5학년 당시에는 218명 중 68등으로 올랐다. 대구고보 재학 중 그는 장래 희망을 의사로 정하였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이 불가능하면서 의사의 꿈을 포기하게 된다. 재학 중에는 학예회에 자주 나갔으며 직접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노래를 그의 동창인 경북의사회 회장을 지낸 윤건호는 50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경북고 시절의 담임인 이길우는 그가 과묵하고 착실한 모범생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했다고 후일 회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