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풍수촌과 바람드리

산골어부 2023. 3. 29. 16:24

풍수촌과 바람드리

 

풍납토성을 둘러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지명 하나가 있다.

신라 문무왕(661~681년) 때인 662년에 김유신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에게 군수물자인 식량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 풍수촌"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음력 1월 23일에 칠중하(임진강)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추정하면, 풍수촌은 칠중하인 임진강일 수도 있지만,  풍납토성이 있는 풍납동 일대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본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책계왕(286년) 때에 아차성과 사성을 수리했다고 전한다. 백제 개로왕(475년)의 기록에는 사성의 동쪽에서  숭산의 북쪽까지 뚝을 쌓고, 궁궐을 중수했다고 전한다. 백제의 위례성 위치비정에서 사성을 비암으로 해석하고, 풍납동을 바람드리로 해석하는 등 수많은 추리와 추측이 난무 했었다. 풍납토성이 발굴되면서 위례성과 한성은 동일한 성으로 비정하지만, 아직도 이를 부정하는 분들이 많다.  풍수촌과 풍납동에 대한 생각을 남겨본다.

 

한강 항공사진1
한강 항공사진2

 

한강과 임진강의 도강 위치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파주 문산이나 연천의 호로고루성 부근에서 임진강을 도강했을 것이다. 이는 한강하류나 임진강 하류를 도강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고,  물론 임진강 중.상류에서 도강하면 더 쉽겠지만, 내륙산간지역으로 우회하기 때문이다. 한강의 도강지점은 어디일까 ?  제1지점은 잠실도가 있던 석촌동 부근이고, 제2지점은 여의도가 있는 마포 부근이다.  조선시대에 정조가 배다리를 건너서 화성을 갔다가 왔지만, 이는 까마득한 훗날의 이야기다. 백제 초기에 맥국이나 말갈이 위례성을 공격하는 방향은 임진강과 북한강을 따라 이어지며, 그중에서 양평의 두물머리 부근을 도강해서 남한산성 일대로  침략하는 것이다. 이는 맥국과 말갈은 수군보다는 기병을 이용해서 말을 타고, 주로 갈수기에 침략한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아차성과 사성은 왜 그곳에 있을까 ?  백제군과 고구려군은 어떻게 한강을 건너 다녔을까 ?  소규모 병력은 나룻배로 도강을 했겠지만, 고구려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군사가 도선을 이용하여 백제의 왕성인 한성을 공격하기보다는 주력군은 아차성을 점령한 후에 한강의 하중도를 건너갔을 것이고, 일부는 양평 두물머리로 우회하여 한강을 도강하여 남한산성 일대를 점령하고, 미사리 방면에서 공격했을 것이다. 물론 그중 일부는 수군을 이용하여 한강을 거슬러 공격했겠지만,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비의 기록으로는 추정만 할 뿐이다.

 

탄금대 일대 항공사진(1948년)(국토지리정보원&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배수진과 도강에 대하여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신립장군의 배수진 이야기가 나타난다.  배수진이란 표현이 왜 임진왜란 충주전투에만 등장할까 ?  백제의 한성과 웅진성과 사비성도 강변에 위치한다. 고구려의 평양성뿐만 아니라, 신라의 월성도 남천을 끼고 있다. 행주산성과 진주성도 마찬가지다. 신라의 월성은 개천에 불과하지만, 한강과 대동강, 금강과 남강은 어떨까 ? 지금은 댐과 제방 등으로 수역이 제법 크게 보이지만, 우리나라의 강은 수량의 변화가 심하여, 홍수기를 제외하면, 강여울을 따라 도강할 수 있는 하천들이기에 강변에 축성된 성에서 전투가 벌어져도 배수진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강 유역을 따라 성과 보루를 축조하는 것은 시야가 좋고, 방어나 축성에 유리하기 때문이지만, 도강을 할 수가 없어서 강물에 뛰어들어 전사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다.  한국전쟁 직전에 찍은 탄금대의 항공사진을 보면 어떨까 ? 탄금대섬에서 하중인 용섬까지는 몇 미터나 될까 ?  중학생 정도면 조금만 헤엄쳐도 건너 다닌다.  달천의 여울은 어떨까 ?  갈수기에는 초등학생도 건너 다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어머니도 초등학교 때 탄금대 여울과 용탄 여울, 그리고 목계 여울을 건너서 제천 백운을 걸어서 오고 갔다고 한다. 예전에는 갈수기가 되면 달천 여울에 섶다리를 설치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친 이야기는 전투현장을 가보지도 않은 조선의 선비들이 지어낸 신립장군의 무용담일 뿐이다.

 

잠실지역 옛지도(한성백제 박물관)

 

 

풍수촌과 풍납동에 대하여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풍수촌을 풍납동으로 비정하는 것도 비암드리와 바람드리로 해석하는 논리와 같다.  풍수촌을 풍납동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이 당시의 군사령부인 한산주의 남천정을 경유하여 한강과 임진강을 건너서 황해도(산양, 이현, 장새)로 간 기록을 분석하면은 어떨까한다.  위례성과 사성과 한성이라는 지명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위례성은 백제식 한자표기고, 사성은 고구려식 한자표현이고, 한성은 신라식 한자표현으로 보면 어떨까 한다. 비암드리와 바람드리란 표현을 지금은 바보 같은 발상이라고 생각하지만, 한성백제가 멸망하고, 천년 후에 쓰인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조선선시대의 기록에서도 한성백제의 왕성은 온조왕(BC 5년)이 만든 목책으로 둘러싼 위례성이었을 것이다. 한성백제가 멸망한 475년 까지 토성을 쌓고, 왕성을 유지했기에 풍납토성은 약 480 년 동안 쌓은 토성이다. 평지에 조성된 토성 뿐만 아니라, 석성을 포함해도 풍납토성의 규모는 대단한 규모다. 신라의 금성과 월성보다도 큰 왕성이지만, 조선시대의 도성과 읍성만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는 흙으로 만든 작은 성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몽촌토성이 발견되었을 때를 상상하면 어떨까 ?  사학자들이 한성백제의 왕성을 찾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풍납토성이 발굴될 때는 또 어떨까 ? 그리고, 하남의 이성산성의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유물들을 본 결과는 어떨까 ? 아직도 확실한 물증인 고고학 자료는 없기에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궁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사라져 간다.  풍수촌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풍수촌이라는 소지명은 아주 작은 행정단위일 것이다.  한성백제가 멸망한  180여 년 후에 나타나는 지명이고, 삼국사기의 지리편에도 나타나지 않기에 주. 군. 현에도 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강 이남에서는 한산군인 광주와 율진군인 과주(과천)가 나타날 뿐이다.  광주와 과주가 나타나는 것도 신라 또는 후대의 기록 때문이다. 백제시대에는 광주와 과주가 아닌 위례성(풍납동)과 금주(시흥동) 또는 검주(김포읍)가 아닐까 한다. 후대의 사학자들이 왜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에 집착했을까 ?  이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시점에서 까마득한 옛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