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의 유래는 ?
괴산군의 유래는 ?
괴산을 오늘날의 상용한자로 풀이하면 회나무골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회나무와 느티나무를 좋아해서 관청을 비롯해서 유적지뿐만 아니라, 마을에도 노거수로 남아있다. 괴목은 회나무를 이야기하지만, 회나무보다는 느티나무로 인식하는 것도 느티나무가 더 많기 때문이다. 느티나무와 연관된 지명은 괴촌과 괴정 등이 있다. 괴곡(槐谷)과 괴산(槐山)의 괴(槐)는 귀신도 쫓는다는 회나무를 의미한다. 괴곡이나 괴곡성이 주는 오늘날의 이미지는 귀신들이 사는 곳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본래 의미는 잡귀를 물리치는 신목 또는 당목이라고 여겼기에 궁궐에는 물론이고, 마을이나 민가에도 심었던 것이다. 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이 노거수를 대표하는 것은 나무도 크지만, 수명이 길다는 것이다. 요즈음은 노거수는 있지만, 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은 너무 커서 안전과 미관을 위해 가지를 잘라 내므로 더 이상 거목이 될 수가 없어 아쉽다. 어쩌면 멋과 여유보다는 각박한 논리에 거목들이 설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괴산군의 유래를 느티나무의 고장로 인식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는 현세태에 길들여진 오늘날의 관점이다. 회나무보다는 역사를 더듬어 괴산의 옛 지명들을 고찰해 보면 어떨까 ?
잉홀현(仍忽縣)-음성현(陰城縣)
잉근내군(仍斤內郡)- 괴곡(槐谷)-괴양군(槐壤郡)-괴주(槐州)
금물노군(今勿奴郡)-흑양군(黑壤郡) -진주(鎭州)
잉벌노현(仍伐奴縣)-곡양현(穀壤縣)-검주(黔州)-금주(衿州)
감물현과 마산현에 대하여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은 계립령을 개설하고 감물현과 마산현을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감물현과 마산현은 어디일까 ? 감물현과 마산현의 위치를 단정할 수는 없다. 일부에서는 감물현을 감문소국이었던 경북 김천으로 비정하고, 마산현은 충남 서천으로 비정하지만, 신라가 감문소국과 사벌국을 점령하여 신라의 영역이 된 것이 신라 첨해왕 때로 기록하기에 감물현과 마산현을 김천과 서천으로 비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라 아달라왕 때에 아찬 길선이 반란을 꾸미다가 백제로 도망간다. 그리고, 백제는 두 개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남한강 지역을 점령하지만, 아달라왕은 한수(남한강)를 따라 두 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긴 땅을 돌려받는다. 이 기사에서 나타나는 한수의 두 개의 성은 충주와 괴산 일대로 추정한다. 감물현과 마산현을 특정한 지명으로 비정하기는 어럽지만, 감물현은 감물내미가 있었던 현재의 괴산군 감물면으로 비정한다. 감물현을 감물내미부곡으로 비정하면 괴산의 유래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지명이 감물현이 된다. 감물현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행정단위처럼 감물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작게는 촌이지만, 크게는 군현을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 아달라왕 시대에 감물현과 마산현은 충주. 음성. 증평. 진천까지 포함할 수도 있다. 달천의 유래에서 괴산의 옛 지명인 잉근내, 감물의 감물내미, 음성의 잉홀, 청천의 거무내, 충주의 검단이라는 지명은 큰 내 또는 큰 개울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김포의 옛 지명인 검주와 서울 금천구의 옛 지명인 잉벌노현(곡양현, 금주)에서도 나타나는데, 한강이라는 강변에 있다는 뜻으로 추정할 뿐이다. 청천과 달천은 한강의 지류인 작은 하천이지만, 크고 작은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남한산성이 있는 광주의 검단산도 마찬가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지리지에서도 고을의 큰 내를 대천이라 하고, 산성이 있는 곳을 진산이라고 할 뿐이다.
잉근내와 잉벌노에 대하여
괴곡이라는 지명은 신라 첨해왕과 백제 고이왕과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역사서에 나타나는 괴산의 옛 지명은 잉근내와 괴곡이다. 괴곡이나 괴양이나 괴주나 괴산은 같은 지명으로 지방제도에 따라 표기가 변한 것뿐이다. 괴곡이란 의미도 회나무나 느티나무가 많아서가 아니라, 산골짜기의 큰 개울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한강이란 명칭도 큰 강이라는 뜻이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표기되는 것뿐이다. 감물(甘勿)이라는 지명도 본래의 지명을 한자로 가차한 지명이기에 큰 개울로 추정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행이 달천수가 최고라고 한 것도 물이 깨끗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은 감물 또는 달천이란 지명 때문에 달천수를 달다 라고 했을 것이다. 진천의 지명에서 금물노는 흑양으로 변천되었지만, 금물노도 큰 뜰이라는 의미일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고대사에서도 잉근내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고, 금. 검. 감. 곰 등은 지역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표기되지만, 그 의미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단순한 지명일 뿐이다.
괴양군(槐壤郡) -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
괴양군(槐壤郡)은 본래 고구려(高句麗)註 027잉근내군(仍斤內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028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괴주(槐州)註 029이다.
청천현(淸川縣)註 126은 본래 살매현(薩註 127買縣)인데 경덕왕(景德王)註 128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괴 : 회 - 회화 - 홰 / 괴 : 느티 - 느릅
잉근내군이 왜 괴양군이 되었을까 ? 잉근내(仍斤內)는 음을 가차한 지명이고, 괴양(槐壤)은 뜻을 신라식 표기로 개명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잉근내와 괴양은 흔히 쓰는 지명이 아니라서 추정하기가 어렵다. 청천의 살매는 유사한 지명들이 많아서 대체되는 지명을 쉽게 찾을 수가 있지만, 당시의 언어체계를 모르면서 잉근내(仍斤內)를 해석하는 것은 어렵다. 무게를 측정하는 척관법에는 근(斤)이라는 단위가 있다. 잉(仍)과 근(斤)에서 잉(仍)은 내(乃)로도 읽는다. 잉근(仍斤)도 살매(薩買)처럼 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지명의 변천사에서 잉(仍)은 검(黔) 또는 금(黔)으로 대체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는 추정에 불과할 뿐이며, 잉근(仍斤)을 괴양(槐壤)으로 개명한 것은 큰 계곡의 뜰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어떨까한다. 진천의 금물노나 음성의 잉홀도 표기는 다르지만, 뜰의 형상을 표기했을 것이다. 김포의 옛 지명인 검주와 서울 금천구의 옛 지명인 잉벌노(곡양, 금주)라는 지명유래도 진천의 금물노처럼 흑양(黑壤) 또는 황양(黃壤)으로 개칭했다가 진주(鎭州)로 고착된 사례와 같을 것으로 추정한다.
살매와 잉근내에 대하여
살수와 살매라는 지명은 한성백제가 멸망하고,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저항하는 시기에 나타난다. 고구려군이 살수에서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는 백제의 도움으로 견아성을 지킨다. 그리고,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하지만, 신라가 구원병을 보내 격퇴시킨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살수는 청천으로 비정하고 있다. 괴산군에 속해 있는 청천면의 옛 지명은 살수와 살매현이지만, 청천면은 괴산보다는 상주와 청주에 예속된 속현이었다. 청주의 유래에서도 살수와 살매는 같은 뜻이고, 살수가 변천된 것이 청천이다. 청천이나 청주나 청원이나 청안도 같은 지명이지만, 지방제도에 따라 표기가 변한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은 괴산. 음성. 진천. 증평군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삼국사기나 고려사를 고찰해보면은 충주와 청주의 위상에 따라 그 편제가 변천되어 왔었다. 삼한의 고대사를 이야기할때, 마한 54개국을 이야기하고 위치를 비정하지만, 54개국은 현재의 시.군.구 보다는 큰 개념이다. 고대사를 고찰하면서 조선시대의 읍성이나 현재의 행정구역에 집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물론 먹고사는 이야기는 국가보다는 우리 동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지만, 지역이기주는 분쟁을 일으킬 뿐이다. 살매와 잉근내와 감물은 달천의 옛 지명이지만, 같은 뜻의 지명으로 볼 수는 없다. 달천의 상류는 살매, 중류는 잉근내, 하류는 감물로 구분한 것은 아닐까 한다. 잉근내와 괴곡은 무슨 뜻일까 ? 잉근내와 괴곡은 희귀한 지명이다. 그래서 더 독특해 보이기도 하고, 신비롭게 보인다. 괴산군의 군목은 느티나무지만, 괴산군에서도 느티나무나 회나무와 같은 거목을 심지는 않는다. 어쩌면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 정도가 되려면 수백 년을 걸릴 것이다. 백년대계가 아닌 천년대계를 바라볼 수는 없을까 ? 느티나무와 연못 그리고, 정자가 있는 풍경과 괴목과 괴정이 어우러진 마을. 흔히들 말하는 천천세와 만만세가 아니라, 천년대계를 바라보는 괴산이 되었으면 한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