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落花巖)과 삼천궁녀(三千宮女)의 기록들
낙화암(落花巖)과 삼천궁녀(三千宮女)의 기록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왜곡이다.
의자왕은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었지만,
국제정세를 잘못 헤아린 실패 때문에
패망의 굴레를 뒤집어 썼다.
낙화암(落花巖)과 삼천궁녀(三千宮女)의 기록들은
후대의 호사가들에 의해 왜곡되었을 뿐이다.
막장보다도 못한 옛이야기는
사실보다는 솔깃한 이야기로 맴돌고 있다.
낙화암(落花巖)과 삼천궁녀(三千宮女)의 기록들은
시인묵객과 조선의 선비들이 만들었지만,
역사학자라는 사람들 까지도
그를 놀이개로 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
자료 1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37년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열다 ( 636년 03월(음) )
3월에 왕이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沙沘河)註 001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포구의] 양쪽 언덕에는 기이한 바위와 돌[奇巖怪石]이 들쭉날쭉 서 있고, 그 사이에 기이하고 이상한 화초가 끼어 있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왕이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북을 치고 거문고註 002를 타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고, 수행한 자들도 여러 차례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불렀다.註 003
참고자료 2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계축(1433) 10월 28일(정축)
술에 대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내용의 글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대체로 들으니, 술[酒]을 마련하는 것은 술 마시는 것을 숭상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신명(神明)을 받들고 빈객(賓客)을 대접하며, 나이 많은 이를 부양(扶養)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사 때에 술 마시는 것은 술잔을 올리고 술잔을 돌려주고 하는 것으로 절차(節次)를 삼고, 회사(會射) 때에 술 마시는 것은 읍양(揖讓)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향사(鄕射)의 예는 친목(親睦)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양로(養老)의 예는 연령(年齡)과 덕행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건만 오히려 말하기를, ‘손과 주인이 백 번 절하고 술 세 순배를 돌린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종일 술을 마셔도 취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선왕(先王)이 술의 예절을 제정할 때에 술의 폐해에 대비(對備)한 것이 더할 수 없이 극진하였다. 후세에 내려와서 풍속과 습관이 옛스럽지 않고, 다만 크게 많이 차리는 것만을 힘쓰게 된 까닭에, 금주(禁酒)하는 법이 비록 엄중하나 마침내 그 폐해를 구제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술의 해독은 크니, 어찌 특히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는 일뿐이겠는가.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意志)를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위의(威儀)를 잃게 한다. 혹은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리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니, 해독이 크면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敗亡)하게 만들며, 해독이 적으면 성품(性稟)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상실(喪失)하게 한다. 그것이 강상(綱常)을 더럽혀 문란하게 만들고 풍속을 퇴폐하게 하는 것은 이루 다 열거(列擧)할 수 없다.
우선 그 중에서 한두 가지 경계해야 할 것과 본받아야 할 것만을 지적하여 말하겠다. 상(商)나라의 주왕(紂王)과 주(周) 나라의 여왕(厲王)은 술로 그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며, 동진(東晉)의 풍속은 술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정(鄭)나라의 대부(大夫) 백유(伯有)는 땅굴을 파서 집을 만들고 그 속에서 밤에 술을 마시다가 자석(子晳)에게 불태워져 죽었으며, 전한(前漢)의 교위(校尉) 진준(陳遵)은 매양 손님들과 크게 마시기를 좋아하여, 손이 오면 문득 손이 떠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타고 온 수레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더니, 흉노(凶奴)에게 사자(使者)로 갔다가 술에 취하여 살해되었다. 후한(後漢)의 사례 교위(司隷校尉) 정충(丁沖)은 자주 제장(諸將)들에게 찾아 다니면서 술을 먹더니 창자가 썩어서 죽었으며, 진(晉)나라의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 주개(周顗)는 술 한 섬을 거뜬히 마시었는데, 한번은 옛 술친구가 왔으므로 즐겨 함께 술을 마시고 몹시 취했다가, 술이 깨서 손[客]을 가 보게 하였더니, 손은 이미 갈비가 썩어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후위(後魏)의 하후사(夏候史)는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상중(喪中)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하며 좋은 막걸리를 입에서 떼지 않으니, 아우와 누이는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는데, 마침내 술에 취한채 혼수상태로 죽었다. 이러한 일들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일들이다.
주(周) 나라의 무왕(武王)은 주고(酒誥)를 지어 상(商)나라의 백성들을 훈계하였고, 위(衛)나라의 무공(武公)은 빈연(賓筵)의 시를 지어 스스로 경책(警責)하였다. 진(晉)나라 원제(元帝)가 술 때문에 정사를 폐하는 일이 많으니, 왕도(王導)가 깊이 경계하여 말하니, 임금이 술잔을 엎어 버리라고 명령하고 드디어 술을 끊었다. 원(元) 나라의 태종(太宗)이 날마다 대신들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시더니, 야율초재(耶律楚材)가 드디어 주조(酒槽)의 금속 주둥이를 가지고 가서 아뢰기를, ‘이 쇠[鐵]도 술에 침식(侵蝕)됨이 이와 같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의 내장[五臟]이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매, 황제가 깨닫고 좌우(左右)의 모시는 사람들에게 칙명(勅命)을 내려 날마다 술은 석 잔만 올리게 하여 끊었다. 진(晉)나라의 도간(陶侃)이 매번 술 마실 때에 일정한 한계가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조금만 더 먹으라고 권하니, 도간(陶侃)이 한참 동안 슬픈 얼굴을 하다가 말하기를, ‘소년 때에 술 때문에 실수한 일이 있어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약속한 것이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그 약속한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유곤(庾袞)은 그의아버지가 살았을 때에 항상 곤에게 술을 조심하라고 훈계하였더니, 그 뒤에 곤은 취할 때마다 문득 스스로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선인의 훈계를 저버리고 어찌 남을 훈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스스로 매 20대를 쳤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진실로 본받을 만한 것이다. 또 우리 나라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옛날 신라가 포석정(鮑石亭)에서 패(敗)하고, 백제가 낙화암(落花巖)에서 멸망한 것이 술 때문이 아닌 것이 없다. 고려의 말기(末期)에는 상하가 서로 이끌고 술에 빠져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다가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도 또한 가까운 은감(殷鑑)이 되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일찍 큰 왕업(王業)의 터전을 만드시고, 태종께서 이어 지으시어 정치와 교화(敎化)를 닦아 밝히시니, 만세에 지켜야 할 헌장(憲章)을 남기셨다. 군중이 모여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조문을 법령에 명시(明示)하여, 오래 물들었던 풍속을 개혁하고 오직 새롭게 하는 교화를 이룩하였다. 내가 부덕(不德)한 몸으로 외람되게 왕업(王業)을 계승하게 되매,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편안히 다스리기를 도모하되, 지나간 옛날의 실패를 거울로 삼고 조종(祖宗)의 이루어 놓은 법을 준수(遵守)하여, 예로써 보이고 법으로써 규찰(糾察)하였다. 나의 마음쓰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건만, 그대들 신민(臣民)들은 술 때문에 덕(德)을 잃는 일이 가끔 있으니, 이것은 전조(前朝)의 쇠퇴하고 미약하였던 풍조가 아직 다 없어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므로,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아아, 술이 해독을 끼침이 이처럼 참혹하건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니 또한 무슨 마음들인가. 비록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는 못할 망정, 제 한 몸의 생명도 돌아보지 않는단 말인가. 조정에 벼슬하는 신하인 유식(有識)한 자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거리의 아랫 백성들이 무슨 일인들 안하겠는가. 형사 소송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이것에서 생기는 것이 많았다. 처음을 삼가지 않으면 말류(末流)의 폐해는 진실로 두려워할 만한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옛일을 고증(考證)하고 지금 일을 증거로 하여 거듭거듭 타이르고 경계하는 까닭이다. 그대들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의 간절한 생각을 본받고 과거(過去) 사람들이 실패를 보아서 오늘의 권면(勸勉)과 징계를 삼으라. 술 마시기를 즐기느라고 일을 폐(廢)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술을 과음(過飮)하여 몸에 병이 들게 하지 말라. 각각 너의 의용(儀容)을 조심하며 술을 상음(常飮) 말라는 훈계를 준수하여 굳게 술을 절제(節制)한다면, 거의 풍습(風習)을 변경시키기에 이를 것이다. 너희 예조에서는 이 나의 간절한 뜻을 본받아 중앙과 지방을 깨우쳐 타이르라.”
하니, 예문 응교(藝文應敎) 유의손(柳義孫)이 기초한 글인데, 드디어 주자소(鑄字所)에 명령하여 인쇄하여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게 하였다.
【원전】 3 집 523 면
【분류】 식생활-주류(酒類) / 사법-법제(法制)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국조보감 제6권 세종 15년(계축, 1433)
우리나라 일을 가지고 말하면, 옛날 신라(新羅)가 포석정(鮑石亭)에서 패배한 것과 백제(百濟)가 낙화암(落花巖)에서 멸망한 것도 모두 술 때문이었으며, 고려 말기에는 상하가 서로 본받아가며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패망에 이르고 말았다. 이 역시 오래지 않은 거울로 삼아야 할 일인데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태종은 이를 계승하여 정치와 교화를 잘 펴서 그 법을 만세에 전하는 한편, 많은 사람이 모여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해묵은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교화를 펼쳤다. 내가 부덕하지만 외람하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리고 밤낮없이 염려한 것은 정치를 잘해 보기 위한 것으로, 옛날의 잘못된 일을 거울로 삼고 조종이 제정해 놓은 법을 본보기로 삼아서 예(禮)를 가지고 제시하고 법으로 규제를 가하였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 씀씀이가 지극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너희 신민들은 술 때문에 자신을 망치는 자가 더러더러 있으니 이는 고려 말기의 몹쓸 기풍이 아직도 근절되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을 나는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아, 술이 재앙을 빚어내는 것이 이렇게 참혹한데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인가. 비록 국가를 위한 염려는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독 자신의 생명마저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인가. 식견이 있는 조정의 신하들이 오히려 이 모양인데 시골의 하찮은 백성들이야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 따지고 보면 옥송(獄訟)이 발생하는 것도 대부분 여기에서 기인된 것으로 처음에 삼가지 않으면 결국에 가서 그 폐단은 정말 두려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옛 일을 상고하여 오늘에 증명을 하면서 반복하여 훈계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아, 너희 중외의 대소 신민들아! 나의 간절한 마음을 체득하여 옛사람의 잘잘못을 보아서 오늘날의 경계로 삼고,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일을 그르치지 말도록 할 것이며,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병에 걸리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각각 너의 행동을 주의하여 술을 대놓고 마시지 말라는 교훈에 따라서 술마시는 것을 억제한다면 아마도 새로운 기풍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도(忠淸道) 부여현(扶餘縣)
【고적】낙화암(落花巖) 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義慈王)이 당 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宮女)들이 달아나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이름했다.” 한다.
동국이상국전집 제7권 / 고율시(古律詩)
민 수재(閔秀才)를 방문하고 옛사람의 운자(韻字)로 짓다
한 잔 술로 담소하며 무료함을 위로하니 / 一樽談笑慰無聊
긴긴 날을 그대 아니고 뉘와 보내랴 / 永日除君孰與消
꽃은 삼천 궁녀의 뺨처럼 곱고 / 花媚三千宮女臉
버들은 십오세 기생 허리 흔드는 듯 / 柳搖十五妓兒腰
꽃술을 빠는 꿀벌은 허파가 불러오르고 / 蜜蜂啑蘂脾初重
어미 제비는 집 찾아와 새끼 제비 먹여주네 / 乳燕尋巢舌轉饒
그대 같은 훌륭한 가문에서 못난 손을 받아주니 / 如子豪門容惡客
이 생에 어느 곳인들 돌아다니지 못하랴 / 此生何處不逍遙
가정집 제5권 주행기(舟行記)
기축년(1349, 충정왕 1) 5월 16일에 진강(鎭江) 원산(圓山)에서 한밤중에 배를 타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용연(龍淵)에 이르니,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도 송정(松亭) 전 거사(田居士)와 임주(林州) 반 사군(潘使君)이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동행하여 뱃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가서 저녁에 고성(古城)에 정박하였다.
금계집 내집 제2권 / 시(詩)
부여에서 동헌의 시에 차운하다. 백마강에 배를 띄웠을 때의 기행〔扶餘次軒韻泛舟白馬紀行〕
천년 도읍 자취 남은 황량한 성 슬퍼하며 / 千年王迹弔荒城
다시 가벼운 배 띄워 달빛 거슬러 가노라 / 更泛輕舟泝月行
차가운 백마강은 오열하며 흘러가고 / 白馬江寒流咽恨
오래된 낙화암은 애간장을 끊는구나 / 落花巖老斷腸情
가을 든 바다에는 은빛 조수 넘실대고 / 秋連海口銀潮立
서리 물든 산에는 비단 잎이 선명하네 / 霜染山顔錦葉明
흥망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지 / 算却興亡猶未了
고란사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네 / 皐蘭寺裏送鐘聲
또〔又〕
무정한 강산은 예와 다르지 않거늘 / 山水無情似舊時
패왕의 성패는 달처럼 찼다 지네 / 伯王成敗月盈虧
푸른 바위가 삼천궁녀 애한을 아는 듯한데 / 蒼巖若解花飛恨
비바람은 해마다 몇 번이나 불었을까 / 風雨年年幾度吹
[주-D001] 패왕(伯王) : 패자(覇者)에 대한 존칭인데 주로 항우(項羽)를 이르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백제의 왕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상촌선생집 제60권 / 청창연담 하(晴窓軟談下)
아조(我朝)의 사람들은 시어(詩語)를 잘 안배하지 못하는데, 이에 대해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음(聲音)이 중국과 다른 만큼 아무리 억지로 해보려 해도 비슷하게 되지 않는 것이 필연적이다.”고들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음이란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니, 중국이니 외국이니 하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언사(言詞)는 달라도 압운(押韻)하는 것은 동일한 만큼 한 귀퉁이를 미루어 나가면 다른 세 귀퉁이도 반증(反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 시를 지을 때 어휘를 구사하는 것이 부족하여 적절한 시어를 배치하지 못할 뿐이지 성음이 다른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백낙천(白樂天)의 궁사(宮詞)에,
은총을 부어주는 황제의 몸은 오직 하나 / 雨露由來一點恩
어떻게 궁중 전체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 爭能遍却及千門
꽃같이 단장한 삼천 궁녀 얼굴들 / 三千宮女如花面
몇이나 될까 봄 바람 속에 눈물 흔적 없는 이는 / 幾箇春風無淚痕
이라 하였는데, 원망하는 여인과 버려진 재주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를 읊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 탄식하게 한다.
용재총화 제1권 성현(成俔) 찬(撰)
○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은 원래 두 가지가 아니다. 육경(六經)은 모두 성인(聖人)의 문장으로 모든 사업(事業)에 나타나는 것인데, 지금 글을 짓는 자는 경술에 근본할 줄을 모르고, 경술에 밝다는 자는 문장을 모르니, 이는 편벽된 기습(氣習)일 뿐만이 아니라 이것을 하는 사람들이 힘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태복승(太僕丞) 김식(金湜)과 중서사인 장성(張珹)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시를 잘하되 율시에 더욱 능가하였고, 필법도 절묘하였다. 그림 그리는 것도 신경(神境)에 들었는데, 그림을 얻으려는 자가 있으면 좌우의 손으로 휘둘러 그려 주었다. 또 족자 하나를 그려 세조(世祖)에게 바치니 세조가 화공으로 하여금 그림을 전사(轉寫)하되 채색을 더하게 하여, 또 문사(文士)를 시켜 자성의 글을 본떠서 그 형식을 바꾸어 시를 짓게 하고, 연회하는 날 이것을 벽에 걸어 놓았더니 태복(太僕)이 처음에는 보고도 모르다가 자세히 보고는 크게 웃으며, “이는 대왕(大王)이 호걸에게 장난한 것이다.” 하였다. 중국 사신의 시에,
동번의 흰 세모시 도포를 입고 / 新試東藩雪苧袍
학을 타고 밤 깊은 강 언덕을 지나니 / 夜深騎鶴過江皐
옥소 소리가 푸른 하늘의 달에 사무쳐 / 玉簫聲透靑天月
단산 백학의 털을 불어 떨어뜨리는구나 / 吹落丹山白鶴毛
하였더니, 신 고령(申高靈 신숙주(申叔舟))이 시를 짓기를,
촉 나라 비단 도포를 입고 하늘에 노니는 신선 / 天上遊仙蜀纈袍
붓 끝은 수풀 언덕의 맑은 흥치에 부쳤구나 / 筆端淸興寄林皐
청구(靑邱 우리나라)에서 천년 운수를 만났으니 / 靑邱正値千年運
옥잎 푸른 가지가 푸른 털로 화하는구나 / 玉葉瓊枝化翠毛
하였고, 김괴애(金乖崖 김수온(金守溫))는,
10년 봄바람이 헌 도포를 물들이는데 / 十載春風染舊袍
곧은 자태는 눈서리 내린 아침 언덕에서 보겠구나 / 貞姿會見雪霜皐
뉘라 백질(白質)을 청골(靑骨)로 돌아오게 하였는가 / 誰敎白質還靑骨
중산(中山 붓을 만드는 토끼털의 명산지)의 영모가 변화시켰지 / 變化中山一頴毛
하였고, 이 문간(李文簡 이승소(李承召))은,
눈서리처럼 아름답던 자태는 푸른 도포로 바뀌고 / 霜雪曜姿換翠袍
비바람을 맞은 죽순은 강 언덕에서 변하는구나 / 籜龍風雨變江皐
겨울날 쌀쌀한데 가지 위에 열매 맺으니 / 歲寒結得枝頭實
단산에 오채모(五彩毛 봉(鳳))가 깃드는구나 / 栖集丹山五彩毛
하였고, 서달성(徐達城)은,
차군(此君 대[竹])의 기절은 도포를 같이할 만하고 / 此君奇節可同袍
만 길 언덕에 옥처럼 우뚝 솟아 있네 / 玉立亭亭萬丈皐
용이 날 듯 변화하여 술법이 많은지라 / 龍騰變化應多術
하룻 밤 바람서리에 모골(毛骨)이 바뀌네 / 一夜風霜換骨毛
하였고, 김복창(金福昌)은
고절인들 어찌 헌 도포로 바꾸랴 / 苦節何曾換故袍
부질없이 견백(堅白)한 성질로 소상강 언덕을 분별하게 하네 / 枉敎堅白辨湘皐
맑은 창가에서 비단을 펴보니 / 晴窓披得鵝溪藏
예전처럼 볼 위에 푸르른 털이 있다 / 依舊靑靑頰上毛
하였다. 그러나 태복은 성질이 탐욕하여 뇌물을 많이 받았으며 떠날 때에는 포과(脯果), 잡물(雜物)까지도 모두 손수 꾸려서 묶고 또 철물(鐵物)을 많이 청하여 가니 당시 사람들이 유기장상사(鍮器長商士)라 하였다. 중서(中書)도 또한 시에 능하였으나 창기(倡妓)만 보면 좋아서 반드시 돌아보고 웃으니, 이명헌(李明憲)이 동반에게, “상사(上使)는 재물을 경계해야 하고, 부사(副使)는 색을 경계해야 한다.” 하였다. 성묘(成廟) 초년에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 강호(姜浩)가 환관 김흥(金興)과 함께 우리나라에 왔는데, 원외는 한번도 글을 논하거나 시를 짓는 일이 없이 밤낮으로 술만 마셨으나, 술에 빠지지는 않으니, 장난삼아 한 연(聯)을 짓기를,
백옥 소반 위에 / 白玉盤中
앵두를 가득 담아 사신에게 드린다 / 盈盛櫻桃呈使星
하였더니, 역관 김맹경(金孟敬)이 대답하여 쓰기를,
황금 술잔에 / 黃金杯裏
미주를 가득 부어 중국 사신에게 드린다 / 滿斟美酒勸皇華
하였다.
옛날에 황엄(黃儼)이 연구를 짓기를,
비가 연꽃을 씻으니 / 雨洗荷花
3천 궁녀가 모두 목욕한 것 같고 / 三千宮女皆沐浴
바람이 대 잎에 부니, / 風吹竹葉
10만 장부가 한꺼번에 떠드는 것 같다 / 十萬丈夫共喧嘩
하였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 뒤에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이 행인(行人) 장근(張瑾)과 함께 와서 문묘(文廟)에 갔다. 호부는 순근(純謹) 화이(和易)하고 시와 부를 잘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후하게 대접하니 호부가 임금의 의채(儀采)를 흠모하여, “참다운 천인(天人)이다.” 했다. 노선성(盧宣城 노사신(盧思愼))과 서달성(徐達成)이 관반(館伴)이 되고 내가 홍겸선(洪兼善)ㆍ이차공(李次公)과 더불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대기하고 있을 적에 서달성이 말하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데 이는 모두 오래 전부터 지어둔 것일 것이다. 내가 먼저 시를 지어 차운하라고 청하면 반드시 그가 크게 낭패할 것이다.” 하였다. 한강에서 놀던 날 제천정(濟川亭)에 오르자 달성이 시 몇 수를 내보이면서, “대인의 뛰어난 운을 제가 도저히 화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서투른 글을 엮으니 화답을 바랍니다.” 하니, 호부가 미소하면서 한 번 보고 붓을 들어 내리쓰는데, 그 글에 고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백제의 지형은 물에 임하여 다하였고 / 百濟地形臨水盡
오대의 천맥은 하늘에서 왔다 / 五臺泉脈自天來
라는 글귀라든가
고루에 기대었으나 정을 다하지 못해 / 倚罷高樓不盡情
다시 춘색을 끌어당겨 밝은 허공에 띄우네 / 又携春色泛空明
사람은 죽엽배 속에서 취하고 / 人從竹葉杯中醉
배는 양화도 어구를 향해 가로지르네 / 舟向楊花渡口橫
라는 글귀 같은 것이다. 또 〈강지수사(江之水辭)〉를 지으면서 배를 타고 잠령(蠶嶺 남산(南山))까지 흘러내려 가도록 글 읊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달성이 담이 내려 앉아 사모(紗帽)를 젖혀 쓰고 길게 신음할 뿐이요, 김문량(金文良)은 혀를 내민 채 거두지도 못하고서, “노적(老賊)이 너무 심하게 사람을 속였구나. 근래에 내가 침[針灸]를 맞지 않아서 시사(詩思)가 메말라 이와 같은 괴로움을 받을 따름이다.” 하고, 한마디도 말을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