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대하여
자찬묘비명
산골어부
묘비명도 쓰고
자서전도 쓰고
송덕비도 만드는
위인들도 있지만
학식도 없고,
벼슬도 없고,
명예도 없어
학생이라고들 쓴다.
재주도 없고
신념도 없고
따르는 자도 없으니,
그저 흙으로 돌아간다.
살아서는 기쁠지라도
죽어서는 뭘 알겠는가 ?
흔적이 있어도 그뿐인데,
왜 스스로 허물을 남길까 ?
2025. 4. 15
다산시문집 제16권 / 묘지명(墓誌銘)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이고, 자는 미용(美庸)이며 또 송보(頌甫)라고도 한다.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니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사(蔭仕)로 벼슬이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고,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용(鏞)을 낳으니 때는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27년이었다.
정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니, 고려 말엽에 배천에 살았는데, 본조(本朝 조선조를 말함)가 개국하여 도읍을 정하자 마침내 한양(漢陽)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조상은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자급(子伋)이며, 이로부터 계승하여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호선(好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언벽(彦璧), 병조 참의(兵曹參議)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하여 마현(馬峴)에 옮겨 살았는데 3세(世)가 모두 포의(布衣)로 마쳤다. 고조부의 휘는 도태(道泰), 증조부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증조부만이 진사(進士)를 하였다.
용은 어려서 매우 영리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 9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10세가 되어 비로소 학과에 힘썼는데 5년 간은 선고(先考)가 벼슬하지 않고 한가로이 지냈으므로 용이 이 때문에 경사(經史)와 고문(古文)을 꽤 부지런히 읽을 수 있었고, 또 시율(詩律)로 칭찬을 받았다.
15세에 장가를 들었는데, 마침 선고(先考)가 다시 벼슬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어 서울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 이공 가환(李公家煥)이 문학으로 한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자부(姊夫) 이승훈(李承薰)이 또 몸을 단속하고 뜻을 가다듬어 모두 성호(星湖) 이 선생(李先生) 익(瀷)의 학문을 조술(祖述)하였다. 용(鏞)이 성호의 유저(遺著)를 보고는 흔연히 학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중략)
용(鏞)은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임오년(1762, 영조 38)에 태어나서 지금 도광(道光 청 선종(淸宣宗)의 연호) 임오년(1822, 순조 22)을 만났으니, 한 갑자(甲子) 60년은 모두 죄와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지난날을 거두어서 정리하고 일생을 다시 시작하니, 금년부터 정밀히 닦고 실천하며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드디어 집 뒤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광(壙)의 형태를 그어놓고 그 평생의 언행(言行)을 대략 기록하여 광중(壙中)의 지문(誌文)으로 삼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네가 네 선행(善行) 기록하되 / 爾紀爾善
연편 누독(連篇累牘) 장황하니 / 至於累牘
네 숨은 사특(邪慝) 기록하면 / 紀爾隱慝
책에 다 적을 수 없으리 / 將無罄竹
너는 말하기를, 나는 / 爾曰予知
사서(四書)ㆍ육경(六經)을 안다 하지만 / 書四經六
그 행실 상고하면 / 考厥攸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으랴 / 能不傀忸
너는 명예 구하나 / 爾則延譽
찬양은 없도다 / 而罔贊揚
몸으로 증명하여 / 盍以身證
나타내고 빛내지 아니하랴 / 以顯以章
네 분운함을 거둬들이고 / 斂爾紛紜
네 창광함을 중지하라 / 戢爾猖狂
힘써 상제(上帝)를 밝게 섬겨야 / 俛焉昭事
마침내 경사 있으리라 / 乃終有慶
무명자집 문고 제13책
협리한화65조목 〔峽裏閒話 六十五〕
27.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대하여
도연명(陶淵明)은 직접 만사(挽詞)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었고,배도(裴度)는 직접 화상찬(畫像贊)을 지었고,백낙천(白樂天)은 직접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과 묘지명(墓志銘)을 지었고,소 강절(邵康節)은 직접 〈무명공전(無名公傳)〉을 지었고, 장괴애(張乖崖)는 직접 화상찬(畫像贊)을 지었고,진요좌(陳堯佐)는 직접 묘지(墓誌)를 지었으며, 우리나라의 노수신(盧守愼)도 직접 지문(誌文)을 지었다.
내가 이를 사모하여 일찍이 〈무명자전(無名子傳)〉을 지었는데, 또 지문(誌文)을 지으려고 하다가 늙도록 곤궁하게 살며 떠돌아다녀서 죽을 곳도 모를 뿐 아니라, 죽어도 장사 지낼 땅이 없어 글이 있다 하더라도 쓸데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만두고 더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쓰고 안 쓰고는 말할 것이 못 되며, 만일 자손에 의해 보관된다면 묘(墓)와 집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장차 한번 써볼 생각이다.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
ㅡ도연명(陶淵明)
先生
(선생)은 : 선생은
不知何許人
(부지하허인)이오 : 어디쯤의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亦不詳其姓字
(역부상기성자)나 : 그 성명과 자(字)도 자세하지 않다.
宅邊有五柳樹
(택변유오류수)하여 : 집 주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으니,
因以爲號焉
(인이위호언)이라 : 그것으로 호(號)를 삼았다.
閑靖少言
(한정소언)하며 : 한가롭고 조용하여 말이 적었으며,
不慕榮利
(부모영리)하고 : 명예나 실리를 바라지 않았다.
好讀書
(호독서)하되 : 책읽기를 좋아했지만,
不求甚解
(부구심해)요 :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每有意會
(매유의회)면 : 매번 뜻이 맞는 글이 있으면
便欣然忘食
(편흔연망식)이라 : 즐거워하시며, 밥 먹는 것도 잊곤 하셨다.
性嗜酒
(성기주)하되 : 성품이 술을 좋아하지만,
家貧不能常得
(가빈부능상득)하니 : 집이 가난하여 항상 즐기지는 못하였다.
親舊知其如此
(친구지기여차)하고 : 친구들이 이와 같은 처지를 알고는
或置酒而招之
(혹치주이초지)면 : 간혹 술을 준비하여 그를 부르면,
造飮輒盡
(조음첩진)하여 : 마시는 데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다 마셔버려
期在必醉
(기재필취)요 : 반드시 취하고야 말았다.
旣醉而退
(기취이퇴)하여 : 취한 뒤에는 물러나는데 인색하지 않아,
曾不吝情去留
(증부린정거유)라 : 가고 머무름에 미련을 두지 않으시었다.
環堵蕭然
(환도소연)하여 : 방은 좁아 쓸쓸하고 조용하였으며,
不蔽風日
(부폐풍일)하고 : 바람과 햇빛을 가리지도 못하였다.
短褐穿結
(단갈천결)하며 : 짧은 베옷을 기워 입으시고,
簞瓢屢空
(단표누공)하되 : 밥그릇이 자주 비어도
晏如也
(안여야)러라 : 태연하시었다.
常著文章自娛
(상저문장자오)하여 : 항상 문장을 지어 스스로 즐기면서,
頗示己志
(파시기지)하고 : 자못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었다.
忘懷得失
(망회득실)하여 : 득실(得失)에 대한 생각을 버리시어,
以此自終
(이차자종)하니라 : 그러한 상태로 일생을 마치려 하시었다.
贊曰黔婁有言
(찬왈검루유언)하되 : 논평하시기를 검루의 말에
不戚戚於貧賤
(부척척어빈천)하고 : “가난하고 천함을 근심하지 않으셨고,
不汲汲於富貴
(부급급어부귀)라하니 : 부하고 귀한 것을 애쓰지 않으셨다”라고 말씀하셨다.
極其言
(극기언)이면 : 그 말씀을 잘 새겨보면
玆若人之儔乎
(자약인지주호)인저 : 이 사함 검류는 오류선생과 같은 무리일 것이다.
酣觴賦詩
(감상부시)하여 : 술을 즐기고 시를 지어
以樂其志
(이락기지)하니 : 그 뜻을 즐기셨으니,
無懷氏之民歟
(무회씨지민여)아 : 무회씨의 백성인가?
葛天氏之民歟
(갈천씨지민여)아 : 갈천씨의 백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