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권십육/고종 안효대왕/신묘 18년(1231) -1차 몽고침입
○ 十二月(십이월) : 12월에
○ 蒙兵(몽병) : 몽고 군사가向廣忠淸州(향광충청주) : 광주(廣州)ㆍ충주ㆍ청주 등지로 향하는데,
所過(소과) : 지나는 곳마다
無不殘滅(무불잔멸) : 잔멸(殘滅)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고려사절요/권십육/고종 안효대왕/임진 19년(1232) - 1차 침입에 따른 충주관노의 난
○ 春正月(춘정월) : 봄 정월에
○ 忠州官奴(충주관노) : 충주의 관노(官奴)가
作亂(작란) : 난을 일으키니,
宰樞會崔瑀第(재추회최우제) : 재ㆍ추가 최우의 집에 모여
議發兵(의발병) : 군사를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州判官(주판관) : 주(州)의 판관
庾洪翼(유홍익) : 유홍익(庾洪翼)이
請遣使撫諭(청견사무유) : 사자를 보내어 회유할 것을 청하니,
卽以注書朴文秀(즉이주서박문수) : 곧 주서(注書) 박문수(朴文秀),
前奉御金公鼎(전봉어금공정) : 전 봉어(前奉御) 김공정(金公鼎)을
假爲安撫別監(가위안무별감) : 임시로 안무별감(安撫別監)을 삼아
以遣之(이견지) : 보내었다.
先是(선시) : 이 보다 앞서
州副使于宗柱(주부사우종주) : 주(州)의 부사(副使) 우종주(于宗柱)가
每於薄書間(매어박서간) : 매양 문부(文簿) 처리에 있어
與洪翼有隙(여홍익유극) : 홍익과 틈이 있었는데,
聞蒙兵將至(문몽병장지) : 몽고 군사가 장차 이를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議城守(의성수) : 성을 지킬 것을 의논하는데
有異同(유이동) : 의견이 달랐다.
宗柱(종주) : 종주는
帥兩班別抄(수량반별초) : 양반별초(兩班別抄),
洪翼(홍익) : 홍익은
率奴軍雜類別抄(솔노군잡류별초) : 노군잡류별초(奴軍雜類別抄)를 거느리고
互相猜忌(호상시기) : 서로 시기하더니,
及蒙兵至(급몽병지) : 몽고 군사가 들이닥치자
宗柱洪翼與兩班等(종주홍익여량반등) : 종주ㆍ홍익과 양반 등은
皆棄城走(개기성주) : 다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唯奴軍雜類(유노군잡류) : 오직 노군잡류가
合力擊逐之(합력격축지) : 합력하여 쳐서 물리쳤다.
蒙兵退(몽병퇴) : 몽고 병이 물러가자
宗柱等還州(종주등환주) : 종주 등이 주(州)로 돌아와
檢考官私銀器(검고관사은기) : 관가와 사가의 은그릇을 점검하니,
奴軍(노군) : 노군(奴軍)이
以蒙兵掠去爲辭(이몽병략거위사) : 몽고 군사가 약탈하여 갔다고 말하였다.
戶長光立等五六人(호장광립등오륙인) : 호장(戶長) 광립(光立) 등 대여섯 사람이
密謀殺奴軍之魁者(밀모살노군지괴자) : 노군의 괴수를 죽이려고 음모하였는데,
奴輩知之(노배지지) : 노군들이 미리 알고
相與謀曰(상여모왈) : 서로 모의하기를,
蒙兵到(몽병도) : “몽고 군사가 이르자
則皆走匿不守(즉개주닉불수) : 다 달아나 숨어 성은 지키지 않더니,
乃何以蒙人所掠(내하이몽인소략) : 이제는 어찌 몽고 군사가 약탈한 것까지
反以歸罪吾輩(반이귀죄오배) : 우리에게 죄를 돌려
而欲殺之乎(이욕살지호) : 죽이고자 하는가.
盍先圖之(합선도지) : 우리가 어찌하여 먼저 도모하지 않으랴." 라고 하였다.
乃詐爲會葬者(내사위회장자) : 이에 회장(會葬)하러 오는 사람처럼 꾸민 뒤에
吹螺集其徒(취라집기도) : 나각을 불어 그의 무리를 모았다.
先至首謀者家(선지수모자가) : 먼저 주모자(主謀者)의 집에 가서
火之(화지) : 불을 지르고,
凡豪强(범호강) : 토호(土豪)로서
素有怨者(소유원자) : 본래부터 원망을 산 자들을
搜殺無遺(수살무유) : 모두 찾아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
且令境內曰(차령경내왈) : 또 경내(境內)에 영을 내려 말하기를,
敢有隱匿者(감유은닉자) : “감히 은닉하는 자가 있으면,
當滅其家(당멸기가) : 마땅히 그 가족을 멸하리라." 하니,
於是(어시) : 이에
婦人小子皆遇害(부인소자개우해) : 부인과 어린아이까지도 다 화를 입었다.
○ 安撫別監朴文秀(안무별감박문수) : 안무별감 박문수(朴文秀)는
還自忠州(환자충주) : 충주에서 돌아오고,
金公鼎留州(금공정류주) : 김공정은 고을에 머물러
以待平定(이대평정) : 평정(平定)되기를 기다리고,
奴軍都領令史池光守(노군도령령사지광수) : 노군도령(奴軍都領) 영사(令史) 지광수(池光守)와
僧牛本等(승우본등) : 중 우본(牛本) 등이
赴京(부경) : 경성으로 달려가니,
崔瑀大加褒賞(최우대가포상) : 최우가 크게 포상을 하여
以光守(이광수) : 광수를
補校尉(보교위) : 교위(校尉)에 보(補)하고,
以牛本(이우본) : 우본을
爲忠州大院寺主(위충주대원사주) : 충주 대원사(大院寺) 주지로 삼았다.
○ 八月(팔월) : 8월에
遣三軍兵馬使(견삼군병마사) : 삼군 병마사를 보내어
討忠州奴賊(토충주노적) : 충주의 노적(奴賊)을 토벌하였다.
○ 九月(구월) : 9월에
三軍平忠州而還(삼군평충주이환) : 삼군이 충주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三軍初至達川(삼군초지달천) : 삼군이 처음 달내[達川]에 이르렀을 때,
水深未涉(수심미섭) : 물이 깊어 건너지를 못하고
方造橋(방조교) : 막 다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奴軍賊魁(노군적괴) : 노군(奴軍)의 적괴
二三人(이삼인) : 2, 3명이
隔川告曰(격천고왈) : 시내의 건너편에서 고하기를,
吾等(오등) : “우리가
欲斬謀首出降(욕참모수출항) : 주모자의 목을 베어 와서 항복하려 합니다." 하였다.
李子晟等曰(리자성등왈) : 이자성 등이 말하기를,
如此則(여차칙) : “만약 그렇게만 하면
不必盡殺汝輩也(불필진살여배야) : 꼭 너희를 다 죽이지는 않으리라." 하였더니,
賊還入城(적환입성) : 적이 도로 성중으로 들어가
斬僧牛本以來(참승우본이래) : 중 우본(牛本)의 목을 베어왔다.
官軍留屯二日(관군류둔이일) : 관군이 머물러 이틀을 진치고 있었는데,
奴軍勇健者(노군용건자) : 노군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들은
皆逃匿(개도닉) : 모두 달아났다.
官軍入城(관군입성) : 관군이 성에 들어가
擒支黨悉誅之(금지당실주지) : 나머지 당을 잡아서 모두 죽이고
以所獲財物牛馬(이소획재물우마) : 얻은 재물과 마소를 가지고
來獻(래헌) : 와서 바쳤다.
○ 撒禮塔(살례탑) : 살례탑이
攻處仁城(공처인성) : 처인성(處仁城)을 공격하니,
有一僧(유일승) : 한 중이
避兵在城中(피병재성중) : 난리를 피하여 성에 있다가
射殺撒禮塔(사살살례탑) : 살례탑을 쏘아 죽였다.
國家(국가) : 국가에서
嘉其功(가기공) : 그 공을 가상하게 생각하여
授上將軍(수상장군) : 상장군의 벼슬을 주었으나,
僧讓功于人曰(승양공우인왈) : 중이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며,
當戰時(당전시) : “한창 싸울 때에
吾無弓箭(오무궁전) : 나는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豈敢虛受重賞(기감허수중상) : 어찌 감히 함부러 과분한 상을 받겠습니까." 하고,
固辭不受(고사불수) :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乃拜攝郞將(내배섭랑장) : 이에 섭랑장(攝郞將)으로 삼았으니,
僧卽金允侯也(승즉금윤후야) : 이 중이 바로 김윤후(金允侯)이다
고려사절요/제17권/고종 안효대왕/계축 40년(1253) - 금당협과 충주성 전투
○ 九月(구월) : 9월에
忠州倉正崔守(충주창정최수) :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設伏金堂峽(설복금당협) : 금당협(金堂峽)에 매복하고
候蒙兵至(후몽병지) : 몽고 군사가 다다르기를 기다려
急擊斬十五級(급격참십오급) : 급히 쳐서 15급을 베고
奪其兵仗與所虜男女二百餘人(탈기병장여소로남녀이백여인) : 병기와 포로된 남녀 2백여 명을 빼았었다.
以功除隊正(이공제대정) : 그 공으로 대정에 제수되었다.
○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에
○ 李峴與蒙兵攻天龍山城(리현여몽병공천룡산성) : 이현(李峴)이 몽고 군사와 더불어 천룡산성(天龍山城)을 치자,
黃驪縣令鄭臣旦(황려현령정신단) :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과
防護別監趙邦彥(방호별감조방언) :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이
出降(출항) : 나와 항복하였다.
○ 也窟等圍攻忠州(야굴등위공충주) : 야굴 등이 충주를 포위하여 공격하자,
前少卿鄭壽(전소경정수) : 전(前) 소경(少卿) 정수(鄭壽)가
率二子(솔이자) : 두 아들을 데리고
自京山府來降(자경산부래강) : 경산부(京山府; 경북 星州)에서 와 항복하였다.
○ 十一月(십일월) : 11월에
○ 也窟在忠州得病(야굴재충주득병) : 야굴이 충주에서 병이 들었다.
卜者曰(복자왈) :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久留則難返(구류즉난반) : “오래 머무르면 돌아가기 어렵다." 하니,
也窟留阿母侃洪福源守之(야굴류아모간홍복원수지) : 야굴이 아모간과 홍복원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率精騎一千北還(솔정기일천북환) : 정예기병 천 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돌아갔다.
○ 十二月(십이월) : 12월에
忠州報蒙兵解圍(충주보몽병해위) : 충주에서 몽고군이 포위를 풀었다고 보고하였다.
時被圍凡七十餘日(시피위범칠십여일) : 그때 포위를 당한 지 모두 7십여 일이나 되어
兵食幾盡(병식기진) : 군량이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防護別監郞將金允侯(방호별감랑장금윤후) : 방호별감 낭장 김윤후(金允侯)가
諭厲士衆曰(유려사중왈) : 군사들을 타일러 격려하기를,
若能效力(약능효력) : “만일 힘을 다해 싸운다면
無貴賤悉除官爵(무귀천실제관작) :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 하고,
焚官奴簿籍(분관노부적) : 관노의 호적을 불태워
以示信(이시신) : 믿음을 보이고
又分給所獲牛馬(우분급소획우마) : 또 노획한 말과 소를 나누어 주자,
人皆效死(인개효사) :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맹세하여 싸웠다.
蒙兵稍挫(몽병초좌) : 몽고군이 차츰 기세가 꺾이어
遂不復南(수불부남) :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7권/고종 안효대왕/갑인 41년(1254) - 충주성 전투에 따른 국원성 승격과
충주산성 및 상주산성 전투
○ 春正月(춘정월) : 봄 정월에
謁景靈殿(알경령전) :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 安慶公淐(안경공창) : 안경공 창이
至蒙古屯所(지몽고둔소) : 몽고군이 주둔한 곳에 이르러
設宴張樂(설연장악) :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갖추어
饗士(향사) : 군사를 먹였다.
阿母侃還師(아모간환사) : 아모간이 군사를 되돌려 갔다.
○ 京城解嚴(경성해엄) : 경성에 계엄(戒嚴)을 해제하고,
遣少卿郭汝翼(견소경곽여익) : 소경 곽여익(郭汝翼)ㆍ
郞將鄭子璵等(랑장정자여등) : 낭장 정자여(鄭子璵) 등을 보내어
往候蒙兵還否(왕후몽병환부) : 몽고 군사가 돌아가는지 돌아가지 않는지를 탐지하고,
兼安撫天龍楊根二城(겸안무천룡양근이성) : 겸하여 천룡성과 양근성을 안무하게 하였다.
○ 李峴棄市(리현기시) : 이현을 저자에 내어 죽이고
籍其家(적기가) :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其子之瑞之松之壽之柏永年(기자지서지송지수지백영년) : 그 아들 지서(之瑞)ㆍ지송(之松)ㆍ지수(之壽)ㆍ지백(之栢)ㆍ영년(永年) 등을
皆沈于海(개침우해) : 모두 바다에 던지고,
峴妻妹及壻(현처매급서) : 현의 아내ㆍ누이ㆍ사위는
竝流于島(병류우도) : 모두 섬에 귀양보냈다.
峴性貪婪(현성탐람) : 현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好傷人(호상인) : 사람을 중상하기를 좋아하였다.
嘗爲選軍別監(상위선군별감) : 일찍이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어 뇌
多受賄賂(다수회뢰) : 물을 많이 받으니,
人號銀尙書(인호은상서) : 사람들이 '은상서(銀尙書)'라고 별명을 지었다.
及使蒙古(급사몽고) : 몽고에 사신가서
被留二年(피류이년) : 2년 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에
說也窟曰(설야굴왈) : 야굴(也窟)에게 유세하기를,
我國都(아국도) : “우리나라 도성이
介于海島(개우해도) : 섬 속에 끼어 있어서
貢賦皆出州郡(공부개출주군) : 공부(貢賦)가 모두 주군(州郡)에서 나오니,
大軍若於秋前(대군약어추전) : 대군이 만일 가을 전에
奄入其境(엄입기경) : 갑자기 국경에 들어간다면
都人之急(도인지급) : 도성 사람들이 위급하게 될 것을
可知也(가지야) :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因受金牌(인수금패) : 금패(金牌)를 받은 것을 인하여
導也窟而來(도야굴이래) : 야굴을 인도하여 와서
常隨蒙軍諭降諸城(상수몽군유항제성) : 항상 몽고군을 따라다니며 여러 성을 달래어 항복시키고,
又劫楊根天龍二城曰(우겁양근천룡이성왈) : 또 양근과 천룡 두 성을 협박하여 말하기를,
掠山東州春州等城(략산동주춘주등성) : “양산ㆍ동주ㆍ춘주 등 여러 성이
竝以不降見屠(병이불강견도) : 모두 항복을 하지 않다가 도륙을 당하였으니,
宜速出降(의속출항) : 빨리 나와 항복해야 할 것이다.
若守將不許(약수장불허) : 만일 지키는 장수가 허락하지 않거든
卽斬以來(즉참이래) : 곧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라." 하였다.
及降(급항) : 항복하자
自爲達魯花赤(자위달로화적) : 스스로 다루가치가 되어
遂以其民(수이기민) : 드디어 그 백성을 거느리고
攻忠州不下(공충주불하) : 충주를 쳤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及蒙軍還(급몽군환) : 몽고 군사가 돌아가자
峴乃來(현내래) : 현이 왔는데
其軍中所獲婦女財寶(기군중소획부녀재보) : 그동안 군중에서 노획한 부녀와 재물 보화를
盡爲己有(진위기유) : 전부 자기 몫으로 만들어
銀釵至滿一笥(은채지만일사) : 은비녀가 한 상자에 가득하고
他物稱是(타물칭시) : 다른 물건도 이와 비등하였다.
及誅(급주) : 그가 형(刑)을 받자
有人蹴其口曰(유인축기구왈) : 어떤 사람이 그의 입을 차며 말하기를,
喫盡幾人銀帛耶(끽진기인은백야) : “몇 사람의 은과 비단을 먹어 치웠느냐?" 하였다.
○ 二月(이월) : 2월에
降襄州東州(강양주동주) : 양주와 동주를 강등하여
爲縣令(위현령) : 현령이 다스리는 고을로 만들고
金城爲監務(금성위감무) : 금성(金城)은 감무(監務)가 다스리는 고을로 만들었으며,
流天龍城別監趙邦彥(류천룡성별감조방언) : 천룡성 별감 조방언(趙邦彦)과
黃驪縣令鄭臣旦于海島(황려현령정신단우해도) :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을 섬에 귀양보냈다.
○ 以鄭準(이정준) : 정준(鄭準)ㆍ
崔坪(최평) : 최평(崔坪)ㆍ
林景弼(림경필) : 임경필(林景弼)을
竝爲樞密院副使(병위추밀원부사) : 모두 추밀원 부사로,
以忠州山城別監郞將金允侯(이충주산성별감랑장금윤후) : 충주산성 별감 낭장 김윤후를
爲監門衛攝上將軍(위감문위섭상장군) : 감문위 섭상장군으로 삼고,
其餘有軍功者(기여유군공자) : 그 나머지 전공(戰功)이 있는 자와
及官奴白丁(급관노백정) : 관노와 백정도 또한
亦賜爵有差(역사작유차) : 차등 있게 벼슬을 주었다.
○ 夏四月旱(하사월한) : 여름 4월에 가물었다.
○ 謁景靈殿(알경령전) :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 陞忠州(승충주) : 충주를 승격하여
爲國原京(위국원경) :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
八月(팔월) : 8월에
○ 蒙兵候騎(몽병후기) : 몽고병의 척후 기병이
屯槐州(둔괴주) : 괴주(槐州 충북 槐山)에 주둔하였는데,
散員張子邦(산원장자방) : 산원(散員) 장자방이
率別抄擊破之(솔별초격파지) : 별초를 거느리고 가서 격파하였다.
九月(구월) : 9월에
○車羅大攻忠州山城(차라대공충주산성) :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는데,
風雨暴作(풍우폭작) : 졸지에 큰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졌다.
城中人抽精銳(성중인추정예) : 성중 사람들이 정예 군사를 뽑아
奮擊之(분격지) : 맹렬히 반격하자
車羅大解圍(차라대해위) : 차라대가 포위를 풀고
遂南下(수남하) :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에
車羅大攻尙州山城(차라대공상주산성) : 차라대가 상주산성(尙州山成)을 공격하였는데,
黃嶺寺僧洪之(황령사승홍지) : 황령사(黃嶺寺) 중 홍지(洪之)가
射殺一官人(사살일관인) : 한 관인을 쏘아 죽이고,
士卒死者過半(사졸사자과반) : 죽은 사졸(士卒)이 반이 넘자,
遂解圍而退(수해위이퇴) :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고려사절요/제17권/고종 안효대왕/병진 43년(1256) - 충주산성 패전과 월악산 신사
○ 夏四月(하사월) : 여름 4월에
○ 蒙兵(몽병) : 몽고병이
屠忠州城(도충주성) : 충주성을 도륙하고
又攻山城(우공산성) : 또 산성을 치니,
官吏老弱(관리로약) : 관리와 노약자들이
恐不能拒(공불능거) : 막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登月嶽神祠(등월악신사) : 월악신사(月嶽神祠)로 올라갔다.
忽雲霧(홀운무) : 홀연히 운무가 자욱하며
風雨雷雹俱作(풍우뢰박구작) : 바람ㆍ비ㆍ우레ㆍ우박이 함께 몰아치니,
蒙兵以爲神助(몽병이위신조) : 몽고 군사가 신령의 도움이 있다 하여
不攻而退(불공이퇴) : 치지 않고 물러갔다.
고려사절요/제17권/고종 안효대왕/을묘 42년(1255) - 대원령 전투
○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에
蒙兵踰大院嶺(몽병유대원령) : 몽고병이 대원령(大院嶺)을 넘으니,
忠州出精銳(충주출정예) : 충주에서 정예 군사를 내어
擊殺千餘人(격살천여인) :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고려사절요 제17권/고종 안효대왕/무오 45년(1258) - 박달현 전투
○ 겨월 10월에
○ 忠州別抄(충주별초) : 충주 별초가
設伏朴達峴(설복박달현) : 박달현(朴達峴)에 복병을 설치하고
狙擊蒙兵(저격몽병) : 몽고 군사를 기습하여
奪所虜人物牛馬兵仗(탈소로인물우마병장) : 포로와 우마와 병기를 빼앗았다.
고려사 지리지 - 충주목(忠州牧)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미을성(未乙省) 또는 완장성(長城)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여 진흥왕
(眞興王)이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중원경(中原京)을 삼았으며 태조(太祖) 23년에 또 고쳐 충주
(忠州)로 삼았는데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니 충주(忠州)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12주(州) 절도사
(節度使)를 두고 창화군(昌化軍)이라 부르고 중원도(中原道)를 칭하였는데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安撫使)
로 삼고 9년에 정하여 목(牧)을 삼으니 8목(牧)의 하나가 되었으며 고종(高宗) 41년에 올려 국원경(國原京)으로 삼았
다. 양진명소(楊津溟所)와 양진연소(楊津衍所)가 있으며 별호(別號)를 대원(大原)【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호(號)를 예성(蘂城)【고종(高宗) 42년 다인(多仁)의 철소(鐵所) 사람이 몽고군을 막아 공(功)이 있었으
므로 소(所)를 올려 익안현(翼安縣)으로 삼았다.】 이라 한다. 1군(郡)과 5현(縣)이 소속하였으며 1지사군(知事郡)을
관령(管領)하였다.
세종 지리지/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목)
사(使)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신라에서 빼앗아,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
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치었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년) 경자에 충주(忠州)로 고치었고, 성종(成宗) 2년(983
년) 계미에는 처음에는 12목(牧)을 두었는데, 바로 그 하나가 되었다. 14년(995년) 을미에는 12주(州) 절도사(節度使)
를 두어 충주 창화군(忠州昌化軍)이라 이름하였고, 현종(顯宗) 3년(1012년) 임자에 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安撫使)
로 고쳤다가, 9년(1018년) 무오에 충주목(忠州牧)으로 정하니, 8목(牧)의 하나이었다.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랐
다.
○ 별호(別號)는 대원(大原),【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또는 예성(蘂城)이다.
○ 속현(屬縣-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있는 군, 현에 예속되어 행정적 지배를 받는 현)이 1이니 익안(翼安)이요,【본
래 다인철소(多仁鐵所)인데, 고려 고종(高宗) 42년(1254년), 갑인에 본 고을 사람이 몽고(蒙古) 군사를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현(縣)으로 승격하였다.】
○ 익안현(翼安縣)의 속성(續姓)이 2이니, 지(池), 어(魚)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15권/충청,충주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혹은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薍長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빼앗았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을
옮겨서 채웠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2년(983)에 목(牧)을 두었다가 14년(995)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여 중원도
(中原道)에 예속하였다. 현종(顯宗) 3년(1012)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만들었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만
들었고, 고종(高宗) 41년(1254)에 승격하여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만들었는데, 본조(本
朝)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세종(世宗) 31년(1449)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세조
(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이 셋이고 청풍(淸風)ㆍ단양(丹陽)ㆍ괴산(槐山). 현(縣)이 넷이다. 연풍(延豐)ㆍ음성(陰城)ㆍ영춘(永
春)ㆍ제천(堤川).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국원(國原)ㆍ대원(大原)ㆍ예성(蘂城)ㆍ중원(中原)ㆍ창화군(昌化軍).
【성씨】익안(翼安) 지(池)ㆍ어(魚).
【산천】달천(達川) 혹은 덕천(德川)이라 이름하고, 혹은 달천(獺川)이라 이름하는데, 주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
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서 나와서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
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주의 노군(奴軍)이 난을 일으키자 이자성(李子晟) 등을 보내 삼
군(三軍)을 거느리고서 토벌하게 하였다. 삼군이 달천에 이르러 물이 깊어 건너지 못하고 한참 다리를 만들고 있는데,
적이 말하기를, “반역의 괴수를 베어 나와서 항복하려 한다.” 하니, 자성(子晟)이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너희들을
반드시 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자, 적이 괴수인 중 우목(牛木)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니, 관군(官軍)이 드디어 남은
무리를 사로잡아 모두 베었다.
【사묘】 월악사(月岳祠) 월악산(月岳山)에 있다. 고려 고종(高宗) 43년(1256)에 몽고(蒙古) 군사가 주의 성을 무찌
르고 또 산성(山城)을 공격하니, 관리들이 늙고 약하여 막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산사로 올라갔는데, 홀연히 구름
안개ㆍ비ㆍ우레ㆍ번개가 크게 일어나자, 몽고 군사들이 신이 돕는 것이라고 여겨 치지 않고 물러갔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익안 폐현(翼安廢縣)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주(本州)의 다인철소(多仁鐵所)인데, 고려 고종 42년에 그 지
방 사람들이 몽고 군사를 막아내어 공이 있으므로 승격하여 현(縣)을 만들고, 인하여 예속시켰다. 대림산성(大林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6백 3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덕주산성(德周山城) 주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6백 70척이고, 안에 샘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페하였다. 동악성(桐岳
城) 주 동쪽 1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백 8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봉
황성(鳳凰城) 주 서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천 1백 21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
하였다.
【명환】고려 김윤후(金允侯)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고 군사가 와서 성을 포위한 지 70여 일이
되어 양식이 거의 다 되었다. 윤후가 사졸(士卒)들을 타일러 독려하기를, “만일 능히 힘을 다한다면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 하고, 드디어 관노(官奴)의 문서를 꺼내어 불사르고 또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니, 사람
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대전하자 몽고 군사가 차츰 꺾여 마침내 다시는 남쪽으로 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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