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건축문화/전통건축 23

길상사에서

엄니와 함께 다니는 것이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하지만, 추억을 남기기보다는 기억을 지우는 엄니가잠시라도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어디를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도 모르지만,함께 지내는 시간만큼은 흡족해하시는 미소만으로도 ~~~~~엄니를 모시고 다닌다고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니고,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는데,

수타면이 떠오르는 수타사

두타사가 아니라, 수타사.대적광전이 아니라, 원통보전.목불인가 ?금불인가 ? 수타면이 떠오르는 수타사.두타행이 두타산 산행은 아니겠지요.무더위도 참아야 하는 것이지만,참는 것만이 두타행은 아니겠지요. 두타행 ① 고요한 곳에 머무르면서 세속을 멀리한다(在阿蘭若處). ② 언제나 걸식하여 신도나 국왕 등의 공양을 따로 받지 않는다(常行乞食).③ 걸식할 때는 마을의 일곱 집을 차례로 찾아가서 빈부를 따지지 않고 걸식하며, 일곱 집에서 밥을 얻지 못하면 그날은 먹지 않는다(次第乞食). ④ 하루에 한 차례를 한자리에서 먹고 거듭 먹지 않는다(受一食法). ⑤ 항상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발우 안에 든 음식만으로 만족한다(節量食).⑥ 정오가 지나면 과일즙·석밀(石蜜:사탕) 따위도 마시지 않는다(中後不得飮漿). ⑦..

퇴계 이황선생이 그린 옥사도자(屋舍圖子)

노은(老隱)과 은둔(隱遁) 나의 고향은 충청도 노은(老隱)이다. 노은(老隱)이라는 지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첩첩산중인 두메산골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산골오지에 살겠다고 찾아 들어온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이러한 현상은 까마득한 옛날에도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에 할아버지는 노은(老隱)이라는 산골로 들어와 나를 촌놈으로 만들었을까 ? 조상을 탓하던 나도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같다. 시골집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도 많아지고, 텃밭과 시골집을 어떻게 바꿀까를 고민하곤 한다. 고향으로 가는 것은 귀향인가 ? 낙향인가 ? 아니면, 은둔인가 ? 나는 벼슬도 없고, 한 일도 없는 아주 평범한 바보다. 아직도 내게는 조상이 물려준 문중의 선산과 묘소도 있고, 아흔을 넘기신 노모도 홀로 계시고,..

도산서당(陶山書堂)에서 배우는 지혜

조선고적도보(1931년) 도산서당(陶山書堂)에서 배우는 지혜 도산서원을 처음으로 답사한 것이 1985년으로 생각된다. 당시에는 고건축답사라기 보다는 건축과 졸업여행을 겸한 것으로 지도교수님을 따라 다니며 교수님의 설명을 어깨너머로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후로도 수차례에 걸쳐 답사가 아닌 관람삼아 다녀갈 때도 서원건축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인지 갔다왔다는 징표만 남기곤 했었다. 지난 2017년과 2018년에 영주에 머무르면서 경북 북부 일대의 문화재들을 답사하면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이 새롭게 보여져서 자주 찾게 되었다. 특히, 도산서원의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퇴계 이황선생의 학식과 지혜가 담겨져 있는 곳같았다. 도산서원을 답사할때, 도산서원를 둘러보면서 도산서원의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분리하여 고찰..

도산잡영(陶山雜詠)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隴雲精舍)

초가삼간(草家三間)과 수간초옥(數間草屋) 퇴계집 퇴계선생연보 제1권 39년 (경신) 60세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완성되다. 이로부터는 또 호를 도옹(陶翁)이라 하였다. 당(堂)은 3칸인데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고,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다. 정사는 7칸인데, 농운정사(隴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