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자취를 밟으며 199

포천 반월성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 629년 08월 ) 51년(629) 8월에 왕이 대장군(大將軍) 용춘(龍春)註 001과 서현(舒玄),註 002 부장군(副將軍)註 003 유신(庾信)註 004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註 005을 침공하였다.註 006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陣)을 펼쳤는데, 군세(軍勢)가 매우 왕성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별로 싸울 마음이 사라졌다. 유신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갖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끌어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라고註 007 하였으니, 내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말에 올라타 검을 빼들고 적진(敵陣)을 향하여 곧바로 나아갔다. 적진에 세 번 들어갔다가 세 번 나왔는데..

회암사지에서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 태종2년 회암사로 가서 태상왕을 문안하다임금이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태상왕을 조알(朝謁)하였다. 처음에 태상왕이 왕사(王師) 자초(自超)의 계(戒)를 받아 육선(肉膳)을 들지 아니하여, 날로 파리하고 야위어졌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환관(宦官)을 시켜 자초에게 말하기를,“내가 태상전(太上殿)에 나가서 헌수(獻壽)하고자 하는데, 만일 태상왕께서 육선(肉膳)을 자시지 않는다면, 내가 장차 왕사(王師)에게 허물을 돌리겠다.”하였다. 자초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회암사를 사양하고 작은 암자에 나가 있었다. 임금이 이른다는 말을 듣고 회암사 주지(住持) 조선(祖禪)과 더불어 태상왕께 고하기를,“상(上)께서 육선(肉膳)을 드시지 아니하여, 안색이 파리하고 야위어지십니다. 우리들이 오로지 상..

소이면 비산리(이국헌과 엄찬)

나란히 선 비석(이국헌과 엄찬)들하지만, 역사는 ?목사이후국헌청덕애민선정비( 牧使李侯國憲淸德愛民善政碑 )목사엄후찬진휼혜선비(牧使嚴侯讚賑恤惠善碑)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1리에 있는, 조선시대에 충주목사를 역임한 엄찬의 선정비.[형태] 목사 엄찬 진휼비(牧使 嚴讚 賑恤碑)는 총 높이가 168㎝이고, 비신은 높이 110㎝, 앞면 67㎝, 측면 34㎝이며, 개석(蓋石)은 높이 59㎝, 앞면 76㎝, 측면 40㎝이다. 방부(方趺)는 높이 9㎝, 앞면 75㎝, 측면 40㎝이다.[금석문] 비석 앞면에는 ‘목사엄후찬진휼혜선비(牧使嚴侯讚賑恤惠善碑)’라고 쓰여 있다.[의의와 평가] 목사 엄찬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비석 내용에 ‘진휼혜선(賑恤惠善)’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충주목사 재..

충주 의림사지 발굴조사지

어림(?)과 의림(?)   (참고자료)충주 의림사지 지표조사 보고서(한국고고학회)Ⅷ. 종합고찰 이번 지표조사는 의림사의 사역을 확인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그간 여 러경로를 통하여 의림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확인 작업을 병 행하여 사찰의 변천과정을 밝히는데 중점을 두고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표조사라는 한계로 인하여 사역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의림사지는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면서 마을이 들어서고 경작으로 인 하여 훼손되어 현재는 연화대석이 남아 있는 과수원 일대를 제외하고 는 사지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또한 1975년 충주공업전문대학의 이영 택 학장에 의하여 과수원 일대가 발굴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당시 의 조사내용과 사진, 출토유물 등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상황을 파악 할 수 없었다. ..

대림산성 봉수대

세종지리지 충주목(忠州牧)사(使)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신라에서 빼앗아,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치었다. 고려 태조(太祖) 23년 경자에 충주(忠州)로 고치었고, 성종(成宗) 2년 계미에는 처음에는 12목(牧)을 두었는데, 바로 그 하나가 되었다. 14년 을미에는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충주 창화군(忠州昌化軍)이라 이름하였고, 현종(顯宗) 3년 임자에 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9년 무오에 충주목(忠州牧)으로 정하니, 8목(牧)의 하나이었다.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別號)는 대원(大原),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또는..

울주 서석곡(書石谷)에서

낙서와 암각낙서와 암각은 무엇이 다를까 ?신라의 왕족과 화랑들은왜 천전리 골짜기를 찾았을까 ?암각화와 마애불은 무엇이 다를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별로 없다.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빌고 또 빌고 ~~~~~하느님도 부처님도 아닌나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신라왕족(삼맥종 진흥왕 일족)의 서석고대의 암각최근의 각서

괴산 미륵산성

괴산 낙영산과 도명산 산행미륵산성을 답사하러 갔는데,비탐방지역이라 통제구역이너무 많아서 산성 둘레길을 돌지 못하고,헤메다가 낙영산과 도명산 정상만 간신히~~~~~개심수술한지 두달 정도로겁대가리없이 갔었는데,특전사가 자랑하던산악유격훈련장이었네요.아무튼 저질체력과 독도 실패로 개고생했습니다. 낙엽이 진 겨울에 다시 가야할듯. 낙엽이 진 겨울에 꼭 가야할듯.

정선 송계리 산성과 고분군에서(1)

산성을 거닐며나는 왜 산성을 찾을까 ?무너진 돌무더기와 흔적조차도 희미한 고분을 바라보며 무슨 상상을 할까 ?시대의 소용돌이인 전쟁의 흔적들은 단지 돌무지의 잔해만이 있을 뿐이다.  까마득한 천년 전의 역사가 왜 알고 싶을까 ?돌무더기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서러있지만, 피비린내 나는 고통은 없다.어쩌면 발굴조사와 유적답사를 하더라도 전투상황을 알수는 없다.  설사 전투기록이 남았다고 해도 단지 추정과 상상만 할 뿐이다.내가 죽는 날까지는 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

구녀산 구녀산성에서

구녀산 구녀산성에서                                              2024. 6. 6오전에 초평저수지를 한바리하고오후에 초정약수 옆에 있는구녀산 구녀산성을 답사하였습니다.딸 아홉이 쌓은 산성이라서인지산 속에 신녀들이 너무 많네요.구녀산성이 기도빨이 좋아서인지무속신앙이 아직도 ~~~~~십남매의 전설에서도딸내미는 ~~~~~그 놈에 아들이 뭔지.구라산성의 전설은어디까지가 진실일까?내수읍 우산리를 근거로 우산성이라고도 하고,구려사를 근거로 구려성이라고도 하지만,구녀산 구녀산성은  구라산 구라산성으로 기록될 뿐이다.구라(?)라는 의미는 뻥(?)은 아니겠지요.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淸州牧) 구라산(謳羅山) 고을 동쪽 41리에 ..

두루봉 동굴개발에 대하여

두루봉 동굴을 바라보며 80학번으로 충북대학교를 다녔기에 두루봉 동굴의  발굴유물도 대학 박물관 수장고에서 몇 차례 본 적이 있었지만, 두루봉 동굴 유적지를 다녀온 것은 처음이었다.  청남대를 오가면서도 큰 용굴이나 작은 용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나이 들면서 향토사에 관심을 두다가, 점점 고대사에 빠져 들면서 지역의 유적지들을 찾게 되었고, 이제서야 두루봉 동굴도 찾게 되었다.  이 글은 이번 답사에서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두루봉 유적지에 대한 학술적인 설명보다는 두루봉 유적지를 어떻게 보존하고 개발해야 좋은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서 개인적인 의견을 남겨본다.  두 개의 커다란 웅덩이는 ? 두루봉 유적지에는 커다란 두 개의 웅덩이가 있다.  하나는 큰 용굴 유적지로 폐광이 되어 웅덩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