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에서 64

사열산성은 어디일까 ?

제천시 청풍문화재단지의 망월산성을 답사한 분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  정약용과 신채호로 이어지던 성열성과 성열현에 관한 지명유래도 역사의 오류였지만, 아직도 향토사학에서는 성열성과 성열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사열산성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후대의 기록인 대동지지에서 고성으로 성황산 유지와 삼국사기의 기록인 사열산성이 등장하는 것도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제천의 향토사와 청풍문화재단지에는 오늘도 잘못된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사에서 우륵이나 강수의 출생지에 관한 이야기는 큰 의미가 없지만, 향토사에서 내 고장 출신임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절실한 사료일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 성열현이나 성열성의 위치를 비정할 수 ..

이종욱 교수의 "역사충돌"을 읽으며

이종욱 교수의 "역사충돌"을 읽으며왜 역사충돌이라고 했을까 ? 충돌보다는 왜곡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 텐데, 역사전쟁도 아닌 역사충돌이라는 패러다임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역사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란 지나간 기록에 불과하지만, 사실보다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기술되고, 짜집기된다. 역사학계에도 카르텔이 존재한다. 국가나 특정조직의 요구에 따라 학자뿐만 아니라, 관리와 관련단체 까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로부터 받은 댓가만큼의 역사를 편집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는 "역사충돌"은 한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 어쩌면 역사는 지나간 기록이 아니라, 산 자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이다.역사충돌역사전쟁역사왜곡역사말살무엇이 다를까 ? 역사바로세우기란또 무엇일까 ?생각을 바꾸..

삼휴정(三休亭)과 사휴정(四休亭)

삼휴정(三休亭)과 사휴정(四休亭) 사휴(四休) 송(宋) 나라 때 손방(孫昉)은 별호(別號)가 사휴거사(四休居士)였는데, 황정견(黃庭堅)의 사휴거사시서(四休居士詩序)에 의하면 태의(太醫) 손군 방(孫君昉)이 …… 사휴거사라 자호(自號)하였으므로, 산곡(山谷)이 그 설(說)을 물었더니, 사휴가 말하기를, 거친 차와 싱거운 밥에 배부르면 곧 쉬고, 해진 옷 기워 입어 추위 가려서 다스우면 곧 쉬고, 평평하고 온온하게 지낼 만하면 곧 쉬고, 안 탐하고 시기 않고 늙으면 곧 쉬는 것이다. 麤茶淡飯飽卽休 補破遮寒暖卽休 三平二滿過卽休 不貪不妬老卽休 휴휴정기(休休亭記) 당나라 때 시인 사공도(司空圖)가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중조산(中條山) 왕관곡(王官谷)에 삼휴정(三休亭) 또는 휴휴정(休休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

감자를 캐며

거름도 안주고, 묵은 감자씨로 보름이나 늦게 심은 감자가 대풍이네요. 하늘이 도와준 덕분에 게으른 사람도 먹고 사는가 봅니다. 삼겹살 구워먹는 테라스와 테이블은 커피 몇잔 먹어보고 ~~~~~ 93세에도 남동생(외삼촌) 준다고 챙기는 ~~~~ 펭구를 닮은 못난이 감자. 감자밭에 덤으로 남은 강낭콩 당근씨를 뿌리는 것으로 감자캐기 끝.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충주의 인물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충주의 인물들 삼국사기에는 우륵, 강수, 김생이 등장한다. 모두 신라의 국원성과 국원소경의 인물들이다. 국가적인 측면에서는 우륵, 강수, 김생보다는 신라의 진흥왕과 가야 왕족인 김무력은 국원성과 국원소경을 만들은 인물일 것이다. 신라의 진흥왕과 김무력은 지방보다는 국가에서도 중요한 인물이기에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편에는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진흥왕과 김무력은 국원소경을 창출해낸 인물들이다 .충주목의 인물에서 우륵과 김생과 권근은 잠시 머물다렸다는 의미고, 강수와 유긍달은 충주가 고향이라는 의미고, 춘부와 김윤후는 충주의 관리로써 그 공적이 크다는 것이다. 조선 후대의 기록에서도 신립과 임경업은 충주의 인물로 기록되질 않는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충주의 세력가인 유긍..

검단과 흑평에 대하여

보름달(자료사진) 검단과 흑평에 대하여 검단(黔丹)이란 지명도 전국에 수없이 많이 산재한다. 대표적인 곳이 남한산성이 있는 하남시의 검단산이다. 그리고, 김포의 검단의 유래에선 검, 감, 금, 김 등이 혼재하여 나타난다, 충주의 지명유래에서도 충주시 대소원면 검단리(檢丹里)가 고지도나 고문서에서는 검단(黔丹)으로 표기되어 있다. 검단리에 인접한 완오리에는 흑평(黑平)이란 지명이 있는데, 검단리와 완오리는 고려시대에 대몽항전의 승리로 충주의 국원경과 더불어 익안현으로 승격되었던 곳이다. 흑평이란 지명은 진천의 옛지명인 금물노와 흑양처럼 큰뜰 또는 검은뜰이라는 뜻이고, 대소원면의 검단리(黔丹里)에서 검(黔)자는 주로 지명에 쓰이는 것으로 검(黔)으로도 읽고, 금(黔)으로도 읽는다. 검단(黔丹)을 해석함에 있..

다인(多仁)과 달천(達川)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다인(多仁)과 달천(達川)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고려사지리지 충주목에는 익안현 다인철소가 나타난다. 다인(多仁)이라는 지명은 무슨 뜻이며, 다인철소는 어디에 있었을까 ? 경북 의성군 다인면은 예천군 다인현(多仁縣)에 속해 있던 곳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인현(多仁縣)을 달이현(達已顯) 또는 다이(多已)로 기록하고 있다. 고지명에서 다인(多仁)은 기름진 땅(地)으로 해석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동명성왕조에는 "다물도(多勿都)"가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다물(多勿)은 고구려의 말로 옛땅의 회복이다."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영토확장을 다물(多勿)전쟁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다인현(多仁縣)에서 달(達)이 다인(多仁)으로 가차된 지명이다. 경북 의성군 다인면에서 다인(多仁)은 넑은 벌(..

지게 예찬론

지게와 배낭 문득 "지게 예찬론"이 떠오른다. 아마도 중학교 때 과학(물리) 담당선생님께서 수업 도중에 여담으로 발명품 이야기를 하다가 "지게"가 우리민족 최고의 발명품이라며 지게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개의 지게다리와 지게작대기의 하중분산과 무게중심에 관한 설명과 더불어 너무 완벽한 지게 때문에 도로와 수레가 발달하지 못해서 외적의 침입을 어렵게 하여 국난을 극복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물물교역인 상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조선말기까지도 등짐을 진 보부상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과 경지정리사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농가마다 한.두개씩 있는 것이 지게다. 근대화 과정에서도 시장통의 지게꾼, 골목길의 연탄장수와 물장수, 재활용 휴지나 옷을 줍는 넝마지기 소쿠리 등이 등장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