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69

왜 태백산 부석사일까 ?

왜 태백산 부석사일까 ? 부석사 일주문의 현판을 보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단양을 지나 죽령을 넘어 풍기와 순흥을 지나면서 소백산만 보이는데, 갑자기 나타나는 "태백산 부석사"는 오류일까 ? 부석사 경내를 오르다가 보면 부석사 범종루에는 "봉황산 부석사"가 보인다.  "소백산과 태백산과 봉황산" 무슨 차이가 있을까 ?   "태백산 부석사를 검색하면 고치령 산신당의 태백산과 소백산 신위를 근거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무엇인가가 부족한  궤변처럼 보인다. 산줄기로 이야기하면 고치령 보다는 태백산 사고가 있었던 춘양의 우구치일 것이다. 춘양의 각화사는 "태백산 각화사"라 하고, 풍기의 비로사는 "소백산 비로사", 순흥의 부석사는 봉황산보다는 " 선달산 부석사"로 쓰는 것이 어떨까 싶지만, 이는 오늘날의 관점일 뿐..

중원의 고대사는

마한의 동쪽은 마한의 동쪽은 어디일까 ? 마한의 북쪽은 또 어디일까 ? 마한의 소국들 중에서 마한의 맹주국은 목지국일까 ? 마한 소국의 하나인 백제는 어디서 시작했을까 ?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온조왕의 마한정복은 사실일까 ? 삼한 소국들의 위치비정에서 해괴한 주장들이 난무한다. 최근에는 발굴조사에 따른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반론도 제기하고는 있지만, 역사학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리고, 삼한의 역사는 중국정사에 나타난 기록과 발굴된 유물로 대신할 뿐이다. 삼한에는 마한과 진한과 변한이라는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한다. 삼한시대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보아야 할까 ? 삼한의 영역은 어디까지 일까 ? 그리고, 마한과 진한과 변한의 영역은 또 어딜까 ? 마한과 진한과 변한은 무엇이 다를까 ? 고대역사..

심항산 봉수대와 심항현 영액에 대하여

심항산 봉수대와 심항현 영액에 대하여 심항산 봉수대는 어디에 있었을까 ? 심항현 영액이란 무엇일까 ? 심항산 봉수대나 심항현 영액은 충주시의 문화유산에서도 중요한 유적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 충주읍성의 방어체계나 봉수체계를 보여준다. 심항산은 현재의 계명산을 이르는 옛 지명이고, 심항현은 계명산과 남산의 안부에 있는 마즈막재를 이르는 옛 지명이다. 심항현 또는 심항치의 영액은 마즈막재의 방어선으로 작은 토석혼축의 보루를 일컫는다. 차단성이나 관문성과 달리 충주읍성을 방어하기 위한 임시로 설치되는 군사시설이기에 성곽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심항현 영액과 달리 심항현 봉수대의 위치논란은 조선시대의 고지도나 일제강점기의 국유림경계도에서 서로 다른 위치로 표기되고, 대동여지도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심항산과 오..

충주 봉현성에 대하여

충주 봉현성에 대하여 충주 나성과 봉현성은 충주의 향토사에서 충주성 또는 국원성의 위치비정에 논란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충주 나성과 봉현성이란 일제 강점기의 기록이기에 충주성 또는 국원성과는 별개의 토성으로 추정해 왔었다. 2019년 2월 9일에 쓴 글처럼 봉방동 일대에서 나타나는 토루를 토성이기보다는 유주막의 달천보와 대제(함지못)와 소제(호암지)에 따른 제방과 관개수로처럼 충주천(사천 또는 봉계) 일대에 농경지나 충주성의 풍수림 등을 조성하면서 축조한 것으로 추정해 왔었다. 몇년 전에 조선시대의 달천보와 달천교에 관한 고찰을 하다가 포기를 한 것은 달천보나 달천교라는 토목공사가 굴포나 간척지에 비해 미미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도 김제의 벽골제를 축조했었지만, 방죽이 아닌 수로를 굴착하는..

괴산군의 유래는 ?

괴산군의 유래는 ? 괴산을 오늘날의 상용한자로 풀이하면 회나무골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회나무와 느티나무를 좋아해서 관청을 비롯해서 유적지뿐만 아니라, 마을에도 노거수로 남아있다. 괴목은 회나무를 이야기하지만, 회나무보다는 느티나무로 인식하는 것도 느티나무가 더 많기 때문이다. 느티나무와 연관된 지명은 괴촌과 괴정 등이 있다. 괴곡(槐谷)과 괴산(槐山)의 괴(槐)는 귀신도 쫓는다는 회나무를 의미한다. 괴곡이나 괴곡성이 주는 오늘날의 이미지는 귀신들이 사는 곳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본래 의미는 잡귀를 물리치는 신목 또는 당목이라고 여겼기에 궁궐에는 물론이고, 마을이나 민가에도 심었던 것이다. 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이 노거수를 대표하는 것은 나무도 크지만, 수명이 길다는 것이다. 요..

청주의 지명유래는 ?

청주의 지명유래는 ? 한강의 지류인 달천에 위치하는 청천과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에 위치하는 청주는 현재의 지명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삼국사기에 달천은 살수 또는 살매로 기록되고 청천이란 지명이 고착되지만, 청주의 옛 지명은 자곡과 비성이라고 전하며, 고려시대에 청주로 변천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백제의 지명이라는 상당현은 조선의 기록인 고려사 지리지에 전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명은 신라를 중심으로 쓰였기에 백제의 지명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고구려의 지명에서도 청주의 옛 지명은 나타나질 않는다. 청주의 지명유래에서 상당현이란 지명도 한자로 변경된 백제의 지명이라기보다는 신라시대에서 개명한 신라식 지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청주에 백제의 영토였던 웅천주나 신라의 웅주를 관할하는 서원경이 ..

풍수촌과 바람드리

풍수촌과 바람드리 풍납토성을 둘러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지명 하나가 있다.신라 문무왕(661~681년) 때인 662년에 김유신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에게 군수물자인 식량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 풍수촌"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음력 1월 23일에 칠중하(임진강)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추정하면, 풍수촌은 칠중하인 임진강일 수도 있지만,  풍납토성이 있는 풍납동 일대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본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책계왕(286년) 때에 아차성과 사성을 수리했다고 전한다. 백제 개로왕(475년)의 기록에는 사성의 동쪽에서  숭산의 북쪽까지 뚝을 쌓고, 궁궐을 중수했다고 전한다. 백제의 위례성 위치비정에서 사성을 비암으로 해석하고, 풍납동을 바람드리로 해석하는 등 ..

금돌성과 삼년산성에 대하여

삼년산성을 거닐며 삼년산성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산성이다. 하지만, 삼년산성의 입구에 들어서면 신라의 성이면서도 신라의 성처럼 보이질 않는다. 왜 그럴까 ? 신라의 성들도 축조시기나 자연환경이나 입지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잘못 복원된 성곽들은 그 주변에서 채취한 성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복원에 사용한 성돌의 모양이나 재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복원된 성돌이 다르기에 느낌도 다르고, 형태만 비슷할 뿐이다. 이는 보존보다는 복원이라는 잘못된 문화관광이라는 정책 때문이다. 천오백 년 전의 산성을 왜 복원할까 ?  당시에는 전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성돌을 쌓았지만, 지금은 역사문화관광을 위해서 성돌을 쌓는다.  삼년산성은 천 년이 흐른 지금도 쌓고 있다.  삼년산성의 성벽을 자세히 보면은 개축과 보수한 흔..

고구려 국원성에 대하여

역사에서 시대의 흐름과 배경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 인명과 지명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같은 지명으로 볼 수 있을까 ? 충주를 청주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 신라의 강수는 임씨일까 ? 석씨일까 ? 국원성과 중원경이 무슨 뜻이길래, 한반도의 중심이라고 우길까 ? 삼국사기의 낭자곡성과 낭성이 어디길래, 자곡과 비성을 낭자가 빠진 (낭)자곡성과 (낭)비성으로 볼까 ? 사열이현이 무엇이길래, 성열현을 청풍현이라고 해석할까 ? 역사에서 오류와 왜곡은 무엇이 다를까 ? 신라의 9주 5소경 체계에서 현재의 충청북도는 동북부 지역인 나토군(제천), 사열이현(청풍), 적산현(단양)은 삭주인 북원경 관할이고, 중북부 지역인 국원성(충주), 잉근내군(괴산), 금물내군(진천), 도서현(증평), 잉홀(음성)은 ..

여주목의 어서이촌(於西伊村)에 대하여

양광도와 황려현에 대하여 고려 무신정권과 원나라가 침입한 간섭기에는 고려의 왕권체계나 지방제도는 있었으나, 정치적인 문제로 인하여 정착하지 못하고 전란을 극복하는데, 더욱 혼란스러웠다. 고려 말기에 김취려 장군의 기록에서 거란과의 제천 박달현 전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황려현(黃驪縣) 법천사(法泉寺)가 나타난다. 법천사(法泉寺)는 원주시 부론면에 위치한다. 원주에서 흘러내리는 섬강은 문막을 지나 법천사지가 있는 부론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여주시 점동면 삼합리는 섬강과 청미천이 남한강과 만나는 세물머리이기도 하지만, 경기도와 강원도와 충청도가 분기되는 곳이기도 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5도 양계라는 지방제도에 따라 경기도와 충청도는 양광도로 편제된다. 그 중에서 고구려 시대의 노음죽현(장호원)을 중..

충주 사투리에 대하여

충주 사투리에 대하여 지금은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토박이 어른들은 물론 동향 사람들끼리 만나면 그들만의 사투리를 쓴다. 하지만, 예전에 충주 사람들은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왜 그럴까 ? 대한민국 표준어는 서울 말씨인데, 충청도 촌뜨기가 왜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생각할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와 신라와 백제의 사투리 등 수많은 방언들이 존재한다. 삼국시대에 산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 삼국의 전쟁터에서 삼국의 장수가 싸움을 한다면 사투리 경연장이 되었을 것이다. 각자마다 독특한 모국어를 쓰지만, 통역관이 없어도 의사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거제도 할머니와 흑산도 아저씨와 연변 아가씨가 사투리 경연을 하면 어떨까 ? 사투리와 신조어 때문에 혼란은..

왜 충청북도와 충청남도일까 ?

망이산성에 올라 음성군 삼성면에 있는 마이산(馬耳山)에는 망이산성(望夷山城)이 있다. 마이산은 안성의 칠장산과 더불어 경기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경계로 금강의 미호천과 남한강의 청미천이 분기하는 한남금북정맥에 위치한다. 한남금북정맥은 백두대간인 속리산에서 시작해서 맹동의 소속리산에서 삼성의 마이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낮은 구릉으로 형성되어 마루금조차도 분간하기 힘든 곳이다. 한남금북정맥에서 칠장산 또는 칠현산은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나누어져 경기와 충북과 충남의 경계가 만나는 삼도봉이 된다. 예전부터 음성군의 삼성. 생극. 금왕. 맹동. 대소 등을 충주의 외서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충주목의 특별관리지역인 임내(任內)로 군현(郡縣)을 설치하거나 수령을 파견하지 않는 특수한 지역이다. 면리제와 달리 임내(..

탄금대 항공사진(1948년)

탄금대섬을 바라보며 1948년에 탄금대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바라본다. 탄금대섬이 선명해 민둥산으로 추정된다. 1945년 해방 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용섬을 비롯하여 칠지의 섬뜰과 하방의 섬뜰도 보이며, 갈수기에 촬영했기에 한강과 달천강의 물흐름이 사막의 모래톱처럼 살아있다. 하지만, 대홍수가 발생하면 탄금대는 섬이 되고 샛강은 물론 용섬과 섬뜰도 물바다가 된다. 벙어리 여울과 김생제방은 또 어디일까 ? 소금배와 황포돛배는 어떻게 다녔을까 ? 항공사진에 나타난 흔적들을 찾아본다. 금대마을에 있던 선사시대의 흔적은 너무 작아서 보이질 않는다. 탄금대 토성은 보이지만, 가마터는 민가들이 형성되어 있다. 우륵이나 신립의 흔적도 보이질 않는다,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은 어디일까 ? 신립이 배수진을 친..

탄금대 토성

원삼국시대에 탄금대는 부곡이었다. 탄금대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 아주 까마득한 이야기다. 탄금대는 가야금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진흥왕과 우륵의 이야기가 머무르기 전에는 탄금대 토성과 철장에서 쇠부리를 하는 사람들이 살던 특별지역으로 추정한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탄금대 사진과 1948년에 촬영된 항공사진을 보며 어릴 적부터 들어온 옛이야기들을 더듬어 본다. 샛강을 건너가는 탄금대는 섬이었다. 금대마을은 갈수기에는 탄금대 샛강을 건너 다니지만, 홍수가 나면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내륙의 조그만 섬마을이다. 합수나루에서 나룻배와 황포돛배가 오가던 것이 불과 100년 전의 탄금대 모습이다. 철새들의 낙원이었던 탄금대 모습을 상상해보자. 백제의 야철지인 부곡(釜谷)들이 충청도의 달천과 미호천 유역에서 나..

쇠금(金)에 대하여

쇠금(金)에 대하여 탄금대 주변의 지명에서 금대, 금제(쇠저울), 금곶(쇠꼬지), 금천, 금탄, 금가, 가금, 금곡(쇠실) 등은 금(琴)보다는 금(金)으로 표기된다. 금(金)이란 지명유래는 수없이 많은 의미로 표기되지만, 탄금대 주변에서 나타나는 금(金)은 금속(金屬) 중에서 주로 쇠(鐵)를 의미한다. 이규경의 연철변증법에는 "하은주 시대에 쇠는 놋쇠이며, 구리로 만든다."라고 하기에, 쇠금(金)은 쇠철(鐵)보다도 더 넓은 의미이며, 쇠부리란 의미도 쇠철(鐵) 뿐만 아니라, 모든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금부리와 쇠부리는 모두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탄금대 일대에서 금(金)이란 지명은 지질에 따른 자연환경과 시대에 따른 역사를 잘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서울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누..

탄금대섬

금부리와 쇠부리에 대하여 노은면 수룡리란 지명은 수철(水鐵)과 천룡(天龍)을 합성한 지명이다. 노은면 수룡리에는 무쇠점이란 곳이 있다. 무쇠를 한자로 표기하면 수철(水鐵)이다. 무쇠로 만든 솥이 무쇠솥이다. 무쇠점은 쇠를 캐거나 부리는 사람들이 사는 촌(村)이다. 수룡리와 인접한 신효리에는 원대 마을이 있다. 원대는 본래 금부리로 원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금부리를 한자로 표기하면 금부리(金釜里) 또는 금부리(金夫里)로 표기할 수도 있다. 전자는 가마골인 부곡(釜谷)이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야철지라는 뜻이지만, 표기만 다를 뿐 같은 지명이다. 세종지리지에는 노은면 보련동에 자기소가 있다고 기록되는데, 자기소를 가마골이라고 부른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강수는 중원경 사량 임나가량 사람이고, 강수의 처는 ..

마한의 장수와 맥국의 거수는

충주 고대사의 중심에는 국원성(國原成)이 존재한다. 그러나, 국원성과 국원소경에 관한 고찰이 미미하여 국원성과 국원소경은 물론이고, 중원경도 지명만 나열할 뿐이다. 발굴조사에서도 그와 관련된 유물은 미미하고, 충주고구려비에 대한 연구도 비석의 발굴 과정과 비문의 해석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 들어서면 한국사가 아니라, 향토사 같은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 고구려비 전시관에는 고구려의 이미지가 보이질 않는다. 한국사 연대표에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지배한 역사는 물론이고 국원성 이전의 고대사가 백제(마한)로 표기되어 있어, 고구려는 백제 또는 신라의 지배자가 아닌 철기군으로 무장한 침략자로 묘사될 뿐이다. 이는 충주의 고대사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백제가 건국초기에 말갈과 싸운..

우륵선생 추모비에서

우륵의 아름다운 외침 탄금대에 올라서면 탄금대 공원 안내판 옆에 탄금대 사연 노래비가 제일 먼저 보인다. 탄금대 사연의 가사에는 산새도 울고, 물새도 울고, 강물도 울고, 가야금도 운다. 비록 시류에 편승한 노래지만, 노래비는 탄금대를 울고 우는 슬픔을 간직한 장소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탄금대 사연의 작사와 작곡과 노래비를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 그들은 탄금대의 진실보다는 시인 문객처럼 탄금대에 흐르는 정서를 표현했을 것이다. 탄금대의 왜곡된 역사는 탄금대기를 쓴 육당 최남선과 우륵선생 추모비를 쓴 월탄 박종화의 붓끝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역사의 진실보다는 애향심에 호소하는 잘못된 관행에서 기인한다. 탄금대기비와 우륵 추모비는 탄금대와 우륵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비석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을 남기기..

중원역사문화권에 대하여

고대역사문화권에 대하여 고대역사문화권이란 무엇일까 ?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 삼한과 삼국으로 정립되었던 우리나라의 고대사에서 중원역사문화권과 예맥역사문화권은 어디에 속할까 ? 백제와 신라와 고구려 역사문화권이란 또 무엇일까 ? 중원, 예맥이란 한강의 고대역사문화권에서 무엇이 다를까 ? 가야, 마한, 탐라를 포함하면 고대 사국 또는 고대 오국도 아닌 고대 팔국사를 써야 할 판이다. 삼한의 역사도 없는데, 이름만 남긴 78개 국사는 어떨까 ? 참으로 해괴한 분류가 아닐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 나타난 기록도 마찬가지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한국사를 찾는 바보들도 있지만, 그는 한국의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아직까지도 정립 되질 않아서 고대문화권이란 분류조차도 혼란스..

탄금대에는 열두대가 없다.

탄금대에는 열두대가 없다. 충주 탄금대를 다녀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충주시민도 탄금대와 열두대를 구분하지 못한다.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지만, 열두대는 없다. 열두대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패한 신립장군의 무용담을 미화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의 탄금정이 있는 절벽을 일컷지만, 탄금대에 세워진 신립장군에 대한 비석들과 유래비는 모두 최근에 세워진 것들이다. 신립장군이 열두번이나 뛰어 올랐다는 열두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 당시의 총사령관인 신립장군이 열두대에서 무엇을 지휘하고, 어디로 활을 쏘았을까 ? 삼국지와 같은 소설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구한말에 쓴 이만도의 향산집에는 아홉번 뛰었다는 신립장군의 무용담이 나타난다. 그 상상력이 열두대를 만들어내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