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의 동쪽은
마한의 동쪽은 어디일까 ? 마한의 북쪽은 또 어디일까 ? 마한의 소국들 중에서 마한의 맹주국은 목지국일까 ? 마한 소국의 하나인 백제는 어디서 시작했을까 ?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온조왕의 마한정복은 사실일까 ? 삼한 소국들의 위치비정에서 해괴한 주장들이 난무한다. 최근에는 발굴조사에 따른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반론도 제기하고는 있지만, 역사학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리고, 삼한의 역사는 중국정사에 나타난 기록과 발굴된 유물로 대신할 뿐이다. 삼한에는 마한과 진한과 변한이라는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한다. 삼한시대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보아야 할까 ? 삼한의 영역은 어디까지 일까 ? 그리고, 마한과 진한과 변한의 영역은 또 어딜까 ? 마한과 진한과 변한은 무엇이 다를까 ? 고대역사문화권의 분류에서 중원과 예맥의 역사는 어디에 속할까 ? 마한의 동쪽을 진한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원역사를 마한의 동쪽 끄트머리라고 주장하는 하고픈 사람들도 있다. 백제의 동쪽 끝은 죽령일까 ? 왜 동쪽의 끄트머리일까 ? 달리 생각하면 진한의 끄트머리도 되고, 맥국의 끄트머리도 되고 예국의 끄트머리도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별 볼일 없는 변방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즉 강력한 지배세력이 없다는 것이다.
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한=백제, 진한=신라, 변한=가야라는 잘못된 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삼한과 삼국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면 고대사를 교과서처럼 바라보게 된다. 삼한과 삼국 뿐만 아니라, 남북국시대란 분류도 역사체계를 정리하다가 나온 발상일 뿐이다. 요즈음은 삼한이라는 표현보다는 원삼국도 아닌 초기철기시대라고 하지만, 초기철기시대란 표현도 한국사와는 괴리가 존재한다. 초기철기시대로 표현하더라도 마한과 진한과 변한이라는 분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정통론이라는 논쟁은 어쩌면 현재도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과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그를 대변하고 있다. 마한이 백제에 의해 멸망하고, 진한이 신라에 복속되었는데, 정통성의 계승이라는 논리는 궤변이자 정치적인 수식에 불과한 것이다. 권력자들은 지나간 권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왕위 쟁탈전은 부자와 형제지간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고, 수많은 정권들이 전정권을 부패와 타락으로 역사를 말살시킨다. 우리는 통일과 정복을 혼돈한다. 통일과 정복은 무엇이 다를까 ? 백제가 성장하면서 마한이 사라지듯이 진한에서 성장한 신라가 삼한과 삼국을 통일했다고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마한=백제, 진한=신라, 변한=가야라는 논리에서 백제를 마한으로 인식하면 고구려는 삼한의 역사에서 벗어난다. 한강의 역사에서 한과 예를 배제하면 어떻게 될까 ? 낙랑과 대방의 존재는 단지 이민족의 침략자일까 ? 한강유역조차도 마한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 고구려를 마한으로 인식한 사람들은 고조선까지 포함시켰을 것이고, 백제를 마한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중국정사의 기록처럼 낙랑에 속한 대방을 삼한으로 보았을 것이다. 고조선과 동이족의 역사를 남북국으로 분류하면 북방이라고 하는 고구려와 백제조차도 마한의 세력이 아닌 것이다. 중원의 역사도 마한의 역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중원의 역사는 마한의 동쪽 끄트머리가 아닌 남한강 중심의 역사문화를 고찰하는 것이다. 위세품에 불과한 왕관을 쓴 찬란한 역사가 아니라, 지역 특색이 있는 고유한 역사문화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마한의 남쪽은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월지국)을 천안 일대로 비정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를 입증할만한 고고학적 근거는 없다. 목지국의 위치비정도 아직까지는 추론에 불과한데, 목지국의 남쪽을 이야기한다면 궤변이 아닐 수가 없다. 더 나아가 마한의 실체도 모르는데, 영산강 유역을 마한역사문화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마한을 이야기할까? 대백제를 주장하던 학자들이 백제를 소국으로 쪼개버리고, 변한과 왜가 아닌 마한의 역사에 집착할까 ? 대가야는 변한일까 ? 대가야도 변한의 일부분에 지나질 않는다. 어쩌면 변한지역이 한반도의 순수혈통에 더 가까울 수도 있고, 민족사관에 더 부합할 수도 있으나, 편협한 역사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마한과 백제는 시작과 끝도 다르며, 마한의 영역은 한반도의 영역을 모두 포함할수도 있지만, 영산강 유역은 일부분에 지나질 않는다. 마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삼한정통론처럼 기자조선이 되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이 마한이라는 논리라면 마한의 역사는 고려와 조선을 지나 현재까지도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 영산강 유역의 소국들도 독자적으로 성장하다가 백제에 복속되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역사에서도 중국의 책봉기사나 양직공도를 이야기한다. 고대 소국들이 중국의 책봉을 받기를 왜 간절히 원할까 ? 허접한 책봉으로 소국의 지위을 인정 받으려는 약자들의 하소연이다. 또한 책봉기사를 들추는 학자들도 지역의 자존심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가야 역사를 쓰기 위해 허접한 일본서기를 인용하여 가야를 왜구의 소굴로 만들었던 과거사를 되겨보면 어떨까 ? 어쩌면 식민지 사학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가야의 소국들이 신라에 복속되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며, 마한과 백제의 지배세력이 다른 것처럼 영산강 유역의 소국들도 백제에 복속되는 과정에 지나질 않는다. 즉 소국이라는 지방의 작은 세력이 중앙권력에 편입되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소국들도 마한의 끄트머리에 있었던 잔여세력이라기 보다는 변한 또는 왜를 포함하는 해양세력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 군국제와 군현제란 무엇일까 ?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어도 지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중앙과 지방의 힘겨루기는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고대역사에서 소국의 수장을 제국의 왕으로 미화하는 촌극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고분들을 살펴보면 지역마다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 차이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즉 지역적인 특색이지 시대의 흐름은 같다는 것이다.
해묵은 논쟁이지만, 백제는 마한일까 ? 변한일까 ?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최치원은 마한을 고구려로 추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한이라는 것도 중국정사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타난 기록일 뿐이다. 그리고, 삼국의 분쟁과 신라의 9주 5소경 등에 따른 역사인식 때문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최치원은 신라말기의 정치적 상황에서 삼한과 삼국의 역사를 설명했을 것이다. 신라의 9주에서 한주와 삭주와 명주는 삼한의 영역에서 어디에 속할까 ? 백제 보다는 고구려가 복속한 고조선의 유민과 낙랑, 부여, 동예. 맥국. 말갈 등으로 분류되는 무리들이 정착한 지역이기에 마한을 고구려로 인식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백제의 웅천주와 완산주와 무진주는 무엇이 다를까 ? 마한과 백제는 지리적인 배경은 유사하지만, 백제를 마한 또는 변한과 왜로 볼 수가 있을까 ? 백제 역시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대방과 마한의 사이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명분론이지만, 백제는 시조가 마한이 아니라, 부여의 별종인 남부여라는 것이다. 신라의 파사왕과 가야의 수로왕이 정사를 논하는 기록을 떠올리면 어떨까 ? 진.변한이 뒤섞여 살았다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을까 ? 한국의 고대사는 조선시대 삼한정통론처럼 고려와 조선의 강역도를 보면서 삼한과 삼국을 바라 보았기 때문이다. 고대사에서 마한=백제, 진한=신라, 변한=가야라는 잘못된 등식은 사라져야 한다. 한국사에서 왜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왜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왕래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약탈과 전쟁이라는 악순환 때문에 서로를 적대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는 중국대륙에만 편중되어 있다. 역사인식을 해양으로 바꾸면 변한과 왜의 역사는 가야 또는 탐라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탐라란 의미도 좁게는 제주도이지만, 크게는 남해안 일대의 섬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구 또는 해구는 단지 일본열도에 국한된 것도 아니며 바다가 있는 지역에서는 까마득한 고대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이웃나라와 사이가 좋은 나라도 별로 없다. 침략과 정복의 역사에서 평화란 꿈같은 이야기다. 대제국은 정복자들의 꿈이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중원의 고대사는
국원과 충주는 무엇이 다를까 ? 중원과 충주를 동일 시하는 것은 충주라는 현재의 행정구역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한강과 남한강은 무엇이 다를까 ? 남한강과 북한강과 임진강은 어떨까 ? 한강과 달천은 또 무엇이 다를까 ? 역사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국원성을 크게 해석하면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과 같은 개념이지만, 작게 해석하면 군현의 읍성일 뿐이다. 광개토왕 또는 장수왕 때의 국원성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 몽촌토성보다는 작은 산성이었거나 탄금대 토성보다는 조금 더 큰 토성이었을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 신득의 포노를 설치한 국원성은 어떨까 ? 삼국을 정벌한 문무왕 때 축조한 국원성은 장미산성이었을까 ? 중원의 고대사는 충주읍성이 아니라, 삼한시대의 이야기다. 충청도가 아니라 한산군 또는 한산주의 이야기다. 초기철기시대의 탄금대 유적과 천년이 지난 후인 철기문화가 보편화된 고려시대의 다인철소를 비교하면 어떨까 ? 중원의 고대사는 고구려 국원성 이전의 역사이기에 기록도 없지만, 흔적조차도 찾기가 어렵고, 기록도 남길 수없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름도 알 수가 없는 촌장 또는 군장이 거느리는 소국이 존재했을 것이다. 신라 진흥왕이 점령한 10군과 신주는 어디일까 ? 국원소경이란 무엇일까 ? 태종 무열왕은 삼한통일의 거점을 왜 남천정으로 삼았을까 ? 사라의 정과 금돌성은 어디일까 ? 당항성과 삼년산성은 왜 쌓았을까 ? 중원의 고대사가 신라의 역사로 끝나버린다. 중원의 고대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후대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륵과 강수 그리고 김생이 아닌 기록조차도 없는 흔적을 찾아서 고찰해야 한다. 중원의 고대사는 없는 것이 아니라,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고대사에서 마한을 거창한 왕국으로 해석하는 것은 고집일 뿐이다. 즉 마한 또는 백제의 변방이란 표현은 지배력이 없다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신라와 맥국의 거수는 우호적으로 지낸다. 그러나, 백제는 낭자곡성에 이르러서 신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신라가 백제의 요청을 거절한다. 낭자곡성은 어디일까 ? 그리고, 그 이전에 마한의 옛장수 맹소가 항복한 복암성은 어디일까 ? 복암성과 낭자곡성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원산성과 금현성 등의 지명조차도 위치를 알 수가 없다. 고대사에서 중원의 땅은 역사가 없는 황무지일까 ? 삼한시대의 소국들 대부분이 정체를 알 수가 없지만,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중원역사문화권에서 마한과 백제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다는 논리는 중원의 역사가 마한과 백제의 주도세력도 아니지만, 그에 예속된 세력도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강의 춘천에 존재했던 맥국처럼 남한강 유역에도 소국의 정치체가 있었다는 반증인 것이다. 소국과 수장의 이름을 모른다고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단지 현재의 시점에서 그를 알지 못한다는 것 뿐이다. 고대역사문화권이라는 해괴한 분류에서 특정문화권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중원의 고대사에는 삼한과 삼국의 역사가 모두 포함된다. 탐라 또는 변한이라는 해양문화를 제외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마한. 중원. 예맥의 역사가 모두 연관성을 지닌다. 이는 중원의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고대역사문화의 분류는 지역갈등만을 조장할 뿐이다. 지역사와 국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향토사학과 자치단체의 아집으로 고대 소국을 대제국으로 과장하는 역사는 사라져야하지 않을까 ?
(참고자료: 임영진 교수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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