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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태백산 부석사일까 ?

산골어부 2025. 3. 5. 20:25

 

왜 태백산 부석사일까 ?

 

부석사 일주문의 현판을 보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단양을 지나 죽령을 넘어 풍기와 순흥을 지나면서 소백산만 보이는데, 갑자기 나타나는 "태백산 부석사"는 오류일까 ? 부석사 경내를 오르다가 보면 부석사 범종루에는 "봉황산 부석사"가 보인다.  "소백산과 태백산과 봉황산" 무슨 차이가 있을까 ?   "태백산 부석사를 검색하면 고치령 산신당의 태백산과 소백산 신위를 근거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무엇인가가 부족한  궤변처럼 보인다. 산줄기로 이야기하면 고치령 보다는 태백산 사고가 있었던 춘양의 우구치일 것이다. 춘양의 각화사는 "태백산 각화사"라 하고, 풍기의 비로사는 "소백산 비로사", 순흥의 부석사는 봉황산보다는 " 선달산 부석사"로 쓰는 것이 어떨까 싶지만, 이는 오늘날의 관점일 뿐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6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다 ( 676년 02월(음) )
十六年, 春二月, 髙僧義相奉旨, 創浮石寺.

 

소백산은 신라의 태백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영주시의 옛지명인 나이군(奈已郡)에 있는 태백산에 부석사가 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부석사의 연혁에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의상대사의 기록을 소개하면서 부석사 뿐만 아니라, 태백산 유래에 대해서도 설명했으면, "태백산 부석사"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렸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소백산뿐만 아니라, 백두산과 묘향산도 태백산으로 기술되어 있다. 함백산과 태백산이란 지명은 어떨까 ? 백두산과 장백산이란 지명도 마찬가지다.  한강의 발원지와 낙동강의 발원지는 또 어떨까 ? 몇 년 전에는 소백산이란 지명 때문에 지역 간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역사의 그늘에서 보면은 잠시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이 글은 8년 전에 부석사를 다녀 가면서 남긴 이야기지만,  이제서야 자료를 보완했으며, 사진은 그 당시인 2017년에 찍은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알고 일주문 현판을 쓴 것인지 그 진위는 알 수가 없지만, 고치령 산신각의 소백산과 태백산 신위보다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처럼 역사서에 나타난 기록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백두대간이나 태백산맥이란 개념도 따지고 보면 후대의 기록들이고. 부석사 일주문과 고치령의 산신각도 근래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낙동강 일대를 지배했던 삼국시대의 신라의 시각으로 보면 소백산은 거산인 태백산인 것이다.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가 태백으로 인식한 것도 부석사가 창건된 이후이기에 당시에는 현재의 태백산보다는 소백산을 더 중시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부석사 일주문

 

부석사 법종루

왜 태백산 부석사일까 ?

 

자료 1.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逸聖) 이사금(尼師今) 

 

5년(138)〕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太白山)註 001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註) 001

태백산(太白山): 지금의 태백산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강원도 태백시에 걸쳐 있는 산이지만, 본 기사에 등장하는 태백산은 현재 경북 영주시 순흥면과 봉화군 물야면, 충북 단양군 가곡면에 걸쳐 있는 소백산을 가리킨다. 본서 권32 잡지1 제사지 중사(中祀)조를 보면, 동악(東岳) 토함산, 남악(南岳) 지리산, 서악(西岳) 계룡산, 중악(中岳) 부악(父岳: 공산(지금의 팔공산))과 함께 북악(北岳)으로서 신라 오악을 구성하는 산으로 나오는데, 그 위치를 오늘날 영주 지역에 해당하는 ‘나이군(奈已郡)’으로 소개해 놓았다. 『삼국유사』 권4 의해5 의상전교에서도 부석사(영주시 순흥면 소재)가 있는 곳을 ‘태백산(太伯山)’이라고 표기하여, 신라 당시에 지금의 소백산을 태백산으로 불렀음을 확인시켜 준다.

 

 

자료 2. 삼국사기 잡지 제사

 

중사로 지내는 5악

 

중사(中祀)註 077로 지내는 5악(五岳)은 동쪽의 토함산(吐含山) 078【대성군에 있다】, 남쪽의 지리산(地理山)註 079【청주(菁州)註 080에 있다】, 서쪽의 계룡산(雞龍山)註 081【웅천주(熊川州)註 082에 있다】, 북쪽의 태백산(太伯山)註 083【나이군(奈已郡)註 084에 있다】, 중앙의 부악(父岳)註 085【또는 공산(公山)註 086이라고도 한다. 압독군(押督郡)註 087에 있다】이다.

 

자료 3. 삼국유사 의해 의상전교

 

이미 본국의 승상(承相) 김흠순(金欽純)註 238 혹은 인문(仁問)註 239이라고도 하는데 그와 양도(良圖)註 240 등이 당나라에 가서 구금되었고, 241 고종(高宗)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흠순 등이 비밀리에 의상에게 일러 앞질러 [신라로] 가게 하였다. 함형(咸亨)註 242 원년 경오(庚午)에 귀국하여 [그] 사정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신인(神印) 대덕(大德)註 243 명랑(明朗)註 244에게 명하여 임시로 밀단법(密壇法)을 설치하고 기도하여 이를 물리치게 하니 이에 국난을 면하였다. 의봉(儀鳳)註 245 원년(676년)에 의상이 태백산(太伯山)에 돌아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 246 창건하고 대승(大乘)을 널리 펴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

 

의상은 이에 열 곳의 절에 교를 전하게 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原州)의 비마라사 (毗摩羅), 가야산(伽倻)의 해인사(海印)註 259, 비슬산(毗瑟)의 옥천사 (玉泉), 금정산(金井)의 범어사(梵魚), 남악(南嶽)의 화엄사(華嚴寺) 등이 그것이다. 또한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註 260을 저술하고 아울러 간략한 주석을 붙여 일승(一乘)註 261의 요긴한 알맹이(樞要)註 262를 모두 포괄하였으니 천 년을 두고 볼 귀감이 되어 저마다 다투어 보배로 여겨 지니고자 하였다. 나머지는 찬술한 것이 없으나, 한 점의 고기로 온 솥의 국물 맛을 알 수 있다. 법계도는 총장(總章)註 263 원년 무진(戊辰)에 이루어졌다. 이 해에 지엄도 입적하였으니 공자(孔子)가 기린을 잡았다註 264는 [구절]에서 붓을 놓은 것과 같다. 세상에 전하기를 의상은 금산보개(金山寶蓋)註 265의 화신이라고 하였다.

 

자료 4. 삼국유사 기이 고조선 왕검조선

 

≪고기(古記)≫註 248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한다.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 249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註 250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註 251이다. 신단수(神壇樹;神檀樹)註 252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삼백육십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자료5. 삼국사기 고구려본지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註 001은 성이 고씨(高氏)註 002이고 이름은 주몽(朱蒙) 註 003이다.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註 004왕 해부루(解夫婁) 註 005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다.註 006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註 007에 이르러 큰 돌을 보더니 마주 대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니 어린아이[小兒]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註 008 모양이었다.‘와(蛙, 개구리)’를 ‘와(蝸, 달팽이)’로 쓰기도 한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하늘이 나에게 후사를 내려주신 것이다.”라고 하며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 註 009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그 재상 아란불(阿蘭弗) 註 010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늘[天]이 저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다. 너희는 그곳을 피하라. 동해 물가에 땅이 있으니 이름을 가섭원(迦葉原)註 011이라 하는데,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五穀)註 012이 자라기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註 013라 하였다. 옛 도읍[舊都]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으니,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 註 014라 칭하며 와서 도읍하였다.註 015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太白山)註 016 남쪽 우발수(優渤水)註 017에서 여자를 만났다.註 018 〔여자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저는 하백(河伯) 註 019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 註 020입니다. 여러 동생註 021들과 함께 나가서 놀고 있었는데, 그때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저를 웅심산(熊心山)註 022 아래 압록강 註 023 인근의 방 안으로 꾀어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謫居]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註 024

 

자료 6. 삼국유사 기이 고구려

 

≪국사(國史)≫ 「고려본기」註 373에 이른다.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 374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처음에 북부여왕註 375 해부루가 동부여로 자리를 피하고 나서 부루가 죽으매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에 왕은 태백산註 376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서 사정을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柳花)註 377인데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던 중 때마침 한 사나이가 있어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자칭하면서 나를 유인하여 웅신산(熊神山)註 378 밑 압록강변의 방 속에서 사통(私通)하고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단군기(檀君記)≫註 379에 이르기를 “[단]군(君)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상관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고 하였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루이다.”라고 하였으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異母兄弟)일 것이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외간남자를 따랐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태백산 각화사(춘양)

 

소백산 비로사(풍기)

 

고치령 성황당(마구령과 우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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