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흔적을 찾아서 39

축성 도본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25년 겸 성균 주부(兼成均注簿) 이보흠(李甫欽)이 상소하기를,“험한 것을 베풀어서 백성을 보존하는 것은 국가의 급선무입니다. 방금 성상의 덕이 먼 데까지 입게 하시니, 이적(夷狄)이 손[賓]으로 복종하고, 국가가 한가하고 안팎에 일이 없사온데, 성을 쌓는 역사를 해마다 거행하지 않는 때가 없으니, 참으로 방비가 있게 하여 근심이 없는 도(道)를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듣자오니 근년에 쌓은 여러 성이 대개는 모두 퇴비(退圮)되었다 하옵는데, 신이 반복하여 이를 생각하여도 이민(吏民)이 용심(用心)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오년에 성을 쌓는 새 도본(圖本)을 반강(頒降)한 이래로 관리가 입법한 뜻을 알지 못하고 법을 지키는 폐단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그 ..

하담(荷潭)

이계집 제3권 :상유록(上游錄) 하담 세상에 전하기로 우륵 선인의 네 번째 휴양지라고 한다 〔荷潭 世傳于勒仙人第四休地〕 예전에 듣기로 우륵 선인이 / 昔聞于勒仙지초 덮개 수레 타고 훌쩍 내려와 / 芝蓋下飄然탄금대에 올라서 배회하고 / 徙倚琴臺上월락탄 앞에서 춤추었지 / 婆娑月瀨前일찍이 네 번째 쉬었던 이곳 / 四休曾此地한 번 떠난 것은 어느 해인가 / 一去是何年운수와 함께 공연히 천고를 이루었으니 / 雲水空千古긴 노래 읊조림에 생각이 아득해지네 / 長歌意渺緜[주-C001] 상유록 : 상유(上游)는 한강의 상류로 여강(驪江)의 별칭이다. 《이계선생삼편전서》에 의하면, 이계는 1769년(영조45) 봄에 영릉 한식제헌관(寧陵寒食祭獻官)이 되어 여주(驪州)에 다녀왔고, 1772년에는 진천(鎭川) 선영(先塋..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은 ?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은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咸昌邑)에 전승되는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진한의 소국으로 추정될 뿐이다. 마한과 백제 또는 고구려, 진한과 신라, 변한과 가야라는 잘못된 인식과삼한과 삼국이란 개념이 후대의 기록에서는 ~~~~~~ 삼국사기 잡지 지리 신라 상주(尙州) 고령군(古寧郡) 고령군(古寧郡)註 165은 본래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註 166으로 신라가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註 167고릉현(古陵縣)이라고도 한다.으로 삼았다.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함녕군(咸寧郡)註 168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셋이다.가선현(嘉善縣)註 169은 본래 가해현(加害縣)註 170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대하여

자찬묘비명 산골어부 묘비명도 쓰고자서전도 쓰고송덕비도 만드는위인들도 있지만 학식도 없고,벼슬도 없고,명예도 없어학생이라고들 쓴다. 재주도 없고신념도 없고따르는 자도 없으니,그저 흙으로 돌아간다. 살아서는 기쁠지라도죽어서는 뭘 알겠는가 ?흔적이 있어도 그뿐인데,왜 스스로 허물을 남길까 ? 2025. 4. 15 다산시문집 제16권 / 묘지명(墓誌銘)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이고, 자는 미용(美庸)이며 또 송보(頌甫)라고도 한다.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니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사방 이웃을 ..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

성호전집 제47권 / 잡저(雜著) 삼한의 정통에 대해 논한 글〔三韓正統論〕 동국(東國)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과 서로 역사의 전개를 같이한다. 단군(檀君)은 요(堯)와 동시에 일어났으며, 무왕(武王)이 천명을 받게 되자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에 봉해졌다. 생각건대, 조선이 단군 이후로 쇠미해져서 더 이상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기자가 차지해서 왕업(王業)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기자의 여덟 조목의 가르침〔八敎〕 가운데 지금 전해지는 것은 세 가지로, 살인을 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여 갚아 주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하며, 도둑질을 한 자는 적몰(籍沒)하여 피해자의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의 약법삼장(約法三章)과 딱 들어맞으며, 그 밖에 이상(彜常..

낙화암(落花巖)과 삼천궁녀(三千宮女)의 기록들

낙화암(落花巖)과 삼천궁녀(三千宮女)의 기록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왜곡이다. 의자왕은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었지만, 국제정세를 잘못 헤아린 실패 때문에 패망의 굴레를 뒤집어 썼다. 낙화암(落花巖)과 삼천궁녀(三千宮女)의 기록들은 후대의 호사가들에 의해 왜곡되었을 뿐이다. 막장보다도 못한 옛이야기는 사실보다는 솔깃한 이야기로 맴돌고 있다. 낙화암(落花巖)과 삼천궁녀(三千宮女)의 기록들은 시인묵객과 조선의 선비들이 만들었지만, 역사학자라는 사람들 까지도 그를 놀이개로 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 자료 1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37년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열다 ( 636년 03월(음) ) 3월에 왕이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沙沘河)註 ..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鑡)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17년(40)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註 001과 불내현(不耐縣)註 002 두 현의 사람들이 연계하여 모의하고서는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註 003의 거수(渠帥)가 군사를 내어 곡하(曲河)註 004의 서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쳐서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었다. 19년(42) 가을 8월에 맥국(貊國)의 거수(渠帥)가 사냥을 하다가 새와 짐승을 잡아 왕에게 바쳤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太祖大王) 〔66년(118)〕 여름 6월에 왕이 예맥(穢貊)註 001과 함께 한의 현도군註 002을 습격하는 한편, 화려성(華麗城)註 003을 공격하였다.註 004 69년(121) 봄에 한의 유주(幽州)註 001..

진한이라 천년의 국원 고을에

점필재집 시집 제16권 / [시(詩)] 경영루에서 차운하다[慶迎樓次韻] 진한이라 천년의 국원 고을에 / 辰韓千載國原區 다시 층루가 있어 동북방 모퉁이를 눌렀네 / 更有層樓壓艮隅 길은 옥구사로 나서 바르게 경계를 지었고 / 路出玉鉤森作界 땅은 금잔지를 나누어 그림을 이루었도다 / 地分金盞簇成圖 웅대한 바람은 또 옷깃을 헤쳐 받을 만하고 / 雄風且可披襟受 취한 글씨는 갓 벗고 읊는 것도 무방하겠네 / 醉墨休妨露頂呼 서북으로 바라보니 어느 곳이 서울이런가 / 西北望京何處是 외로운 돛대 아득히 푸른 들판에 닿았구나 / 孤帆渺渺接平蕪 [주-D001] 옥구사 : 강소성(江蘇省) 동산현(銅山縣) 남쪽 희마대(戱馬臺) 아래에 나 있는 가도(街道)의 이름인데, 당(唐) 나라 때 이울(李蔚)이 이 가도를 냈다고 한다.[주..

탐라(耽羅)와 탐진( 耽津)

고운당필기 제2권 탐라는 섬나라다〔耽羅者島國〕 유득공 三國史記 第 二十六卷(삼국사기 제 26권) 百濟本紀 第 四(백제본기 제 04) 106.文周王(문주왕) 제22대 문주왕 출처: https://hwalove.tistory.com/entry/三國史記-第-二十六卷삼국사기-제-26권106文周王문주왕?category=343688 [빈막(賓幕)] 二年春二月(이년춘이월) : 2년 봄 2월, 修葺大豆山城(수즙대두산성) :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移漢北民戶(이한북민호) : 이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 三月(삼월) : 3월, 遣使朝宋(견사조송) :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려 하였으나 高句麗塞路(고구려새로) : 고구려가 길을 막았으므로 不達而還(불달이환) : 이르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夏四月(하사월) : 여름 ..

충주시 국가지정문화재 목록(국보/보물/사적/명승)

충청북도 충주시 국가지정문화재 목록(국보/보물/사적/명승) 출처 : 문화재청 # 충주를 떠난 문화재(적색표기)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충청북도 충주시 통일신라 1962-12-20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제102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忠州 淨土寺址 弘法國師塔 서울특별시 용산구 고려시대 1962-12-20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제197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 충청북도 충주시 조선시대 1979-05-22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 忠州 高句麗碑 충청북도 충주시 고구려 1981-03-18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보물 제16호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忠州 億政寺址 大智國師塔碑 충청북도 충주시 조선시대..

선림보훈[ 禪林寶訓 ] 충주 청룡사에서 간행한 판본

선림보훈[ 禪林寶訓 ] 종교/불교, 문화유산/기록 유산 문헌/단행본 충청북도 충주시 고려/고려 후기 디지털충주문화대전-『선림보훈』 목차 정의 개설 편찬/발간경위 서지적 상황 형태 구성/내용 의의와 평가 정의 고려 후기 충주 청룡사에서 간행한 판본. 개설 송나라의 묘희(妙喜) 종고(宗杲)와 죽암(竹庵) 사규(士珪)가 선림의 도덕이 타락해 감을 걱정하여, 학덕이 높은 스님들의 좋은 말씀이나 행동들에 대한 것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그 뒤 남송(南宋)의 승려 정선(淨善)이 다른 어록들과 전기를 첨가하여 선(禪)을 수련하는 스님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편찬한 책이다. 편찬/발간경위 책 권말에 있는 고려 말 승려 환암(幻菴)이 쓴 발문(跋文)에 의하면, 1378년(우왕 4) 요암행제공(了庵行齊公)이 『선림보훈』을 얻..

신돈과 이인임의 충주 천도론

신돈과 이인임의 충주 천도론 문득 "천도론"이 떠오른다. 인공위성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손가락으로 날아 다니는 세상에 천도론을 꺼내는 것도 바보같은 발상이다. 고려사에 나타난 신돈과 이인임의 충주 천도론은 왜적의 침입에 따라 내륙으로 숨겠다는 것이다. 몽고침입 때에는 강화도와 산성으로 피신했지만, 왜구침입에는 강화도가 아닌 내륙인 충주를 택한 것이다. 이는 권력의 핵심인 강력한 조직과 군사력도 없으면서 왕권만 유지해보려는 술수일 뿐이다. 거란과 몽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 속에서도 충주민이 저항한 것은 지리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국원성 또는 중원경"이라는 지역민의 자부심이 아니였을까 ? 하는 망상도 해본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도 조선의 도성인 서울과 기득권 세력을 버리지 못하고 개국하여 조선왕조..

굴포와 운하(運河)의 역사

"굴포는 육지와 습지(濕地)가 함께 이어져 물을 건너는 곳은 겨우 20리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마음이 깊지 못하여 큰일을 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어렵게 여깁니다. 그러나 1년간의 조선(漕船)ㆍ상선의 패몰과 사람이 빠져 죽은 일 등을 계산해 보면 그 경비가 거만(巨萬)에 이르러 계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노는 인력을 부역(赴役)하게 한다면, 설사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실로 나라에 손해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중종실록에서) 굴포(堀浦) :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만든 보조 수원 시설. 댈 물량이 적은 곳이나 기본 수원(水源)의 물이 미치지 않는 지대에 일정한 규격의 크기로 웅덩이를 파서 만든다. 조거(漕渠) : 교통 짐을 싣거나 풀거나 할 때 배를 들이대기 위하여 파..

달천교와 달천보의 역사

달천교와 달천보의 역사 남한강의 지류인 충주 달천의 역사를 살펴보면은 단월동 강수욕장 부근에 달천보와 관개수로를 개설하려다가 포기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그리고, 달천교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절요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 등에 나타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저수지인 대제(함지)와 소제(연지)가 나타난다. 달천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몽고와 일본의 침략에 따른 충주전투일 것이다. 달천교와 달천보와 수로는 당시의 전투상황을 추정하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달천보와 그에 따르는 관개수로는 태안반도의 굴포운하와 비슷한 시기에 축조 또는 포기한 것으로 나타난다. 산성이나 저수지 제방과 달리, 수로의 개설은 암반굴착 시 암반이 단단하여 당시의 공법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달천보와 달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