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흔적을 찾아서

탐라(耽羅)와 탐진( 耽津)

산골어부 2022. 4. 7. 18:29

고운당필기 제2권 탐라는 섬나라다〔耽羅者島國〕 유득공

 

 

三國史記 第 二十六卷(삼국사기 제 26권) 百濟本紀 第 四(백제본기 제 04)

 

106.文周王(문주왕)

제22대 문주왕<文周王 475~477 재위기간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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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春二月(이년춘이월) : 2년 봄 2월,

修葺大豆山城(수즙대두산성) :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移漢北民戶(이한북민호) : 이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

 

 

三月(삼월) : 3월,

遣使朝宋(견사조송) :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려 하였으나

高句麗塞路(고구려새로) : 고구려가 길을 막았으므로

不達而還(불달이환) : 이르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夏四月(하사월) : 여름 4월,

耽羅國獻方物(탐라국헌방물) :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王喜(왕희) : 왕이 기뻐하여

拜使者爲恩率(배사자위은솔) :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秋八月(추팔월) : 가을 8월,

拜解仇爲兵官佐平(배해구위병관좌평) :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三國史記 第 二十六卷(삼국사기 제 26권) 百濟本紀 第 四(백제본기 제 04)

 

108.東城王(동성왕)
제24대 동성왕<東城王 479~501 재위기간 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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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年(이십년) : 20년,

設熊津橋(설웅진교) : 웅진교를 가설하였다.

秋七月(추칠월) : 가을 7월,

築沙井城(축사정성) : 사정성을 쌓고

以扞率毗陁鎭之(이한솔비타진지) : 한솔 비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八月(팔월) : 8월,

王以耽羅不修貢賦(왕이탐라불수공부) : 왕이 탐라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親征至武珍州(친정지무진주) : 그를 직접 치려고 무진주에 이르니

耽羅聞之(탐라문지) :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遣使乞罪(견사걸죄) :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乃止(내지) : 중지하였다.

耽羅卽耽牟羅(탐라즉탐모라) : 탐라는 곧 탐모라이다.

 

三國史記 第 二十七卷(삼국사기 제 27권)_111.威德王(위덕왕)
제27대 위덕왕<威德王 554~598 재위기간 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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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六年(삼십육년) : 36년,

隋平陳(수평진) : 수 나라가 진 나라를 평정하였다.

有一戰船漂至耽牟羅國(유일전선표지탐모라국) : 전함 한 척이 탐모라국으로 표류하여 왔다.

其船得還(기선득환) : 그 배가 돌아가게 되어

經于國界(경우국계) : 국경을 통과할 때,

王資送之甚厚(왕자송지심후) : 왕이 물자를 풍성하게 주어 귀국케 하고,

幷遣使奉表賀平陳(병견사봉표하평진) :
사신을 보내 진 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표문을 올렸다.

高祖善之(고조선지) :수 나라 고조가 이를 훌륭히 여겨

下詔曰(하조왈) : 조서를 내려 말했다.

百濟王旣聞平陳(백제왕기문평진) : "백제왕이 진 나라를 평정하였다는 말을 듣자

遠令奉表(원령봉표) : 멀리서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쳤다.

往復至難(왕복지난) : 왕래가 지극히 어려운 지역이니,

若逢風浪(약봉풍랑) : 만약 풍랑이라도 만나면

便致傷損(편치상손) : 사람이 상하고 재물을 잃게 될 것이다.

百濟王心迹淳至(백제왕심적순지) : 백제왕의 마음이 순박하고 지극한 것은

朕已委知(짐이위지) : 내가 이미 깊이 알고 있다.

相去雖遠(상거수원) : 거리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事同言面(사동언면) : 얼굴을 대하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何必數遣使(하필수견사) : 하필 자주 사신을 보내어

來相體悉(래상체실) : 서로 대면할 필요가 있겠는가?

自今已後(자금이후) : 이후로는 해마다

不須年別入貢(불수년별입공) : 조공하지 말 것이며

朕亦不遣使往(짐역불견사왕) : 나도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王宜知之(왕의지지) : 왕은 그리 알 것이다."

 

 

三國史記 第 六卷(삼국사기 제 06권)_030-1.文武王 上(문무왕 상)
제30대 文武王 上(문무왕 상) <661~681 재위기간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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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月6日(이월육일) : 2월 6일,

耽羅國主佐平徒冬音律(탐라국주좌평도동음률) :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이

一作津(일작진) : '률'을 '진'이라고도 한다.

來降(래강) : 항복해왔다.

耽羅自武德以來(탐라자무덕이래) : 탐라국은 무덕 이래로

臣屬百濟(신속백제) : 백제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故以佐平爲官號(고이좌평위관호) : 좌평으로 관직명을 삼았었는데,

至是(지시) : 이 때

降爲屬國(강위속국) :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전라도(全羅道)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동쪽은 보성군(寶城郡) 경계까지 48리, 서쪽은 강진현(康津縣) 경계까지 12리, 북쪽은 나주(羅州) 경계까지 50리, 능성현(綾城縣) 경계까지 40리, 남쪽은 바다까지 1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에 딸린 현이 되었다. 고려 때에 정안(定安)으로 고쳐 영암군(靈巖郡)에 예속시켰고, 인종(仁宗) 때에 공예태후(恭睿太后 인종 왕비)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府)로 승격시켰다. 원종(元宗) 6년에 회주(懷州)로 고쳐 목(牧)으로 올렸으며,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하였다. 후에 왜구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에 옮겼다가 본조 태조 원년에 수령현(遂寧縣)의 중령산(中寧山)에 성을 쌓아 다스리는 곳으로 하였다. 태종 13년에 규례에 따라 도호부로 하였고, 이듬해 성이 좁다하여 도로 수령현의 옛터로 다스리는 곳을 옮겼으며,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였다.

【산천】 수인산(修因山) 부의 북쪽 10리에 있는 진산이다. 위에 돌성이 있다. 자세한 것은 강진(康津)의 고적 아래에 보인다. 중령산(中寧山)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장원봉(狀元峯) 읍성(邑城)의 서쪽에 있다. 억불산(億佛山)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천관산(天冠山) 부의 남쪽 52리에 있다. 예전에는 천풍(天風)이라 불렀고, 혹은 지제(支提)라고도 하였는데, 몹시 높고 험하여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 사자산(獅子山) 부의 동쪽 9리에 있다. 부암(婦巖) 혹은 망부석이라도 일컫는데, 억불산 산허리에 있다. 가지산(迦智山)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용두산(龍頭山)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착두산(錯頭山)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웅점(熊岾) 착두산 동쪽 5리에 있다.
작천(鵲川) 영암군(靈巖郡) 월출산(月出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강진현의 북내상(北內廂) 서남쪽을 지나 부의 남쪽 6리에 이르러 수령천과 합쳐 강진의 구십포(九十浦)로 들어간다. 예양강(汭陽江) 부의 동쪽 성문 밖에 있다. 바다 부의 동남쪽 16리에 있다. 수령천(遂寧川) 예양강(汭陽江)이라고도 하는데, 가지산(迦智山)에서 나와 부의 북쪽 2리를 지나 돌아 동쪽으로 흐르고,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성암(省巖)에 이르러 강진현의 구십포와 합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죽포(竹浦)ㆍ관음방포(觀音方浦)ㆍ돈도두포(豚道頭浦) 모두 옛 장흥에 있다. 천포(泉浦) 부의 동쪽 40리에 있는데, 어량이 있다. 금당도(金堂島) 둘레가 24리이다. 동도(童島) 둘레가 2리이다. 득량도(得良島) 둘레가 10리이다. 이상은 모두 부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횡간도(橫看島)ㆍ벌라도(伐羅島) 둘레가 60리. 산이도(山伊島) 둘레가 90리이다. 소랑도(小狼島) 둘레가 1리이다. 대랑도(大狼島) 둘레가 6리이다. 대화도(大花島) 둘레가 42보이다. 대저도(大猪島) 둘레가 3리이다. 우도(牛島) 둘레가 4리이다. 화도(花島) 둘레가 12리이다. 내덕도(來德島) 둘레가 30리이고, 목장이 있다. 이상은 모두 부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전라도(全羅道) 강진현(康津縣)

 

동쪽은 장흥부 경계까지 24리, 남쪽은 바닷가까지 7리, 서쪽은 해남현 경계까지 25리, 북쪽은 영암군 경계까지 4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리이다.

【건치연혁】 도강현(道康縣)은 본래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양무(陽武)로 고쳤고, 고려 때에 도강현으로 고쳐 영암군에 예속시켰으며,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다. 탐진현(耽津縣)은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탐진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때에는 영암군에 예속하였다가 뒤에 장흥부에 예속시켰다. 본조 태종 17년에 병마도절제사의 영(營)을 도강(道康)의 옛 치소(治所)에 옮겨 두 현을 합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탐진을 치소로 하였다. 세종 11년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다가 성종 6년에 탐진의 옛 치소로 돌아왔다.

 

【산천】 보은산(寶恩山) 현의 동쪽 7리에 있는 진산이다. 월출산(月出山) 현의 북쪽 40리. 영암과의 경계에 있다. 만덕산(萬德山)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 고려의 중 혜일(慧日)의 시에, “앞 봉우리는 돌 창고[石庫] 같고, 뒷 봉우리는 연꽃 같도다.” 하였다.
좌곡산(佐谷山) 현의 서쪽 65리에 있다. 수인산(修因山) 도강에 있다. 현에서의 거리가 동쪽으로 30리. 마점(馬岾)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바다 서남쪽이 모두 바다이다. 송계(松溪) 송계부곡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고현(古縣)을 지나는데, 곧 작천(鵲川)의 상류이다.
구십포(九十浦)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현 서쪽의 물과 합쳐 구십포가 된다. 탐라(耽羅)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에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耽津)이라 하였다. ○ 고려의 박충좌(朴忠佐)가 일찍기 승평군(昇平郡)에서 놀 때 기생 벽옥(碧玉)과 정분이 있었는데, 안렴사(按廉使)가 되자 벽옥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구십포에 이르러 슬퍼하면서 시를 짓기를, “구십포에 밀물이 지려는데, 푸른 솔 붉은 나무는 지난해에 지나간 곳이로다. 지금 부질없이 깃발에 싸여 지나가는데, 누각 위에는 이 행차를 바라보는 사람 없도다.” 하였다.
남원포(南垣浦) 현의 남쪽 57리에 있다. 작천(鵲川) 현의 북쪽 15리, 옛 도강현 땅에 있다. 자세한 것은 장흥부에 적혀 있다. 감물천(甘勿川)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마점(馬岾)에서 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완도(莞島) 현의 남쪽 60리 되는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둘레는 2백 90리이고 자세한 것은 해남현에 있다. 고이도(古爾道) 둘레가 1백 5리이며 목장이 있다. 조약도(助藥島) 둘레가 95리이며 목장이 있다. 신지도(新智島) 둘레가 90리이며 목장이 있다. 가배도(加背島) 둘레 30리. 소흘도(所訖島) 둘레 20리. 다야도(多也島)ㆍ동량도(銅梁島) 모두 둘레가 4리. 부인도(富仁島) 둘레 5리. 은파도(恩波島) 둘레 6리. 벽랑도(碧浪島) 둘레 4리. 죽도(竹島) 둘레 6리. 재마도(載馬島) 둘레 15리. 이상 여러 섬은 모두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신증』 연기산(煙氣山)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이발산(離鉢山)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주작산(朱雀山) 현의 서쪽 35리에 있다. 불용산(佛湧山)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금천(錦川)ㆍ용하지(龍下池)ㆍ합지(蛤池) 모두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전라도(全羅道) 해남현(海南縣)

 

동쪽은 강진현 경계까지 19리, 서쪽은 진도군 경계 벽파진(碧波津)까지 53리, 남쪽은 바다까지 66리, 북쪽은 영암군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침명(浸溟) -투빈(投濱)이라고도 하였다.- 으로 고치어 양무군(陽武郡)에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영암군에 예속시켰다. 본조 태종 9년에 진도현에 합쳐 해진현(海珍縣)으로 되었으며, 12년에 고을의 치소(治所)를 영암에 딸린 현 옥산(玉山) 땅에 옮기었다가 세종 19년에 다시 가르고 현감으로 하였다.

 

【산천】 금강산(金剛山)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이다. 산에 옛 성이 있다. 달마산(達摩山)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관자산(館子山)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가학산(賀鶴山)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두륜산(頭輪山)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이 산에 오르면 제주의 한라산(漢拏山)과 서로 바라보인다. 고다산(高多山)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관두산(館頭山) 현의 남쪽 41리에 있다. 제주를 왕래하는 배가 이 산 밑에 머무른다. 우사현(亏沙峴)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바다 서쪽ㆍ남쪽이 다 바다이다. 벽파진(碧波津) 현의 남쪽 30리, 진도군과의 경계에 있다. 대진(大津) 현의 서쪽 1백 5리에 있다. 주량(周梁) 현의 서쪽 75리에 있다. 별진포(別珍浦)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삼촌포(三寸浦) 현의 남쪽 20리, 진도군과의 경계에 있다. 우음토포(亏音吐浦)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고어란포(古於蘭浦)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제주에 내왕하는 배가 여기에 머무른다. 입암포(笠巖浦)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이곳 역시 제주 배가 머무르는 곳이다. 종천포(淙川浦) 현의 서남쪽 5리에 있다. 어성포(魚成浦)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죽성포(竹城浦)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포 위에 산성의 옛터가 있는데, 전하는 말에 전세(田稅)를 거두어들이던 곳이라 한다. 부소도(扶蘇島)ㆍ마뢰도(磨賴島) 모두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죽도(竹島) 황원현(黃原縣)에 있다. 완도(莞島)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둘레가 2백 90리. 곧 신라 때의 청해진(淸海鎭)인데, 그 서남쪽은 이 현에 속하고, 동북쪽은 강진현에 속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동쪽은 정의현(旌義縣) 경계까지 80리이고, 서쪽은 대정현(大靜縣) 경계까지 81리이며, 남쪽으로는 바다까지 1백 20리이고, 북쪽으로 바다까지 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탐라국(耽羅國)인데 혹은 탁라(乇羅)라고도 한다. 전라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넓이가 4백여 리이다. 처음에 양을나(良乙那)ㆍ고을나(高乙那)ㆍ부을나(夫乙那)라는 세 사람이 있어 그 땅에 나누어 살고, 그 사는 곳을 도(都)라고 이름하였다. 신라 때에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가 그 아우 두 사람과 함께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에 조회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후에게 성주(星主)라 칭호하고, 그 둘째 아우는 왕자(王子)라 하고, 끝 아우는 도내(都內)라 하여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내려주었다. 《고려사(高麗史)》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처음에는 인물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다. 지금 진산(鎭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는 구멍이 있으니, 이곳이 세 신인이 나온 땅이다. 맏이는 양을나이고 다음은 고을나이고 세 번째는 부을나인데, 세 사람이 궁벽한 황무지에 돌아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으로 옷을 해입고 고기를 먹고 살았다. 하루는 보니, 붉은 진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동해 가에 떠 이르렀다. 가까이 가서 열어보니, 안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주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따라왔다. 석함을 여니 푸른옷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ㆍ송아지와 오곡의 종자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日本國) 사신인데, 우리 왕이 이 세 딸을 낳고 이르기를, 「서해 가운데 있는 산에, 신의 아들 세 사람이 내려와서 나라를 열려고 하는데 배필이 없다.」 하고, 이에 신에게 명하여, 세 딸을 모시고 왔으니, 배필을 삼아 큰 업을 이루소서.’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대로 나누어 장가들었다. 샘물 맛이 좋고 땅이 비옥한 곳에 나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정하여,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고,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여,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마다 부유하고 번성해졌다. 15대 손 고후(高厚)ㆍ고청(高淸) 형제 세 사람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닿았으니, 이때는 신라의 융성한 시대였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방에 보였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조회할 징조이다.’ 하였다. 고후의 무리가 이르자 왕이 가상히 여기어 고후에게 성주(星主)란 칭호를 주었으니 객성이 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왕은 고청을 자기의 가랑이 아래로 나가게 하고 사랑하기를 자기 자식같이 하여 왕자(王子)라고 일컫고 그 막내를 도내(都內)라고 일컬었다. 고을 이름은 탐라(耽羅)라 하였으니, 처음 올 적에 탐진에 닿아서 신라에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각각 보개(寶蓋)와 옷을 주어 보냈다. 이때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신라를 공경히 섬기니, 드디어 고(高)를 성주로 삼고 양(良)을 왕자로 삼고 부(夫)를 도상(都上)으로 삼았다. 뒤에 양(良)을 고쳐 양(梁)으로 하였다.” 하였다. 그 뒤에 백제에 복종하여 섬겼는데, 동성왕(東城王) 21년에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친히 정벌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자 그 성주가 듣고 사자를 보내어 죄를 용서하기를 비니, 이에 그만두었다. 백제가 멸망함에 미쳐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탐라국주(耽羅國主)의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20년에 태자 말로(末老)를 보내어 조회하니, 성주 왕자의 작위를 주었다. 숙종(肅宗) 10년에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만들었고, 의종(毅宗) 때에 강등하여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11년에 반적(叛賊)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그 땅에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4년이 지나 왕이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쳐서 평정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년에 원(元)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만들었는데, 20년에 왕이 원 나라에 조회하고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 나라 승상 완택(完澤) 등이 아뢰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다시 우리에게 예속시켰다. 이듬해에 제주(濟州)로 고치고 비로소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다. 26년에 원 나라 황태후(皇太后)가 또 그 땅에 말을 방목하다가 31년에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충숙왕(忠肅王) 5년에 좀도둑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꾸미니, 그 지방 사람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일으켜 모두 베고 원 나라에 보고하여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1년에 원 나라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니, 원 나라에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를 탐라만호(耽羅萬戶)로 삼았다. 아단불화가 본국의 천한 노예 김장로(金長老)와 함께 주(州)에 이르러 만호 박도손(朴都孫)을 매질하고 바다에 던져 죽였다. 16년에 원 나라가 이 주(州)를 다시 우리나라에 예속시켰다. 이때에 원 나라 목자(牧子)들이 사나워서 여러 번 국가에서 보낸 목사와 만호를 죽이고 배반하였다. 김유(金庾)가 토벌하게 되니 목자들이 원 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萬戶府)를 두기를 청하였다. 왕이 아뢰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고 목자들이 기른 말을 가려 바치기를 전례와 같이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그대로 좇았다. 18년에 원 나라 목자 하치[哈赤]가 제 마음대로 날뛰어 관리를 살해하니, 6년 뒤에 왕이 도통사 최영(崔瑩)을 보내어 하치를 쳐서 멸하고 다시 관리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태종(太宗) 2년에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의 무리가 성주 왕자의 호가 참람하다 하여 고치기를 청하니,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삼고 왕자를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삼았다. 세조(世祖) 12년에 안무사를 고쳐 병마수군절제사를 삼았다가, 뒤에 목사로 고치고 진(鎭)을 두었다.

 

고운당(유득공)필기 제2권

탐라는 섬나라다〔耽羅者島國〕

 

《북사》에 “백제 남쪽으로 바닷길을 가면 탐모라국(耽牟羅國)이 있는데, 노루와 사슴이 많이 나고 백제의 부용국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이 위(魏)나라 선무제에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옥은 섭라(涉羅)에서 생산됩니다.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습니다. 두 물품을 왕부(王府)에 올릴 수 없는 것은 진실로 두 적의 소행입니다.’라 하였다.” 하였다.

《당서》에서 “용삭 초에 담라(儋羅)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해 왔다. 그 나라는 신라의 무주(武州) 남쪽 섬에 있다. 풍속은 질박하고 촌스럽다. 큰 돼지가죽을 옷으로 입으며 여름에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집에, 겨울에는 토굴집에 산다. 처음에 백제에 부속되었다가 후에 신라에 부속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것은 모두 탐라(耽羅)를 가리킨다. 우리나라 방언에 해도(海島)를 일러 ‘섬(剡)’이라 하고 국가를 ‘나라(羅羅)’라 한다. 탐(耽), 섭(涉), 담(儋) 세 글자는 그 소리가 모두 ‘섬’과 비슷하니, 탐라는 아마도 섬나라를 이른 말일 것이다. 고기(古記)에 “처음 탐진에 배를 대고 신라에 조공했기 때문에 탐라라고 했다.”라고 한 것은 견강부회한 말이다. 또 《삼국지》에 “주호(州胡)는 마한(馬韓)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왜소하고 언어는 중국과 같지 않으며 모두 머리를 삭발한 것이 선비족(鮮卑族)과 같다. 단지 가죽을 두르고 소와 돼지를 잘 길러서 배를 타고 왕래하며 마한에 내다 판다.” 하니, 이것도 탐라를 가리킨 듯하다.

[주-D001] 고구려 …… 하였다 : 위수의 《위서》 〈고구려열전〉에 정시 연간(504~508) 세종이 고구려 사신 예실불을 동당(東堂)에서 접견했다는 기록 중에 실려 있다.[주-D002] 용삭 …… 부속되었다 : 용삭(龍朔)은 당나라 고종 12~14년(661~663)의 연호이다. 《신당서》 〈동이열전〉에 보인다.[주-D003] 탐진(耽津) :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군이다.

 

해동역사 제16권 /

세기(世紀) 16 제소국(諸小國)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신라와 고려 시대 때 소소한 속국(屬國)들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의 서책에 나오는 나라들만을 취하여 이들을 합하여 제국기(諸國記)로 삼아 끝에다가 붙인다.

 

탐라(耽羅)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탐라는 바다 섬 나라이다. 《후위서(後魏書)》에서는 섭라(涉羅)라고 칭하였고, 《수서(隋書)》에서는 담모라(?牟羅)라 칭하였고, 《당서(唐書)》에서는 담라(儋羅)라 칭하고 또 탐부라(耽浮羅)ㆍ탁라(乇羅)라 칭하였는데, 이는 모두 한나라이다. 우리나라의 방언에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는데, 탐(耽)ㆍ섭(涉)ㆍ담(儋) 세 음은 모두 섬(剡)과 음이 비슷하니, 대개 섬 나라를 이른 것이다. 고기(古記)에 칭한 바 ‘처음에 탐진(耽津)에 정박하여 신라에 조회하였으므로 탐라(耽羅)라고 한다.’는 것은 견강부회한 설이다. 백제 문주왕(文周王) 때부터 백제를 섬겼고, 백제가 망하자 다시 신라를 섬겼으며, 고려 숙종(肅宗) 10년에 이르러 강등시켜 군(郡)으로 삼았는데, 지금의 제주(濟州)이다.

○ 탐라는 임읍(林邑)의 남쪽 변경 바다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책부원귀》 ○ 《한창려집(韓昌黎集)》에는,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ㆍ유구(流求) 등의 나라는 동남쪽 천지(天池)에 있다.” 하였다.

○ 탐라는 또한 탐모라(耽牟羅)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백제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속에서 솟아나왔다. 맏이를 양을나(良乙那)라 하고, 다음을 고을나(高乙那)라 하고, 그다음을 부을나(夫乙那)라 하였다. 어느 날 세 사람이 바닷가에서 사냥을 하다가 석함(石函)을 하나 얻어 열어보니, 세 여인과 개와 소 등 가축과 오곡(五穀)의 종자가 있었다. 이에 드디어 세 여인을 나누어 아내로 삼고 각자 샘물이 달고 토질이 비옥한 곳을 찾아 살았다.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1도(都)라 하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2도,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3도라 하고는 비로소 오곡을 씨뿌렸으며,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러 날로 부유해졌다. 송 원휘(元徽 후폐제(後廢帝)의 연호) 4년(476)에 비로소 백제국에 방물을 보내었다. 《일본기(日本紀)》 ○ 이것은 바로 동사(東史)의 본문이다.

○ 후위(後魏) 정시(正始 선무제(宣武帝)의 연호) 연간에 세조(世祖)가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인견하였다. 예실불이 아뢰기를,

“황금은 부여(夫餘)에서 나고 가(珂)는 섭라(涉羅)에서 산출되는데,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나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었습니다.”

하였다. 《후위서》

○ 백제에서 남쪽 바다로 3개월을 가면 탐모라(耽牟羅)라는 나라가 있는데, 남쪽에서 북쪽까지의 거리가 1천여 리이고,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수백 리이며, 토산물로는 노루와 사슴이 있다.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이다. 《수서》 ○ 《수서》에는 또, “양제(煬帝) 대업(大業) 4년(608)에 문림랑(文林郞) 배세청(裴世淸)을 파견하여 왜국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백제국을 건너 죽도(竹島)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탐라국이 큰 바다 가운데 있었다.” 하였다.

○ 당 고종 용삭(龍朔) 초에 담라(儋羅)란 나라가 있어 국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그 나라는 신라 무주(武州)의 남쪽 섬에 있는데, 풍속이 소박하고 누추하며, 개 가죽과 돼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여름에는 초실(草室)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窟室)에 산다. 땅에서는 오곡이 나는데, 소를 써서 경작할 줄 모르며, 철치(鐵齒)로 땅을 판다. 처음에는 백제에 부용하였다. 인덕(麟德 당나라 고종의 연호) 연간에 추장(酋長)이 와서 조회하면서 황제를 따라서 태산(太山)에 갔다. 뒤에 신라의 부용국이 되었다. 《신당서》

○ 가우(嘉祐 송나라 인종(仁宗)의 연호) 연간에 소주(蘇州) 곤산현(崑山縣) 상해(上海)에 어떤 배 한 척이 표류하여 와서 해안에 닿았다. 배 안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의관은 중국 사람과 같았으며,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험 삼아 글자를 써 보게 하였으나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서찰 하나를 내보였는데, 바로 당나라 천우(天祐 애제(哀帝)의 연호) 살펴보건대, 천우(天祐)가 《사문유취(事文類聚)》에는 천수(天授)로 되어 있는데, 이는 천우를 잘못 쓴 것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이를 인하여 고려 태조의 연호라고 하였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연간에 둔라도(屯羅島)의 살펴보건대, 둔라도는 탁라도(乇羅島)가 잘못된 것이다. 수령(首領)에게 배융부위(陪戎副尉)를 제수하였음을 고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글이 있었는데, 바로 고려에 올리는 표문(表文)으로, 역시 둔라도라고 칭하였으며, 모두 한자(漢字)를 써서 기록하였다. 이는 대개 동이로서 고려에 신하로 소속된 자이다. 《몽계필담(夢溪筆談)》 ○ 교빙지(交聘志) 표류조(漂流條)에 상세히 나온다.

○ 탐라는 고려의 여국(與國)이다. 세조(世祖)가 이미 고려를 신하로 복속시키고는 탐라가 남송(南宋)ㆍ일본(日本)과 통하는 요충지라고 여겨 주의를 기울였다. 《원사》 ○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에는 탐라가 이미 고려에 병합되었으므로, 《원사》에 실려 있는 탐라에 대한 사실은 모두 고려기(高麗紀)에 편찬되어 있다.

○ 마한의 서쪽 바다의 섬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키가 작고 머리를 깎았으며, 가죽 옷을 입는데 상의(上衣)만 있고 하의(下衣)는 없다.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물화(物貨)를 한(韓)의 국중(國中)에 사고 판다. 《후한서》 ○ 살펴보건대, 주호국은 탐라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가 없기에 끝에다가 기록해 둔다.

 

탐진강( 耽津江)

예양강(汭陽江)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에서 발원하여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에서 장흥 다목적 댐으로 흘러드는 지방 하천.

[명칭 유래]

탐진천(耽津川)은 강진군 대구면 일대에 있었던 탐진현(耽津縣)에서 유래되었다. 탐진현은 757년 신라 경덕왕 때 동음현(冬音縣)을 개칭하면서 처음 사용한 지명이다. ‘동음’은 도무, 두무로 원산(圓山)을 의미한다. 제주의 고지명인 탐라(耽羅)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고, 한라산이 화석지명으로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구십포(九十浦)는 [강진]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현 서쪽의 물과 합쳐 구십포가 되며, 탐라의 사신이 신라에 조공할 때 배가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 환경]

탐진강은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산 92번지 궁성산(弓城山)[484m] 북서쪽 범바우골 성터샘[해발 고도 400m]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향하다 기동 저수지로 흘러들어 간다. 그 후 활성골을 따라 남쪽 노린재들에서 서쪽 자작골과 영사에서 내린 비사리골 물을 더해 동남쪽으로 흘러간 탐진천은 봉황동 앞에서 남서쪽 칠성동과 네거리촌의 비사리골 물을 더해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 갓골에서 세류촌을 타고 내린 물과 남쪽 장군애미골 물을 합류한다. 용바우를 지나 동쪽으로 흘러 옛 금정 동 초등학교가 있던 청용리 동산에 이르러 쌍효리에서 나온 쌍효천이 합하고, 북쪽 깐치골 물도 합류하여 남쪽으로 굽이돌아 성자교로 흐른다. 성자동 앞에서는 남서쪽 기암과 길동골 물인 기암천[성자동골천]을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간 탐진천은 남쪽 만대 마을에서 나온 앞골 물도 합류하여 북쪽으로 향하다 보를 감돌아 동남쪽으로 흘러간다. 북쪽 분토골 물과 괸돌골 물을 합류하면서 감입 곡류천(嵌入曲流川)[신생대 3기 말 융기 작용이 이루어지기 전의 자유 곡류천이 융기한 후 하방 침식으로 하천 폭이 좁고, 하천 주변은 협곡을 이루며 흐르고 있는 하천]을 이루고, 중산 마을에 이른다. 중산들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향한 탐진천은 서쪽 바가시골 물을 합류하면서 영암군 경계를 넘어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우손골들로 흘러간다.

탐진천 샛강인 쌍효천(雙孝川)[3.4㎞]은 국사봉[615m] 북쪽 석동골과 홍골에서 발원하여 석교 마을 앞에서 영암군 서쪽 모개나무골 물을 합류하여 북동쪽으로 흐른다. 북쪽 모효에서 나온 모골 물도 합류하여 노린재들을 타고 북동쪽으로 내려 동산 남쪽에서 탐진천으로 유입된다. 기암천(幾岩川)[3.5㎞]은 국사봉 북동쪽 자락인 기암골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기암 마을에 이르러 남쪽 명당골 물과 남동쪽 길동골 물을 합류하여 월암 서쪽을 거쳐 성자동 남서쪽에서 탐진천에 합류한다.

[현황]

탐진강 수계의 본류로 영암군 금정면에서 장흥군 부산면 장흥 다목적 댐까지 구간은 지방 하천이고, 그 하류 구간은 국가 하천이다. 금정면 세류리 638번지에서 장흥 다목적 댐까지의 유로 연장은 24.4㎞, 하천 연장은 20.20㎞이며, 유역 면적은 96㎢이다. 하류 구간인 강진군 하구점[용문리 삼각점[249.7m]부터 북67도 서로 그은 직선]부터 강진군 군동면까지는 유로 연장 55.07㎞, 하천 연장 34.5㎞2, 유역 면적 508.53㎢이다. 영암군 수역은 궁성산 북쪽 해발 고도 400m 지점부터 금정면 청용리와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경계 지점까지로 유로 길이는 약 9.6㎞다.

탐진천 주변에 있는 궁성산과 청용리 마봉(馬峰)[406m]에 성터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궁성산성 터에는 27홀 규모의 아크로 컨트리클럽이 들어서 있으며, 궁성산 법흥사 뒤쪽 농바위에 쌀이 나온다는 천석굴 전설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 목포 대학교 박물관, 『문화 유적 분포 지도』-전남 영암군(전라남도·영암군, 1999)
  • 김경수, 『장흥 다목적 댐 수몰 지역의 역사와 문화』-지리 환경(목포 대학교 박물관, 2001)
  • 『영암의 땅 이름』 (영암 문화원, 2006)
  • 「영암군 새 주소 생활 안내도」 (영암군,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