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에서/기억 속으로 20

이종욱 교수의 "역사충돌"을 읽으며

이종욱 교수의 "역사충돌"을 읽으며왜 역사충돌이라고 했을까 ? 충돌보다는 왜곡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 텐데, 역사전쟁도 아닌 역사충돌이라는 패러다임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역사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란 지나간 기록에 불과하지만, 사실보다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기술되고, 짜집기된다. 역사학계에도 카르텔이 존재한다. 국가나 특정조직의 요구에 따라 학자뿐만 아니라, 관리와 관련단체 까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로부터 받은 댓가만큼의 역사를 편집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는 "역사충돌"은 한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 어쩌면 역사는 지나간 기록이 아니라, 산 자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이다.역사충돌역사전쟁역사왜곡역사말살무엇이 다를까 ? 역사바로세우기란또 무엇일까 ?생각을 바꾸..

삼휴정(三休亭)과 사휴정(四休亭)

삼휴정(三休亭)과 사휴정(四休亭) 사휴(四休) 송(宋) 나라 때 손방(孫昉)은 별호(別號)가 사휴거사(四休居士)였는데, 황정견(黃庭堅)의 사휴거사시서(四休居士詩序)에 의하면 태의(太醫) 손군 방(孫君昉)이 …… 사휴거사라 자호(自號)하였으므로, 산곡(山谷)이 그 설(說)을 물었더니, 사휴가 말하기를, 거친 차와 싱거운 밥에 배부르면 곧 쉬고, 해진 옷 기워 입어 추위 가려서 다스우면 곧 쉬고, 평평하고 온온하게 지낼 만하면 곧 쉬고, 안 탐하고 시기 않고 늙으면 곧 쉬는 것이다. 麤茶淡飯飽卽休 補破遮寒暖卽休 三平二滿過卽休 不貪不妬老卽休 휴휴정기(休休亭記) 당나라 때 시인 사공도(司空圖)가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중조산(中條山) 왕관곡(王官谷)에 삼휴정(三休亭) 또는 휴휴정(休休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

감자를 캐며

거름도 안주고, 묵은 감자씨로 보름이나 늦게 심은 감자가 대풍이네요. 하늘이 도와준 덕분에 게으른 사람도 먹고 사는가 봅니다. 삼겹살 구워먹는 테라스와 테이블은 커피 몇잔 먹어보고 ~~~~~ 93세에도 남동생(외삼촌) 준다고 챙기는 ~~~~ 펭구를 닮은 못난이 감자. 감자밭에 덤으로 남은 강낭콩 당근씨를 뿌리는 것으로 감자캐기 끝.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충주의 인물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충주의 인물들 삼국사기에는 우륵, 강수, 김생이 등장한다. 모두 신라의 국원성과 국원소경의 인물들이다. 국가적인 측면에서는 우륵, 강수, 김생보다는 신라의 진흥왕과 가야 왕족인 김무력은 국원성과 국원소경을 만들은 인물일 것이다. 신라의 진흥왕과 김무력은 지방보다는 국가에서도 중요한 인물이기에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편에는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진흥왕과 김무력은 국원소경을 창출해낸 인물들이다 .충주목의 인물에서 우륵과 김생과 권근은 잠시 머물다렸다는 의미고, 강수와 유긍달은 충주가 고향이라는 의미고, 춘부와 김윤후는 충주의 관리로써 그 공적이 크다는 것이다. 조선 후대의 기록에서도 신립과 임경업은 충주의 인물로 기록되질 않는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충주의 세력가인 유긍..

지게 예찬론

지게와 배낭 문득 "지게 예찬론"이 떠오른다. 아마도 중학교 때 과학(물리) 담당선생님께서 수업 도중에 여담으로 발명품 이야기를 하다가 "지게"가 우리민족 최고의 발명품이라며 지게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개의 지게다리와 지게작대기의 하중분산과 무게중심에 관한 설명과 더불어 너무 완벽한 지게 때문에 도로와 수레가 발달하지 못해서 외적의 침입을 어렵게 하여 국난을 극복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물물교역인 상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조선말기까지도 등짐을 진 보부상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과 경지정리사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농가마다 한.두개씩 있는 것이 지게다. 근대화 과정에서도 시장통의 지게꾼, 골목길의 연탄장수와 물장수, 재활용 휴지나 옷을 줍는 넝마지기 소쿠리 등이 등장했지만..

갑신년(1944) 장마

갑신년(1944) 장마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지만, 어릴 적 부터 들어 온 이야기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남한강 홍수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 보니, 갑신년(1944) 장마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다만, 안성.이천.여주등 중부지역에서 피해사례가 나타난다. 어릴 적 부터 들어온 "갑신년 장마"는 한강 유역 일대의 홍수라기보다는 경기 남부와 충북 북부지역인 안성,장호원 등에 걸친 국지성 호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부의 고향인 노은에서는 72년과 90년 홍수보다도 갑신년 장마를 더 큰 장마로 말하고 있다. 어부의 고향인 노은면은 그리 험한 산골은 아니라서 홍수에 따른 재해라는 것을 모르는 곳이다. 큰비가 온다고 해도 논밭두렁이나 한포천의 제방이 조금 유실되는 정도이며, 비가 그치면 몇 시간 내에 ..

충주팔경 - 모래내에 내려앉은 기러기

충주팔경 중 하나인 "모래내에 내려앉은 기러기"를 찾기 위해 달천강을 따라서 돌아 다녔다. 충주에서는 모시래뜰이 가장 넓은 곳이다. 평야라고 하기에는 작은 뜰이지만, 달천강 유역에서는 가장 넓은 뜰이다. 탄금대 합수머리는 크게는 달천강이 남한강에 합류하지만, 달천강의 마지막 지류인 주덕의 요도천과 충주시내를 가로지르는 충주천이 합류되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강 유역에 홍수가 발생하면 탄금대 일대는 물바다가 되었다. 남한강 본류의 거대한 물길에 달천의 물길은 흐르지 못하고 요도천과 충주천을 따라 역류하여 탄금대 샛강과 달천 샛강 등 달천강 하류의 저지대는 모두 물에 잠겨 버렸다. 72년도 대홍수 때 쓸려갔던 가옥들과 농경지. 달천강과 남한강 주변에는 그 당시 수해복구로 지은 집들이 지금도 폐허가 되거나 초라..

우리재(우성)

우리재는 외가집 동네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외할머니가 살아계셨다.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머리가 하얗게 ~~~ 어릴 적 부터 우리재는 왜 우리재일까 ? 니네재도 아니고 우리재~~~~~ 이제는 우리재란 동네가 중부내륙고속도로와 동서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하여 또 다시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성이 되어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또한 우리재는 북사면에 위치하여 겨울이면 항상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우리재 토끼는 북쪽을 바라보며 눈이 다 녹았다고 먹이 구하러 가지만, 닥밭골 토끼는 남쪽을 바라보며 눈 때문에 나가지 못하고 굶는다." 하셨다. 그래서인지 우리재 사람들은 부지런히 사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