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2025/04/18 4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대하여

자찬묘비명 산골어부 묘비명도 쓰고자서전도 쓰고송덕비도 만드는위인들도 있지만 학식도 없고,벼슬도 없고,명예도 없어학생이라고들 쓴다. 재주도 없고신념도 없고따르는 자도 없으니,그저 흙으로 돌아간다. 살아서는 기쁠지라도죽어서는 뭘 알겠는가 ?흔적이 있어도 그뿐인데,왜 스스로 허물을 남길까 ? 2025. 4. 15 다산시문집 제16권 / 묘지명(墓誌銘)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이고, 자는 미용(美庸)이며 또 송보(頌甫)라고도 한다.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니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사방 이웃을 ..

포천 반월성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 629년 08월 ) 51년(629) 8월에 왕이 대장군(大將軍) 용춘(龍春)註 001과 서현(舒玄),註 002 부장군(副將軍)註 003 유신(庾信)註 004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註 005을 침공하였다.註 006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陣)을 펼쳤는데, 군세(軍勢)가 매우 왕성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별로 싸울 마음이 사라졌다. 유신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갖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끌어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라고註 007 하였으니, 내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말에 올라타 검을 빼들고 적진(敵陣)을 향하여 곧바로 나아갔다. 적진에 세 번 들어갔다가 세 번 나왔는데..

회암사지에서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 태종2년 회암사로 가서 태상왕을 문안하다임금이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태상왕을 조알(朝謁)하였다. 처음에 태상왕이 왕사(王師) 자초(自超)의 계(戒)를 받아 육선(肉膳)을 들지 아니하여, 날로 파리하고 야위어졌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환관(宦官)을 시켜 자초에게 말하기를,“내가 태상전(太上殿)에 나가서 헌수(獻壽)하고자 하는데, 만일 태상왕께서 육선(肉膳)을 자시지 않는다면, 내가 장차 왕사(王師)에게 허물을 돌리겠다.”하였다. 자초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회암사를 사양하고 작은 암자에 나가 있었다. 임금이 이른다는 말을 듣고 회암사 주지(住持) 조선(祖禪)과 더불어 태상왕께 고하기를,“상(上)께서 육선(肉膳)을 드시지 아니하여, 안색이 파리하고 야위어지십니다. 우리들이 오로지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