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에서/옛날 지명들 30

검단과 흑평에 대하여

보름달(자료사진) 검단과 흑평에 대하여 검단(黔丹)이란 지명도 전국에 수없이 많이 산재한다. 대표적인 곳이 남한산성이 있는 하남시의 검단산이다. 그리고, 김포의 검단의 유래에선 검, 감, 금, 김 등이 혼재하여 나타난다, 충주의 지명유래에서도 충주시 대소원면 검단리(檢丹里)가 고지도나 고문서에서는 검단(黔丹)으로 표기되어 있다. 검단리에 인접한 완오리에는 흑평(黑平)이란 지명이 있는데, 검단리와 완오리는 고려시대에 대몽항전의 승리로 충주의 국원경과 더불어 익안현으로 승격되었던 곳이다. 흑평이란 지명은 진천의 옛지명인 금물노와 흑양처럼 큰뜰 또는 검은뜰이라는 뜻이고, 대소원면의 검단리(黔丹里)에서 검(黔)자는 주로 지명에 쓰이는 것으로 검(黔)으로도 읽고, 금(黔)으로도 읽는다. 검단(黔丹)을 해석함에 있..

다인(多仁)과 달천(達川)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다인(多仁)과 달천(達川)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고려사지리지 충주목에는 익안현 다인철소가 나타난다. 다인(多仁)이라는 지명은 무슨 뜻이며, 다인철소는 어디에 있었을까 ? 경북 의성군 다인면은 예천군 다인현(多仁縣)에 속해 있던 곳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인현(多仁縣)을 달이현(達已顯) 또는 다이(多已)로 기록하고 있다. 고지명에서 다인(多仁)은 기름진 땅(地)으로 해석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동명성왕조에는 "다물도(多勿都)"가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다물(多勿)은 고구려의 말로 옛땅의 회복이다."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영토확장을 다물(多勿)전쟁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다인현(多仁縣)에서 달(達)이 다인(多仁)으로 가차된 지명이다. 경북 의성군 다인면에서 다인(多仁)은 넑은 벌(..

장미산성과 잣고개에 대하여

충주시 가금면 장미산에는 장미산성과 잣고개가 있다. 장미산성 서측에 있는 잣고개는 중원고구려비가 있는 입석마을에서 묘곡을 지나 봉황리 마애불이 있는 내동(안골)을 잇는 고개로 1872년 고지도에는 백자치(栢子峙)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지지자료에선 백현(栢峴)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잣고개는 묘곡에서 내동으로 이어지는 지방도에 있지만, 본래 잣고개의 옛길은 묘곡에서 가흥리 원동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며, 잣고개 북측에는 고려 때의 절터인 원동사지와 원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들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원동사지에서 발견된 "봉황"이라는 명문와편으로 인하여 원동사지는 봉황골의 봉황사가 아니였을까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옛 잣고개 마루에는 고갯길을 파낸 흔적과 돌무더기가 잔존하여 있고, 장미산성으로 이어지..

충주시 노은면(老隱面)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노은면(老隱面)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 지명유래를 고찰함에 있어서 지방행정단위를 구별하는 군현제와 면리제에 대한 기본개념과 연혁들도 알아야 한다. 단순한 마을의 지명유래도 역사적 사건이나 지방제도의 변천, 그리고 한자나 한글의 음운체계의 변화 등에 따라 달리 표기되기도 하고, 방언이나 잘못된 기록으로 인하여 본래의 고유지명이 전혀 다른 지명으로 변하여 고착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고유의 지명보다는 한자로 표기된 지명을 오늘날 우리가 상용하는 한자와 한글로 직역하거나 지역의 방언이나 발음 상의 차이를 언급하여 고유의 지명을 왜곡하기도 하며, 타 지역의 지명유래를 와전시켜 전래된 것처럼 기술하기도 한다.  노은면의 지명유래에서 국망산이란 옛지명이 금방산이니, 국향산이니 하는 논쟁이 있었으..

[스크랩] 석종사 부근에 있던 절터는 죽정사지(竹精寺址)인가. 죽장사지(竹杖寺址)인가

충주목 죽장사(竹杖寺)와 노인성(老人星)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경인 24년(1170), 송 건도 6년ㆍ금 대정 10년 ○ 봄 정월 초하루 임자에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하례를 받고, 친히 신하들의 하표(賀表)를 대신 지었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공경히 생각건대, 폐..

삼국사기에 나타난 능안(能晏)과 욕돌역(褥突驛)

우리나라의 역참제도(驛站制度)와 한국 무용사에 등장하는 중원경 욕돌역(褥突驛)과 무동인 능안(能晏)은 중원역사에서도 중요한 기록유산 중 하나이다. 최근에 중원경 욕돌역(褥突驛)을 충주시 신니면 옹원으로 추정하는 글들이 나타나지만, 욕돌역(褥突驛)에 대한 자료는 삼국사기와 ..

낭자곡성(娘子谷城)은 충주의 옛지명이었을까 ?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낭자곡성(娘子谷城)과 낭성(娘城)이란 지명에 대한 논란은 청주(淸州)와 충주(忠州)로 나누어 해석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낭성(娘城)은 신라의 서원경이었던 청주로 기술되어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진흥왕과 우륵에 관하여는 신..

고구려 옛지명과 국원성의 영역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상고사는 무엇일까 ? 아마도 고조선 부터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국가로 정립된 원삼국시대일 것이다. 하지만, 원삼국시대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와 그에 대한 역사가 정립되질 않아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역사교과서에도 제대로 기술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한국사를 배우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사들까지도 고대역사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린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로 정립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역사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에 등장히는 군소국들 중에서 고대국가로 성장한 삼국을 제외하고는 그 유적지나 유물을 있어도 문헌이 없다는 이유로 묵시해 버린다. 물론 고대사 연구가 쉽지는 않겠지만, 국가차원에서 고대사를 정립할 필요성이 제..

익안현(翼安縣)의 다인철소(多仁鐵所)

고려사 지리지 - 충주목(忠州牧)에서 발췌 [고종(高宗) 42년 다인(多仁)의 철소(鐵所) 사람이 몽고군을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소(所)를 올려 익안현(翼安縣)으로 삼았다.] 대소원면 능골에서 바라본 충주기업도시 충주지역의 대몽항쟁에서 충주목의 다인철소 사람들이 몽고군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워서 어떤 전공을 거두었기에 익안현으로 승격되었을까 ?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익안현에 대한 기록은 "고종(高宗) 42년. 몽고군을 막은 공으로 익안현으로 승격되었다" 는기록 뿐이다. 고려사의 기록에서 고종 42년이란 익안현 사람들이 항전한 년도가 아니라 익안현의 승격시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처인성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김윤후가 그 공적으로 섭랑장이 되었고, 그 후 충주산성 별감 낭장이 된 김윤후..

대제(함지못)의 지명유래

대제(함지못)의 지명유래 충주시에 있는 대제(함지못-함주못)와 소제(호암지-연지)에 대한 옛지명을 고찰해본다. 삼한시대의 농경문화로 축조된 저수지로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상주의 공검지(恭儉池), 제천의 의림지(義林池) 등을 언급하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사료는 분명치 않다. 삼국사기 등에 나타난 고대사료에서도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에 대한 기록이 있을 뿐이며, 대부분의 기록은 조선시대 초기인 세종지리지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세종지리지에 나타난 방죽의 규모를 살펴보면 지형과 수로를 이용한 소류지 또는 방죽에 불과하다. 이는 연꽃으로 유명한 백련지와 김제의 벽골제에서 보듯이 축조 당시와 달리 토사의 유입에 따른 퇴적물로 인하여 저수량이 감소되어 저습지나 수로로 전락하고,..

[스크랩] 권근의 호 "양촌"은 그가 살았던 충주시 소태면 양촌 마을에서 딴 것이다.

양촌(陽村) 권근(權近)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미술학과 2004812027 이형순 1. 권근의 생애 2. 교육사상 3. 철학사상 4. 주요 저서 1. 권근의 생애 고려왕조 말기에서 조선왕조 초기에 활약한 대학자 권근은 고려왕조의 말기에서 조선왕조 초기에 걸쳐서 크게 활약한 대학자이며 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