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상고사는 무엇일까 ? 아마도 고조선 부터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국가로 정립된 원삼국시대일 것이다. 하지만, 원삼국시대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와 그에 대한 역사가 정립되질 않아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역사교과서에도 제대로 기술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한국사를 배우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사들까지도 고대역사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린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로 정립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역사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에 등장히는 군소국들 중에서 고대국가로 성장한 삼국을 제외하고는 그 유적지나 유물을 있어도 문헌이 없다는 이유로 묵시해 버린다. 물론 고대사 연구가 쉽지는 않겠지만, 국가차원에서 고대사를 정립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고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지명들을 찾아 국원성의 영역을 고찰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은 한국사에서 고대사는 왜 ! 정립되지 못할까 ?" 하는 의문을 자꾸만 던지게 된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유물에 대해서는 하찮은 잡귀까지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 유물이나 유적지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데도 역사학계의 눈치나 살펴야 하고, 관계기관이나 단체의 요구에 따라 결론을 내리는 경향이 너무도 많다.
우리나라의 고대사에서 고령의 대가야와 김해의 금관가야의 역사는 경주의 사로국과 같은 시대에 존재한다. 이는 원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두 지역의 고유영역은 낙동강의 동북부는 신라영역이며, 서남부는 가야의 세력이 지배해왔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인 경상도를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를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한 6국 또는 12국, 가야 6국 또는 12국은 현재의 자치행정구역을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기준으로 잔존한다. 진한 6국 중 사로국이 진한 6국을 지배하고, 가야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배세력과 영역의 변화는 특정지역의 자연조건과 특성에 큰 변화를 주지 않으며, 지역에 따른 역사문화의 인식도 연속성을 지닌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가야와 금관가야는 400년에서 500년에 이르는 역사를 자랑하기에 고려나 조선시대를 지나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그 지역에는 가야의 후예라는 역사성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이는 전라도 역사에서도 나타난다. 전라도는 마한과 백제의 영역이다. 마한의 역사는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의 침입으로 한강과 금강유역에 형성되지만, 백제의 건국으로 한강을 빼앗기고, 금강과 영산강 유역으로 밀려난다. 마한의 역사는 짧게는 백제 온조왕까지, 길게는 영산강유역에서 AD 5세기까지 잔존하므로 약 6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기준도 수계와 지형에 따른 것도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나주권과 익산권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다도해의 해상세력과 내륙의 백제세력에 의한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로도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영산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해상세력이 마한의 잔존세력일 수도 있고, 나주지역의 독자세력일 수도 있갰지만, 백제의 영역과는 구분할 수 있다. 백제는 원삼국시대에는 한강유역에서. 삼국시대에는 금강유역에서, 그리고 후삼국시대에는 견훤이 전북지역을 기반으로 하기에 현재까지도 한강과 금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백제에 속한 것으로 인식한다.
이는 충청도 역사에서도 나타난다. 충청도 지역도 마한과 백제의 영역에 속한다. 충청북도는 한강의 본류인 남한강유역이고, 충청남도는 금강유역이다. 하지만 충청북도에서 금강 지류인 미호천 유역은 백제권으로 인식하지만, 남한강유역은 백제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백제문화권이라고 인식하지는 않는다. 이는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의 중원경으로 이어온 중원문화의 지배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서도 백제가 지배한 기록이나 영역에 따른 전쟁보다는 고구려의 속국인 예맥 등에 의한 기록 이외에 백제의 영향은 거의 나타나질 않는다. 그리고 충청남도를 가르는 금북정맥의 북측 지역인 삽교천과 안성천이 흐르는 유역은 공주와 부여권과는 또 다른 지역적 특색을 지난다.
고구려의 국원성은 한강유역에 존재하는 유일한 성(城)이다. 국원성은 단순한 군사용 산성이 아니라, 통치를 하는 지명으로 고구려의 평양성과 같은 의미로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의 지명이며 국원성의 위치는 장미산성과 보련산성이 있는 충주시 가금면 일대로 추정되며 그 영역은 한강수계와 금강과 낙동강 상류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점령한 지역으로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에 진출한 지역과 유사하다. 이는 국원성을 중심으로 충주고구려비를 비롯한 고구려의 옛지명들이 그를 말해준다. 고서에 실린 고구려의 옛지명들을 고찰하면서 국원성의 영역을 현재의 행정구역과 지명을 고찰해 보면서 이 글을 남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나타난 고구려 지명들은 삼국사기 지리편에 기록된 것과 유사한데, 이는 남한강 유역 전지역과 금강의 미호천 상류 지역인 진천과 음성, 동해안의 울진, 영덕 등과 낙동강 상류지역인 봉화, 안동, 청송 등으로 나타난다. 이 기록에서 고구려가 고조선의 멸망으로 형성된 마한과 동예(예국과 맥국)의 영토인 동해안과 인접한 내륙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것과 신라 진흥왕이 함경도까지 큰 전투없이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해안선과 험준한 산줄기는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경로이기에 경상도와 함경도의 문화적 성향이 같이 나타난다.
마한은 백제의 출현으로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을 빼앗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에 따른 유적과 유물까지도 백제의 문화유산으로 분류되고 있는 현실은 우리나라의 고대사가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한의 역사 뿐만 아니라, 지역의 수많은 지역의 군소세력들은 현재에도 행정구역을 구분하는 보이지않는 기준으로 잔존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행정구역에서도 역사적, 지리적 특성을 무시한채 같은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지역간의 마찰로 이어진다. 고서에 기록된 고구려 옛지명들을 국원성의 관할구역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에 따른 국원성의 영역을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삼국사기 지리편
地理四(지리사) 高句麗,百濟(고구려,백제)
高句麗(고구려) :
按通典云(안통전운) : <통전>에는
朱蒙以漢建昭二年(주몽이한건소이년) : "주몽이 한 나라 건소 2년에
自北扶餘東南行(자북부여동남행) : 북부여로부터 동남방으로 나와서
渡普述水(도보술수) : 보술수를 건너
至紇升骨城居焉(지흘승골성거언) :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號曰句麗(호왈구려) : 국호를 구려라 하고
以高爲氏(이고위씨) : 성씨를 '고'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古記云(고기운) : 고기에는
朱蒙自扶餘逃難至卒本(주몽자부여도난지졸본) :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則紇升骨城卒本似一處也(즉흘승골성졸본사일처야) :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지방인듯하다.
漢書志云(한서지운) : <한서지>에는
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료동군거락양삼천륙백리) : "요동군은 낙양과의 거리가 3천 6백리이며,
屬縣有無慮(속현유무려) : 이에 속한 현으로서 무려현이 있었으니,
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칙주례북진의무려산야) : 바로 <주례>에 이른바 북진의 의무려산이며,
大遼於其下置醫州(대료어기하치의주) : 대요 때는 그 아랫 쪽에 의주를 설치하였다.
玄菟郡距洛陽東北四千里(현토군거락양동북사천리) : 현토군은 낙양과 동북으로 4천리 떨어져 있었고,
所屬三縣(소속삼현) : 이에 속한 현은 셋이다.
高句麗是其一焉(고구려시기일언) :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本者(칙소위주몽소도흘승골성졸본자) : 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란 지방은
蓋漢玄菟郡之界(개한현토군지계) : 아마도 한 나라 현토군의 경내이고,
大遼國東京之西(대료국동경지서) :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며,
漢志所謂玄菟屬縣高句麗是歟(한지소위현토속현고구려시여) : <한서지>에 이른바 현토군의 속현으로서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昔大遼未亡時(석대료미망시) : 옛날 대요가 멸망하기 이전에
遼帝在燕京(료제재연경) : 요제가 연경에 있었으므로,
則吾人朝聘者(칙오인조빙자) : 우리 사신들이
過東京涉遼水(과동경섭료수) :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一兩日行至醫州(일량일행지의주) :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에 당도하여,
以向燕薊(이향연계) : 연계로 향하였기 때문에
故知其然也(고지기연야) : <한서지>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自朱蒙立都紇升骨城(자주몽립도흘승골성) :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歷四十年(력사십년) : 40년이 지나서
孺留王二十二年(유류왕이십이년) : 유류왕 22년에
移都國內城(이도국내성) :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다.
(或云尉那巖城(혹운위나암성) : [혹은 위나암성이라 하고
或云不而城(혹운불이성) : ) 혹은 불이성이라고도 한다.]
按漢書(안한서) : <한서>에는
樂浪郡屬縣有不而(락랑군속현유불이) : "낙랑군에 속한 현으로 불이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又總章二年(우총장이년) : 총장 2년에
英國公李勣奉勑(영국공리적봉래) : 영국공 이적이 칙명에 의하여
以高句麗諸城置都督府及州縣(이고구려제성치도독부급주현) :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하였다.
目錄云(목록운) : <목록>에는
鴨綠北已降城十一(압록북이항성십일) : "압록강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열 하나인데
其一國內城(기일국내성) : 그 중 하나가 국내성이며,
從平壤至此十七驛(종평양지차십칠역) : 평양으로부터 국내성까지는 17개의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則此城亦在北朝境內(칙차성역재북조경내) : 이 성도 역시 북조(北朝) 경내에 있었으나
但不知其何所耳(단불지기하소이) : 다만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都國內(도국내) : 국내성에 도읍한지
歷四百二十五年(력사백이십오년) : 425년이 지난
長壽王十五年(장수왕십오년) : 장수왕 15년에
移都平壤(이도평양) :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歷一百五十六年(력일백오십륙년) : 평양에서 156년이 지난
平原王二十八年(평원왕이십팔년) : 평원왕 28년에
移都長安城(이도장안성) : 장안성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歷八十三年(력팔십삼년) : 장안성에서 83년이 지난
寶臧王二十七年而滅(보장왕이십칠년이멸) : 보장왕 27년에 멸망하였다.
(古人記錄(고인기록) : [옛 사람들의 기록에는
自始祖朱蒙至寶臧王歷年(자시조주몽지보장왕력년) : 시조 주몽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가
丁寧纖悉若此(정녕섬실약차) : 이와 같이 분명하고 상세하다.
而或云(이혹운) : 그러나 혹자는
故國原王十三年(고국원왕십삼년) : "고국원왕 33년에
移居平壤東黃城(이거평양동황성) :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겼는데,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성재금서경동목멱산중) : 그 성은 지금 서경의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었다"고 말하니,
不可知然否(불가지연부) : ) 어느 말이 옳은지를 알 수 없다.]
平壤城似今西京(평양성사금서경) :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인듯하고,
而浿水則大同江是也(이패수칙대동강시야) : 패수는 바로 대동강이다.
何以知之(하이지) : 어떻게 이를 알 수 있는가?
唐書云(지당서운) : <당서>에는
平壤城(평양성) : "평양성은
漢樂浪郡也(한락랑군야) : 한 나라의 낙랑군으로서
隨山屈繚爲郛(수산굴료위부) : 산굽이를 따라 성을 둘러 쌓았고
南涯浿水(남애패수) : 남으로 패수가 놓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又志云(우지운) : 또한 [한지]에는
登州東北海行(등주동북해행) : "등주에서 동북쪽 바다길로 나서서
南傍海壖(남방해연) : 남쪽으로 해변을 끼고
過浿江口椒島(과패강구초도) : 패강 어귀에 있는 초도를 지나면
得新羅西北(득신라서북) : 신라의 서북 지방에 도달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又隋煬帝東征詔曰(우수양제동정조왈) : 또한 수 양제의 동방 정벌 조서에는
滄海道軍(창해도군) : "창해 방면 군사는 선
舟艫千里(주로천리) : 박이 천 리에 뻗쳤는데,
高帆電逝(고범전서) :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달리고
巨艦雲飛(거함운비) : 커다란 전함들은 구름같이 날아서
橫絶浿江(횡절패강) : 패강을 횡단하여
遙造平壤(요조평양) : 멀리 평양에 다달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以此言之(이차언지) : 이렇게 보면
今大同江爲浿水明矣(금대동강위패수명의) :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인 것이 명백하며,
則西京之爲平壤(칙서경지위평양) : 서경이 평양이라는 것도 또한 알 수 있다.
亦可知矣唐書云(역가지의당서운) : <당서>에는
平壤城亦謂長安(평양성역위장안) : "평양성도 장안이라고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而古記云(이고기운) : 고기에는
自平壤移長安(자평양이장안) :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으니,
則二城同異遠近(칙이성동이원근) : 두 성이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則不可知矣(칙불가지의) : 알 수가 없다.
高句麗始居中國北地(고구려시거중국북지) :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則漸東遷于浿水之側(칙점동천우패수지측) : 점점 동방의 패수 옆으로 이동하였다.
渤海人武藝曰(발해인무예왈) : 발해 사람 무예는
昔高麗盛時(석고려성시) : "옛날 고구려의 전성 시대에는
士三十萬(사삼십만) : 군사 30만으로
抗唐爲敵(항당위적) : 당과 대적하였다"고 말하였으니,
則可謂地勝而兵强(칙가위지승이병강) : 고구려의 지세가 유리하고 군사가 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至于季末(지우계말) :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 이르러
君臣昏虐失道(군신혼학실도) : 임금과 신하가 우매하고 포학하여 각자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자,
大唐再出師(대당재출사) : 당이 다시 군사를 출동시키고,
新羅授助(신라수조) : 신라가 이를 도와
討平之(토평지) : 그들을 쳐서 평정했던 것이다.
其地多入渤海靺鞨(기지다입발해말갈) : 그 지역의 대부분이 발해와 말갈로 편입되고,
新羅亦得其南境(신라역득기남경) : 신라에서도 그 남쪽 지방을 차지하여,
以置漢朔溟三州及其郡縣以備九州焉(이치한삭명삼주급기군현이비구주언) : 한주, 삭주, 명주의 3주와 군현을 두어 아홉 주를 설치하였다.
漢山州(한산주) :
한산주
國原城(국원성) : 국원성
(一云未乙省(일운미을성) : [미을성 또는
一云託長城(일운탁장성) : ) 탁장성이라고도 한다.]
南川縣(남천현) : 남천현
(一云南買(일운남매) : ) [남매라고도 한다.]
駒城(구성) : 구성
(一云滅烏(일운멸오) : ) [멸오라고도 한다.]
仍斤內郡(잉근내군) : 잉근내군
述川郡(술천군) : 술천군
(一云省知買(일운성지매) : ) [성지매라고도 한다.]
骨乃斤縣(골내근현) : 골내근현
楊根縣(양근현) : 양근현
(一云去斯斬(일운거사참) : ) [거사참이라고도 한다.]
今勿內郡(금물내군) : 금물내군
(一云萬弩(일운만노) : ) [만노라고도 한다.]
道西縣(도서현) : 도서현
(一云都盆(일운도분) : ) [도분이라고도 한다.]
仍忽(잉홀) : 잉홀
皆次山郡(개차산군) : 개차산군
奴音竹縣(노음죽현) : 노음죽현
奈兮忽(나혜홀) : 나혜홀
沙伏忽(며복홀) : 며복홀
蛇山縣(사산현) : 사산현
買忽(매홀) : 매홀
(一云水城(일운수성) : ) [수성이라고도 한다.]
唐城郡(당성군) : 당성군
上忽(상홀) : 상홀[
(一云車忽(일운차홀) : ) 차홀이라고도 한다.]
釜山縣(부산현) : 부산현[
(一云松村活達(일운송촌활달) : ) 송촌활달이라고도 한다]
栗木郡(율목군) : 율목군
(一云冬斯肹(일운동사힐) : ) [동사힐이라고도 한다.]
仍伐奴縣(잉벌노현) : 잉벌노현
齊次巴衣縣(제차파의현) : 제차파의현
買召忽縣(매소홀현) : 매소홀현
(一云彌鄒忽(일운미추홀) :[미추홀이라고도 한다.]
獐項口縣(장항구현) : 장항구현
(一云古斯也忽次(일운고사야홀차) : ) [고사야홀차라고도 한다.] )
主夫吐郡(주부토군) : 주부토군
首尒忽(수이홀) : 수이홀
黔浦縣(검포현) : 금포현
童子忽縣(동자홀현) : 동자홀현
(一云仇斯波衣(일운구사파의) : ) [구사파의라고도 한다.]
平淮押縣(평해압현) : 평회압현
(一云別史衣(일운별사의) : [펼사파의라고도 하며
淮一作唯(회일작유) : ) 회(淮)를 유(唯)로도 쓴다.]
北漢山郡(북한산군) : 북한산군
(一云坪壤(일운평양) : ) [평양이라고도 한다.]
骨衣內縣(골의내현) : 골의내현
王逢縣(왕봉현) : 왕봉현
(一云皆伯(일운개백) : [개백이라고도 한다.
漢氏美女迎安臧王之地(한씨미녀영안장왕지지) :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던 곳이라하여
故名王逢(고명왕봉) : ) 왕봉으로 불렀다.]
買省郡(매성군) : 매성군[
(一云馬忽(일운마홀) : ) 마홀이라고도 한다.]
七重縣(칠중현) : 칠중현
(一云難隱別(일운난은별) : ) [난은별이라고도 한다.]
波害乎史縣(파해호사현) : 파해호사현
(一云頟(일운액) : ) [액봉이라고도 한다.]
泉井口縣(천정구현) : 천정구현
(一云於乙買串(일운어을매관) : ) [어을매곶이라고도 한다.]
述尒忽縣(술이홀현) : 술이홀현
(一云首泥忽(일운수니홀) : ) [수니홀이라고도 한다.]
達乙省縣(달을성현) : 달을성현
(漢氏美女於高山頭點烽火迎安臧王之處(한씨미녀어고산두점봉화영안장왕지처) : [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을 맞던 곳이라 하여
故後名高烽(고후명고봉) : ) 후 일에 고봉이라고 불렀다.]
臂城郡(비성군) : 비성군
(一云馬忽(일운마홀) : ) [마홀이라고도 한다.]
內乙買(내을매) : 내을매
(一云內尒米(일운내이미) : ) [내이미라고도 한다.]
鐵圓郡(철원군) : 철원군
(一云毛乙冬非(일운모을동비) : ) [모을동비라고도 한다.]
梁骨縣(량골현) : 양골현
僧梁縣(승량현) : 승량현
(一云非勿(일운비물) : ) [비물이라고도 한다.]
功木達(공목달) : 공목달
(一云熊閃山(일운웅섬산) : ) [웅섬산이라고도 한다.]
夫如郡(부여군) : 부여군
於斯內縣(어사내현) : 어사내현
(一云斧壤(일운부양) : ) [부양이라고도 한다.]
烏斯含達(오사함달) : 오사함달
阿珍押縣(아진압현) : 아진압현
(一云窮嶽(일운궁악) : ) [궁악이라고도 한다.]
所邑豆縣(소읍두현) : 소읍두현
伊珍買縣(이진매현) : 이진매현
牛岑郡(우잠군) : 우잠군
(一云牛嶺((일운우령) : [우령
一云首知衣(일운수지의) : ) 또는 수지의라고도 한다.]
獐項縣(장항현) : 장항현
(一云古斯也忽次(일운고사야홀차) : ) [고사야홀차라고도 한다]
長淺城縣(장천성현) : 장천성현
(一云耶耶(일운야야) : [야야
一云夜牙(일운야아) : ) 또는 야아라고도 한다.]
麻田淺縣(마전천현) : 마전천현
(一云泥沙波忽(일운니사파홀) : ) [이사파홀이라고도 한다.]
扶蘇岬(부소갑) : 부소압
若只頭耻縣(약지두치현) : 약지두치현
(一云朔頭(일운삭두) : [삭두
一云衣頭(일운의두) : ) 또는 의두라고도 한다.]
屈於岬(굴어갑) : 굴어갑
(一云紅西(일운홍서) : ) [홍서라고도 한다.]
冬比忽(동비홀) : 동비홀
德勿縣(덕물현) : 덕물현
津臨城縣(진림성현) : 진림성현
(一云烏阿忽(일운오아홀) : ) [오아홀이라고도 한다.]
穴口郡(혈구군) : 혈구군
(一云甲比古次(일운갑비고차) : ) [갑비고차라고도 한다.]
冬音奈縣(동음나현) : 동음나현
(一云休陰(일운휴음) : ) [휴음이라고도 한다.]
高木根縣(고목근현) : 고목근현
(一云達乙斬(일운달을참) : ) [달을참이라고도 한다.]
首知縣(수지현) : 수지현
(一云新知(일운신지) : ) [신지라고도 한다.]
大谷郡(대곡군) : 대곡군
(一云多知忽(일운다지홀) : ) [다지홀이라고도 한다.]
水谷城縣(수곡성현) : 수곡성현
(一云買旦忽(일운매단홀) : ) [매단홀이라고도 한다.]
十谷縣(십곡현) : 십곡현
(一云德頓忽(일운덕돈홀) : ) [덕돈홀이라고도 한다.]
冬音忽(동음홀) : 동음홀
(一云豉鹽城(일운시염성) : ) [시염성이라고도 한다.]
刀臘縣(도랍현) : 도랍현
(一云雉嶽城(일운치악성) : ) [치악성이라고도 한다.]
五谷郡(오곡군) : 오곡군
(一云弓次云忽(일운궁차운홀) : ) [궁차운홀이라고도 한다.]
內米忽(내미홀) : 내미홀
(一云池城(일운지성) : [지성 또
一云長池(일운장지) : ) 는 장지라고도 한다.]
漢城郡(한성군) : 한성군
(一云漢忽(일운한홀) : [한홀
一云息城(일운식성) : 또는 식성
一云乃忽(일운내홀) : ) 또는 내홀이라고도 한다.]
鵂鶹城(휴류성) : 휴류성
(一云租波衣(일운조파의) : [조파의
一云鵂巖郡(일운휴암군) : ) 또는 휴암군이라고도 한다.]
獐塞縣(장새현) : 장새현
(一云古所於(일운고소어) : ) [고소어라고도 한다.]
冬忽(동홀) : 동홀
(一云于冬於忽(일운우동어홀) : ) [우동어홀이라고도 한다.]
今達(금달) : 금달
(一云薪達(일운신달) : [신달
一云息達(일운식달) : ) 또는 식달이라고도 한다.]
仇乙峴(구을현) : 구을현은
(一云屈遷(일운굴천) : ) [굴천이라고도 한다.]
今豐州(금풍주) : 지금의 풍주이다.
闕口(궐구) : 궐구는
今儒州(금유주) : 지금의 유주이다.
栗口(율구) : 율구는
(一云栗川(일운율천) : ) [율천이라고도 한다.]
今殷栗縣(금은율현) : 지금의 은률현이다.
長淵(장연) : 장연은
今因之(금인지) :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麻耕伊(마경이) : 마경이는
今靑松縣(금청송현) : 지금의 청송현이다.
楊岳(양악) : 양악은
今安嶽郡(금안악군) : 지금의 안악군이다.
板麻串(판마관) : 판마곶은
今嘉禾縣(금가화현) : 지금의 가화현이다.
熊閑伊(웅한이) : 웅한이는
今水寧縣(금수녕현) : 지금의 수녕현이다.
甕遷(옹천) : 옹천은
今甕津縣(금옹진현) : 지금의 옹진현이다.
付珍伊(부진이) : 부진이는
今永康縣(금영강현) : 지금의 영강현이다.
鵠島(곡도) : 곡도는
今白嶺鎭(금백령진) : 지금의 백령진이다.
升山(승산) : 승산은
今信州(금신주) : 지금의 신주이다.
加火押(가화압) : 가화압
夫斯波衣縣(부사파의현) : 부사파의현
(一云仇史峴(일운구사현) : ) [구사현이라고도 한다.]
牛首州(우수주) : 우수주
(首一作頭(수일작두) : [수(首)를 두(頭)로 쓰기도 하며
一云首次若(일운수차약) : 수차약
一云烏根乃(일운오근내) : ) 또는 오근내라고도 한다.]
伐力川縣(벌력천현) : 벌력천현
橫川縣(횡천현) : 횡천현
(一云於斯買(일운어사매) : ) [어사매라고도 한다.]
砥峴縣(지현현) : 지현현
平原郡(평원군) : 평원군
(北原(북원) : ) [북원]
奈吐郡(나토군) : 나토군
(一云大提(일운대제) : ) [대제라고도 한다.]
沙熱伊縣(사열이현) : 사열이현
赤山縣(적산현) : 적산현
斤平郡(근평군) : 근평현
(一云並平(일운병평) : ) [병평이라고도 한다.]
深川縣(심천현) : 심천현
(一云伏斯買(일운복사매) : ) [복사매라고도 한다.]
楊口郡(양구군) : 양구군
(一云要隱忽次(일운요은홀차) : ) [요은홀차라고도 한다.]
猪足縣(저족현) : 저족현
(一云烏斯逈(일운오사형) : ) [오사형이라고도 한다.]
玉妓縣(옥기현) : 옥기현
(一云皆次丁(일운개차정) : ) [개차정이라고도 한다.]
三峴縣(삼현현) : 삼현현
(一云密波兮(일운밀파혜) : ) [밀파혜라고도 한다.]
狌川郡(성천군) : 성천군
(一云也尸買(일운야시매) : ) [야시매라고도 한다.]
大楊管郡(대양관군) : 대양관군
(一云馬斤押(일운마근압) : ) [마근압이라고도 한다.]
買谷縣(매곡현) : 매곡현
古斯馬縣(고사마현) : 고사마현
及伐山郡(급벌산군) : 급벌산군
伊伐支縣(이벌지현) : 이벌지현
(一云自伐支(일운자벌지) : ) [자벌지라고도 한다.]
藪狌川縣(수성천현) : 수성천현
(一云藪川(일운수천) : ) [수천이라고도 한다.]
文峴縣(문현현) : 문현현
(一云斤尸波兮(일운근시파혜) : ) [근시파혜라고도 한다.]
母城郡(모성군) : 모성군
(一云也次忽(일운야차홀) : ) [야차홀이라고도 한다.]
冬斯忽(동사홀) : 동사홀
水入縣(수입현) : 수입현
(一云買伊縣(일운매이현) : ) [매이현이라고도 한다.]
客連郡(객련군) : 객련군
(客一作各(객일작각) : [객(客)을 각(各)으로도 쓰며
一云加兮牙(일운가혜아) : ) 가혜아라고도 한다.]
赤木縣(적목현) : 적목현
(一云沙非斤乙(일운사비근을) : ) [사비근을이라고도 한다.]
管述縣(관술현) : 관술현
猪闌峴縣(저란현현) : 저란현현
(一云烏生波衣(일운오생파의) : [오생파의
一云猪守(일운저수) : ) 또는 저수라고도 한다.]
淺城郡(천성군) : 천성군
(一云比烈忽(일운비렬홀) : ) [비열홀이라고도 한다.]
꜎谷縣(경곡현) : 경곡현
(一云首乙呑(일운수을탄) : ) [수을탄이라고도 한다.]
菁達縣(청달현) : 청달현
(一云昔達(일운석달) : ) [석달이라고도 한다.]
薩寒縣(살한현) : 살한현
加支達縣(가지달현) : 가지달현
於支呑(어지탄) : 어지탄
(一云翼谷(일운익곡) : ) [익곡이라고도 한다.]
買尸達(매시달) : 매시달
泉井郡(천정군) : 천정군
(一云於乙買(일운어을매) : ) [어을매라고도 한다.]
夫斯達縣(부사달현) : 부사달현
東墟縣(동허현) : 동허현
(一云加知斤(일운가지근) : ) [가지근이라고도 한다.]
奈生郡(나생군) : 나생군
乙阿且縣(을아차현) : 을아차현
于烏縣(우오현) : 우오현
(一云郁烏(일운욱오) : ) [욱오라고도 한다.]
酒淵縣(주연현) : 주연현
何瑟羅州(하슬라주) : 하슬라주
(一云河西良(일운하서량) : [하서량
一云河西(일운하서) : ) 또는 하서라고도 한다.]
乃買縣(내매현) : 내매현
東吐縣(동토현) : 동토현
支山縣(지산현) : 지산현
穴山縣(혈산현) : 혈산현
䢘城郡(수성군) : 수성현
(一云加阿忽(일운가아홀) : ) [가아홀이라고도 한다.]
僧山縣(승산현) : 승산현
(一云所勿達(일운소물달) : ) [소물달이라고도 한다.]
翼峴縣(익현현) : 익현현
(一云伊文縣(일운이문현) : ) [이문현이라고도 한다.]
達忽(달홀) : 달홀
猪䢘穴縣(저수혈현) : 저수혈현
(一云烏斯押(일운오사압) : ) [오사합이라고도 한다.]
平珍峴縣(평진현현) : 평진현현
(一云平珍波衣(일운평진파의) : ) [평진파의라고도 한다.]
道臨縣(도림현) : 도림현
(一云助乙浦(일운조을포) : ) [조을포라고도 한다.]
休壤郡(휴양군) : 휴양군
(一云金惱(일운금뇌) : ) [금뇌라고도 한다.]
習比谷(습비곡) : 습비곡
(一作呑(일작탄) : ) [탄이라고도 한다.]
吐上縣(토상현) : 토상현
岐淵縣(기연현) : 기연현
鵠浦縣(곡포현) : 곡포현
(一云古衣浦(일운고의포) : ) [고의포라고도 한다.]
竹峴縣(죽현현) : 죽현현
(一云奈生於(일운나생어) : ) [나생어라고도 한다.]
滿若縣(만약현) : 만약현[
(一云沔兮(일운면혜) : ) 면혜라고도 한다.]
波利縣(파리현) : 파리현
于珍也郡(우진야군) : 우진야군
波且縣(파차현) : 파차현
(一云波豐(일운파풍) : ) [파풍이라고도 한다.]
也尸忽郡(야시홀군) : 야시홀군
助攬郡(조람군) : 조람군
(一云才攬(일운재람) : ) [재람이라고도 한다.]
靑已縣(청이현) : 청이현
屈火縣(굴화현) : 굴화현
伊火兮縣(이화혜현) : 이화혜현
于尸郡(우시군) : 우시군
阿兮縣(아혜현) : 아혜현
悉直郡(실직군) : 실직군
(一云史直(일운사직) : ) [사직이라고도 한다.]
羽谷縣(우곡현) : 우곡현
右高句麗州郡縣(우고구려주군현) : 이상은 고구려의 주, 군, 현인데
共一百六十四(공일백륙십사) : 모두 164개소이다.
其新羅改名及今名(기신라개명급금명) : 신라에서 개칭한 것과 지금의 명칭은
見新羅志(견신라지) : <신라지>에 실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경기(京畿)
옛날 마한(馬韓)의 지역이다 신이 살펴보건대 마한이 고구려가 되고, 진한(辰韓)이 신라가 되고, 변한(卞韓)이 백제가 됨은, 최치원(崔致遠)이 이미 정론(定論)하였습니다. 이것은 최치원이 처음으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삼국(三國) 초기부터 서로 전해 오던 말입니다. 고려 김부식(金富軾)의 지리지에도 또한 최치원의 논을 옳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중엽(中葉)에 이르러 비로소 금마산(金馬山)은 백제의 지경에 있고, 평나산(平那山)은 고구려의 지경에 있었는데, 평(平)과 변(卞)은 음이 서로 가깝다 하여, 마침내 마한이 백제가 되고, 변한이 고구려로 되었다는 의심을 두게 되었으나, 드러나게 지적하여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김경숙(金敬叔)이 《주관육익(周官六翼)》을 편찬함에 미쳐, 삼한을 서술하면서 말하기를, “고려는 낙랑(樂浪)과 변한을 병합하고, 백제는 마한과 대방(帶方)을 병합하였다.” 하고, 삼국을 서술함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를 마한으로 삼고 백제를 변한으로 삼았다.”하였으니, 한 사람의 말이 서로 모순되니 어찌 말할 것이 되겠습니까. 본조(本朝)에 이르러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과 이첨(李詹) 등이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할 때에, 당연한 것처럼 마한을 백제라 하고 변한을 고구려라 하였습니다. 권근은 바로 근세의 대유(大儒)로서 동국 사람이 시채(蓍蔡)에 비기는데, 또한 이런 논을 주장함으로써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진 설(說)을 착란시켰으니, 웬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중국 및 동국의 사기를 반복하여 고찰해 보니, 삼한 때에는 마한이 가장 커서 54국을 거느렸고, 진ㆍ변 두 나라는 각각 12국을 거느렸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익산(益山) 이남에 54국을 받아들일 만한 땅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마한의 왕도(王都)는 남쪽이 변한에 매우 가깝고, 동북쪽은 낙랑ㆍ말갈(靺鞨)ㆍ옥저(沃沮) 등과 국경이 서로 불었으니, 그 뒤 고구려 동명왕이 낙랑에서 일어나 마한 동북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뒷사람이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칭(稱)함은 아마 이 때문인가 하옵니다. 《후한서(後漢書)》에,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또 왜(倭)와 접했다.”하고, 또 말하기를,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살아 의복ㆍ거처ㆍ언어ㆍ풍속이 같다.”하였는데, 변한(弁韓)이라 하지 않고 변진(弁辰)이라 함은, 비록 먼 데서 들은 말이라 하더라도, 변한ㆍ진한 두 나라가 서로 이웃에 붙어 있음을 알 만합니다. 신라 혁거세(赫居世) 19년에 변한이 그 나라를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고, 그 뒤 백제가 마한을 쳐 없애고 병력이 강성하게 되자, 신라에 속하였던 변한의 옛 땅을 차차 먹어 들어서, 지리산(智異山) 이서(以西)가 모두 병합되었습니다. 뒷사람이 백제를 칭하여 변한이라 하는 것도, 아마 이 까닭인가 하는데, 어찌하여 권근은 금마ㆍ평나의 설에 미혹되어 말하기를, “마한이 백제 지역 안에 있었다.”하여, 드디어 마한을 백제라 하였는지요. 또 《당서(唐書)》에 이른바, “변한의 묘예(苗裔)가 낙랑의 땅에 있다.”한 것도 대체로 변한의 계통이 낙랑으로부터 나왔음을 말한 것으로, 김부식은 그 말은 사실 기록이 아니라 하였는데도, 권근의 논은 도리어 그것을 끌어다 증거로 삼으면서 ‘묘예’ 두 자를 빼고 바로, “변한이 낙랑의 지역에 있었다.”함은 무슨 까닭인지요. 또 그 말에, “《후한서》에 말하기를, ‘변한이 남쪽에 있다.’ 한 것은, 대체로 한(漢)나라의 지경인 요동의 지역으로부터 말하는 것이고, 변한이 진ㆍ마 두 한(韓)의 남쪽에 있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하였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그가 말한, “마한이 서쪽에 있었다.”는 것 또한 마한이 요동의 서쪽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관육익》에, 고려 세조가 궁예를 달래면서 한 말을 기록하기를, “대왕이 조선ㆍ숙신(肅愼)ㆍ변한 땅의 왕이 되시고자 할 것 같으면, 먼저 송악(松岳)을 점령함이 좋을 것입니다.”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오늘의 서경(西京)은 옛날의 변나경(卞那京)인 까닭으로 변한이라 한다.”하였는데 이 말은 더욱 거짓이요 망령된 것입니다. 변한을 서경이라 하게 되면 조선이란 다시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뒷날 궁예가 용병(用兵)을 나주(羅州)로부터 시작하였으니, 세조가 말한 바 변한은 백제를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르기를, “고구려 지역엔 본래부터 마읍산(馬邑山)이 있는 까닭으로 마한이라 이름하고, 백제 지역엔 본래부터 변산(卞山)이 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하였다.”하였으니, 이제 평양부에 마읍산이 있고, 부안현(扶安縣)에 변산(邊山)이 있으니 《삼국유사》의 말은 혹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책을 누가 지었는지 알지 못하겠고, 또 고려 중엽 이후에 나온 것으로, 그 기재한 것이 허황됨이 많아서 족히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나, 삼한의 설을 변증(辨證)한 것은 증거가 매우 밝아, 동방의 지리를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은, 진실로 참고로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신은 그런 까닭으로 삼가 최치원의 옛 설에 의하여, “경기ㆍ충청ㆍ황해 등의 도를 마한 구역(舊域)에 소속시키고, 전라도를 변한 구역에 소속시켰습니다.”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그 지역을 나누어 점거하였다가, 뒤에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광주목(廣州牧)
동은 양근군(楊根郡) 경계(境界)까지 25리, 여주 경계까지 75리, 남은 이천부(利川府) 경계까지 74리, 양지현 경계까지 85리, 용인현 경계까지 43리, 서는 과천현(果川縣) 경계 양재역(良才驛)까지 27리, 안산군 경계까지 76리, 북은 양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남한산성이다.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또 도읍을 남평양성으로 옮겼다 지금의 경도(京都).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없애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신라가 그 땅을 점차 거두어 남한산성을 고쳐 한산주라 하고, 또 남한산주라고도 불렀다.
【군명】 남한산ㆍ한산주ㆍ한주ㆍ회안(淮安)ㆍ봉국군(奉國軍).
신증동국여지승람 제7권
여주목(驪州牧)
동은 충청도 충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44리요, 강원도 원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요, 남은 음죽현(陰竹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3리요, 서는 이천부(利川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8리, 광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요, 북은 지평현(砥平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7리, 양근군(楊根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57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0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황효(黃驍)로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황려현(黃驪縣) 황리(黃利)라고도 한다. 으로 고쳤다
【군명】 골내근(骨乃斤) ㆍ황효(黃驍)ㆍ영의(永義)ㆍ황려(黃驪)ㆍ여강(驪江)ㆍ여흥(驪興)ㆍ여성(驪城)ㆍ황리(黃利).
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이천도호부(利川都護府)
동쪽으로 여주(驪州)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40리이다. 서쪽으로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37리이고, 북쪽으로 광주(廣州) 경계까지 21리이며, 서울까지 1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남천현(南川縣) 남매(南買)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승격시켜 군주(軍主)를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이 황무(黃武)로 고치어, 한주(漢州)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군명】 남천(南川)ㆍ남매(南買)ㆍ황무(黃武)ㆍ영창(永昌)
음죽현(陰竹縣)
동쪽으로 여주(驪州)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 충청도(忠淸道) 충주(忠州) 경계까지 15리이며, 서쪽으로 죽산현(竹山縣) 경계까지 26리이고, 북쪽으로 이천부(利川府) 경계까지 29리이며, 서울까지 1백 9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노음죽현(奴音竹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개산군(介山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군명】 노음죽(奴音竹)ㆍ설성(雪城).
양지현(陽智縣)
동쪽으로 이천부(利川府) 경계까지 12리이고, 남쪽으로 죽산현(竹山縣) 경계까지 47리이며,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81리이고, 서쪽으로 용인현(龍仁縣) 경계까지 17리이며, 북으로 광주(廣州) 경계까지 40리이고, 서울까지 1백 1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수주(水州)의 양량(陽良) 부곡(部曲)인데, 본조 공정왕(恭靖王) 원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현으로 승격시켜 감무를 두었고, 태종 13년 예에 의하여 현감을 만들고, 현의 읍내를 광주(廣州) 추계향(秋溪鄕)으로 옮겼으며, 또 죽주(竹州)의 고안(高安)ㆍ대곡(大谷)ㆍ목악(木岳)ㆍ제촌(蹄村) 등 네 부곡을 분할하여 붙이고, 충청도로부터 떼어 본도에 예속시켰다.
【군명】 양량(陽良)ㆍ양산(陽山)ㆍ추계(秋溪).
죽산현(竹山縣)
동쪽으로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충청도(忠淸道)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3리이고, 북쪽으로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49리이며, 서울까지 1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에서 고쳐 개산(介山)으로 일컬었다.
【군명】 개차산(皆次山)ㆍ개산(介山)ㆍ음평(陰平)ㆍ연창(延昌)ㆍ죽주(竹州).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동쪽으로 수원부(水原府) 경계까지 24리요, 남쪽으로 같은 부 쌍부현(雙阜縣) 경계까지 20리요, 서쪽으로 화량(花梁)까지 41리요, 북쪽으로 안산군(安山郡) 경계까지 43리며, 서울까지 1백 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당성군(唐城郡)이다.
【군명】 당성(唐城)ㆍ당은(唐恩)ㆍ익주(益州)ㆍ강녕(江寧)ㆍ영제(寧提)ㆍ과포(戈浦).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예전 마한(馬韓) 지역인데 고구려와 백제가 그 땅을 나누어 차지하였다가, 뒤에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고려 성종(成宗) 14년(995)에 나라 안을 나누어 10도(道)를 만드는데, 충주(忠州)ㆍ강주(剛州)ㆍ환주(歡州) 등 13주(州)로 중원도(中原道)를 만들고, 공주(公州)ㆍ운주(運州) 등 11주로 하남도(河南道)를 만들었다. 예종(睿宗) 원년(1105)에 관내도(關內道)에 합하여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일컬었다가 명종(明宗) 원년(1170)에 나누어 두 도(道)를 만들었고, 충숙왕(忠肅王) 원년(1313)에 다시 합하여 한 도를 만들어 양광도(楊廣道)라 일컬었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1)에 충청도(忠淸道)로 일컫고, 신우(辛禑) 말년에 본도의 평창군(平昌郡)을 떼어서 교주도(交州道)에 옮겨 붙였다.
충주목(忠州牧)
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8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48리이고, 연풍현(延豐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51리이고, 경기도 여주(驪州) 경계까지 78리이고, 경기도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66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45리이고,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경계까지 58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혹은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薍長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빼앗았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을 옮겨서 채웠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군명】 국원(國原)ㆍ대원(大原)ㆍ예성(蘂城)ㆍ중원(中原)ㆍ창화군(昌化軍).
청풍군(淸風郡)
동쪽으로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39리이고, 남쪽으로 경상도(慶尙道) 문경현(聞慶縣) 경계까지 60리이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40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5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사열이현(沙熱伊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군명】 사열이(沙熱伊).
단양군(丹陽郡)
동쪽으로 경상도 풍기군(豐基郡) 경계까지 29리이고, 남쪽으로 경상도 예천군(醴泉郡) 경계까지 36리이고, 서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52리이고, 영춘현(永春縣) 경계까지 43리이고, 서울까지 3백 5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인데 혹은 적성(赤城)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군명】 적산(赤山)ㆍ적성(赤城)ㆍ단산(丹山).
괴산군(槐山郡)
동쪽으로 연풍현(延豐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청안현(淸安縣) 경계까지 38리이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29리이고, 북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2백 9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잉근내군(仍斤內郡)인데 신라에서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괴주(槐州)로 고치었다.
【군명】 잉근내(仍斤內)ㆍ괴양(槐壤)ㆍ괴주(槐州)ㆍ시안(始安).
연풍현(延豐縣)
동쪽으로 경상도 문경현(聞慶縣) 경계까지 11리이고, 남쪽으로 문경현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33리이고, 북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50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6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상모현(上芼縣)이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에 장연(長延)으로 고치고 장풍현(長豐縣)과 함께 충주(忠州)에 붙였다.
【군명】 상모(上芼)ㆍ장연(長延)
음성현(陰城縣)
동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8리이고, 북쪽으로 충주 경계까지 25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18리, 청안현(淸安縣) 경계까지 35리이고, 서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40리이고, 서울까지 2백 4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군명】 잉홀(仍忽)ㆍ설성(雪城)ㆍ잉근내(仍斤內) 육익(六翼)
영춘현(永春縣)
동쪽으로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豐基郡) 경계까지 36리이고, 남쪽으로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58리이고, 서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55리이고, 북쪽으로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4백 6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인데 신라에서 자춘(子春)으로 고치고 내성군(奈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원주(原州)에 붙였다.
【군명】 을아단(乙阿旦)ㆍ자춘(子春).
제천현(堤川縣)
동쪽으로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경계까지 17리이고, 영춘현(永春縣) 경계까지 18리이고, 남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0리이고,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20리이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43리이고, 북쪽으로 강원도 원주(原州) 경계까지 36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9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奈吐郡)인데 신라에서 내제(奈堤)로 고쳤고, 고려 초에 제주(堤州)로 고쳤다.
【군명】 내토(奈吐)ㆍ내제(奈堤)ㆍ의천(義川)ㆍ의원(義原).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
청주목(淸州牧)
동쪽으로 청안현(淸安縣)의 경계까지 42리, 같은 현 시화역(時化驛)의 경계까지 44리, 남쪽은 문의현(文義縣)의 경계까지 20리, 회인현(懷仁縣)의 경계까지 24리, 보은현(報恩縣)의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전의현(全義縣)의 경계까지 54리, 목천현(木川縣)의 경계까지 55리, 연기현(燕岐縣)의 경계까지 38리, 북쪽으로 진천현(鎭川縣)의 경계까지 32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상당현(上黨縣) 낭비성(娘臂城)이라고도 하고,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에 처음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에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시켰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군명】 상당(上黨)ㆍ낭비성(娘臂城)ㆍ서원경(西原京)ㆍ청주(靑州)ㆍ낭성(娘城)ㆍ전절군(全節軍).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직산현(稷山縣)
동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33리이고,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1리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郡) 경계까지 25리이며, 남쪽으로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0리이며,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21리이다.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군명】 위례성(慰禮城). 사산(蛇山).
진천현(鎭川縣)
동쪽은 충주(忠州) 경계까지 27리이고, 남쪽은 청주 경계까지 28리이며, 서쪽은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38리이고, 북쪽은 경기도(京畿道) 죽산현(竹山縣) 경계까지 3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금물노군(今勿奴郡) 다른 이름은 만노군(萬弩郡)이요, 혹은 수지(首知), 또는 신지(新知)라고도 한다. 신라(新羅) 때에 흑양군(黑壤郡) 흑(黑)은 혹 황(黃)이라고도 함. 이라 고쳤다.
【군명】 금물노(今勿奴)ㆍ만노(萬弩)ㆍ수지(首知)ㆍ신지(新知)ㆍ흑양(黑壤)ㆍ황양(黃壤)ㆍ강주(降州)ㆍ진주(鎭州)ㆍ창의(彰義)ㆍ의녕(義寧)ㆍ상산(常山).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慶尙道)
본래 진한(辰韓)의 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경주부(慶州府) 청하현(淸河縣)
동쪽으로 해안까지 7리이고, 남쪽으로 흥해군(興海郡) 경계까지 11리이며, 서쪽으로 경주(慶州) 신광현(神光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 영덕현(盈德縣) 경계까진 19리이다.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아혜현(阿兮縣)으로,
【군명】 아혜(阿兮)ㆍ해아(海阿)ㆍ덕성(德城).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동쪽은 해안까지 7리, 남쪽은 영덕현(盈德縣) 경계까지 22리, 서쪽은 진보현(眞寶縣) 경계까지 80리, 예안현(禮安縣) 경계까지 1백 26리, 북쪽은 강원도(江原道) 평해군(平海郡) 경계까지 30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이다.
【군명】 우시(于尸)ㆍ유린(有隣)ㆍ예주(禮州)ㆍ단양(丹陽)ㆍ덕원(德原)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
동쪽은 영덕현(盈德縣) 경계까지 49리, 남쪽은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 74리, 서쪽은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19리, 북쪽은 진보현(眞寶縣) 경계까지 5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청기현(靑己縣)이다.
【군명】 청기(靑己)ㆍ적선(積善)ㆍ부이(鳧伊)ㆍ운봉(雲鳳)ㆍ청부(靑鳧)ㆍ청보(靑寶).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영천군(榮川郡)
동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예안현(禮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남으로 안동부 경계에 이르기까지 41리, 서로 풍기군(豐基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북으로 풍기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3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이군(奈已郡)이다 내(奈)는 날(捺)로 된 것도 있다.
【군명】 내이(奈已)ㆍ내령(奈靈)ㆍ강주(剛州)ㆍ순안(順安)ㆍ영주(榮州)ㆍ귀성(龜城)
영덕현(盈德縣)
동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3리, 영해부(寧海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남쪽으로 청하현(淸河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41리, 서쪽으로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6리, 북쪽으로 진보현(眞寶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7리, 서울에서의 거리가 7백 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야시홀군(也尸忽郡)이다.
【군명】 야시홀(也尸忽)ㆍ야성(野城)
봉화현(奉化縣)
동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31리, 서쪽으로 안동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남쪽으로 예안현(禮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5리, 북쪽으로 강원도(江原道) 삼척부(三陟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74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8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고사마현(古斯馬縣)이다.
【군명】 고사마(古斯馬)ㆍ봉성(鳳城)ㆍ옥마(玉馬)
예안현(禮安縣)
동으로 영해부(寧海府) 경계까지 41리, 남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12리, 서로 영천군(榮川郡) 경계까지 39리, 북으로 봉화현(奉化縣) 경계까지 41리, 경도(京都)와의 거리는 5백 4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매곡현(買谷縣)이다.
【군명】 매곡ㆍ선곡ㆍ선성(宣城).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고령현(高靈縣)
동쪽은 현풍현(玄風縣)의 경계까지 30리, 남쪽은 초계군(草溪郡)의 경계까지 28리, 서쪽은 합천군의 경계까지 32리, 북쪽은 성주(星州)의 경계까지 10리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4리다.
【건치연혁】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다 자세한 것은 김해부의 산천 편을 보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그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대 5백 20년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중[釋] 이정(利貞)의 전기를 살펴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가(夷毗訶)에 응감한 바 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金官國)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라 하였다. 그러나 가락국(駕洛國) 옛 기록의 ‘여섯 알[六卵]의 전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한 것으로써 믿을 수 없다. 또 중 순응(順應)의 전기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의 10대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腦王)이며, 신라의 영이찬(迎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에게 청혼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참고할 것이 못된다.
【군명】 대가야ㆍ고양(高陽)ㆍ영천(靈川).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동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42리이고 남쪽으로 웅천현(熊川縣) 경계까지 40리이며, 서쪽으로 창원부(昌原府) 경계까지 44리이고 북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4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4리이다.
【건치연혁】 가락국(駕洛國)이다. 혹 가야(伽倻)라 하기도 하였는데 뒤에 금관국(金官國)이라 고쳤다. 시조(始祖) 김수로왕(金首露王)으로부터 구해왕(仇亥王)까지 무릇 10대, 4백 91년을 왕국으로 내려왔다. 구해왕이 신라에게 항복하니 법흥왕(法興王)이 객으로 예대(禮待)하고 그 나라를 읍으로 만들어서 금관군(金官郡)이라 불렀다.
【군명】 가락(駕洛)ㆍ가야(伽倻)ㆍ금관(金官)ㆍ임해(臨海)ㆍ금주(金州)ㆍ금녕(金寧)ㆍ분성(盆城).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본래는 변한(弁韓) 땅인데, 뒤에 백제(百濟) 땅이 되었다.
익산군(益山郡)
동으로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10리, 북으로 여산군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까지 17리, 서쪽으로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22리, 서울로부터 4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다. 후조선(後朝鮮)의 임금 기준(箕準)은 기자의 41대 손인데,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에 떠서 남으로 내려가, 한지(韓地)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이곳을 병합하고, 이후부터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군명】 금마(金馬)ㆍ익주(益州).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4권
강원도(江原道)
본래 예맥(濊貊)의 지역이었는데, 후에 고구려와 신라의 소유로 되었다.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동쪽으로 바닷가까지 10리, 서쪽은 평창(平昌)군 경계까지 1백 59리, 횡성(橫城)현 경계까지 1백 90리, 서남쪽으로 정선(旌善)군 경계까지 90리, 남쪽으로 삼척부(三陟府) 경계까지 94리, 북쪽으로 양양부(襄陽府) 경계까지 60리인데, 서울과 거리는 6백 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예국(濊國)인데, 철국(鐵國) 또는 예국(蕊國)이라고도 한다.
【군명】 예국(濊國)ㆍ임둔(臨屯)ㆍ하슬라(何瑟羅)ㆍ하서량(河西良)ㆍ명주(溟州)ㆍ동원(東原)ㆍ임영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9리이고, 남쪽으로는 울진현(蔚珍縣) 경계까지 1백 9리다. 서쪽으로 경상도 봉화현(奉化縣) 경계까지 1백 50리이고, 같은 도 안동부 소천현(少川縣) 경계까지는 1백 37리며, 정선군(旌善郡) 경계까지는 95리다. 북쪽으로 강릉부 경계까지 37리인데, 서울까지는 6백 32리다.
【건치연혁】 본래 실직국(悉直國)이었는데, 신라 파사왕(婆娑王) 때에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지증왕(智證王) 6년 실직 군주(軍主)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만들었다.
【군명】 실직ㆍ척주ㆍ진주(眞珠).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동쪽으로 해안까지 12리, 남쪽으로 강릉부 경계까지 65리, 서쪽으로 인제현(麟蹄縣) 경계까지 55리, 북쪽으로 간성군(杆城郡) 경계까지 45리다.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1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익현현(翼峴縣) 이문현(伊文縣)이라 하기도 한다.
【군명】 익현(翼峴)ㆍ이문(伊文)ㆍ익령(翼嶺)ㆍ덕령(德寧)ㆍ양주(襄州)ㆍ양산(襄山).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5권
울진현(蔚珍縣)
동쪽은 해안까지 9리, 서쪽은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81리, 남쪽은 평해군(平海郡) 경계까지 48리, 북쪽은 삼척부(三陟府) 경계까지 44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5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이다. 고우이군(古亏爾郡)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을 삼았으며 고려조에서는 강등하여 현으로 하고 영(令)을 두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군명】 선사(仙槎)ㆍ우진야ㆍ고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원주목(原州牧)
동쪽은 평창군(平昌郡) 경계까지 1백 12리, 충청도 제천현(提川縣) 경계까지 52리, 남쪽은 충청도 충주(忠州) 경계까지 43리, 서쪽은 경기도 지평현(砥平縣) 경계까지 74리, 서남쪽은 경기도 여주(驪州) 경계까지 63리, 북쪽은 횡성현(橫城縣) 경계까지 3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이다.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
【군명】 평원(平原)ㆍ북원경(北原京)ㆍ일신(一新)ㆍ정원(靖原)ㆍ익흥(益興)ㆍ성안(成安)ㆍ평량경(平涼京).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동쪽은 양구현(楊口縣) 경계까지 89리, 남쪽은 홍천현(洪川縣) 경계까지 65리, 서쪽은 경기(京畿)의 가평현(加平縣) 경계까지 59리, 북쪽은 낭천현(狼川縣) 경계까지 64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맥국(貊國)인데, 신라의 선덕왕(善德王) 6년에 우수주(牛首州) 수(首)는 두(頭)라고도 쓴다. 로 하여 군주(軍主)를 두었다. 문무왕(文武王) 13년에는 수약주(首若州) 오근내(烏斤乃)라고도 하고 수차약(首次若)이라고도 한다. 라고 일컬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삭주(朔州)로 고쳤다가 뒤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군명】 우수(牛首)ㆍ수약(首若)ㆍ오근내(烏斤乃)ㆍ삭주(朔州)ㆍ광해(光海)ㆍ춘주ㆍ안양(安陽)ㆍ수춘(壽春)ㆍ봉산(鳳山).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평안도(平安道)
본래 조선(朝鮮)의 옛 땅이니, 천문(天文)으론 미성(尾星)과 기성(箕星)의 분야(分野), 곧 석목(析木)의 성좌(星座)이다. 《전한서(前漢書)》를 살펴보건대, “연(燕) 땅은 미성과 기성의 분야이다.” 하였으니, 낙랑(樂浪)과 현도(玄菟)도 마땅히 그에 속할 것이요, 또 말하기를, “현도와 낙랑은 무제(武帝) 때에 두었는데 다 조선 예맥(貊)ㆍ구려(句驪)의 만이(蠻夷)이다.” 하였으니, 본국을 통틀어 미성과 기성의 분야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평양부(平壤府)
동쪽으로 상원군(祥原郡) 경계까지 50리, 강동현(江東縣) 경계까지 47리, 남쪽으로 중화군(中和郡) 경계까지 36리, 서쪽으로 강서현(江西縣) 경계까지 57리, 증산현(甑山縣) 경계까지 72리, 북쪽으로 순안현(順安縣) 경계까지 49리, 자산군(慈山郡) 경계까지 61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태백산(太伯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檀君)이라 일컬었으니, 이것이 전조선이요, 주 무왕(周武王)이 상(商)을 이기고 기자(箕子)를 여기에 봉하니, 이것이 후조선이요, 전하여 41대 손 준(準)에 이르러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 험(險)은 검(儉)이라고도 쓰니, 바로 평양이다. 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漢) 나라의 조명(詔命)을 받들려 하지 않으니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사군(四郡)으로 만들고 왕험성으로 낙랑군(樂浪郡)을 삼았다.
【군명】 조선(朝鮮) 동쪽 해 뜨는 땅에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이름하였다. ○《사기(史記)》 주(注) 색은(索隱)에 이르기를, “조(朝)는 음이 조(潮)요, 선(鮮)은 음이 선(仙)이니 선수(汕水)가 있으므로 이름하였다.” 하였다. 왕검성(王儉城) 옛 기록에, 단군(檀君)은 이름이 왕검(王儉)이라고 하였다.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 《당서(唐書)》에, “평양을 또한 장안이라 이른다.” 했다.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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