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에서/옛날 지명들

삼국사기에 나타난 능안(能晏)과 욕돌역(褥突驛)

산골어부 2013. 12. 26. 15:31

 

우리나라의 역참제도(驛站制度)와 한국 무용사에 등장하는 중원경 욕돌역(褥突驛)과 무동인 능안(能晏)은 중원역사에서도 중요한 기록유산 중 하나이다. 최근에 중원경 욕돌역(褥突驛)을 충주시 신니면 옹원으로 추정하는 글들이 나타나지만, 욕돌역(褥突驛)에 대한 자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사기를 참고로 기술한 동사강목에 나타날 뿐이며, 욕돌역(褥突驛)이란 지명에 관한 자료나 근거는 없다. 조선시대에 등장하는 연원역,단월역, 대소역, 용원역 등과 달리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시대에 존재하는 역참제도와 관방체계는 단지 추정할 뿐이다. 그런데, 왜 ! 중원경 욕돌역(褥突驛)을 용원역(龍院驛)으로 추정하는 글들이 나타나고 있을까 ?

 

또한 중원경 역사에서 나타나는 능안(能晏)은 가야무를 춘 무동이다. 우륵과 능안은 가야와 연관된 인물들이다. 하지만 능안(能晏)은 가야의 춤을 추었다는 기록만 있기에 가야출신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륵과 능안으로 이어지는 중원경 내의 가야문화가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三國史記 第 三卷(삼국사기 제 03권)


제21대 炤知麻立干(소지마립간) <479~500 재위기간 21년>

九年春二月(구년춘이월) : 9년 봄 2월,

置神宮於奈乙(치신궁어내을) : 내을에 신궁을 설치하였다.

奈乙始祖初生之處也(내을시조초생지처야) : 내을은 시조가 처음 탄생한 곳이다.

三月(삼월) : 3월,

始置四方郵驛(시치사방우역) :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命所司修理官道(명소사수리관도) : 소관 관청으로 하여금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

秋七月(추칠월) : 가을 7월,

葺月城(즙월성) : 월성을 수리하였다.

冬十月雷(동십월뇌) : 겨울 10월,우레가 있었다.

 

三國史記 第 六卷(삼국사기 제 06권)

제30대 文武王 上(문무왕 상) <661~681 재위기간 20년>


八年春(팔년춘) : 8년

冬十月二十五日(동십월이십오일) : 겨울 10월 25일,

 

王還國次褥突驛(왕환국차욕돌역) : 왕이 귀국하는 길에 욕돌역에서 묵었다.

國原仕臣龍長大阿湌私設筵(국원사신용장대아찬사설연) :
그 때, 국원의 지방관인 대아찬 용장이 개인적으로 연회를 열어

饗王及諸侍從(향왕급제시종) : 왕과 여러 시종들을 접대하였다.

及樂作(급악작) : 음악이 시작되자

奈麻緊周子能晏年十五歲(내마긴주자능안년십오세) : 내마 긴주의 아들 능안이 나이 15세로서

呈加耶之舞(정가야지무) : 가야의 춤을 추었다.

王見容儀端麗(왕견용의단려) : 왕이 그의 얼굴과 거동이 단정하고도 고운 것을 보고

召前撫背(소전무배) : 앞으로 불러 등을 어루만지면서

以金盞勸酒(이김잔권주) : 금잔으로 술을 권하고

賜幣帛頗厚(사폐백파후) : 폐백을 후하게 주었다.

 

三國史記 第 四十六卷(삼국사기 제 46권)

列傳 第 六(열전 제 06) 强首(강수)


强首(강수) : 강수(强首)는
中原京沙梁人也(중원경사양인야) : 중원경 사량인(沙梁人)이다.
父昔諦奈麻(부석체나마) : 아버지는 나마 석체(昔諦)이다.
其母夢見人有角(기모몽견인유각) : 그 어머니가 꿈에 뿔이 달린 사람을 보고
而妊身及生(이임신급생) : 임신하여 낳았더니
頭後有高骨(두후유고골) : 머리 뒤편에 뼈가 불쑥 나와 있었다.
昔諦以兒就當時所謂賢者(석체이아취당시소위현자) :
석체가 아이를 데리고 당시 어질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

問曰(문왈) : 묻기를
此兒頭骨如此(차아두골여차) : “이 아이의 머리뼈가 이러하니
何也(하야) : 어떻습니까?” 하니,
答曰(답왈) : 대답하였다.
吾聞之(오문지) : “내가 들으니
伏羲虎形(복희호형) : 복희(伏羲)는 호랑이 모습이고,
女媧蛇身(여왜사신) : 여와는 뱀의 몸이며,
神農牛頭(신농우두) : 신농(神農)은 소의 머리 같았고,
皐陶馬口(고도마구) : 고요(皐陶)는 입이 말과 같았으니
則聖賢同類(칙성현동류) : 성현은 다 같은 유(類)로서
而其相亦有不凡者(이기상역유부범자) : 그 골상도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은 바가 있었다.

 

동사강목

무진년 신라 문무왕 8년, 고구려 왕 장 27년 ○ 이해에 고구려가 망하였다(당 고종 총장(總章) 원년, 668)

9월

○ 신라 왕이 돌아오면서 욕돌역(褥突驛)지금은 미상 에 도착하니, 국원경(國原京 지금의 충주(忠州))의 사신(仕臣) 용장(龍長)이 왕을 위하여 향연(享宴)을 베풀었다.

그때 악(樂)을 베풀었는데, 내마 긴주(緊周)의 아들 능안(能晏)이 나이 15세로 가야의 춤을 추었다. 용모와 거동이 단아하여 왕이 앞으로 불러 등을 어루만지고 후한 폐백을 내려 주었다.

 

능안고개(디지털 충주문화대전)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노은면 법동리를 연결하는 고개.

[명칭유래]

문숭리 능안골에 위치하고 있는 고개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일명 사기점재, 토막재, 토현(土峴)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자연환경]

충주시 신니면과 음성군의 생극면 경계에 수레의산[679m]이 있으며, 수레의산 동쪽의 신니면노은면 경계에는 498고지가 있다. 498고지의 동쪽으로 웃고개, 능안고개, 숭선고개, 418고지 등이 차례로 줄을 지어 솟아 있다. 능안고개는 높이 약 300m 정도이며, 498고지와 418고지 간의 안부에 위치한다. 서쪽의 웃고개는 문숭리 숭선마을에서 서덕1교를 건너 법동리 양지말로 가는 고개이고, 동쪽의 숭선고개(일명 숭선재, 또는 숭선현)는 문숭리 숭선마을에서 노은면 안락리 서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현황]

능안고개는 신니면 문숭리 숭선마을에서 노은면 법동리 사냥골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문숭리 능안골과 마리골 사이의 남사면에는 다수의 고려장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도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고 현재 주변 지역에서는 활석들이 흩어져 있다.

또한 능안고개 중간 쯤에는 백자요지가 있다. 고갯길을 따라 좌우측으로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져 있는데 사기를 굽던 곳이라 하여 사기점재라고도 한다. 사기점재의 가마터 주변은 인삼밭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물길에 의해 흔적이 드러났는데 사기점재 요지에서는 백제의 대접, 사발, 제기편 등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 현재 신니면 문락리 동락에서 노은면 안락리 안락골로 통하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도로확장 사업으로 가마터가 훼손되고 있어 보호의 필요성이 지적되었다. 능안고개 남쪽에 유적지인 숭선사지가 있다.

 

[충주지명유래] 신니면

유 래


▣ 신니-면(薪尼面)
【면】충주시 13면의 하나. 본래 충주군 지역으로서 신니곡면(申尼谷面) 또는 신니면(申尼面)이라 하여 본리(本里), 수청(水淸), 신책(新冊), 화악(化岳), 추동(楸洞), 지석(支石), 신단(新丹), 내포(內浦), 상숭(上崇), 중숭(中崇), 상사(上寺), 점촌(店村), 문내(文內), 회문(回文), 동락(同樂), 남악(南岳), 모도원(毛陶院)의 17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석면(薪石面)의 광벌(廣伐), 탄현(炭峴), 수월(水越), 동화(洞花), 대화(大化), 흑석(黑石), 팔송(八松), 봉황(鳳凰), 선동(仙洞), 용당(龍堂), 광평(廣坪), 외룡(外龍), 내룡(內龍), 온수(溫水), 마제(馬蹄), 학성(鶴城), 불견(不見), 당곡(堂谷), 원대(院垈), 산직(山直), 안항(顔巷), 화산(化山), 석포(石浦)의 23개리와 덕면(德面)의 석우리(石隅里), 주류면(周柳面) 창전일리(倉田一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석(新石), 신니(申尼)의 이름을 따서 신니면(薪尼面)이라 칭하고 신청(新淸), 화석(化石), 문숭(文崇), 문락(文樂), 모남(毛南), 광월(廣越), 대화(大花), 송암(松岩), 선당(仙堂), 원평(院坪), 용원(龍院), 마수(馬水), 견학(見鶴), 화안(花顔)의 14개리로 개편 관할하고 있음. 1973년 광월리(廣越里) 무수(無愁)마을은 음성군 음성읍으로 편입되었고 1981년 1월 1일 마수리(馬水里) 신석(新石)마을을 신석(新石)과 온수(溫水)로 구분하였으며 1982년 12월 31일 화안리(花顔里)의 산정(山亭), 산안(山顔) 2개마을과 1984년 마수리(馬水里) 온수(溫水)마을이 율곡사업지구공사로 폐쇠되었고 1985년 1월 1일 면소재지인 용원리(龍院里) 외룡(外龍)마을 1, 2구로 구분하고 1990년 1월 1일 견학리(見鶴里) 행촌(杏村)을 1, 2구로 분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충주시내 서편에 위치하며 동쪽은 주덕읍(周德邑), 서쪽은 음성군(陰城郡) 생극면(笙極面), 남쪽은 음성군 음성읍(陰城邑), 북쪽은 노은면(老隱面)과 인접하고 있음. 1997년 11월 20일 현재 1,570가구 5,264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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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원리(龍院里)

⊙ 용원-리(龍院里)【리】신니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신석면(薪石面)지역으로 용안리(龍安里) 또는 용원(龍院)이라고 부르다가 외룡동(外龍洞)과 내룡동(內龍洞)으로 나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니면(申尼面) 내포리(內浦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용원리(龍院里)라 하고 신니면(薪尼面)에 편입됨. 신니면의 면소재지로서 충주시내에서 약 20km지점으로 신니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음. 자연마을로 장터, 새말, 안용원(內龍), 바깥용원(外龍), 아랫말, 웃말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 외용 1리

●외용1-리【마을】용원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신니면의 행정중심지로 신니면사무소, 신니파출소, 신니우체국, 신니농협, 용원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충주시내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노은면으로 갈리는 삼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1997년 10월 조사시 126가구, 408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장터거리와 새말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바깥-용원[외용동]【마을】용원 바깥쪽에 있는 마을. 신니면 면소재지이며 이 관할내에는 장터거리와 서편에 있는 새말이 있음.

●용안역-터【터】용원리에 있던 역참(驛站) 터. 역참이란 옛날에 국가에서 문서의 전달과 물자수송을 돕고 때로는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행하였으며 충주지방에는 정9품(正九品)의 도찰방(道察訪)아래 속역(屬驛) 14개소가 있었음.

* 외용 2리

●외용2-리【마을】용원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외용 1리에서 가섭산 쪽으로 형성된 마을. 자연마을로 분투골 등이 있으며 1997년 10월 조사시 99가구, 369명의 주민이 살고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분투-골1【마을】용원 왼쪽으로 향교가 있는 마을.

* 내룡

●내-룡【마을】용원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외용 1리에서 주덕읍 방면인 신석과 학성사이에 자리잡은 마을. 1997년 10월 조사시 86가구, 299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꽃담말, 웃말, 아랫말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꽃-샘[꽃담말]【마을】안용원 북동쪽으로 있는 마을.
●안-용원[내용동]【마을】용원 안쪽에 있는 마을. 외룡 남쪽 약 1㎞ 지점에 있음. 이 관할에는 동북쪽에 있는 꽃담말과 웃말, 아랫말이 있음.

견학리(見鶴里)

⊙ 견학-리(見鶴里)【리】신니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신석면(薪石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불견리(不見里), 학성리(鶴城里), 마제동(馬蹄洞)과 주류면(周柳面) 창전 일리(倉田一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불견과 학성의 이름을 따서 견학리(見鶴里)라 하여 신니면에 편입되었음. 신니면에서 가장 동쪽으로 주덕읍과 접경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못보기, 학성, 안학성, 새들, 성밑, 벌담 등이 있음.

* 학성

●학-성【마을】견학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향촌 1리와 용원리 사이에 3번국도를 중심으로 넓은 들에 형성된 마을. 1997년 10월 조사시 87가구, 323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못보기, 학성, 안학성, 검무골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검무-골[갬무골]【마을】학성 북서쪽에 있는 마을.
●못-보기[신성, 불견리]【마을】갬보들 서북쪽에 있는 마을.
●안학-성(內鶴城)【마을】학성 남쪽으로 있는 마을.
●학-성(鶴城)[광대들기, 학성동]【마을】견학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마을 터전이 넓고 주변에 학이 잘모여 드는 곳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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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촌 1리

●향촌-1리【마을】견학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학성과 향촌 2리 사이에 3번국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마을. 1997년 10월 조사시 64가구, 2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살구나무백이, 성밑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견학리-토성(見鶴里土城)【터】성밑마을 뒷산에 있는 장방형의 토성으로 내외이중성(內外二重城)이었던 것 같으나 현재는 내성(內城)의 삼면(三面)만 남아 있고 성내(城內)에서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인 것으로 보이는 석기와 석도 등이 출토되었음. 둘레 약 140m 정도임.

●살구나무-백이【마을】새들 북서쪽 서울가는 큰 길가에 있는 마을로 넓은 벌판안에 자리잡고 있음. 옛날 근처에 살구나무가 많았다고 함.
●성-밑[성하동]【마을】학성 동남쪽에 있는 마을. 마을 뒤쪽으로 산등성이가 성처럼 둘러싸고 있음.
●성하-동(城下洞)【마을】→ 성밑.

* 향촌 2리

●향촌-2리【마을】견학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신니면의 가장 동쪽으로 주덕읍과 경계에 형성된 마을. 1997년 10월 조사시 39가구, 137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새들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새-들【마을】살구나무백이 남동쪽으로 새로 이룬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