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국망산(國望山) 지명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중 충주목에 대한 내용 중에서-조선 중종 25년(1530)
【산천】 대림산(大林山)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말흘산(末訖山) 주 북쪽 30리에 있다. 심항산(心項山)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주 서쪽 30리에 있다. 망이산(望夷山) 주 서쪽 91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천룡산(天龍山) 주 서쪽 5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풍류산(風流山) 주 남쪽 23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주 서쪽 45리에 있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
승정원일기 고종 28년 신묘(1891, 광서17)
6월 4일(병신) 맑음 |
좌목 | |
○ 팔도 유생인 유학 김사덕(金思悳)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성상께서 양성해 주셔서 각각 제 처소를 얻었고 인재를 기르시는 교화를 넉넉히 입었으니, 바로 교화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공경하고 떠받드는 정성에 있어서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으나, 천하의 사리는 마땅히 행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그렇게 되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은 조정과 민간에서 함께 알고 있는 바이며, 이치상 당연한 것은 신하들이 함께 원하는 바입니다. 신들은 마땅히 행해야 할 일과 이치상 당연한 것을 가지고 이에 감히 머리를 맞대고서 아랫사람의 말까지 들어주시는 성상께 우러러 호소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작은 것일망정 채납(採納)해 주소서. 일찍이 듣건대, 옛날 제왕가(帝王家)는 행궁(行宮)을 유람했던 장소나 머물렀던 지역에 더러 두어서 후세에 그런 사실을 기억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건립한 행궁이 많은데, 수원(水原)과 과천(果川)에도 있고 온양(溫陽)과 천안(天安)에도 있고 서도(西道)와 북도(北道)에도 있으니, 지금 하나하나 들어서 아뢸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미(寒微)할 때의 잠저(潛邸)가 있던 곳에도 행궁을 건립하여 사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많이 있고, 또한 잠깐 주필(駐蹕)한 곳에도 모두 행궁을 두어서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이것은 유람을 즐기고 토목 공사를 좋아해서 세운 것이 아니고, 다만 한 번 머물렀던 곳을 중히 여겨서 그 행적을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충청도 충주(忠州)국향산(國向山) 아래의 노은면(老隱面)신흥동(新興洞)은 바로 우리 중궁 전하께서 3개월 동안 머물러 계셨던 곳입니다. 하늘이 도우셔서 성덕(聖德)이 더욱 밝아지셨고, 옥체(玉體)가 건강하시게 되어 보위(寶衛)가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중궁의 교화가 널리 퍼져 지나는 고을마다 부역을 탕감하고 조세를 견감해 주셨으니, 신민(臣民)들이 어찌 감격하고 칭송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한 번 환궁한 이래로 해와 달이 더욱 밝아졌고 곡식이 여러 해 동안 잘 익었으며, 태평한 정치를 이룩하여 팔방(八方)이 아무 일이 없었으니, 아, 훌륭합니다. 우리 국가의 만억년(萬億年) 무한한 복이 다시 천백세(千百世) 유구한 복의 터전이 되었으니, 아, 아름답지 않습니까. 지금 이 신흥동은 미천할 때의 잠저도 아니고, 또한 잠깐 주필했던 곳도 아닌, 바로 3개월 동안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러니 수원과 과천에 행궁을 건립한 것과는 특히 다른 점이 있으며, 도리어 온양과 천안에 행궁을 둔 것과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환궁하고 나서 10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까지도 행궁을 건립하여 행적을 드러내는 거조가 없으니, 아무리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라도 산촌(山村)과 야옥(野屋)의 사이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러러 사모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신민이 답답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조정의 성전(盛典)에도 흠결이 되는 것입니다. 신들이 감히 마땅히 행해야 할 일과 이치상 당연한 것으로 우러러 성상께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우리 동궁 저하는 타고난 효성으로 보령(寶齡)을 경축하고 휘호(徽號)를 선양하여 친히 표리(表裏)를 올리고 능히 그 정성을 폈습니다. 어버이의 진짓상을 돌보고 주무실 때 문안드리는 일은 문왕(文王)이 세자로 있을 때의 성덕(聖德)을 본받아 훌륭한 명성이 사방에 드러나서 백성들의 기쁨에 겨운 목소리가 팔역(八域)에 넘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들이 지금 행궁의 건립을 요청하는 것은 중궁 전하의 성덕에서 나온 것이며 우러러 동궁 저하의 효성스러운 생각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전하의 지극히 어질고 자애스러운 마음으로 굽어살피시어 훤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에 신들이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우러러 숭엄하신 성상께 번거롭게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마땅히 행해야 하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사리를 깊이 유념하시어 사람이 미천하다고 하여 말까지 폐하지 마시고, 특별히 윤허를 내리심으로써 함께 칭송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와 같이 한목소리로 의론하는 것이 괴이할 것 없으나, 일을 확대시킬 필요도 없다. 그대들은 그리 알고 물러가라.” 하였다. |
포천 국망봉(國望峰) 지명유래(향토문화대전)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 ·장암리와 가평군 북면 적목리 경계에 있는 산.
『여지도(輿地圖)』에는 관음산(觀音山) 동쪽에 국망산(國望山)으로, 『팔도분도(八道分圖)』에는 관음산 동쪽에 망국산(望國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망국산은 영평현 동쪽 50리에 있고 남쪽으로 화악(華岳)과 이어져 있다.”라고 되어 있다. 국망봉은 산이 크고 능선이 억세며 골이 깊은 산이다.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로 들어서면 독수리가 날아가는 듯 거대한 산이 병풍처럼 막아서고 있는데 이 산이 국망봉이다. 국망봉은 포천시의 무수한 산 중 제일 높은 산이다.
국망봉이라는 명칭은 궁예(弓裔)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로는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고 철원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의 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날로 폭정이 심해졌다. 그러자 부인 강씨는 한사코 궁예에게 간언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강씨를 강씨봉 아래 마을로 쫒아냈다. 그 후 왕건에 패한 궁예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강씨를 찾았지만 부인 강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회한과 자책에 빠진 궁예가 국망봉에 올라 도성 철원을 바라보았다 하여 국망봉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두 번째로는 태봉국 궁예와 왕건(王建)이 싸울 때 궁예의 부인 강씨가 이곳으로 피난을 와 토굴을 파고 살면서 태봉국의 수도 철원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는 궁예가 어릴 적에 철원을 바라보며 “국가 도읍지는 여기로구나.” 하였다고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안동 국망봉(國望峰) 지명유래(향토문화대전)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에 있는 산.
퇴계 이황(李滉)은 국망봉에서 한양을 한 눈에 볼 수 있었고 축지법으로 왕래하면서 국사(國事)를 논의하였다 한다. 이황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있을 때, 간신배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명종을 국망봉에서 관망하여 축지법으로 그 곳에 당도하여 구했다고 한다. 또한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국망봉에 단을 쌓고 매년 10월 24일이면 북쪽을 바라보고 절하기를 30년 동안 했으며 돌아가신 단종을 애도한 곳이기도 하다. 국망봉은 이황과 이계양의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추측된다.
국망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대부분 소나무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다. 측량표지석이 있는 국망봉 정상 부근에는 깔딱고개가 있으며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 국망봉은 서쪽 직선으로 500여m 지점에 위치한다. 도산온천 주차장 북편 고가옥의 옆의 고목나무를 지나 나있는 오솔길은 소나무 터널로 이루어진 산책길로 각광받고 있다. 북쪽으로는 동악골, 남쪽으로는 배미골 가는 길이며 배미골 능선 위에는 키작은 토종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북한산 만경대의 지명유래(한국지명유래집)
북한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 일명 한산, 삼각산(三角山) 또는 화산이라 불렀으며 신라 때에
는 부아악이라고도 하였다. 옛날 개성의 송도에서 한양으로 오다가 이 산을 바라보면 백운대(白雲臺), 만경대(萬景臺), 인수봉(仁壽峰)의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이곳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고 한다. 또한 무학대사(無學大師) 이성계를 위해 도읍지를 정할 때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올랐다가 서남쪽으로 가서 비봉에 이르렀다고 하여 만경대를 일명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비봉은 진흥왕순수비가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백산 국망봉(國望峰) 지명유래(한국지명유래집)
충청북도 단양군의 남동쪽에 위치하는 소백산의 능선에 위치하는 산이다(고도:1,421m). 가곡면과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걸쳐 있으며, 비로봉 다음으로 높은 고봉이며 남서쪽으로 연화봉, 북동쪽으로는 형제봉에 이어진다.
『여지도서』(영춘)에 의하면, "소백산 이현의 동면 40리에 있으며, 강원도 강릉부 오대산에 이르고, 경상도 순흥과 접해 있으며, 국망봉이 소백의 최정상이다."고 수록하고 있다. 국망봉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해동지도』에는 영춘현 남쪽 남천의 상류에 소백산, 남천사(南川寺)와 함께 '국망산(國望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단양군의 가곡면과 영주군의 순흥면에 걸쳐 있는 국망봉(1,420m)으로 수록되어 있다.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 유래가 전해진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의 왕자 마의태자가 신라를 회복하려다 실패하자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개골산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곳을 국망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소백산 국망봉(國望峰) 지명유래(한국지명유래집)
경상북도 영주시의 순흥면 덕현리에 있는 산이다(고도 : 1,421m). 소백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에 위치하고 있다. 주봉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충신이며 효자인 배순(裵純)과의 관련설이 전해진다. 그가 '국상을 당했을 때 이 산에서 궁성을 바라보며 곡하고, 임금의 명복을 빌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여지도서』(순흥)에 소개된 주세붕(1495~1554)의 시에서도 국망봉을 살펴볼 수 있다. "국망봉 산머리에서 한양을 바라보니/ 한양은 보이질 않고 용문(龍門)만 보이는구나/ 용문 서쪽 자락에 오색구름 뭉게뭉게 피어나니/ 흰머리 외로운 산하의 두 눈에 눈물 자국 퍼지네."라는 것이며 이 기록은 지명의 역사가 이황보다 앞서 풍기군수를 지냈던 주세붕에게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주세붕이 국망봉을 명명하여 시에 쓰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지명유래집』(충청)에서는 마의태자 관련설을 언급하고 있다.
국망봉(國望峰)과 배점(裵店) 지명유래 (영주문화원)
순흥읍내에서 초암사(草庵寺)로 가는길 3.5㎞되는 곳에 세그루의 수령 600년 가량되는 느티나무가 서있다. 이곳을 이름하여 세상사람들이 삼괴정(三槐亭)이라한다. 이나무의 남쪽 도로변에 최근 이전한 적은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원래 이것이 배점 국민학교 운동장 서편에 있던 것을 학생들의 운동에 지장이 있다하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 정려각에 매년 춘추로 동신(洞神)으로 모시는 충신이며 효자인 배순(裵純)이란 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 배순이란 분은 지금으로부터 한 500년전에 어디에서 온지 모르는 분이 이곳에 와서 대장간을 차려 놓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 양심적으로 수요자에게 공급하였으며 행실이 착하고 특히 어버이에게 효도가 지극 하였으며 조상을 모시는 정성도 지극하였다. 그 일례를 들면 가을에 타작을 할 때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곡식은 다른 마당에서 정결하게 타작을 해서 보관했다. 당시는 아마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창건하는 때이라 모든 철물을 이분이 정성껏 공급함으로 상인이나 유림사회(儒林社會)에서도 칭찬이 자자해서 퇴계선생(退溪先生)께서 이사람을 불러보시고 칭찬했었다. 퇴계선생이 돌아가심에 쇳곳으로 상(像)을 만들어 놓고 삼년복(三年服)을 입었으며 선조대왕이 붕어(崩御)하시자 매삭망(每朔望)에 정성들여 장만한 음식을 들고 뒷산에 올라 북쪽 궁성(宮城)을 향해 곡제사(哭祭祀)를 3년동안 지냈다. 그 슬픈소리가 궁안에 까지 들리어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게 되었다고하며 그가 음식을 들고 산에 오를 때 밟은 바위에 아직도 나막신 자욱이 남아있으며 궁성을 바라보며 곡(哭)했다는 산은 뒷사람들이 국망봉이라 한다. 또 배순의 점방이 있던 곳이라 하여 관명(官名)은 평장동이나 모두들 배점(裵店)이라고 동명(洞名)을 부른다. 78살을 살고 죽을 때 맑은날에 큰비가 오고 그의 앞뜰에는 갈가마귀떼가 모여 들어 슬피울며 천하의 효자요, 충신이 운명하는 것을 슬퍼했다고하며 또 일설에는 그의 처가 어느날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기집을 보니 집이 모두 화염(火焰)에 쌓여 타고 있는데 그의 남편이 화염에 쌓여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고 황망히 집에 와보니 집은 아무일도 없었으며 사랑방에 가보니 부군이 평상시대로 누워있었는데 운명(殞命)했더라는 것이었다. 서울에 가면 세종로 을지로등 옛 위인의 이름을 따서 거리이름을 지어 그분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이것과 견주어볼 때 소백산골에 500년전 유림의사회 속에서 근본도 모르는 사.농.공.상의 계급사회안에 공인비치로서 양반도 유생도 아닌 이분이 퇴계와 같은 도덕군자(道德君子)의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행실이 얼마나 돈독(敦篤)했다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후에 그분의 덕을 기리기 위해 그분이 살던 마을의 이름을 배점(裵店)이라 하며 또 그분이 궁성을 바라보며 당시의 임금님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여 국망봉(國望峰)이라 했으니 이분의 덕이야 오백추(五百秋)에 길이 남고 있음을 알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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