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낭자곡성(娘子谷城)과 낭성(娘城)이란 지명에 대한 논란은 청주(淸州)와 충주(忠州)로 나누어 해석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낭성(娘城)은 신라의 서원경이었던 청주로 기술되어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진흥왕과 우륵에 관하여는 신라의 중원경이었던 충주로 기술되어 있다. 낭자곡성(娘子谷城)은 신라 탈해왕과 백제 다루왕 때 나타나는 기록이고, 낭성(娘城)은 진흥왕 때 나타나는데, 신라 진흥왕은 한강유역인 고구려의 국원성에 국원소경을 설치하기 이전에 우륵을 낭성(娘城)으로 불러 하림궁에서 가야금을 연주케 했다. 그 후에 충주에 국원소경을 만들고,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으로 이주시킨다.
낭성(娘城)이란 지명은 낭자곡성(娘子谷城)과 유사할 뿐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청주목의 군명에서 낭비성(娘臂城)과 낭성(娘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낭자곡성(娘子谷城)과 낭성(娘城)이란 지명에 대한 논란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충주목의 연혁에서 "본래는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였다. 낭자성(狼子城)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낭자곡성(娘子谷城)이란 위치가 갑짜기 충주로 변경되는 혼란을 겪는다. 또한 우륵의 출생지에 대한 논란에서도 성열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이는 각 지방마다 전설과 민담을 근거로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성열현이나 하림궁에 대한 위치도 다만 추정만 할 뿐이다.
성열현이나 하림궁에 대한 다산 정약용과 단재 신채호 등의 주장들도 그 일설의 한 부분일 뿐이며,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전설과 민담 등의 자료를 참조하여 역사를 추리한 소견에 불과한데, 이를 정설인 역사적 사실로 과장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고서에 나타난 것들도 그 진실성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래된 기록이기에 그를 참조할 뿐인데, 마치 그 기록을 역사적 사실처럼 간주하고 정설로 인정하는 것이 기존의 역사관일 뿐이다. 언젠가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진흥왕이 살던 시기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쓴 시기의 연대 차이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를 기술한 것이지만,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오늘날에는 볼 수없는 더 많은 당시의 역사자료을 참고했다는 것이다. 성열현에 대한 논란처럼 지방의 향토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특정용역을 맡은 역사학자들까지도 어용학자가 되어 역사를 왜곡하는 사례는 참으로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낭자곡성(娘子谷城)과 낭성(娘城)에 대한 역사 기록들을 다시금 정리해해본다.
三國史記 第 一卷(삼국사기 제 01권) 新羅本紀 第 一(신라본기 제 01)
004.脫解尼師今(탈해니사금)
제4대 脫解尼師今(탈해니사금) <57~80 재위기간 23년>
五年秋八月(오년추팔월) : 5년, 가을 8월,
馬韓將孟召以覆嚴城降(마한장맹소이복엄성강) :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七年冬十月(칠년동십월) : 7년, 겨울 10월,
百濟王拓地至娘子谷城(백제왕척지지낭자곡성) :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遣使請會(견사청회) : 사신을 보내 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王不行(왕불행) : 왕은 가지 않았다.
八年秋八月(팔년추팔월) : 8년 가을 8월,
百濟遣兵攻蛙山城(백제견병공와산성) :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
又攻狗壤城(우공구양성) : 백제가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자 .
王遣騎二千擊走之(왕견기이천격주지) : 왕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十年(십년) : 10년,
百濟攻取蛙山城(백제공취와산성) :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留二百人居守(유이백인거수) :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尋取之(심취지) :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十四年(십사년) : 14년,
百濟來侵(백제래침) : 백제가 침범하였다.
十八年秋八月(십팔년추팔월) : 18년 가을 8월,
百濟寇邊(백제구변) :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遣兵拒之(견병거지) :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十九年(십구년) : 19년,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
百濟攻西鄙蛙山城(백제공서비와산성) :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拔之(발지) : 점령하였다.
二十年秋九月(이십년추구월) : 20년 가을 9월,
遣兵伐百濟(견병벌백제) :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復取蛙山城(복취와산성) :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自百濟來居者二百餘人(자백제래거자이백여인) :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盡殺之(진살지) : 모두 죽였다.
三國史記 第 二十三卷(삼국사기 제 23권) 百濟本紀 第 一(백제본기 제 01)
087.多婁王(다루왕)
제2대 다루왕<多婁王 28~77 재위기간 49년>
三年冬十月(삼년동십월) : 3년 겨울 10월,
東部屹于與靺鞨戰於馬首山西克之(동부흘우여말갈전어마수산서극지) :
동부 흘우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였다.
殺獲甚衆(살획심중) :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생포한 자가 매우 많았다.
王喜(왕희) : 왕이 기뻐하여
賞屹于馬十匹租五百石(상흘우마십필조오백석) : 흘우에게 말 열 필과 벼 5백 석을 상으로 주었다.
四年秋八月(사년추팔월) : 4년 가을 8월,
高木城昆優與靺鞨戰大克(고목성곤우여말갈전대극) : 고목성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斬首二百餘級(참수이백여급) :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秋九月(추구월) : 가을 9월,
靺鞨攻陷馬首城放火(말갈공함마수방화성) : 말갈이 마수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燒百姓廬屋(소백성려옥) :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다.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
又襲甁山柵(우습병산책) : 그들이 또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二十八年(이십팔년) : 28년,
秋八月(추팔월) : 가을 8월,
靺鞨侵北鄙(말갈침북비) :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二十九年春二月(이십구년춘이월) : 29년 봄 2월,
王命東部(왕명동부) :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築牛谷城(축우곡성) : 우곡성을 쌓아
以備靺鞨(이비말갈) : 말갈을 방어하게 하였다
三十六年冬十月(삼십육년동십월) : 6년 겨울 10월,
王拓地至娘子谷城(왕척지지낭자곡성) : 3왕이 낭자곡성까지 토지를 개척하였다.
仍遣使新羅請會(잉견사신라청회) :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요청하였으나,
不從(불종) : 신라는 거절하였다.
三十七年(삼십칠년) : 37년,
王遣兵攻新羅蛙山不克城(왕견병공신라와산성불극) :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移兵攻狗壤城(이병공구양성) : 군사를 옮겨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新羅發騎兵二千(신라발기병이천) : 신라는 기병 2천 명을 동원하였으나
逆擊走之(역격주지) : 우리 군사는 이들과 대적하여 물리쳤다.
三十九年(삼십구년) : 39년,
攻取蛙山城(공취와산성) :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留二百人守之(유이백인수지) : 군사 2백 명을 그곳에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尋爲新羅所敗(심위신라소패) :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신라에게 쫓겨났다.
四十三年(사십삼년) : 43년,
遣兵侵新羅(견병침신라) :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四十七年秋八月(사십칠년추팔월) : 47년 가을 8월,
遣將侵新羅(견장침신라) : 장수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四十八年冬十月(사십팔년동십월) : 48년 겨울 10월,
又攻蛙山城拔之(우공와산성발지) :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四十九年秋九月(사십구년추구월) : 49년 가을 9월, 와산성을 신라가 회복하였다.
蛙山城爲新羅所復(와산성위신라소복) :
三國史記 第 二卷(삼국사기 제 02권) 新羅本紀 第 二(신라본기 제 02)
008.阿達羅尼師今(아달라니사금)
제8대 阿達羅尼師今(아달라니사금) <154~184 재위기간 30년>
三年夏四月(삼년하사월) : 3년 여름 4월,
隕霜(운상) : 서리가 내렸다.
開雞立嶺路(개계입령로) : 계립령에 길이 개통되었다.
四年春二月(사년춘이월) : 4년 봄 2월,
始置甘勿馬山二縣(시치감물마산이현) : 감물현과 마산현 두 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三月(삼월) : 3월,
巡幸長嶺鎭(순행장영진) :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勞戍卒(노수졸) :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各賜征袍(각사정포) :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五年春三月(오년춘삼월) : 5년 봄 3월,
開竹嶺(개죽령) : 죽령이 개통되었다.
倭人來聘(왜인래빙) : 왜인이 예방해왔다.
十二年冬十月(십이년동십월) : 12년 겨울 10월,
阿湌吉宣謀叛(아찬길선모반) :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發覺(발각) : 발각되자
懼誅亡入百濟(구주망입백제) : 처형을 두려워하여 백제로 도망갔다.
王移書求之(왕이서구지) : 이 글을 보내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百濟不許(백제불허) : 백제가 응하지 않았다.
王怒出師伐之(왕노출사벌지) : 왕이 노하여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百濟嬰城守不出(백제영성수불출) : 백제는 성을 닫고 수비하며 나오지 않았다.
我軍粮盡乃歸(아군량진내귀) : 우리 군사는 식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十四年秋七月(십사년추칠월) : 14년 가을 7월,
百濟襲破國西二城(백제습파국서이성) :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虜獲民口一千而去(로획민구일천이거) : 주민 1천 명을 잡아 갔다.
八月(팔월) : 8월,
命一吉湌興宣領兵二萬伐之(명일길찬흥선영병이만벌지) :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王又率騎八千自漢水臨之(왕우율기팔천자한수림지) :
또한 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 곳에 도착하였다.
百濟大懼(백제대구) : 백제는 크게 두려워 하여
還其所掠男女乞和(환기소략남녀걸화) :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三國史記 第 四卷(삼국사기 제 04권) 新羅本紀 第 四(신라본기 제 04)
024.眞興王(진흥왕)
제24대 眞興王(진흥왕) <540~576 재위기간 36년>
六年秋七月(육년추칠월) : 6년 가을 7월,
伊湌異斯夫奏曰(이찬이사부주왈) :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國史者(국사자) :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記君臣之善惡(기군신지선악) :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示褒貶於萬代(시포폄어만대) :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不有修撰(불유수찬) :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後代何觀(후대하관) :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王深然之(왕심연지) : 왕이 깊이 동감하고
命大阿湌居柒夫等(명대아찬거칠부등) :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廣集文士(광집문사) : 선비들을 널리 모아
俾之修撰(비지수찬) :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九年春二月(구년춘이월) : 9년 봄 2월,
高句麗與穢人攻百濟獨山城(고구려여예인공백제독산성) :
고구려가 예와 함께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百濟請救(백제청구) :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王遣將軍朱玲領勁卒三千擊之(왕견장군주영영경졸삼천격지) :
왕은 장군 주령을 보냈다. 주령은 정병 3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殺獲甚衆(살획심중) : 주령은 포로를 많이 잡아 왔으며 죽인 자도 매우 많았다.
十一年春正月(십일년춘정월) : 11년 봄 정월,
百濟拔高句麗道薩城(백제발고구려도살성) :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三月(삼월) : 3월,
高句麗陷百濟金峴城(고구려함백제김현성) :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王乘兩國兵疲(왕승양국병피) :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命伊湌異斯夫出兵擊之(명이찬이사부출병격지) :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取二城增築(취이성증축) :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留甲士一千戍之(유갑사일천수지) :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十二年春正月(십이년춘정월) : 12년 봄 정월,
改元開國(개원개국) :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
三月(삼월) : 3월,
王巡守次娘城(왕순수차낭성) : 왕이 순행 중에 낭성에서 묵으며,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문우륵급기제자니문지음락) :
3우륵과 그의 제자인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特喚之(특환지) : 특별히 그들을 초청하였다.
王駐河臨宮(왕주하임궁) : 왕은 하림궁에 머무르며
令奏其樂(영주기락) :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二人各製新歌奏之(이인각제신가주지) : 두 사람은 각각 새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先是(선시) : 이에 앞서
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가야국가실왕제십이현금) : 가야국의 가실왕이 2현금을 만들어
以象十二月之律(이상십이월지률) : 열 두 달을 음률로 상징하게 하였다
乃命于勒製其曲(내명우늑제기곡) : 우륵으로 하여금 이에 맞는 악곡을 짓게 했었다.
及其國亂(급기국란) : 그러나 가야국이 혼란스러워지자
操樂器投我(조락기투아) :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 나라로 귀순해왔었다.
其樂名加耶琴(기락명가야금) : 이에 따라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이라고 하였다.
王命居柒夫等侵高句麗(왕명거칠부등침고구려) :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乘勝取十郡(승승취십군) : 이를 기회로 열 곳의 군을 빼앗았다.
十三年(십삼년) : 13년,
王命階古注知萬德三人(왕명계고주지만덕삼인) : 왕이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으로 하여금
學樂於于勤(학락어우근) : 우륵에게서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于勒量其人之所能(우늑량기인지소능) :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참작하여,
敎階古以琴(교계고이금) :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敎法知以歌(교법지이가) :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치고,
敎萬德以舞(교만덕이무) :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業成(업성) : 학업이 끝나자
王命奏之曰(왕명주지왈) : 왕이 그들로 하여금 연주하게 하고는,
與前娘城之音無異(여전낭성지음무이) : "전일 낭성에서 듣던 소리와 다름이 없다"라고 말하며,
厚賞焉(후상언) : 후하게 상을 주었다.
十四年春二月(십사년춘이월) : 14년 봄 2월,
王命所司築新宮於月城東(왕명소사축신궁어월성동) :
왕이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黃龍見其地(황용견기지) : 그 터에서 황색의 용이 나타났다.
王疑之(왕의지) :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改爲佛寺(개위불사) : 궁궐을 고쳐 절을 짓고,
賜號曰皇龍(사호왈황용) : 황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秋七月(추칠월) : 가을 7월,
取百濟東北鄙(취백제동북비) :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置新州(치신주) : 신주를 설치하였다.
以阿湌武力爲軍主(이아찬무력위군주) : 아찬 무력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
娶百濟王女爲小妃(취백제왕녀위소비) : 왕이 백제의 왕녀를 맞아 소비로 삼았다.
十五年秋七月(십오년추칠월) : 15년 가을 7월,
修築明活城(수축명활성) :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百濟王明襛與加良來攻管山城(백제왕명농여가량래공관산성) :
백제왕 명농(백제 제27대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逆戰失利(군주각간우덕이찬탐지등역전실리) :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신주군주김무력이주병부지) :
신주의 군주 김 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及交戰(급교전) :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急擊殺百濟王(비장삼년산군고우도도급격살백제왕) :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於是(어시) : 이 때
諸軍乘勝大克之(제군승승대극지) :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斬佐平四人(참좌평사인) :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士卒二萬九千六百人(사졸이만구천육백인) :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하였다.
匹馬無反者(필마무반자) :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十六年春正月(십육년춘정월) : 16년 봄 정월,
置完山州於比斯伐(치완산주어비사벌) : 비사벌에 완산주를 신설하였다.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
王巡幸北漢山(왕순행북한산) :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拓定封疆(탁정봉강) : 국경을 정하였다.
十一月(십일월) : 11월,
至自北漢山(지자북한산) : 왕이 북한산에서 돌아와
敎所經州郡(교소경주군) : 교서를 내려, 순행했던 주와 군에
復一年租調(복일년조조) : 1년 간의 납세를 면제해주고,
曲赦除二罪皆原之(곡사제이죄개원지) :
해당 지방 죄수 가운데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十七年秋七月(십칠년추칠월) : 17년 가을 7월,
置比列忽州(치비열홀주) : 비열홀주를 설치하였다.
以沙湌成宗爲軍主(이사찬성종위군주) : 사찬 성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十八年(십팔년) : 18년,
以國原爲小京(이국원위소경) : 국원을 소경으로 만들었다.
廢沙伐州(폐사벌주) : 사벌주를 없애고
置甘文州(치감문주) : 감문주를 설치하였다.
以沙湌起宗爲軍主(이사찬기종위군주) : 사찬 기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廢新州(폐신주) : 신주를 없애고
置北漢山州(치북한산주) :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十九年春二月(십구년춘이월) : 19년 봄 2월,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사귀척자제급육부호민) :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으로 이사하게하여
以實國原(이실국원) : 국원을 충실하게 하였다.
奈麻身得作砲弩上之(내마신득작포노상지) : 내마 신득이 포와 노를 만들어 바쳤으므로,
置之城上(치지성상) : 이를 성 위에 설치하였다.
二十三年秋七月(이십삼년추칠월) : 23년 가을 7월,
百濟侵掠邊戶(백제침략변호) : 백제가 변경의 주민을 침탈하였다.
王出師拒之(왕출사거지) :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서
殺獲一千餘人(살획일천여인) :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二十六年(이십육년) : 26년,
秋八月(추팔월) : 가을 8월 ,
命阿湌春賦出守國原(명아찬춘부출수국원) : 아찬 춘부로 하여금 국원을 지키게 하였다
九月(구월) : 9월,
廢完山州(폐완산주) : 완산주를 없애고
置大耶州(치대야주) : 대야주를 설치하였다.
二十九年(이십구년) : 29년,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
廢北漢山州(폐북한산주) : 북한산주를 없애고
置南川州(치남천주) : 남천주를 설치하였다.
又廢比列忽州(우폐비열홀주) : 또한 비열홀주를 없애고
置達忽州(치달홀주) : 달홀주를 설치하였다
三國史記 第 十九卷(삼국사기 제 19권) 高句麗本紀 第 七(고구려본기 제 07)
080.陽原王(양원왕)
陽原王(양원왕) :
양원왕은 <545~559 재위기간 14년>
四年春正月(사년춘정월) : 4년 봄 정월
以濊兵六千攻百濟獨山城(이예병육천공백제독산성) :
예의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新羅將軍朱珍來援(신라장군주진래원) : 신라 장군 주진이 백제를 도왔기 때문에
故不克而退(고불극이퇴) :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六年春正月(육년춘정월) : 6년 봄 정월
百濟來侵(백제래침) : 백제가 침입하여
陷道薩城(함도살성) : 도살성을 함락시켰다.
三月(삼월) : 3월
攻百濟金峴城(공백제금현성) :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였다.
新羅人乘間取二城(신라인승간취이성) : 신라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 성을 빼앗았다.
夏六月(하육월) : 여름 6월
遣使入北齊朝貢(견사입북제조공) : 사신을 북제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秋九月(추구월) : 가을 9월
北齊封王(북제봉왕) : 북제가 왕 봉하여
爲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위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령호동이교위) :
북제가 왕을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료동군개국공고구려왕) :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심았다.
七年夏正月(칠년하정월) : 7년 여름 정월
遣使入北齊朝貢(견사입북제조공) : 사신을 북제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秋九月(추구월) : 가을 9월
突厥來圍新城(돌궐래위신성) : 돌궐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不克(불극) : 승리하지 못하자
移攻白巖城(이공백암성) :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王遣將軍高紇領兵一萬(왕견장군고흘령병일만) : 왕이 장군 고 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拒克之(거극지) : 그들을 물리치고
殺獲一千餘級(살획일천여급) :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新羅來攻(신라래공) : 신라가 침공하여
取十城(취십성) :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三國史記 第 二十六卷(삼국사기 제 26권)百濟本紀 第 四(백제본기 제 04)
110.聖王(성왕)
제26대 성왕<聖王 523~554 재위기간 31년>
四年冬十月(사년동십월) : 4년 겨울 10월,
修葺熊津城(수즙웅진성) : 웅진성을 수축하고
立沙井柵(립사정책) : 사정책을 세웠다.
七年冬十月(칠년동십월) : 7년 겨울 10월,
高句麗王興安躬帥兵馬來侵(고구려왕흥안궁수병마래침) :
고구려왕 흥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拔北鄙穴城(발북비혈성) :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다.
命佐平燕謨(명좌평연모) : 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領步騎三萬(령보기삼만) :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拒戰於五谷之原(거전어오곡지원) :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게 하였으나
不克(불극) : 이기지 못했다.
死者二千餘人(사자이천여인) : 사망자가 2천여 명이었다.
十六年春(십육년춘) : 16년 봄,
移都於泗沘(이도어사비) :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一名所夫里(일명소부리) : 소부리라고도 한다.
國號南扶餘(국호남부여) :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十八年秋九月(십팔년추구월) : 18년 가을 9월,
王命將軍燕會(왕명장군연회) : 이 장군 연회에게 명령하여
攻高句麗牛山城(공고구려우산성) : 고구려의 우산성을 치게 하였으나
不克(불극) : 승리하지 못했다.
二十六年春正月(이십육년춘정월) : 26년 봄 정월,
高勾麗王平成與濊謀(고구려왕평성여예모) : 고구려왕 평성이 예와 공모하여
攻漢北獨山城(공한북독산성) :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해왔다.
王遣使請救於新羅(왕견사청구어신라) :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羅王命將軍朱珍(라왕명장군주진) : 신라왕이 장군 주진을 시켜
領甲卒三千發之(영갑졸삼천발지) :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朱珍日夜兼程至獨山城下(주진일야겸정지독산성하) :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與麗兵一戰(여려병일전) :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
大破之(대파지) : 크게 이겼다.
二十八年春正月(이십팔년춘정월) : 28년 봄 정월,
王遣將軍達己(왕견장군달기) :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領兵一萬(영병일만) : 1만 명을 거느리고
攻取高句麗道薩城(공취고구려도살성) :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三月(삼월) : 3월,
高勾麗兵圍金峴城(고구려병위금현성) :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三十一年秋七月(삼십일년추칠월) : 31년 가을 7월,
新羅取東北鄙(신라취동북비) :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아
置新州(치신주) : 신주를 설치하였다.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
王女歸于新羅(왕녀귀우신라) :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三十二年秋七月(삼십이년추칠월) : 32년 가을 7월,
王欲襲新羅(왕욕습신라) :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親帥步騎五十(친수보기오십) :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夜至狗川(야지구천) :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新羅伏兵發與戰(신라복병발여전) :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爲亂兵所害薨(위난병소해훙) :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諡曰聖(시왈성) :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三國史記 第 二十七卷(삼국사기 제 27권) 百濟本紀 第 五(백제본기 제 05)
111.威德王(위덕왕)
제27대 위덕왕<威德王 554~598 재위기간 44년>
元年冬十月(원년동십월) : 원년, 겨울 10월에
高句麗大擧兵來攻熊川城(고구려대거병래공웅천성) :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을 침공하였다가
敗衄而歸(패뉵이귀) : 패하고 돌아갔다.
八年秋七月(팔년추칠월) : 8년, 가을 7월에
遣兵侵掠新羅邊境(견병침략신라변경) :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가
羅兵出擊敗之(라병출격패지) :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死者一千餘人(사자일천여인) : 사망자가 1천여 명이었다.
三國史記 第 六卷(삼국사기 제 06권) 新羅本紀 第 六(신라본기 제 06)
030-1.文武王 上(문무왕 상)
제30대 文武王 上(문무왕 상) <661~681 재위기간 20년>
八年(팔년) : 8년,
秋七月十六日(추칠월십육일) : 가을 7월 16일,
王行次漢城州(왕행차한성주) : 왕이 한성주에 행차하여
敎諸摠管往會大軍(교제총관왕회대군) :
모든 총관들에게 가서 당 나라 군대와 연합하도록 지시하였다.
文穎等遇高句麗兵於蛇川之原(문영등우고구려병어사천지원) : 문영 등이 사천 벌에서
對戰大敗之(대전대패지) : 고구려 군사와 마주쳐 싸워서 크게 승리하였다.
九月二十一日(구월이십일일) : 9월 21일,
與大軍合圍平壤(여대군합위평양) : 당 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高句麗王先遣泉男産等(고구려왕선견천남산등) : 고구려 왕은 우선 천 남산 등을 보내
詣英公請降(예영공청항) : 영공을 방문하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於是(어시) : 이 때
英公以王寶臧王子福男德男(영공이왕보장왕자복남덕남) : 영공이 왕 보장과 왕의 아들 복남·덕남과
大臣等二十餘萬口廻唐(대신등이십여만구회당) : 대신 등 20여만 명을 당 나라로 보냈다.
角干金仁問大阿湌助州隨英公歸(각간김인문대아찬조주수영공귀) :
각간 김 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 돌아가고,
仁泰義福藪世天光興元隨行(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수행) :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도 그들을 수행하였다.
初大軍平高句麗(초대군평고구려) : 이보다 앞서, 당 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평정하려 했을 때,
王發漢城指平壤(왕발한성지평양) : 왕은 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다가
次肹次壤(차힐차양) : 흘차양에 머물고 있었다.
聞唐諸將已歸(문당제장이귀) : 그 때 당 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귀국하였다는 말을 듣고
還至漢城(환지한성) : 한성으로 되돌아 왔다.
冬十月二十二日(동십월이십이일) : 겨울 10월 22일,
賜庾信位太大角干(사유신위태대각간) : 유신에게 태대각간,
仁問大角干(인문대각간) : 인문에게 대각간의 직위를 주고,
已外伊湌將軍等並爲角干(이외이찬장군등병위각간) :
이 밖에 이찬·장군 등은 모두 각간의 직위를 주었으며,
蘇判已下並增位一級(소판이하병증위일급) :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위품 한 급씩을 올려 주었다.
大幢少監本得(대당소감본득) : 대당소감 본득은
蛇川戰功第一(사천전공제일) : 사천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며,
漢山州少監朴京漢(한산주소감박경한) : 한산주 소감 박 경한은
平壤城內殺軍主述脫(평양성내살군주술탈) :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을 죽인
功第一(공제일) : 전공이 제일 높았으며
黑嶽令宣極(흑악령선극) : 흑악령 선극은
平壤城大門戰功第一(평양성대문전공제일) : 평양성 대문 싸움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並授位一吉湌(병수위일길찬) : 모두 일길찬의 직위를 주고
賜租一千石(사조일천석) : 벼 1천 석을 주었다.
誓幢幢主金遁山(서당당주금둔산) : 서당 당주 김 둔산은
平壤軍營戰功第一(평양군영전공제일) :
授位沙湌(수위사찬) : 평양 군영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賜租七百石(사조칠백석) : 사찬의 직위와 벼 7백 석을 주었다.
軍師南漢山北渠(군사남한산북거) : 군사 남한산 사람 북거는
平壤城北門戰功第一(평양성북문전공제일) : 평양성 북문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授位述干賜粟一千石(수위술간사속일천석) : 술간의 직위와 곡식 1천 석을 주었다.
軍師斧壤仇杞(군사부양구기) : 군사 부양 사람 구기는
平壤南橋戰功第一(평양남교전공제일) : 평양 남교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授位述干賜粟七百石(수위술간사속칠백석) : 술간의 직위와 곡식 7백 석을 주었다.
假軍師比列忽世活(가군사비열홀세활) : 가군사 비열홀 사람 세활은
平壤少城戰功第一(평양소성전공제일) : 평양 소성 전투에서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授位高干賜粟五百石(수위고간사속오백석) : 고간의 직위와 곡식 5백 석을 주었다.
漢山州少監金相京(한산주소감김상경) : 한산주 소감 김 상경은
蛇川戰死功第一(사천전사공제일) : 사천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전공이 제일 높았으므로
贈位一吉湌賜租一千石(증위일길찬사조일천석) : 일길찬의 직위와 벼 1천 석을 주었다.
牙述沙湌求律(아술사찬구률) : 아술 사찬 구율은
蛇川之戰(사천지전) : 사천 전투에서
就橋下涉水(취교하섭수) :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서
出與賊鬪大勝(출여적투대승) : 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以無軍令(이무군령) : 군령없이
自入危道(자입위도) : 임의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으므로,
功雖第一而不錄(공수제일이불록) : 전공은 비록 제일 높았으나 공신록에 등록되지 않았다.
憤恨欲經死(분한욕경사) : 그는 이를 분하게 여겨 목매어 죽으려 하였다.
旁人救之不得死(방인구지불득사) : 그러나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구하여 죽지 못하였다.
二十五日(이십오일) : 25일,
王還國次褥突驛(왕환국차욕돌역) : 왕이 귀국하는 길에 욕돌역에서 묵었다.
國原仕臣龍長大阿湌私設筵(국원사신용장대아찬사설연) :
그 때, 국원의 지방관인 대아찬 용장이 개인적으로 연회를 열어
饗王及諸侍從(향왕급제시종) : 왕과 여러 시종들을 접대하였다.
及樂作(급악작) : 음악이 시작되자
奈麻緊周子能晏年十五歲(내마긴주자능안년십오세) : 내마 긴주의 아들 능안이 나이 15세로서
呈加耶之舞(정가야지무) : 가야의 춤을 추었다.
王見容儀端麗(왕견용의단려) : 왕이 그의 얼굴과 거동이 단정하고도 고운 것을 보고
召前撫背(소전무배) : 앞으로 불러 등을 어루만지면서
以金盞勸酒(이김잔권주) : 금잔으로 술을 권하고
賜幣帛頗厚(사폐백파후) : 폐백을 후하게 주었다.
十一月五日(십일월오일) : 11월 5일,
王以所虜高句麗人七千入京(왕이소로고구려인칠천입경) :
왕이 고구려 포로 7천 명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三國史記 第 三十二卷(삼국사기 제 32권) 雜志 第 一(잡지 제 01)
120.樂(악)
加耶琴(가야금) : 가야금도
亦法中國樂部箏而爲之(역법중국락부쟁이위지) : 중국 악부의 쟁(箏)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風俗通曰(풍속통왈) : <풍속통>에는
箏秦聲也(쟁진성야) : "쟁은 진(秦)나라 악기"라 하였고,
釋名曰(석명왈) : <석명>에는
箏施絃高(쟁시현고) : "쟁은 줄을 높이 걸었기 때문에
箏箏然(쟁쟁연) : 소리가 쟁쟁하며,
幷梁二州(병량이주) : 병(幷) 양(梁) 두 주의
箏形如瑟(쟁형여슬) : 쟁은 모양이 비파와 같다"고 하였다.
傅玄曰(부현왈) : 부 현은
上圓象天(상원상천) :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고,
下平象地(하평상지) :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 것이며,
中空准六合(중공준육합) : 가운데가 빈 것은 육합을 모방한 것이고,
絃柱擬十二月(현주의십이월) : 줄과 괘는 12달을 모방한 것인 바,
斯乃仁智之器(사내인지지기) : 이야말로 어질고 슬기로움을 상징하는 기구이다"라고 말하였다.
阮瑀曰(완우왈) : 완 우는
箏長六尺(쟁장육척) : "쟁의 길이는 6자이니,
以應律數(이응률수) : 이는 율의 수에 맞춘 것이고,
絃有十二(현유십이) : 현은 12줄이니,
象四時(상사시) : 이는 사시를 상징한 것이며,
柱高三寸(주고삼촌) : 괘의 높이는 3치이니,
象三才(상삼재) : 이는 삼재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加耶琴(가야금) : 가야금이
雖與箏制度小異(수여쟁제도소이) : 비록 쟁의 제도와 조금 다르기는 하나 거
而大槩似之(이대개사지) : 의 그것과 유사하다.
羅古記云(라고기운) : 신라 고기에는
加耶國嘉實王見唐之樂器而造之(가야국가실왕현당지락기이조지) :
"가야국 가실왕"이 당 나라 악기를 보고 만든 것인데,
王以謂(왕이위) : 가실왕이 스스로 이에 대하여
諸國方言各異聲音(제국방언각이성음) : '모든 나라의 방언은 각각 그 성음이 다른 것인데
豈可一哉(기가일재) : 어찌 당나라의 노래만 부를 수 있으랴?'라고 말하고,
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造十二曲(내명락사성열현인우륵조십이곡) :
악사인 성열현 사람 우륵에게 명령하여 12곡을 창작하게 하였다.
後于勒以其國將亂(후우륵이기국장란) : 그 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携樂器投新羅眞興王(휴락기투신라진흥왕) : 우륵이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귀순하였다.
王受之(왕수지) : 왕이 그를 받아 들여
安置國原(안치국원) : 국원에 정착시키고,
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傳其業(내견대내마주지계고대사만덕전기업) :
곧 대나마 주지, 계고와 대사 만덕 등을 보내 그에게서 수업하게 하였다.
三人旣傳十一曲(삼인기전십일곡) : 세 사람이 11곡을 배우고 나서
相謂曰(상위왈) : 서로 말하기를
此繁且淫(차번차음) : '이 음악이 번잡하고 음탕하여
不可以爲雅正(부가이위아정) : 우아한 음악이 될 수 없다'라 하고,
遂約爲五曲(수약위오곡) : 마침내 그것을 줄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于勒始聞焉而怒(우륵시문언이노) : 우륵이 처음 이 말을 듣고 성을 내었으나
及聽其五種之音(급청기오종지음) : 그 다섯 가지 음률을 듣고는
流淚歎曰(류루탄왈) :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여
樂而不流(악이불류) :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哀而不悲(애이불비) :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可謂正也(가위정야) : 바르다고 할 만하다.
爾其奏之王前(이기주지왕전) : 너희들이 왕의 앞에서 이를 연주하여라'라고 말하였다.
王聞之大悅(왕문지대열) : 진흥왕이 그 곡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諫臣獻議(간신헌의) : 간관들이 건의하기를
加耶亡國之音(가야망국지음) :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을
不足取也(부족취야) : 취할 것이 없다'고 하니,
王曰(왕왈) : 왕이 말하기를
加耶王淫亂自滅(가야왕음란자멸) : '가야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이지
樂何罪乎(악하죄호) : 음악에 무슨 죄가 있으랴?
蓋聖人制樂(개성인제악) :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緣人情以爲撙節(연인정이위준절) : 사람의 정서에 따라 이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므로,
國之理亂不由音調(국지리란불유음조) :
나라의 태평과 혼란이 음률 곡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라 하고,
遂行之(수행지) : 마침내 이를 펼쳐
以爲大樂(이위대악) : 주된 음악을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加耶琴有二調(가야금유이조) : 가야금에는 두 조(調)가 있었는데
一河臨調(일하림조) : 첫째는 하림조(河臨調)요,
二嫩竹調(이눈죽조) : 둘째는 눈죽조(嫩竹調)이니
共一百八十五曲(공일백팔십오곡) : 모두 185곡이었다
于勒所製十二曲(우륵소제십이곡) : 우륵이 지은 12곡은
一曰下加羅都(일왈하가라도) : 첫째는 하가라도,
二曰上加羅都(이왈상가라도) : 둘째는 상가라도,
三曰寶伎(삼왈보기) : 셋째는 보기,
四曰達己(사왈달기) : 넷째는 달기,
五曰思勿(오왈사물) : 다섯째는 사물,
六曰勿慧(육왈물혜) : 여섯째는 물혜,
七曰下奇物(칠왈하기물) : 일곱째는 하기물,
八曰師子伎(팔왈사자기) : 여덟째는 사자기,
九曰居烈(구왈거렬) : 아홉째는 거열,
十曰沙八兮(십왈사팔혜) : 열째는 사팔혜,
十一曰爾赦(십일왈이사) : 열 한째는 이사,
十二曰上奇物(십이왈상기물) : 열 두째는 상기물이었다.
泥文所製三曲(니문소제삼곡) : 니문이 지은 3곡은
一曰烏(일왈오) : 첫째는 까마귀,
二曰鼠(이왈서) : 둘째는 쥐,
三曰鶉(삼왈순) : 셋째는 메추라기였다.
赦字未詳(사자미상) : '사(赦)'자의 뜻은 분명치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8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48리이고, 연풍현(延豐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51리이고, 경기도 여주(驪州) 경계까지 78리이고, 경기도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66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45리이고,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경계까지 58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혹은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薍長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빼앗았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을 옮겨서 채웠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군명】 국원(國原)ㆍ대원(大原)ㆍ예성(蘂城)ㆍ중원(中原)ㆍ창화군(昌化軍).
【산천】견문산(犬門山)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월락탄(月落灘) 주 서쪽 15리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금천(金遷) 월탄(月灘)으로 우륵(于勒)이 놀던 곳이다.
【고적】 탄금대(彈琴臺) 견문산(犬門山)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라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ㆍ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뒷사람이 인하여 그 대를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우거】 신라 우륵(于勒) 《고기(古記)》에 가야국(伽倻國) 가실왕(嘉悉王)이 당 나라 악기를 보고 거문고를 만들고, 악사(樂師)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에게 명하여 12곡(曲)을 지었다. 뒤에 우륵이 그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거문고를 안고 신라로 갔다. 진흥왕(眞興王)이 국원(國原)에 안치(安置)하고 주지(主知)ㆍ계고(階古)ㆍ만덕(萬德)을 보내어 그 기술을 전수하게 하였다. 세 사람이 11곡을 배우고 나서 서로 말하기를, “이것이 번잡하고 또 음란하니, 아(雅)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요약하여 5곡을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는 듣고 노하였다가, 그 소리를 듣고나서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즐거워도 흐르지 않고 슬퍼도 비참하지 않으니 바른 소리라 할 수 있다.” 하였다. 왕 앞에서 연주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본래는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였다. 낭자성(狼子城)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 충청도(忠淸道) 청주목(淸州牧)
동쪽으로 청안현(淸安縣)의 경계까지 42리, 같은 현 시화역(時化驛)의 경계까지 44리, 남쪽은 문의현(文義縣)의 경계까지 20리, 회인현(懷仁縣)의 경계까지 24리, 보은현(報恩縣)의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전의현(全義縣)의 경계까지 54리, 목천현(木川縣)의 경계까지 55리, 연기현(燕岐縣)의 경계까지 38리, 북쪽으로 진천현(鎭川縣)의 경계까지 32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상당현(上黨縣) 낭비성(娘臂城)이라고도 하고,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에 처음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에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시켰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군명】 상당(上黨)ㆍ낭비성(娘臂城)ㆍ서원경(西原京)ㆍ청주(靑州)ㆍ낭성(娘城)ㆍ전절군(全節軍).
【고적】 고상당성(古上堂城) 율봉역(栗峯驛) 북쪽 산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7천 7백 73자, 성안에 우물 열 둘이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부모성(父母城) 고을 서쪽 1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는 2천 4백 27자이고, 성안에 큰 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산성(山城) 고을 동쪽 2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고, 둘레는 5천 22자, 안에 우물 넷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저산성(猪山城) 돌로 쌓은 것인데, 둘레는 5백 45자,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미륵산성(彌勒山城) 돌로 쌓았고, 둘레는 5천 7백 79자, 안에 우물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구라산성(謳羅山城) 돌로 쌓았고, 둘레는 2천 7백 90자, 안에 우물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상령산성(上嶺山城) 돌로 쌓았고 터가 남아 있다. 안에 큰 우물이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감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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