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목 죽장사(竹杖寺)와 노인성(老人星)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경인 24년(1170), 송 건도 6년ㆍ금 대정 10년 |
○ 봄 정월 초하루 임자에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하례를 받고, 친히 신하들의 하표(賀表)를 대신 지었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공경히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요(堯)의 성철(聖哲)을 갖추시고, 순(舜)의 총명을 겸하시어, 정무를 다스리시는 여가에 하루에 세 번 신하를 접견하시는 부지런함을 닦으셨습니다. 즐겨 사신(詞臣)과 더불어 4, 6문(四六文)으로 된 성대한 문장을 내리시고, 신하들과 가까이 자리를 함께 하며 시서(詩書)와 경사(經史)의 미묘한 글을 토론하셨습니다. 북사(北使 금 나라 사신)는 장수[壽]를 송축하여 하례를 드리고, 일본에서는 보물을 헌납하고 황제로 부르니, 이는 사람 생긴 이후로 일찍이 오늘에 견줄 만한 때가 없었습니다."
공덕의 성대함을 지극히 찬양하여 여러 신하에게 내려 보이니, 백관이 표를 올려 하례했다. 이날 봉원전(奉元殿)에 임어하여 《서경》〈익직(益稷)〉을 강론하였다.
○ 기묘일에 왕이 영통사(靈通寺)에서 화엄회(華嚴會)를 베풀고, 친히 불소(佛疏)를 지어 문신에게 보이니, 백관들이 표를 올려 하례하였다. 신사일에 궁으로 돌아왔다. 여러 왕씨에게 명하여 광화문(廣化門) 좌우 행랑에 채색 비단으로 장막을 치고는 관현방(管絃坊)과 대악서(大樂署)에서 채색된 누각무대를 세우고 여러 가지 놀이를 베풀어 거가(車駕)를 맞았는데, 모두 금은ㆍ주옥ㆍ금수(錦繡)ㆍ나기(羅綺)ㆍ산호(珊瑚)ㆍ대모(玳瑁)로 꾸며, 그 기묘하고 화려함이 전고(前古)에 비길 데 없었다. 국자감의 학관이 학생을 인솔하고 가요를 올리니 왕이 연(輦)을 멈추고 음악을 관람하다가 3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궁궐로 들어갔다. 승선 김돈중ㆍ노영순ㆍ임종식 등이 왕을 봉원전(奉元殿)으로 모시고 성찬(盛饌)을 올렸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새벽까지 놀다가 파하였다.
○ 2월에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평장사 허홍재(許洪材), 지어사대사 이복기(李復基), 기거주 한뢰(韓賴) 등을 불러, 배를 띄우고 종일토록 술마시며 즐기고, 드디어 화평재(和平齋)에 머물렀다.
○ 갑신일에 낭성(狼星)이 남극(南極)에 나타났는데, 서해도 안찰사 박순가(朴純嘏)가 노인성(老人星)이라 하여 역마를 달려 급히 이를 아뢰었다.
○ 3월에 왕이 서강(西江)에 놀이하러 가려 하였는데, 꿈에 한 부인이 문에 서서 고하기를, “왕이 만약 서강에 놀러 가시려면, 반드시 5월까지 기다리십시오." 하였다. 왕이 꿈에서 깨어 곧 중지하였다.
○ 경신일에 허홍재ㆍ이복기ㆍ한뇌ㆍ김돈중 등과 더불어 배를 띄워 작은 잔치를 베풀었다. 임술일에도 역시 이와 같이 하였고, 을축일에 또 배 가운데서 연회를 베풀고 밤에 현화사(玄化寺)로 갔는데, 길에서 큰비를 만나서 말을 달려 돌아왔다.
○ 지문하성사 최온(崔溫)을 보내어 서경의 노인당(老人堂)에 제사하고, 우부승선 임종식(林宗植)을 해주(海州) 상산(床山)에 보내어 노인성(老人星)에 제사지내게 하고 중앙과 지방에 노인당 있는 곳에는 모두 사신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 문극겸(文克謙)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삼았다. 극겸이 이미 좌천되어 황주판관이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미세한 과실에 연좌되어 해면되더니, 왕이 오히려 이전의 일을 노여워하여 다시 지방으로 배척하여 진주 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아뢰기를, “극겸은 곧은 신하인데, 연속 지방으로 강직시켜 보내어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마땅한 처사가 아니옵니다." 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이 임명을 하였다.
○ 여름 4월에 내전(內殿)에서 친히 노인성에 제사를 지냈다.
○ 충주 목부사(忠州牧副使) 최광균(崔光鈞)이 아뢰기를, “전월 28일에 죽장사(竹杖寺)에서 노인성에 제사지냈는데, 그날 저녁 수성(壽星)이 나타나더니 삼헌(三獻)에 이르러서 없어졌습니다."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고 백관이 하례하였다.
○ 연복정에 행차하여 배 가운데서 시신과 연회하고, 밤중에야 비로소 파하였다.
○ 금내(禁內) 육관문신(六官文臣)이 표를 올려 수성이 재차 나타남을 하례하니, 술과 과일을 하사하였다.
○ 수성이 두 번 나타났다 하여 명하여 태자는 복원궁(福源宮)에서 제사를 지내고, 허홍재(許洪材)는 상춘정(賞春亭)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은 충주 죽장사에서 제사지냈다.
○ 왕이 친히 노인성에 제사를 지내려고, 판례빈성사 김우번(金于番), 낭중 진력승(陳力升)에게 명하여 진관사(眞觀寺) 남쪽 기슭에 집을 짓고, 또 별기은소(別祈恩所)를 세우고는 금은으로 꽃을 만들며 금옥으로 그릇을 만들었다.
○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였다. 이때 왕이 무시로 거둥하면서, 항상 아름다운 곳에 이를 적마다 매번 행차를 멈추고, 가까이 총애하는 문신들과 술마시고 글을 읊으며 돌아갈 줄 모르니, 호종하던 장군과 군사들이 피곤하여 불평을 토로하였다. 대장군 정중부(鄭仲夫)가 나가 오줌을 누니, 견룡행수(牽龍行首) 산원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가 뒤따라가 은밀히 중부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문신들은 득의양양하여 취하도록 마시며 배부르도록 먹고 있는데 무신들은 모두 굶주리고 피곤하니, 이 어찌 참을 수 있소." 하니, 중부도 일찍이 김돈중에게 수염을 그슬린 유감이 있어 드디어 흉한 음모를 꾸몄다.
○ 5월에 문신과 화평재에서 연회를 베풀어 밤까지 서로 창화하고, 내시 황문장(黃文莊)에게 붓을 잡도록 명하여, “여러 신하들이 성덕(聖德)을 칭찬하기를, '태평세월에 글을 좋아하는 임금[大平好文之主]'이라 하였다."고 쓰게 하였다.
○ 무진일에 연복정에 행차하여 밤에 배를 띄우고 시신과 잔치를 베풀었다. 경오일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 처소를 염현사(念賢寺)로 옮겼다. 행차가 장차 출발하려 할 때, 허홍재ㆍ이복기ㆍ한뇌(韓賴) 등과 배 가운데에 술자리를 갖고, 임금과 신하가 모두 몹시 취하여 밤중까지 돌아갈 줄을 몰랐다. 김돈중이 앞으로 나아가 왕에게 아뢰기를, “호종하는 군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모두 굶주림과 피곤에 빠져 있는데, 왕께서는 어찌 심하게 즐기기만을 하십니까. 또 밤도 어두운데 무엇을 관람할 것이 있어 여기에 오래 머무르고 계십니까." 하니, 왕이 불쾌해하며 거가를 명하여 출발하니, 이미 새벽이 되려 하였다.
○ 윤달에 연복정에 나아가 밤에 시신과 연회하였다.
○ 내시 전중감(殿中監) 김천(金闡)에게 명하여 연복정에 잔치를 베풀고 재신ㆍ추신ㆍ승선ㆍ대간 등과 더불어 배를 타고 연회를 즐겼는데, 밤이 새도록 그치지 않아 여러 신하가 모두 몹시 취하였다.
○ 여러 신하들이 수성(壽星)이 나타난 것을 하례하니, 왕이 상참관(常叅官) 이상과 연회를 베풀고, 친히 악장(樂章) 5수(首)를 지어서 악공(樂工)에게 명하여 이를 노래하게 하고, 채붕(綵棚 채색된 무대 누각)을 세우고 각종 놀이를 베풀어 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파하였는데, 연회에 참석한 관원에게는 각각 말 한 필씩을 하사하였다. 이날 밤에 또 한뇌ㆍ이복기와 편전(便殿)에서 작은 잔치를 열고, 특히 서홍정대(犀紅鞓帶)를 하사하여 남달리 총애함을 보였다.
○ 연복정에 거둥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자기가 본 물건들을 가지고 상서로운 징조라고 주장하였다. 다복쑥[蓬艾] 세 줄기가 정자에 난 것을 서초(瑞草)라 이르고, 내시(內侍) 황문장(黃文莊)은 물가에 깃들이는 물새를 가리켜 현학(玄鶴)이라고 하면서 시를 지어 이를 찬미하니, 왕이 한참 동안 칭찬하고 시를 지어 화답하고는 정언(正言)으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나이 너무 젊어 국자박사직한림원(國子博士直翰林院)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 왕손(王孫)이 출생하니,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어서 이를 금 나라에 고하려고, 즉시 명하여서 동문원(同文院)에 이첩하여 금 나라의 지휘를 기다리게 하였는데, 금 나라 임금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저 나라에서 손자를 얻은 것은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다. 사절을 보내어 고하려 한다니, 이미 그 성의를 알았도다. 번거롭게 멀리 사신을 보내올 것은 없다." 하였다.
○ 6월에 연복정 남천(南川)의 제방이 터졌다. 다시 막도록 명하고 조하기를, “군졸의 힘이 다하여 제방을 막을 수 없으니, 방리(坊里)의 장정을 징발하여 쌓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4, 5개소의 수문(水門)을 내고, 제방 위에 정자를 창건하여 기이하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었다.
○ 가을 7월 1일 기묘에 일식이 있었다.
○ 허홍재ㆍ이복기ㆍ한뇌 등과 더불어 보현원(普賢院) 남쪽 시내에 배를 띄우고, 술자리를 베풀어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였다.
○ 이복기가 의복(衣服) 등 완호품(玩好品)과 술ㆍ고기ㆍ포(脯)ㆍ과일 등을 바치니, 밤에 왕이 배를 띄우고 재신ㆍ추신ㆍ시신과 연회를 하면서 복기를 돌아보며 이르길,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이 그 누가 경과 같겠는가." 하였다.
○ 허홍재를 문하시랑 동평장사로, 최온을 참지정사로, 이광진(李光縉)을 동지추밀원사로, 양순정(梁純情)을 추밀원부사로, 지추밀원사 서순(徐淳)을 좌천시켜 상서좌복야 판비서성사로 삼았다. 서순이 성질이 솔직하고 꾸밈이 없고 왕의 좌우에게 아첨하지 않아 이복기가 헐뜯었기 때문이었다. 밤에 배를 띄우고 허홍재 및 여러 시신들과 더불어 연회하였다.
○ 8월에 연복정 남천(南川)의 제방이 또 터져 크게 군졸을 징발하여 막으니, 원망의 소리가 길에 충만하였다.
○ 동강(東江) 서재(書齋)에 행차하였다.
○ 수주(水州)의 백성이 밭을 갈다가 금 한 덩이를 얻었는데, 길이는 두 치[二寸] 가량 되고 머리와 꼬리가 모두 뾰족하여 형상이 거북과 같았다. 지주사(知州事) 오녹지(吳錄之)가 가져다가 바치니 좌우에서 만세를 부르며 말하기를, “하늘이 금 거북[金龜]을 내리시니, 성덕(聖德)의 감응입니다." 하며, 여러 신하가 모두 하례하였다.
○ 병자일에 왕이 연복정에서 흥왕사(興王寺)로 갔다. 이때 왕은 황음(荒淫)에 빠져 정사를 돌아보지 않고, 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뇌 등이 또 원대한 생각이 없어서 은총만 믿고 오만하여 무사(武士)를 멸시하니, 여러 사람의 노여움이 더욱 심해 갔다. 이날 정중부가 이의방과 이고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우리가 거사할 만하다. 그러나 왕이 만약 바로 환궁한다면 아직 참고 기다릴 것이요, 만약에 또 보현원으로 옮겨 간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정축일에 왕이 보현원으로 행차하려고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시신을 불러서 술을 따르게 하고, 술이 취하자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장하도다, 이곳은 군병을 연습시킬 만하도다." 하고,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라고 하였다. 이는 왕이 무신들의 불평을 알고 후하게 상품을 내림으로써 이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뇌는 무신들이 총애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시기하는 마음을 품었다.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한 사람과 맞잡고 치다가 소응이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한뇌가 갑자기 앞으로 나가더니 그 뺨을 쳐서 즉시 뜰 아래로 떨어뜨렸다. 왕이 여러 신하와 더불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임종식ㆍ이복기도 또한 소응을 꾸짖고 욕하였다. 이에 정중부ㆍ김광미(金光美) ㆍ양숙(梁肅)ㆍ진준(陳俊) 등이 안색을 변하며 서로 눈짓하였다. 중부가 소리를 높여 한뇌를 꾸짖기를, “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삼품인데, 어찌 모욕을 이다지 심하게 주느냐." 하니, 왕이 중부의 손을 잡아 위안하고 화해시켰다. 이고가 칼날을 빼고 중부에게 눈짓하였다. 중부는 이를 말렸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어가가 보현원에 가까이 갔을 때 이고와 이의방이 먼저 가서 왕의 유지(諭旨)라 속여 순검군을 집합시키고, 왕이 막 문에 들어가고 여러 신하가 물러나려 할 즈음에 이고 등이 직접 종식과 복기를 문에서 쳐 죽였다.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은 난이 일어난 것을 알고서 길가는 도중에 거짓 취한 체하고 말에서 떨어져 도망하고, 한뇌는 친한 환관에 의탁하여 몰래 안으로 들어가서 왕의 침상(寢床) 아래로 숨었다. 왕이 크게 놀라 환관 왕광취(王光就)로 하여금 제지하게 하니 중부가 말하기를, “화의 근원인 한뇌가 아직도 주상의 곁에 있으니, 내보내어 베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내시 배윤재(裵允才)가 들어가 아뢰었으나, 한뇌가 왕의 옷을 잡고 나오지 않았다. 이고가 또 칼을 빼어 위협하니 그제야 나왔는데, 즉시 죽여 버렸다. 지유(指諭) 김석재(金錫才)가 이의방에게 말하기를, “이고가 감히 어전에서 칼을 뺀단 말인가." 하였다. 의방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석재가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에 승선 이세통(李世通), 내시 이당주(李唐柱), 어사잡단 김기신(金起莘), 지후 유익겸(柳益謙), 사천감(司天監) 김자기(金子期)ㆍ태사령(太司令) 허자단(許子端) 등 무릇 호종하던 문신과 대소 신료ㆍ환관들 모두가 죽음을 당하였는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이전에 정중부와 이고가 약속하기를, “우리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서 머리에 쓴 복두(幞頭)를 버리는 것을 표시로 하고, 그러지 않는 자는 죽이자."고 하였기 때문에 무인도 복두를 버리지 않는 자는 역시 많이 피살되었다. 오직 승선 노영순(盧永醇)만은 본래 무사집 아들로서 무신과 서로 친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안시키려고 여러 장수에게 칼을 하사하니, 무신들은 더욱 교만ㆍ횡포하였다. 이에 앞서 동요(童謠)에 이르기를, “어느 곳이 보현찰(普賢刹)인고. 이 금[畫]을 따라가면 모두 다 도살되리라." 하였다. 어떤 자가 정중부ㆍ이고에게 고하기를, “김돈중이 먼저 알고 도망갔다." 하니, 정중부와 이고가 놀라며 말하기를, “만약 돈중이 성에 들어가서, 태자의 영(令)을 받들어 성문을 닫고 굳게 막으며 난동의 수령(首領)을 잡자고 아뢰면 일이 매우 위태한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의방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남해로 피신하거나, 북녘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피하겠다." 하고, 드디어 걸음 빠른 자를 서울에 보내어 정탐하게 하였다. 그 사람이 밤에 성안에 들어가서 돈중의 집에 이르러 엿보니 고요하고 사람의 소리가 없기에, 승선(돈중)의 소재를 물으니 답하기를, “거가를 호종해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그 사람이 그대로 회보하니, 정중부ㆍ이고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일은 이미 성사되었다." 하고, 그의 일당을 머물러 행궁을 지키게 하고, 날쌔고 용맹 있는 자를 뽑아 곧장 서울로 달려가게 하여, 가구소(街衢所)에 이르러 별감 김수장(金守藏)을 죽이고, 바로 대궐로 들어가서 추밀원부사 양순정(梁純精), 사천감(司天監) 음중인(陰仲寅), 대부소경 박보균(朴甫均), 감찰어사 최동식(崔東軾), 내시지후 김광(金光) 등 궐내에 숙직하고 있던 관료들을 모두 죽였다. 전중내급사 문극겸(文克謙)이 성중(省中)에 숙직하고 있다가, 난이 일어남을 듣고 도망해 숨었으나 추적해 온 군사에게 잡혔다. 극겸이 말하기를, “나는 전 정언(正言) 문극겸이다. 주상께서 만일 내 말을 따르셨다면 어찌 오늘의 난이 있었겠는가. 원컨대, 예리한 칼로 내 목을 베어 다오." 하였다. 군사가 이상하게 여겨서 결박지어 여러 장수 앞으로 송치하였다.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우리가 평소에 이름을 듣던 자이니 죽이지 말라." 하고, 궁성(宮城)에 가두어 두었다.
이고ㆍ이의방 등이 순검군을 거느리고 밤에 태자궁(太子宮)에 다달아 행궁별감 김거실(金居實), 원외랑 이인보(李仁甫) 등을 죽이고, 또 천동택(泉洞宅)에 들어가 별상원(別常員) 10여 명을 죽이고서, 사람을 시켜 길에서 외치기를, “모든 문신의 관(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게 하라." 하였다. 군졸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판리부사로 치사한 최유칭(崔褎偁), 판리부사 허홍재(許洪材), 동지추밀원사 서순(徐醇), 지추밀원사 최온(崔溫), 상서우승(尙書右丞) 김돈시(金敦時), 국자감 대사성 이지심(李知深), 비서감 김광중(金光中), 이부시랑 윤돈신(尹敦信), 위위소경(衛尉少卿) 조문귀(趙文貴), 대부소경 최윤서(崔允諝), 시랑 조문진(趙文振), 내시소경 진현광(陳玄光), 시어사 박윤공(朴允恭), 병부낭중 강처약(康處約), 도성낭중 강처균(康處均) 봉어(奉御) 전치유(田致儒), 지후 배진(裵縉)ㆍ배연(裵衍) 등 50여 명을 수색해서 죽였다. 왕이 더욱 두려워, 정중부를 불러 난동을 종식시킬 계책을 의논하니, 중부가, “네, 네." 하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왕이 즉시 이고ㆍ이의방을 응양용호군 중랑장(鷹揚龍虎軍中郞將)으로 삼았다. 그 나머지 무인 중 상장군은 모두 수사공복야(守司空僕射)에, 대장군은 상장군에 승진시켰으며, 의방의 형 준의(俊儀)를 승선에 임명하였다. 정중부 등이 왕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왔다.
○ 을묘일에 왕을 거제현(巨濟縣)으로 추방하고, 태자는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하였으며, 태손(太孫)은 죽였다. 왕의 애희(愛姬) 무비(無比)는 청교역(靑郊驛)으로 도망해 숨었는데, 중부 등이 죽이려 하니 태후(太后)가 간청하여 죽음을 면하고 왕을 따라갔다. 김돈중(金敦中)은 감악산(紺嶽山)으로 도망해 들어갔는데 중부가 전부터의 원한으로 현상(懸賞)을 걸고 급하게 추적하였다. 돈중은 따라 온 하인을 시켜 몰래 서울에 들어가서 자기집 안부를 탐지해 오도록 하였던 바, 하인이 많은 현상을 탐내어 드디어 돈중의 거처를 고하여 돈중을 잡아다 냇가 모래사장에서 죽였다. 돈중이 죽음에 임하여 한탄하며 말하기를, “나는 한뇌ㆍ이복기와 동조하지 않았지만 다만 유시(流矢)의 사건으로 인하여 죄 없는 사람에게 화(禍)를 미치게 하였으니, 내게 오늘날이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였다. 병부시랑 조동희(趙冬曦)가 일찍이 왕업을 연장할 터를 살펴보려고 서해도로 갔다가, 변란이 있음을 듣고 장차 동계(東界)로 가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려고 철령(鐵嶺)에 이르렀는데, 사나운 호랑이가 길을 막고 있어 지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뒤쫓아 온 기병(騎兵)에게 체포되었다. 중부 등이 의논하기를, “동희는 이전에 탐라(耽羅)를 평정한 공이 있다."고 하여, 장차 먼 곳으로 귀양보내려 하였는데, 지키던 자가 갑자기 죽여 그 시체를 물에 던져버렸다. 또 내시소경(內侍少卿) 최현(崔儇)을 죽이고, 소경 최춘(崔偆)과 원외랑 최치(崔値)는 귀양보냈다. 중부 등이 살해된 문신들의 집을 철거하려 하니 진준(陳俊)이 이를 말리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미워하고 원망하던 대상은 이복기ㆍ한뇌 등 4, 5명에 불과하였는데, 이제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만 해도 너무 심하였다. 만약 그 집을 모두 철거해버린다면 그 처자는 장차 어디에 붙이고 살란 말인가." 하였으나, 의방 등이 듣지 않고 드디어 군사를 풀어 헐어버렸다. 이 뒤로 무인들의 상습(常習)이 되어 원한이 있으면 매양 그 집을 헐어버렸다.
○ 정중부 등이 총애받던 환관 백자단(白子端)ㆍ왕광취(王光就)와, 아첨하던 신하 영의(榮儀)ㆍ유방의(劉方義)를 죽여서 목을 저자에 높이 달고, 그 밖의 환관과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던 자를 거의 다 죽였다. 이전에 전왕(前王)이 3개 소의 사택(私宅)을 짓고 관북택(館北宅)ㆍ천동택(泉洞宅)ㆍ곽정택(藿井宅)이라 이름하고 재물을 거두어 모은 것이 수만을 헤아렸는데, 이에 이르러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가 모두 나누어 점유하였다.
○ 왕이 수문전(修文殿)에 임어하는데 이준의ㆍ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가 모시고 따랐다. 문극겸(文克謙)을 석방하고 명하여 비목(批目 벼슬 임명의 명단)을 쓰게 하였는데, 임극충(任克忠)을 중서시랑 평장사에, 정중부ㆍ노영순(盧永醇)ㆍ양숙(梁淑)을 참지정사에, 한취(韓就)를 추밀원사에, 윤인첨(尹鱗瞻)을 지추밀원사에, 김성미(金成美)를 복야에, 김천(金闡)을 추밀원부사에 이준의(李俊義)를 좌승선에, 문극겸을 우승선에, 이소응(李紹膺)을 좌산기상시로, 이고를 대장군 위위경에, 이의방을 대장군 전중감에 임명하였는데, 이고와 이의방은 모두 집주(執奏)를 겸임시켰으며, 기탁성(奇卓成)을 어사대사(御史臺事)로 채원(蔡元)을 장군으로 삼았다. 그 밖에도 무신으로 자격과 서열(序列)을 뛰어서 현달한 관직과 요직을 겸임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의방 등이 왕에게 아뢰어 극겸을 승선으로 삼으니 문신 이공승(李公升) 등이 이에 힘입어 화를 면하였고, 무관도 또한 신뢰하여 고사(故事)를 많이 물었기 때문에 곧 용호군 대장군(龍虎軍大將軍)을 겸임하였다.
○ 여러 무신이 중방(重房)에 모여 문신으로서 남아 있는 자를 모두 불렀는데 이고가 모두 죽이려고 하니 중부가 말렸다. 한 군사가 병부낭중 진윤승(陳允升)의 집에 와서 속여 말하기를, “왕의 유지(諭旨)에 먼저 대궐로 나오는 사람을 승선에 임명한다 합니다." 하여, 윤승이 나가니 군사가 그를 죽이고 큰 돌을 안겨 주었다. 이전에 수성(壽星)이 나타났다 하여 진관사(眞觀寺) 남쪽에 사당을 창건할 때, 윤승이 공사를 감독하였는데 모든 군사들이 돌을 운반할 때 반드시 저울로 달아서 받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당한 것이다.
○ 겨울 10월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를 벽상공신으로 삼고 공신각 위에 화상을 그렸는데, 양숙ㆍ채원이 이들의 다음이었고 그들의 벼슬 1계급씩 승진시키고, 김이영(金貽永)ㆍ이작승(李綽升)ㆍ정서(鄭敍) 등을 소환하여 모두 직전(職田)을 회복시켰으며, 닭을 그려 왕의 침상에 넣은 화계(畫鷄) 사건과 김돈중의 말(馬)이 저질렀던 유시(流矢) 사건으로 귀양간 자도 모두 서울로 오게 하였다. 중부는 서해도의 군ㆍ현을 모두 그의 고향인 해주(海州)에 속하게 하고, 의방은 그의 외가(外家) 고을인 금구(金溝)를 현령관(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 공부낭중 유응규(庾應圭)를 금 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 “삼가 보건대 신의 형 현(晛)이 오랫동안 주 나라 왕실[周室 금 나라를 비유함]을 높이 받들고, 즐겁게 한 나라 번국[漢藩 고려를 비유한 것]의 도리를 따랐습니다. 중년에 이르러 병으로 인하여 드디어 여러 해 동안 신음하여, 이름난 의원도 손을 대지 못하였거늘 한 개의 환약(丸)이 어찌 다시 그 신령한 효험을 나타내리오. 오랜 병이 점점 깊어져 나라를 무너뜨릴까 두려워하여, 근자에 중대한 책임(왕위)을 벗어남으로써 남은 여생을 보전하려 하였습니다. 신의 선국왕(先國王 인종)인 신 해(楷)의 유언(遺言)을 받들었기 때문에 신이 동모의 형제가 되므로 선대의 유업을 부탁할 만하다 하여, 신으로 하여금 임시 군국의 사무를 지켜 보게 하니, 신이 회피할 계책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또한 진실로 어려운 바 있어, 장차 대국에 가서 호소하려 하였으나 다만 산천의 길은 더욱 멀며, 또 만백성에게 주인이 없을 수 없고, 종묘를 지키는 사람이 없을 수 없어 억지로 국인의 뜻에 맞추어 임시 책임을 맡았기에 감히 그 사실을 갖추어 황제께 진달하나이다." 하였다.
전왕의 이름으로 표를 올리기를, “신이 오랫동안 질병에 걸려 점점 쇠약하고 수척하더니 정신이 이로 인하여 혼미하고, 기운도 이로 말미암아 쇠잔하여 의원이 독소를 다스려도 효험이 없고 약을 독하게 힘껏 먹어도 낫지 않으니, 이수(二豎: 병)가 고황(膏肓)에 들어 하늘이 혼백(魂魄)을 빼앗은 것입니다. 선인(先人)의 나라 다스리는 교훈을 공경히 받들고 열국(列國)에 솔선하여 상국에 조공을 하는 일에 관하여 민정(民政)이 책상에 가득히 쌓여도, 혹 결재를 폐하기도 하고 국빈(國賓)이 연속 이르러도 혹 영접의 예를 잃기도 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이미 어그러지고, 황제를 섬기는 예의도 많이 차질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병상에 엎드려 거의 몸과 사지(四肢)를 자리에 버려 둔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보호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신의 선조의 개척하고 씨 뿌린 유업을 생각한즉, 신이 옛날 신의 부친인 전국 왕을 섬길 때에 일찍이 신에게 부탁하기를, '혹 왕위를 교체할 경우가 있거든 반드시 먼저 네 아우에게 전하라.' 하였습니다. 이제 신에게 원자 홍(泓)이 있으나 어려서는 총명하지 못했고, 장성하여서도 또한 허물이 많아 종묘를 받들기를 감당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다시 번국(藩國)의 직명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신의 아우 호(晧)의 충순(忠順)한 덕은 일찍부터 왕과 어버이를 잘 섬겼고, 돈목(敦睦)하고 공손한 마음은 언제나 게으름이 없었습니다. 이에 그 착한 행실이 한결같음을 아름답게 여기고, 더욱 유명(遺命)의 징험 있음을 알겠기에 이에 신의 아우 호를 시켜 임시 군국의 사무를 맡아 지키게 하고, 감히 이에 주달하니 이 정성을 살피심을 바랍니다." 하였다.
[주D-002]유시(流矢) 의 사건 : 김돈중이 전년에 왕을 호종하다가, 자기가 탄 말이 뛰어서 기병이 차고 있던 전통(箭筒) 에서 화살이 빠져 나와 왕의 옆에 떨어졌다. 왕이 놀라서 범인을 잡으라 하는데도 돈중이 자기의 과실임을 고백하지 않아서 무고한 다른 사람이 많이 잡혀 죽었다.
[주D-003]이수(二豎) 가……들어 : 춘추(春秋) 때에, 진(晉) 나라 경공(景公) 이 병이 들어 진(秦) 나라의 명의 (名醫) 를 청하였는데, 그가 오기 전에 경공의 꿈에 두 수자(豎子) 가 서로 말하기를, “내일 명의가 오면 우리를 처치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고(膏) 의 밑과 황(肓) 의 위로 들어가면 명의도 어찌 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다음 날 명의가 와서 진찰하고는, “병이 고황(膏肓) 의 사이에 들어갔으니 치료할 수 없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8년 병오(1426,선덕 1)
5월19일 (임자) | ||
예조에서 계하기를,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상고해 보건대 송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4년에 교묘(郊廟)에 봉사(奉祀)한 예문(禮文)에 말한 바는, ‘국조(國朝) 시령(時令)의 추분(秋分)에 수성(壽星)을 남교(南郊)에서 제향한다.’고 했고, 《희령사의(熙寧祀儀)》에는 ‘단상(壇上)에 수성(壽星) 한 위(位)를 설치하되, 남쪽을 향하게 하고, 또 단하(壇下) 묘계(卯階)의 남쪽에는 각(角)·항(亢)·저(氐)·방(房)·심(心)·미(尾)·기(箕)의 일곱 위(位)를 설치하되 동쪽을 향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이아(爾雅)》에 ‘수성(壽星)은 각(角)·항(亢)이다.’고 하였는데, 이를 설명한 사람이 말하기를, ‘수(數)가 각·항에 일어나니, 열수(列宿)의 장(長)이므로, 수성(壽星)이라 한 것이고, 이른바 추분에 제향하는 수성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단하(壇下)에 각·항의 위(位)를 설치하고, 또 저·방·심·미·기를 같이 제사지내니, 더욱 명분(名分)이 없습니다. 또 《진서(晉書)》의 천문지(天文志)를 상고해 보건대 노인성(老人星) 한 별이 호(弧)의 남쪽에 있는데, 일명 남극성(南極星)이라고 합니다. 평상시 추분(秋分)의 아침에는 병방(丙方)에 나타났다가, 춘분(春分)의 저녁에 정방(丁方)으로 사라지는데, 나타나면 세상이 태평하게 다스려진다 하므로, 수(壽)하고 창성(昌盛)함을 주관한다 하며, 평상시 추분에 남교에서 보게 됩니다. 후한(後漢)에서는 국도(國都)의 남교에 노인성의 묘(廟)를 세워, 평상시 중추(仲秋)에 이를 제사지내게 되니, 수성(壽星)은 노인성(老人星)이 되는 것입니다. 청컨대 후한(後漢)의 제도에 의하여 단상(壇上)에 수성(壽星) 한 자리[位]를 설치하되, 남쪽을 향하게 하여 노인성에 제사 지내고, 그 단하(壇下)의 동방 일곱 별의 자리는 마땅히 다시 설치하지 말 것입니다. 또 입추(立秋) 뒤의 진일(辰日)에 영성(靈星)을 제사지내고 추분에 수성을 제향하는 것은 모두 소사(小祀)가 되는 것입니다. 본국(本國)은 추분의 아침에는, 노인성을 남교에서 제사지내는데, 각·항 두 별의 자리를 그 앞에 아울러 설치하고, 예료(禮料)는 노인성에는 변(籩)과 두(豆)를 각각 8개씩 쓰고, 각·항 두 별에는 변과 두를 각각 2개씩 쓰고, 생(牲)은 송아지 1마리를 쓰고, 축판(祝版)에는 ‘삼가 남극노인성존군(南極老人星尊君)과 각이성(角二星)·항사성(亢四星)에게 명백히 아룁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설위(設位)와 예료(禮料)가 모두 옛날 제도에 어긋났습니다. 원컨대 원풍(元豐)의 《예제(禮制)》에 의하여, 각·항의 자리는 설치하지 말고, 다만 노인성의 자리만 설치하여 제사지내되, 제품(祭品)도 또한 소사(小祀)의 예(例)에 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의주(儀注)에, “제사 전 3일에 행사(行事)해야 할 집사관(執事官)은 모두 2일 동안 산재(散齋)하고 정침(正寢)에서 자며, 제사지낼 곳에서 1일 동안 치재(致齋)한다. 무릇 산재할 때는 치사(治事)는 전과 같이 하되, 다만 술을 마음대로 마시지 말고, 파·부추·마늘을 먹지말며, 조상(弔喪)과 문병(問病)을 하지 말며, 음악을 듣지 말며, 형벌을 행하지 말며, 형살 문서(刑殺文書)에 판결 서명(署名)하지 말고, 더러운 일에 참예하지 말며, 치재는 오직 제사지내는 일만을 행한다.【무릇 제사에 참예할 사람은 모두 2일 전에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제사 1일 전에 충호위(忠扈衛)는 여러 사관(祀官)의 자리를 설치하고, 또 찬만(饌幔)을 설치하되 모두 동문(東門) 밖에 땅의 형편에 따라 적당히 한다. 전사관(典祀官)은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단(壇)의 안팎을 소제하고, 집례(執禮)는 헌관의 자리를 단 아래 동남쪽에 설치하되 서향하게 하고, 집사(執事)의 자리는 그 뒤로 조금 남쪽으로 설치하되, 서향하게 하고 북쪽을 윗자리로 한다. 집례(執禮)의 자리는 단 위에 설치하고, 알자(謁者)와 찬자(贊者)의 자리는 단 아래에 설치하되, 모두 동쪽으로 가까이 서향하게 한다. 헌관의 음복(飮福)하는 자리는 단 위의 남계(南階) 서쪽에 설치하되 북향하게 한다. 섶[柴]을 요단(燎壇)에 쌓아 놓고【신단(神壇)의 남쪽 병방(丙方)이다.】 망료(望燎)하는 자리는 요단의 북쪽에 설치한다. 헌관은 북쪽에 있게 하되, 남향하게 하고, 집례(執禮)·대축(大祝)·찬자(贊者)는 동쪽에 있게 하되, 서향하여 북쪽을 윗자리로 한다.【대축과 찬자는 조금 물려서 한다.】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평상복(平常服) 차림으로 주방(廚房)에 나아가 세척(洗滌)한 것을 보고, 찬구(饌具)를 살피고, 생(牲)이 살쪘는가를 보고 재소(齋所)로 돌아온다. 포시(晡時) 후에 전사관(典祀官)이 재인(宰人)을 거느리고 생(牲)을 벤다.【가죽째 삶아 익힌다.】 제삿날 행사하기 전에 전사관은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노인성좌(老人星座)를 단 위의 북방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왕골자리를 깐다. 축판(祝版)을 신위의 오른쪽에 놓고,【점(坫)이 있다.】 폐비(幣篚)는 준소(尊所)에 진설하고, 향로(香爐)와 향합(香合)과 촉(燭)을 신위 앞에 설치하고, 제기(祭器)와 찬수를 담을 찬구(饌具)를 설치하되, 변(籩) 8개는 왼쪽에 있게 하여 세 줄로 하고, 오른쪽을 윗자리로 한다.【첫 줄은 소금이 앞에 있고, 어수(魚鱐)가 그 다음이며, 둘째 줄은 건조(乾棗)가 앞에 있고, 과황(果黃)과 진자(榛子)가 그 다음이고, 세째 줄은 능인(菱人)이 앞에 있고, 검인(芡仁)과 녹포(鹿脯)가 그 다음에 있다.】 두(豆) 8개는 오른쪽에 있게 하여 세 줄로 하고, 왼쪽을 윗 자리가 되게 한다.【첫 줄은 부추김치가 앞에 있고, 젓이 그 다음이며, 둘째 줄은 무우김치가 앞에 있고, 사슴젓과 미나리김치가 그 다음이며, 세째 줄은 토끼젓이 앞에 있고, 죽순김치와 물고기젓이 그 다음에 있다.】 보(簠)와 궤(簋)가 각각 2개씩 변(籩)·두(豆) 사이에 있게 하되, 보는 왼쪽에 있게 하고, 궤는 오른쪽에 있게 한다.【보(簠)는 벼와 메조를 채우는데, 메조는 벼의 앞에 있고, 궤(簋)는 메기장과 차기장을 채우는데, 차기장이 메기장의 앞에 있다.】 조(俎) 1개는 보·궤의 앞에 있게 하고,【돼지를 채운다. 송(宋)의 《석전의(釋奠儀)》에 ‘무릇 앞에 있다.’고 말한 것은 모두 남쪽에 있는 것을 말한다.】 작(爵) 3개는 조(俎) 앞에 있게 한다.【각각 점(坫)이 있다.】 상준(象尊) 2개를 놓는데,【하나는 현주(玄酒)를 채우되, 상준(上尊)에 채우고, 하나는 청주(淸酒)를 채운다. 무릇 신(神)에게 제사하는 물건이 그 당시에 없는 것은 현시(現時)의 물건으로 대신한다.】 단 위의 동남 모퉁이에 북향하여 서쪽을 윗자리로 하고, 세(洗)는 단 아래 동남쪽에 북향하여 설치하며,【관세(盥洗)는 동쪽에 있고, 작세(爵洗)는 서쪽에 있다.】 뇌(罍)는 세(洗) 동쪽에 있게 하되, 구기[勺]를 얹어 두고, 비(篚)는 세(洗)의 서남쪽에 늘어놓는다.【수건과 작을 담아 놓는다.】 여러 집사의 관세(盥洗)는 또한 동남쪽에 모두 북향하여 설치한다. 준(尊)과 뇌(罍)와 비(篚)와 멱(羃)을 잡는 사람의 자리는 준·뇌·비·멱의 뒤에 설치한다. 제삿날 축시(丑時) 전 5각(刻)에【축시 전 5각은 곧 삼경(三更) 삼점(三點)이니, 행사는 축시 1각(刻)을 쓴다.】 전사관(典祀官)이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찬구(饌具)에 제수(祭需)를 담고 나면, 물러가서 자리에 나아가 제복(祭服)을 입고 올라와 신위판(神位版)을 좌전(座前)에 설치한다. 3각(刻)에 행사할 집사관은 각기 제복을 입는다. 집례는 알자와 찬자를 거느리고 먼저 단 남쪽의 배위(拜位)에 나아가, 겹줄로 북향하여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사배하고 나서 자리로 나아간다. 1각 전에 알자가 전사관(典祀官)·대축(大祝)·재랑(齋郞)을 인도하여 들어와서 단 남쪽의 배위에 나아가 겹줄로 북향하여 서쪽을 위로 하여 서면, 집례가 ‘사배하라.’ 말하고, 찬자가 전갈(傳喝)하면,【무릇 집례가 말을 하면 찬자가 모두 전갈한다.】 전사관 이하 모두 사배한다. 알자가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을 씻고 수건에 닦고 나면, 각기 자기 자리로 나아간다. 재랑이 작세위(爵洗位)로 나아가 작을 씻고 닦고 나서 비(篚)에다 담아서 받들고 준소에 나아가 점(坫) 위에 둔다.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들어와 자리에 나아가 서향하여 서고, 집례가 ‘사배하라.’고 말하면, 헌관은 사배한다. 알자가 헌관의 헌관은 왼쪽에 나아가 유사(有司)에게 아뢰어 삼가 갖추어 행사하기를 청한다. 집례가 ‘폐백 드리는 예(禮)를 행하라.’ 말하면,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에 나아가 북향하여 서게 하고, 홀을 꽂고 손을 씻고 수건에 닦기를 찬한다.【손을 씻고 닦는 것은 찬하지 아니한다.】 홀을 잡기를 찬하고, 인도하여 단으로 나아가 남계(南階)로 올라【여러 집사(執事)들은 오르고 내리는 것을 모두 동계로 한다.】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 서게 하고, 꿇어앉아서 홀 꽂기를 찬한다. 집사자 한 사람은 향합을 받들고, 집사자 한 사람은 향로를 받든다. 알자가 세 번 향을 피우기를 찬하면, 집사자가 향로를 신위 앞에 올리고, 대축이 폐백을 헌관에게 주면, 헌관이 집폐(執幣) 헌폐(獻幣)하는데, 폐백을 대축에게 주어 신위 앞에 드리게 한다.【향합을 받들고, 폐백을 주는 것은 모두 헌관의 오른쪽에서 하고, 향로를 드리고, 폐백을 드리는 것은 모두 헌관의 왼쪽에서 한다. 작을 주고 작을 드리는 것도 이에 준한다.】 알자가 〈헌관에게〉 홀을 잡고 구부렸다 엎드렸다가 일어나기를 찬하고, 인도하여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간다. 조금 있다가 집례가 ‘초헌례(初獻禮)를 행하라.’고 말하면,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남계로 올라 준소에 나아가서 서향하여 서게 한다. 집준자가 멱(羃)을 들고 술을 따르면, 집사자가 작으로 술을 받는다.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 서게 하고, 꿇어앉아 홀을 꽂기를 찬한다. 집사자가 작은 헌관에게 주고, 헌관은 집작(執爵) 헌작(獻爵)하는데, 작을 집사자에게 주어 신위 앞에 드리게 한다. 홀을 잡고 구부렸다 엎드렸다가 일어나 조금 물러나서 북향하여 꿇어앉기를 찬하고, 대축은 신위의 오른쪽에 나아가 동향하여 축문(祝文)을 읽는다. 이를 마치면, 알자가 〈헌관에게〉 구부렸다 엎드렸다가 일어나기를 찬하고, 인도하여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조금 있다가 집례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라.’고 말하면,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올라가 준소로 나아가서 서향하여 서게 하고, 집준자가 멱(羃)을 들고 술을 따르면, 집사자가 작으로 술을 받는다.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 서게 하고, 꿇어앉아서 홀을 꽂기를 찬하고, 집사자가 작을 헌관에게 주면, 헌관은 집작 헌작하는데, 작을 집사자에게 주어 신위 앞에 드리게 한다. 〈헌관에게〉 홀을 잡고 구부렸다 엎드렸다가 일어나기를 찬하고, 인도하여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조금 있다가 집례가 ‘종헌례(終獻禮)를 행하라.’고 말하면,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예(禮)를 행하기를 아헌례의 의식과 같게 하고, 인도하여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집례가 ‘음복(飮福)하고 제육(祭肉)을 받으라.’고 말하면, 집사자가 준소에 나아가 작으로 복주(福酒)를 따르고, 또 집사자가 조(俎)를 가지고 나아가 신위 앞에 있는 조육(胙肉)을 덜어 낸다.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남계로 올라가 음복위(飮福位)에 나아가 북향하여 서게 하고, 꿇어앉아 홀을 꽂기를 찬하고, 집사자가 헌관의 오른쪽에 나아가 서향하여 작을 헌관에게 주면, 헌관은 작을 받아 마신다. 작을 다 비우면 집사자는 빈 작을 받아 다시 점(坫) 위에 놓는다. 집사자가 서향하여 조(俎)를 헌관에게 주면, 헌관은 조를 받아서 집사자에게 준다. 집사자는 조를 받아서 남계로 내려와 문으로 나간다. 알자가 홀을 잡고 부복하였다 일어나기를 찬하고, 인도하여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간다. 집례가 ‘재배(再拜)하라.’고 말하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재배한다. 집례가 ‘변(籩)·두(豆)를 걷어치우라.’고 말하면, 대축이 나아가 변·두를 걷어치운다.【걷어치운다 함은 변·두 각각 1개를 있던 자리에서 조금 옮기는 것이다.】 집례가 ‘사배(四拜)하라.’고 말하면, 헌관은 사배한다. 집례가 ‘망료(望燎)하라.’고 말하면, 알자는 헌관을 인도하여 망료하는 자리에 나아가서 남향하여 서게 하고, 집례는 찬자(贊者)를 거느리고 망료하는 자리로 나아가 서향하여 서게 하면, 대축이 축판과 폐백을 가지고 요단(燎壇)위에 나아가 태울 나무에 놓는다. 집례가 ‘태우라.’고 말하면, 태울 나무의 반을 태운다. 알자가 헌관의 왼쪽에 나아가 예가 끝났다고 아뢰면, 알자는 헌관을 인도하여 나가고, 집례는 찬자를 거느리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알자가 전사관과 집사자를 인도하여 단 남쪽의 배위로 나아가 서게 하고, 집례가 ‘사배하라.’고 하면, 전사관과 여러 집사는 모두 사배한다. 이를 마치면, 알자가 인도하여 나가고, 집례가 찬자와 알자를 거느리고 단 남쪽의 배위로 나아가서 사배하고 나간다. 전사관은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신위판(神位版)을 간수하고, 예찬(禮饌)을 거둬치우고 내려가서 곧 물러간다.” 하였다. 【원전】 3 집 27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카노푸스
카노푸스(Canopus), 또는 용골자리 알파(α Car / α Carinae)는 용골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로, 동아시아의 별자리에서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또는 노인성(老人星)이라고 한다. 실시등급(實視等級) -0.72등급으로, 하늘에서는 태양을 제외하면 시리우스에 이어 두 번째로 밝은 별이다. 표면온도는 7000℃, 지구(地球)에서 310광년(光年) 떨어져 있다.
적위(赤緯)가 -51°40′이기 때문에 북위 37°30′인 서울에서는 지평선(地平線)에서 약 1도 정도로, 거의 지평선에 걸쳐 있다. 지평선 가까이 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붉게 보인다.
동양에서 이 별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 믿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남부 지역에서 이 별을 보았을 경우 나라에 그것을 고하도록 했으며, 매우 경사스러운 징조로 여겼다. 또 이 별을 보게 되면 오래 산다는 말도 있다.
이 별은 약 1만 2000년 뒤에는 남극성(南極星)이 될 것이다.
물리적 특성[편집]
히파르코스 위성을 쏘아 올리기 전까지 이 별의 거리 예측값은 96광년에서 1200광년까지 제각각이었다. 근사한 거리 수치가 밝혀지면서, 카노푸스는 우리 은하 내 발견된 별들 중 가장 밝은 부류에 들어가게 되었다. 히파르코스가 측정한 근사한 거리는 지구에서 약 310광년으로(96파섹), 시차값은 10.43± 0.53 밀리초각이다.
카노푸스와 지구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카노푸스 존재 자체의 불확실성에 있다. 카노푸스는 적색 거성으로부터 혹은 적색 거성으로 진화했거나 진화하는 상태에 있는, 분광형 F0la의 '밝은 초거성'으로, 몇 개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속성을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자료의 부족함 때문에 카노푸스가 얼마나 밝고 지구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기가 힘들다. 따라서 카노푸스를 직접 관측하는 것이 이 별을 알 수 있는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시차를 관측하기가 부적합한 대상이었고, 따라서 1990년대 초까지 이 별의 거리는 불확실했다.
카노푸스는 태양보다 15,000배 더 밝다. 카노푸스보다 밝은 별은 시리우스이다. 그러나 시리우스는 태양의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8광년) 밝아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카노푸스의 표면 온도는 7200켈빈 정도이다. 반지름은 0.6천문단위 수준으로(각지름 0.006초각에서 도출한 크기) 이는 태양 반지름의 65배 수준이다. 만약 이 별을 태양 대신 태양계 중앙에 갖다 놓는다면, 카노푸스의 표면은 수성 궤도의 4분의 3까지 이를 것이다. 지구 수준의 온도가 형성되려면 120AU(태양과 지구와의 거리의 120배)나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는 명왕성 궤도의 3배나 된다.
카노푸스는 전갈자리-센타우루스자리 성협의 일원으로, 이들은 고유 운동을 공유하고 있다.
가시성[편집]
카노푸스는 천구의 남극에 가까운 자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북반구 고위도 지역에서는 관찰할 수 없다. 오스트레일리아, 남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남회귀선 밑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시리우스와 카노푸스를 동시에 잘 볼 수 있다. 남위 38도 밑으로 내려가면 카노푸스는 주극성으로 보이게 된다. 카노푸스는 천구에서 시리우스에 이어 두 번째로 밝은 별로(1843년 용골자리 에타가 카노푸스보다 밝아진 적이 있다) 겉보기 등급은 -0.72이다.
분야 | 의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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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 가을(음력 8월) |
날짜 | 양력 9월 23일경 |
관련정일 | 추분(秋分) |
정의
추분(秋分)에 인간의 장수를 담당한다고 하는 노인성에 지내는 제사. 노인성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여겨 고려시대에는 잡사(雜祀), 조선시대에는 소사(小祀)로 규정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남극성(南極星),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수성(壽星), 남극수성(南極壽星)으로 부르는 노인성은 용골(龍骨)자리에 있는 카노푸스(Canopus)를 가리킨다. 이 별은 시리우스 다음으로 밝은 별로서 남반구에서는 가장 밝다. 남반구의 별자리이므로 우리나라에서는 평소 보기 어렵지만 남쪽 해안과 제주도에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일년 중 추분(秋分)에 나타났다가 춘분(春分)에 사라진다고 하여 추분에 제사를 지냈다.
노인성이 나타나면 세상이 태평해지고 군왕이 장수하는 반면 보이지 않으면 군주가 위험하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여겼기 때문에 노인성이 나타나면 백관(百官)이 왕에게 축하를 올렸다. 노인성은 비단 국가와 군왕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장수를 가져다주는 신앙 대상이었다. 작은 키, 흰 수염, 큰 머리, 튀어나온 이마의 형상을 하고 발끝까지 덮은 도의(道衣)를 입은 노인의 모습을 그린 노인성도(老人星圖)는 세화(歲畵)의 한 종류였다.
내용
『통전(通典)』에는 주나라에서 추분에 남교에서 수성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수성이 노인성이다. 『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에 의하면 국도(國都)의 남교(南郊)에 노인성묘가 있어서 중추(中秋: 8월)의 달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애초 노인성묘에서 노인성을 제사지내던 것이 점차 제단의 형식으로 바뀌었다.
당나라 개원(開元) 24년(736)에 수성단(壽星壇)을 설치하고 천추절(千秋節: 중국 황태자의 생일)에 노인성과 각(角)·항(亢)·저(氐)·방(房)·심(心)·미(尾)·기(箕) 등 7수(宿)를 함께 제사지냈다. 7수 역시 수성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송대에도 이와 비슷하였는데 「희녕사의(熙寧祀儀)」에 의하면 단상에 노인성 일위(一位)를 남향으로 설치하고 단 아래 남쪽에 각, 항 등 일곱 신위를 동쪽으로 향하게 배설(配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은 원풍 연간(元豊年間: 1078~1085)에 변하여 단 아래의 7위를 제외하고 노인성만을 모셨다. 그리고 고종 소흥(紹興) 7년(1137)에는 태상박사 황적(黃積)의 건의에 따라 추분에 제사를 지냈다. 명나라에 들어와 홍무(洪武) 3년(1370)까지 지속되다 영성(靈星)과 더불어 폐지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성제(老人星祭)가 가장 성행하던 때는 고려시대이다.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에 의하면 노인성제는 대·중·소사에 포함되지 않고 잡사에 속하였다. 이것은 노인성제가 유교식이라기보다 도교나 불교의 형식으로 제향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개성 남교에서 노인성제를 지냈지만 그 외 내전(內殿), 복원궁(福源宮), 충주 죽장사(竹杖寺) 그리고 서경을 비롯한 노인당 등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향일도 추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2월, 4월, 8월 등 다양하였다. 이러한 제사는 도교 초제(醮祭)의 형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송대의 영향으로 노인성과 더불어 각·항의 수성도 같이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 수성에 대한 제사는 태종과 세종대를 거치면서 정비되었다. 먼저 태종 11년(1411)에 수성에 대한 제사를 유교적 제향 방식에 따라 요단(燎壇)에서 희생(犧牲)을 태우는 방식으로 거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종 8년에는 원풍의 예제에 따라 각·항의 신위를 제외하고 노인성만을 모시는 것으로 정하였다. 이후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五禮儀)」에서 이 노인성제는 제외되었다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소사로 실렸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노인성제는 지속되지 못하고 중종 이후 폐지된다. 폐지의 원인이나 시기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 정조대에 영성(靈星)과 더불어 복원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정조 21년(1797)에 예조판서 민종현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복원을 주장하였고, 정조가 이를 받아들여 영성과 수성에 관한 의식인 「성단향의(星壇享儀)」를 직접 지었다. 여기서 정조는 영성과 수성이 천신(天神)에 속하므로 남교에 제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중국 고대의 예를 통해서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인성제는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임미선 외.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2000
- 高麗史, 國朝五禮儀, 文獻通考, 五禮通考, 通典, 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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