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은면(老隱面)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
지명유래를 고찰함에 있어서 지방행정단위를 구별하는 군현제와 면리제에 대한 기본개념과 연혁들도 알아야 한다. 단순한 마을의 지명유래도 역사적 사건이나 지방제도의 변천, 그리고 한자나 한글의 음운체계의 변화 등에 따라 달리 표기되기도 하고, 방언이나 잘못된 기록으로 인하여 본래의 고유지명이 전혀 다른 지명으로 변하여 고착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고유의 지명보다는 한자로 표기된 지명을 오늘날 우리가 상용하는 한자와 한글로 직역하거나 지역의 방언이나 발음 상의 차이를 언급하여 고유의 지명을 왜곡하기도 하며, 타 지역의 지명유래를 와전시켜 전래된 것처럼 기술하기도 한다.
노은면의 지명유래에서 국망산이란 옛지명이 금방산이니, 국향산이니 하는 논쟁이 있었으며, 노은면의 유래도 조선중기에 청안현감을 지낸 정경연이 낙향하여 지냈기에 노은(老隱)이 되었다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다. 국망산이나 논고개의 유래가 왜곡된 이유는 무엇일까 ? 금방산이라는 유래는 금광산이 생겨나면서 나타난 지명이거나 국망산을 궁방산으로 발음하는 차이에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고, 국향산은 민비의 행궁을 짓기 위해 지방유생들에 의해 국망산을 국향산으로 왜곡하여 상소를 올린 것에서 비롯된다. 또한 논고개나 노은치의 유래는 정경연이라는 청안현감이 이 곳에 정착하면서 노은이라는 지명이 노인이 숨어사는 곳으로 변형된 것일 뿐이다. 소고(蘇古)라는 지명에서 소고(蘇古)는 솟대울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솟대울 또는 쇳대울은 솟대가 아닌 효죽(孝竹)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효죽에서 효(孝)는 솟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효(孝)와 노(老)는 모두 "머리와 솟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자(子)와 비(匕)"에서 비(匕)는 "뾰족하다."라는 뜻보다는 지팡이를 짚은 사람 즉 늙은이"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효죽(孝竹)과 노은(老隱)은 정경연의 세거지와 연관성이 있기는 하지만, 노은이라는 지명은 보련사와 천룡성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생성되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서에 나타난 지명에서 보련사, 국망산, 천룡산, 천룡성 등이 고려말에서 조선조 초기에 등장하며, 민비 또는 정경연에 따른 지명 유래는 구한말이나 근래에 형성된 지명유래일 뿐이다. 명성황후란 칭호도 임오군란이 일어날 때에는 없었으며, 승정원일기에서도 중궁전으로 표기될 뿐이다. 조선시대에서 황후란 칭호는 고종이 세운 대한제국 때로 민비가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이기에 명성황후는 후대의 기록일 뿐이다. 노은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영조 35년(1759년)에 간행된 여지도에서 노은면현으로 나타나며 노은면현에서 현은 고을 현(縣)이 아니라, 재갈 현(峴) 또는 고개 치(峙)다. 면리제에 따른 행정단위에서 천룡리, 대방동, 보련동, 저전리, 소미리, 고장박리, 자작리, 법동으로 나타나며, 후대의 기록에서 우성동(偶城洞), 금본동, 대덕동, 안락동 등이 나타난다, 그리고, 대한제국 광무2년(1898년) 충청북도 각군읍지에서 노현(老峴)과 신흥(新興) 등이 기록된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면리제에서는 현재처럼 면사무소가 설치되는 것이 아니고, 면장 또는 리장이 자신의 집에서 촌을 대표하여 그를 관장할 뿐이며, 면사무소가 설치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로 가신리 가정자에 설치되었다가 연하리로 이전되었다. 노은면에서 소고(蘇古)라는 지명이 노은(老隱)과 같이 나타나는 것도 향촌의 대표가 바뀐 것으로 추정되며, 노은현면(老隱峴面)의 노은치(老隱峙) 또는 노현(老峴)은 청안현감을 지낸 정경연의 후손들이 정착하고 향촌의 대표가 되면서 노은면과 노은고개의 유래가 변질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연하리(蓮河里)는 보련사(寶蓮寺)에서 유래한다.
보련산의 옛지명인 천룡산(天龍山)과 보련사(寶蓮寺)에 관한 기록은 조선조 초기에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보련동(寶蓮洞)에 자기소와 더불어 나타난다. 가마골이란 지명도 보련동 자기소와 연관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말의 대학자인 이숭인과 조선시대 김종직의 시에 나오는 보련사(寶蓮寺)도 천룡산(天龍山)에 있었던 보련사(寶蓮寺)로 추정된다. 보련사(寶蓮寺)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보련골 절터에서 발견된 "건흥5년명 금동광배"가 고구려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기에 보련사(寶蓮寺)는 중원고구려비와 봉황리 마애불과 더불어 대표적인 고구려의 유적지 중에 하나로 꼽힌다. 고구려의 옛지명이었던 국원성(國源城)은 삼국사기에, 고려의 대몽항전에서 나타나는 천룡성(天龍城)은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전한다. 특히 보련산성인 천룡성(天龍城)은 그 관할구역이 여주현에 속하여 여주민들이 입보하여 항전한 것으로 나타나며, 이는 노은면의 천룡성이 충주목에 속한 음죽현(장호원)과 여주현 사람들의 피난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룡성은 고려시대에 북방민족인 거란(요), 여진(금), 몽고(원)는 물론이고 고려말의 홍건적 침입 때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천룡성은 신라시대에 재축성된 장미산성과 달리 축조방식이 상이하다. 이는 천룡성과 장미산성을 축조한 세력이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연하리(蓮河里)와 하남고개(河南峴)는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
노은면에서 앙성면으로 넘어가는 하남고개는 하나미고개 또는 하내미고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남이란 지명을 직역하면 "내가 남쪽으로 흐르는 곳이다." 하지만 지명유래의 본래 의미는 "보련산 아래에 있다."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보련산은 보련사가 있는 산이고, 보련골은 보련사가 있는 마을이다. 천룡산도 천룡사가 있는 산이고, 천룡은 천룡사가 있는 마을인 것이다. 하나미 고개도 보련산 아래에 있는 고개이며, 앙성면의 하남도 보련산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보련산과 천룡산은 모두 사찰과 관련된 지명인데, 동일한 산이 두 개의 지명으로 나타나는 것은 두 사찰의 존립시기와 관련된다. 즉 조선조 초기에 사사혁파에 따라 사찰을 정리 또는 폐사시키면서 보련사가 천룡사보다도 더 오랜 동안 남아 있었기에 현재의 명칭이 보련산으로 잔존하는 것이다. 보련산이란 지명에서 보련골에 무슨 연지와 연꽃이 있었겠는가 ? 보련골과 연화동에는 보련산에서 흘러내린 돌밭들이 산재하여 늪지가 형성될 수가 없는 지형이다. 즉 연화동(蓮花洞)과 연하리(蓮河里)도 보련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가에 있다는 뜻이다.
국망산과 보련산의 유래는 ?
국망산과 보련산의 본래 지명을 추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지명유래에 관한 자료들을 분석하면 수많은 추정이 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차자표기법에 따른 변화와 지형에 따른 지명을 중심으로 제기하고자할 뿐이다. 국망산을 직역하면 "나라를 바라보는 산이다." 그 중에서도 임오군란에 따른 민비의 행궁 건립으로 제기된 상소에서 나타나는 "국향산"은 왕이 거처하는 한양의 궁성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후대에 와전된 지명유래일 뿐이며, 대부분의 지명유래는 국(國)을 고구려의 국내성의 옛지명인 불내현과 같이 불(不 또는 弗)을 가차한 이두문자에서 추정하거나 벌(伐) 또는 부리(夫里) 등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즉 전자로 해석하면 "국원성을 바라보는 산"이라는 뜻이고, 후자로 해석하면 "국원성에 우뚝 솟은 산"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국망산은 국원성과 연관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보련산은 불교의 사찰인 보련사와 천룡사와 관련된 지명으로도 볼 수 있고, 국망산에 비하여 산줄기가 길게 늘어진 산이라는 뜻으로 "연산(連山)"에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특히 천룡산과 장미산이 역사서에서 혼재하여 나타나는 것은 "보련과 장미"의 축성설화와 "봉황성"의 위치 논란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포천(노은내 또는 큰개울)이 남한강과 합류되는 곳이 가흥의 봉황골인데, 이 곳에서는 한포천을 봉황내라고 한다.
노은(老隱)과 소고(蘇古)는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
인문지리의 특성상 고지명의 변천사는 역사 속에서 변형된 지명들과 지역 속에 숨어있는 화석같은 지명들을 찾아 추정할 뿐이다. 마한과 고구려 시대의 고지명에서 인근 지역의 옛지명을 살펴보면은 장호원(설성)은 노음죽(奴音竹), 진천은 만노(萬弩) 또는 금물노(今勿奴) 등이 나타나는데, 노(奴), 노(怒), 노(弩) 등은 뜻이 있는 지명이 아니라, 본래의 지명을 가차한 지명이라는 것이다. 노은면(老隱面) 유래에서 노은(老隱)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후기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국원성과 고려의 천룡, 그리고 조선시대 초기에 나타나는 보련사, 국망산, 천룡산 등과 같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닐까한다. 그러나, 소고(蘇古)라는 지명은 임오군란 전후에 가신리의 번성으로 인하여 노현(老峴)과 신흥(新興)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처럼 노은면 수룡리에 존재한 지역명으로 추정할 뿐이다. 노은(老隱)에서 노(老)는 노(奴), 노(怒), 노(弩), 노(魯) 등으로도 쓸 수 있는 이두식 표기로 해석하면 벌(伐), 들(坪), 양(壤) 등이 된다. 노(老)는 "늙다."보다는 "우두머리 또는 솟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노(奴)는 "들(坪)과 달(達)"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노은(老隱)이란 지명은 산골짜기의 작은 들판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논산시와 대전시 유성지역에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논산시(論山市)의 유래에서도 논산(論山)은 논(畓)에서 유래한다기보다는 노성(魯城)과 연산(連山)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대전의 노은이란 지명도 백제 때 유성의 옛지명인 노사지현(奴斯只縣)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면리제의 연혁은 신라나 고려시대의 향, 소, 부곡 뿐만 아니라, 조선조 초기에 군현을 중심으로한 방위면(方位面)과 리(里)와 리정(里正)에 관한 기록으로도 나타난다. 세종지리지에 나타난 충주목의 규모는 1천 8백 71호에 인구는 7천 4백 52명. 청풍군은 1백 91호에 인구는 6백 56명. 제천현은 4백 15호에 인구는 1천 2백 35명이다. 조선초기에 노은면의 인구는 2백 여명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보련사 기록에서 나타난 토지 150결과 승려 70이란 규모는 오늘날 토지로 환산하면 45~90만평의 원속전을 소유한 대사찰이다. 보련사에 딸린 승려와 보련사 주변에 거주하는 노비의 수를 합하면 노은면의 인구는 그 보다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은면의 지명 유래는 조선시대의 작은 사건인 민비의 피난과 낙향한 인물로 얼룩져 있을 뿐이다. 보련사지에서 출토된 건흥오년명 금동광배와 금동불상이 아니라 작은 행궁터에 집착하고, 보련사와 천룡성이라는 큰 유적지가 아니라 논고개라는 작은 고개에 얽매여 그 유래를 굴절시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수룡리에는 충주목사였던 이국헌의 송덕비가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 이국헌 목사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송덕비를 세웠지만, 그로 인하여 자신이 충주아전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 가족들이 멸문지화를 당한다. 지역민들에게 지명유래와 역사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역사란 단지 기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민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고찰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
[ 보련산과 보련사에 관한 참고자료]
고려사절요/제17권/고종 안효대왕/계축 40년(1253) - 금당협과 천룡성 전투
○ 九月(구월) : 9월에
忠州倉正崔守(충주창정최수) :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
設伏金堂峽(설복금당협) : 금당협(金堂峽)에 매복하고
候蒙兵至(후몽병지) : 몽고 군사가 다다르기를 기다려
急擊斬十五級(급격참십오급) : 급히 쳐서 15급을 베고
奪其兵仗與所虜男女二百餘人(탈기병장여소로남녀이백여인) : 병기와 포로된 남녀 2백여 명을 빼았었다.
以功除隊正(이공제대정) : 그 공으로 대정에 제수되었다.
○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에
○ 李峴與蒙兵攻天龍山城(리현여몽병공천룡산성) : 이현(李峴)이 몽고 군사와 더불어 천룡산성(天龍山城)을 치자,
黃驪縣令鄭臣旦(황려현령정신단) :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과
防護別監趙邦彥(방호별감조방언) :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이
出降(출항) : 나와 항복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7권/고종 안효대왕/갑인 41년(1254) - 천룡성과 양근성
○ 春正月(춘정월) : 봄 정월에
謁景靈殿(알경령전) :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 安慶公淐(안경공창) : 안경공 창이
至蒙古屯所(지몽고둔소) : 몽고군이 주둔한 곳에 이르러
設宴張樂(설연장악) :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갖추어
饗士(향사) : 군사를 먹였다.
阿母侃還師(아모간환사) : 아모간이 군사를 되돌려 갔다.
○ 京城解嚴(경성해엄) : 경성에 계엄(戒嚴)을 해제하고,
遣少卿郭汝翼(견소경곽여익) : 소경 곽여익(郭汝翼)ㆍ
郞將鄭子璵等(랑장정자여등) : 낭장 정자여(鄭子璵) 등을 보내어
往候蒙兵還否(왕후몽병환부) : 몽고 군사가 돌아가는지 돌아가지 않는지를 탐지하고,
兼安撫天龍楊根二城(겸안무천룡양근이성) : 겸하여 천룡성과 양근성을 안무하게 하였다.
○ 二月(이월) : 2월에
降襄州東州(강양주동주) : 양주와 동주를 강등하여
爲縣令(위현령) : 현령이 다스리는 고을로 만들고
金城爲監務(금성위감무) : 금성(金城)은 감무(監務)가 다스리는 고을로 만들었으며,
流天龍城別監趙邦彥(류천룡성별감조방언) : 천룡성 별감 조방언(趙邦彦)과
黃驪縣令鄭臣旦于海島(황려현령정신단우해도) :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을 섬에 귀양보냈다.
사사혁파(寺社革罷)
조선 건국 이후 불교에 대한 억압책으로 시행한 사원정리.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원소유의 사원전(寺院田)과 법손노비(法孫奴婢)를 몰수했고, 국가에서 지정한 사찰 이외에는 혁파했다. 사원은 고려시대에 왕실이나 귀족들에 의해 토지와 노비 등을 희사받아 성장하기 시작하여, 수조지가 약 10만 결에 달하기도 했다. 고리대나 권력을 이용해 강제로 남의 토지를 빼앗거나, 일반백성을 자신들의 전호(佃戶)나 노비로 삼는 등의 방법을 통해 많은 토지를 모았다. 이것은 국가에 세를 내야 할 토지와 양민의 감소를 가져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건국 이후 사사혁파를 시행했다. 고려말에 실시한 과전법에서 먼저 사사전을 면세지에서 제외시켰다. 또한 사원에 대한 개인의 토지희사 금지, 사패(賜牌)와 희사에 의해 조성된 사원전의 회수 조치가 내려졌다. 사사혁파는 조선건국 주체였던 정도전(鄭道傳) 계열의 주도로 추진되었으나 전면적 혁파는 태조의 신불(信佛) 등의 이유로 실시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사사혁파 조치는 국가가 정한 사원 이외의 것들을 혁파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1402년( 태종 2)에 밀기부비보사사(密記付裨補寺社)로 정한 70개의 절과 승려 100명 이상의 사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찰을 혁파하려 했지만 실행할 수 없었다.
(중략)
1424년(세종 6)에 다시 대대적인 사원의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기존 불교계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해 조계·천태·지남 등 3종을 선종으로 하고, 화엄·자은·중신·시흥 등은 교종으로 하여 36사를 남겨 각기 나누어 속하게 했다. 그 36사는
한양에 흥천사·흥덕사·유후사(留後司)에 속한 숭효사·연복사·광명사·신엄사, 개성의 관음굴·감로사, 양주의 승가사·장의사·소요사·개경사·회암사·진관사·대자암, 공주의 계룡사, 진주의 단속사, 경주의 기림사, 구례의 화엄사, 태인의 흥룡사, 고성의 유점사, 원주의 각림사, 단율(段栗)의 정곡사, 안변(安邊)의 석왕사, 경기도 해풍의 연경사, 송림의 영통사, 충청북도 보은의 속리사, 충주의 보련사, 거제의 견암사, 합천의 해인사, 거평의 서봉사, 전주의 경복사, 회양의 표훈사, 황해도 문화(文化)의 월정사, 해주의 신광사, 평양의 영명사 등을 말한다. 후에 강릉의 상원사
가 추가되어 37사가 되었다. 이러한 사사혁파는 그 과정을 통해 사원세력의 대폭적인 약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불교는 사상적으로도 유교에 지배적인 위치를 내주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청주박물관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 유물번호신수1714
- 국적/시대한국-통일신라
- 크기높이 10.1cm
- 출토지충청북도 충주시 연하동
- 재질금속- 금동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보관 앞에 작은 부처인 화불(化佛)이 있으나 녹이 많이 슬고 마멸이 심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양 어깨로 드리워 졌으며, 천의(天衣)는 어깨와 굽혀진 팔 안쪽으로 늘어져 있는데 오른손과 오른쪽 천의 일부는 떨어져 나갔다. 광배는 없으나 이를 달기 위한 돌기가 뒷면 중앙에 남아 있다. 얼굴은 둥글지만 전체적으로 곡선미와 세련미가 나타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제작 기법을 잘 따르고 있다.
'건흥 5년'이 새겨진 금동 광배 ('建興五年'銘金銅光背)
- 유물번호M335-6
- 국적/시대한국-고구려
- 크기높이 12.4cm
- 출토지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 재질금속- 금동
- 지정번호
불상 뒤에 연결되었던 배 앞머리 형태의 광배(부처의 몸에서 나는 빛 장식)이다. 가운데 아래쪽에 뚫려있는 사각형 구멍은 불상을 끼워 고정했던 구멍이다.
좌우 끝에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본래 삼존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꽃무늬의 머리 광배를 가운데 배치하였고, 그 위로 조각된 불꽃무늬와 앉은 자세의 작은부처[화불(化佛)]는 화려함과 장엄함을 더해 준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X'자형의 천의(天衣)를 입고 있으며,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불상을 만들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건흥(建興)’은 고구려의 연호(年號)로 보이며, 충주고구려비와 함께 충북지역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고구려 유물이다.
建興五年歲在丙辰
佛弟子淸信女上部
兒奄造釋迦文像
願生生世世値佛聞
法一切衆生同次願
건흥 5년 병진년에 부처님의 제자이자 청신녀인
상부의 아엄이 석가모니상을 만들다
원하건대 태어나는 세상마다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듣게 하옵소서
모든 중생도 이 소원과 같이 하옵소서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 갑진(1424,영락 22)
4월5일 (경술) | ||
예조에서 계하기를,
“석씨(釋氏)의 도는 선(禪)·교(敎) 양종(兩宗)뿐이었는데, 그 뒤에 정통과 방계가 각기 소업(所業)으로써 7종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잘못 전하고 거짓을 이어받아, 근원이 멀어짐에 따라 말단(末端)이 더욱 갈라지니 실상 그 스승의 도에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또 서울과 지방에 사사(寺社)를 세워, 각 종(宗)에 분속(分屬)시켰는데, 그 수효가 엄청나게 많으나, 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절을 비워두고 거처하는 자가 없으며, 계속하여 수즙(修葺)하지 않으므로 점점 무너지고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계(曹溪)·천태(天台)·총남(摠南) 3종을 합쳐서 선종(禪宗)으로, 화엄(華嚴)·자은(慈恩)·중신(中神)·시흥(始興) 4종을 합쳐서 교종(敎宗)으로 하며, 서울과 지방에 중들이 우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36개소의 절만을 두어, 양종에 분속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전지를 넉넉하게 급여하고 우거하는 중의 인원을 작정하며 무리지어 사는 규칙을 작성하여, 불도(佛道)를 정하게 닦도록 할 것입니다. 이어 승록사(僧錄司)를 혁파하고, 서울에 있는 흥천사(興天寺)를 선종 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 도회소(敎宗都會所)로 하며, 나이와 행동이 아울러 높은 자를 가려 뽑아 양종의 행수 장무(行首掌務)를 삼아서 중들의 일을 살피게 하기를 청합니다. 이제 분속하려는 서울과 지방의 사사(寺社)와 우거하는 중의 정원과 급여할 전지의 결수(結數)를 가지고 낱낱이 아룁니다. 선종에 예속된 것으로는 절이 18개소, 전지(田地)가 4천 2백 50결입니다. 서울 흥천사는 원속전(元屬田)은 1백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항거승(恒居僧)은 1백 20명입니다. 유후사(留後司) 숭효사(崇孝寺)는 원속전이 1백 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항거승은 1백명이며, 연복사(演福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항거승은 1백명이며, 개성 관음굴(觀音堀)은 원속전이 45결인데, 경기 이번에 1백 5결과 수륙위전(水陸位田) 1백결을 더 주고, 항거승은 70명이며, 경기 양주(楊州) 승가사(僧伽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항거승은 70명입니다. 개경사(開慶寺)는 원속전이 4백결이고, 항거승이 2백명이며, 회암사(檜巖寺)는 원속전이 5백결이고, 항거승이 2백 50명이며, 진관사(津寬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과 수륙위전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고양(高陽) 대자암(大慈菴)은 원속전이 1백 52결 96복(卜)인데, 이번에 97결 4복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입니다. 충청도 공주(公州) 계룡사(鷄龍寺)는 원속전이 1백 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 입니다. 경상도 진주(晉州) 단속사(斷俗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경주(慶州) 지림사(祗林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전라도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태인(泰仁) 흥룡사(興龍寺)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7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강원도 고성(高城) 유점사(楡岾寺)는 원속전이 2백 5결인데, 이번에 95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50명이며, 원주(原州) 각림사(覺林寺)는 원속전이 3백결이고, 거승은 1백 50명입니다. 황해도 은율(殷栗) 정곡사(亭谷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함길도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는 원속전이 2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입니다. 교종(敎宗)에 소속된 것으로는 절이 18개소, 전지가 3천 7백 결입니다. 서울 흥덕사는 원속전이 2백 50결이고, 거승은 1백 20명이며, 유후사 광명사(廣明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신암사(神巖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개성(開城) 감로사(甘露寺)는 원속전이 40결인데, 이번에 1백 6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경기 해풍(海豊) 연경사(衍慶寺)는 원속전이 3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주고, 거승은 2백명이며, 송림(松林) 영통사(靈通寺)는 원속전이 2백결이고, 거승은 1백명이며, 양주(楊州) 장의사(藏義寺)는 원속전이 2백 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이며, 소요사(逍遙寺)는 이번에 속전이 1백 50결이고, 거승은 70명입니다. 충청도 보은(報恩) 속리사(俗離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1백 4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충주(忠州) 보련사(寶蓮寺)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7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경상도 거제(巨濟) 견암사(見巖寺)는 원속전이 50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1백 2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입니다. 전라도 창평(昌平) 서봉사(瑞峯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전주(全州) 경복사(景福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강원도 회양(淮陽) 표훈사(表訓寺)는 원속전이 2백 1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50명입니다.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월정사(月精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는 원속전이 2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입니다. 평안도 평양(平壤) 영명사(永明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2 집 591 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조선왕조실록 성종 5년 갑오(1474,성화 10)
7월15일 (무진) | ||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
“보련사(寶蓮寺)의 위전(位田) 1백 40결(結)과 장의사(藏義寺)의 위전 중에서 1백 결을 신륵사(神勒寺)에 옮겨 주고, 또 매년 봄·가을에 소금 20석(碩)을 주고, 정인사(正因寺)에도 봄·가을에 소금 5석을 주라.” 하였다. 【원전】 9 집 130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농업-전제(田制) / *사상-불교(佛敎) [주D-001]결(結) : 토지 면적의 단위. 모든 전지는 토성(土性)의 비척(肥瘠)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양전(量田) 곧 토지 측량에 사용하는 전척(田尺)의 길이도 토지의 등급에 따라 상이(相異)하였음.
|
세종 지리지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주의 서쪽 보련동(寶蓮洞)에 있고,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주의 북쪽 월호현(月乎峴)에 있다. 【모두 하품(下品)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혹은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薍長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빼앗았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을 옮겨서 채웠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2년(983)에 목(牧)을 두었다가 14년(995)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예속하였다. 현종(顯宗) 3년(1012)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만들었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만들었고, 고종(高宗) 41년(1254)에 승격하여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세종(世宗) 31년(1449)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산천】 대림산(大林山)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말흘산(末訖山)
주 북쪽 30리에 있다.
심항산(心項山)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주 서쪽 30리에 있다.
망이산(望夷山)
주 서쪽 91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천룡산(天龍山)
주 서쪽 5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풍류산(風流山)
주 남쪽 23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주 서쪽 45리에 있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
오동산(梧桐山)
주 동쪽 7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주 동쪽 5리에 있다.
종당산(宗堂山)
주 북쪽 13리에 있다. 이상한 돌이 생산되는데 세밀하여 비갈(碑碣)을 만들 만하다.
악현(惡峴)
주 서쪽 음성현(陰城縣) 경계에 있다.
천룡산(天龍山)에 있다.
용두사(龍頭寺)
말흘산(末訖山) 밑에 있다. 삼국시대 때에 북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므로, 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기도하였다. 고려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승 법경자등탑비(僧法鏡慈燈塔碑)가 있다. ○ 이숭인(李崇仁)이 송도생상인(送道生上人)시에, “개천(開天) 서쪽 억정(憶井) 동쪽에 높직하게 이 절이 있다. 산은 평야를 둘렀으니 새벽 구름이 희고, 강은 성긴 숲을 둘렀으니 단풍잎이 붉도다. 상인(上人)은 오늘에 돌아가는 돛대를 움직이고, 노는 손은 옛날에 울린 종소리를 들었노라. 동방(同榜)인 비서(祕書)가 아마 잘 있을 것이니, 조만간 편지가 도달할 것이라 말하여 다오.” 하였다.
개천사(開天寺)
정토산(凈土山)에 있다. ○ 고려(高麗) 역대 왕조의 실록(實錄)을 처음에는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간직했다가 왜구(倭寇)로 인하여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에 옮기고, 또 이 절에 옮기고, 또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에 옮겼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그 땅이 바닥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이 절에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종(世宗) 때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모두 서울로 운반하였다.
【고적】 익안 폐현(翼安廢縣)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주(本州)의 다인철소(多仁鐵所)인데, 고려 고종 42년에 그 지방 사람들이 몽고 군사를 막아내어 공이 있으므로 승격하여 현(縣)을 만들고, 인하여 예속시켰다.
대림산성(大林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6백 3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덕주산성(德周山城)
주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6백 70척이고, 안에 샘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페하였다.
동악성(桐岳城)
주 동쪽 1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백 8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봉황성(鳳凰城)
주 서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천 1백 21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남변(南邊)
끝이 10리.
북변(北邊)
끝이 10리.
금천(金遷)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
이안(利安)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
신석(薪石)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
덕서(德西)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중니곡(中尼谷)
서쪽으로 끝이 60리.
복성면(福城面)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
소탄(所呑)
옛날 연탄처(淵呑處)인데,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90리.
법왕(法王)
위와 같음.
금목동(金目洞)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
성곡(省谷)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
대오곡(大烏谷)
본래는 대오곡처(大烏谷處)로써, 서쪽으로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10리.
사다산(沙多山)
서쪽으로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15리.
기음(岐音)
위와 같음.
두의곡(豆衣谷)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90리.
소고(蘇古)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유모곡(柳茅谷)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불정(佛頂)
위와 같음.
율지동(栗枝洞)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
감물내(甘勿內)
본래는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이었는데,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맹동(孟洞)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리.
감미곡(甘味谷)
서쪽 끝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
거곡(居谷)
위와 같음.
사을미(沙乙味)
본래는 광반석부곡(廣反石部曲)이었는데, 동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
가흥(可興)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
앙암(仰巖)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
성대양(省台陽)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금생(金生)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가차산(加次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엄정(嚴政)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
산천(山天)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주유모(周柳茅)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
사리포(沙里浦)
처음이 40리, 끝이 50리.
율동(栗洞)
처음이 80리, 끝이 1백 리.
덕산(德山)
본래는 덕산향(德山鄕)인데, 동남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1백 5리.
적화현(赤火峴)
처음과 끝이 60리. ○ 탄촌부곡(炭村部曲)은 남쪽으로 20리. 소잉임부곡(所仍林部曲)은 동남쪽으로 65리. 상하맥곡(上下麥曲)은 서북쪽으로 45리.
【성지】 천용산 고성(天龍山古城)
봉황성(鳳凰城)이라고도 한다. 둘레는 6천 1백 21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장미산 고성(薔薇山古城)
유적(遺跡)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5년 기묘년(己卯年)(1759년)
西 福城洞面
智莊里, 龍堂里, 山井里
西 老隱峴面
天龍里, 大方洞里, 寶連洞里, 楮田里, 素美里, 古莊朴里, 自作里, 法洞里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정조 4년 (1780년)대
西 福城洞面
智莊里, 龍堂里, 山井里
西 老隱峴面
天龍里, 大方洞, 寶連洞, 楮田里, 文巖里,素美里, 古莊朴里, 自作里, 法洞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1789년) 기유년식(己酉年式)
福城洞面
智藏洞, 龍堂洞, 山亭洞
元戶: 四百五十二, 口:一千八百
男: 八百六十八, 女:九百三十二
老隱峙面
天龍洞, 大方洞, 保蓮洞, 楮田洞, 偶城洞, 文巖洞, 金本洞, 大德洞, 安樂洞, 法洞
元戶: 五百九十二, 口: 二千八百七十六
男: 一千三百十一, 女: 一千五百六十五
호서읍지(湖西邑誌)-고종8년(1871년)
西 福城洞面
智莊里, 龍堂里, 山井里
西 老隱峴面
天龍里, 大方洞, 寶連洞里, 楮田里, 文巖里, 素美里, 古莊朴里, 自作里, 法洞里.
충청북도 각군읍지(忠淸北道 各郡邑誌)-광무 2년 (1898년) 이후
西 福城洞面
鳳凰川,龍堂,堂城,槐亭,本卜,河南,釣台,伐川
西 老峴面
老峴, 天龍, 大方, 寶連, 于城, 文巖, 薪田,新興, 安樂, 大德, 法洞
도은집(이숭인) 제3권
시(詩) |
보련사 주지에게 부치다〔寄寶蓮住持〕 |
보련사 안에 청정한 낙이 있는데 / 蓮社有淸樂
도인이 밖에서 구할 게 있으리오 / 道人無外求
머리를 돌리니 저녁 해 뉘엿뉘엿 / 回頭日欲暮
산의 푸른 이내 멀리서 아른아른 / 山翠遠浮浮
점필재집(김종직) 시집 제9권
시(詩)] |
보련사의 주지로 가는 공상인을 보내다[送空上人住持寶蓮寺] |
바쁠 때는 보따리 메고 조용할 땐 참선하여라 / 忙裏挑包靜裏禪
공사의 가고 머무름은 인연을 따를 뿐이네 / 空師去住只隨緣
잠깐 한 석장이끌어 천령을 하직하고서 / 暫携一錫辭天嶺
스스로 삼승호위하러 보련사로 들어가누나 / 自衛三乘入寶蓮
풀밭에 앉으면 서리 바람이 방석에 불 게고 / 草坐霜風侵白氎
숲속을 걷노라면 여울물이 행전에 뿌려지리라 / 林行石瀨濺靑纏
쇠잔한 성 병든 태수는 제대로 작별 못해주니 / 殘城病守難爲別
누가 한공이 태전 사랑했다 괴이하게 여기랴 / 誰怪韓公愛太顚
중이나 도사(道士)가 짚는 지팡이를 이르는데, 또는 선장(禪杖)이라고도 한다.
[주D-002]삼승 : 불교(佛敎)의 용어로,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세 가지 교법(敎法)을 말한다.
[주D-003]누가 한공이……여기랴 : 한공(韓公)은 당(唐) 나라 한유(韓愈)를 이르는데, 그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어 있을 적에 태전(太顚)이라는 중이 썩 위인이 훌륭하므로 그를 불러서 같이 노닐고 또 서로 왕래도 하였으며, 그 후 조주(潮州)를 떠날 적에는 그에게 의복(衣服)을 남겨주고 작별을 하기까지 하여, 어떤 사람들에게 한유가 불씨(佛氏)를 숭봉(崇奉)한다는 오해를 받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이 내용은 한유가 상서(尙書) 맹간(孟簡)에게 준 편지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점필재집(김종직) 시집 제11권
시(詩)] |
덕봉 공상인의 시에 차운하고 인하여 영귀일영대에 대해서 사례하다[次韻德峯空上人仍謝靈龜日影臺] |
덕봉의 봉우리 아래 구름 문이 높직한데 / 德峯峯下抗雲扃
잣나무 용나무 그림자가 호정에 가득하네 / 柏影榕陰滿戶庭
치자꽃은 오래 맡아서 별 향취가 없으나 / 薝蔔久聞無別臭
복령을 한가히 캐서 노쇠함을 견제하도다 / 茯笭閑斸制頹齡
응당 호포천이 그대로 시원함을 자랑할게고 / 應誇虎跑泉仍冽
멀리 용광의 대가 다시 푸르를 게 생각나네 / 遙憶龍光竹更靑
갑자기 지남침 얻어 규표를 대신하니 / 忽得司南代圭表
밤중에 중성점치는 노고를 않게 되었구려 / 不勞昏夜占中星
진(晉) 나라 때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 뒤에 있던 샘 이름인데,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일찍이 샘이 먼 것을 걱정하자, 호랑이가 돌 틈을 발로 긁어 파서 물이 나왔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한다.
[주D-002]용광의 대 : 소식(蘇軾)이 일찍이 용광사(龍光寺)에 들러서 큰 대를 얻어 견여(肩輿)를 만들었던 고사에서 온 말로, 역시 사찰(寺刹)을 의미한 말이다. 《蘇東坡集 卷四十四》
[주D-003]규표 : 해 그림자를 관측하는 기구, 즉 일시계(日時計)를 말한다.
[주D-004]중성 : 이십 팔수(二十八宿)를 사방으로 분배하여 방(方) 마다 칠수(七宿) 씩이 되는데, 그 칠수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별을 가리킨다.
정경연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한자 鄭慶演
영어의미역 Jeong Gyeongyeon
이칭/별칭 선여(善餘)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전통인물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
시대 조선/조선 중기
집필자 최일성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미상
성별 남
생년 1604년(선조 37)
몰년 1666년(현종 7)
본관 연일
대표관직 청안현감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낙향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선여(善餘). 증조할아버지는 송강 정철(鄭澈), 할아버지는 강릉부사를 지낸 정명(鄭溟),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정직(鄭溭), 어머니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박준(朴峻)의 딸 비안박씨이다. 슬하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정수(鄭澍), 통덕랑에 오른 정린(鄭潾), 상의원정을 지낸 정필(鄭泌), 정섭(鄭涉), 영의정을 지낸 정호(鄭澔), 영동현감을 지낸 정진(鄭津), 순릉참봉을 지낸 정온(鄭溫), 이조판서에 추증된 정영(鄭泳) 등 8형제를 두었다.
[활동사항]
1604년(선조 37) 태어난 정경연(鄭慶演)은 1630년(인조 8)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현 충주 노은면 수룡리로 이주해 어머니를 모시면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1643년(인조 21) 영릉참봉, 1645년 경기전참봉, 1648년 전생서봉사를 거쳐 사헌부감찰 재직 중 병으로 사직하고 충주로 돌아왔다.
1656년(효종 7)에 다시 사헌부감찰에 기용되었다. 이후 청안현감으로 부임하여 뛰어난 공무 집행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1658년 병으로 다시 사직하였다. 1664년 다시 기용되어 내자시주부, 평릉도찰방을 지냈다. 1665년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은퇴하고 충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666년(현종 7) 6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자장리 화영산에 있다. 박세채(朴世采)가 비문을 지었고, 수암 권상하(權尙夏)가 표문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산림경제 : 조선 후기의 학자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 산림경제 제2권 양화(養花) |
연(蓮) 그 잎을 하(荷), 그 열매를 연(蓮), 그 뿌리를 우(耦), 그 꽃봉오리를 함담(菡萏), 그 꽃을 부용(芙蓉)이라 하는데 총칭해서 부거(芙蕖)라고 한다 |
8~9월에 단단하고 검게 익은 연실(蓮實)을 거두어 벽돌 등에 머리 부분을 갈아 껍질을 얇게 만든 다음 도랑 언저리의 흙을 파 잘 이겨 셋째 손가락 정도로 두 치쯤 되게 연실을 싼다. 위쪽은 가늘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점점 굵게 싸는데, 연실의 간 부분이 뾰족한 쪽을 향하게 하고 뿌리[蔕頭]쪽은 굵고 뭉뚝한 쪽을 향하게 한다. 다 빚어 싼 다음에는 진흙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못[池] 속에 던져 넣는다. 뭉뚝한 부분이 먼저 가라앉으므로 껍질을 얇게 간 부분이 위를 향하게 되어 잘 난다. 《거가필용》 《신은지》
쇠똥으로 땅을 걸게 한 다음 입하(立夏) 3~4일 전에 연뿌리의 마디 머리[節頭]를 캐어 진흙 속에 심으면 《신은지》에는 “2월에 대초(帶草)와 진흙[濕泥]으로 연뿌리를 싸서 못 안에 심는다.” 하였다. 심은 그 해 바로 꽃이 핀다. 《산거사요》 《거가필용》 《사시찬요》 《양화소록》
이른봄에 연뿌리 세 마디를 상처를 입지 않게 캐어 못 바닥 야문 흙[硬土]에 닿도록 진흙을 깊게 파고 심으면 심은 그 해 꽃이 핀다. 《거가필용》 《양화소록》
5월 20일에 깊이 심는다. 연줄기[蓮柄]가 큰 것은 대나무를 박아 세우고 잡아매주면 살지 않는 것이 없다. 《양화소록》
연을 심을 때는 붉은 꽃이 피는 연과 흰 꽃이 피는 연을 함께 섞어 심으면 안 된다. 흰 꽃의 연이 성(盛)하면 붉은 꽃의 연은 반드시 쇠잔해지므로 한 못 안에 심어야 할 경우에는 꼭 간격을 띄워 양쪽에 나누어 심어야 하며 심는 방법은 반드시 옛 방법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절기나 날에는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양화소록》
연실을 푸른 빛깔의 독[靛瓮] 속에 넣어 놓았다가 겨울을 난 뒤 심으면 푸른 꽃이 피는 연이 난다. 《지봉유설》
큰 독[大瓮] 두 개에 붉은 꽃 피는 연과 흰 꽃 피는 연을 나누어 심는다. 심을 때는 곁뿌리[旁根]는 모두 잘라 버려야 하며 잎줄기가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 이리저리 흔들리면 꽃이 피지 않는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독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갈무리하고 얼어 터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듬해 봄에 캐어 묻으면 더욱 많은 꽃이 핀다. 만일 독이 무거워 움직일 형편이 못 되면 묵은 뿌리들을 캐어 버리고 독을 비워 두었다가 이듬해 다시 심으면 된다. 《양화소록》
연[荷蓮]은 오동열매 기름[桐油]을 지극히 무서워한다. 《거가필용》 《산거사요》
연못[蓮池]에 칡을 우려서는 절대 안 된다. 연의 씨가 마른다. 《문견방》
'역사의 뒤안길에서 > 옛날 지명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미산성과 잣고개에 대하여 (0) | 2015.06.27 |
---|---|
금가면 지명유래에 관하여 (0) | 2015.06.12 |
[스크랩] 충주 안림동 의림사지와 중원 의림사 (0) | 2014.11.06 |
[스크랩] 석종사 부근에 있던 절터는 죽정사지(竹精寺址)인가. 죽장사지(竹杖寺址)인가 (0) | 2014.11.05 |
삼국사기에 나타난 능안(能晏)과 욕돌역(褥突驛) (0) | 2013.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