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朴祥)의 시(서애집에서 발췌)
명문장 강수는 묘도 없고, / 文章强首無遺墓
명필 김생의 암자가 퇴락했네. / 翰墨金生有廢庵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에는 삼국사기를 인용한 김생, 강수, 우륵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김생은 불우조에, 강수는 인물조에, 우륵은 우거조에 각각 기록되는데, 이를 풀이하면 김생은 스님으로써 중원경에 머무른 것이고, 강수는 고향이 중원경 사량이고, 우륵은 중원경에 잠시 머무렀다는 뜻이다. 명환조에서 김생, 강수, 우륵을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충주를 관할하는 관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일 수도 있다. 쉽게 말하면 강수는 중원경 사량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김생과 우륵은 타지에서 충주로 들어와 살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열전 강수편에는 강수는 사찬이라는 관직생활을 하다가 죽어 강수의 처만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기록된다. 조선시대 초기의 문장가인 박상의 시에는 "강수의 묘도 없고, 김생의 암자는 퇴락했네"라는 귀절이 있다. 박상이 임진왜란 충주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탄금대를 지나면서 쓴 시인데, 훗날 서애 유성룡이 탄금대 전투의 패전을 한탄하며 박상의 시에 화답한 시도 전해진다. 박상의 싯구로 보면 강수의 묘가 충주에 있었을 수도 있고, 민담이거나 박상의 상상일 수도 있다. 또한 강수가 경주에 있다가 죽은 것인지, 아니면 중원경에 있다가 죽어서 강수의 처가 그의 고향인 부곡으로 돌아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김생이 거처한 김생사는 탄금대를 마주보는 강가에서 발굴되었으나, 강수의 묘는 전하는 곳이 없다, 금가면의 지명유래에서 금가면은 금생면과 가차산면이 합한 지명으로 금생면은 김생과 연관된 지명이고 가차산은 장대산과 태고산과 연관된 지명인데, 가차산면은 말흘산(용천산), 태고산, 장대산으로 이어지는 지역으로 사천(沙川)인 모래내와 관련된 지명들이 산재한다. 이에 삼국사기 강수열전에 기록된 사량(沙梁)에 대한 지명유래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충주목 고지도)
가차산과 장대산에 대하여
금가면의 경촌, 도촌, 축동 등에 세워진 유래비를 살펴보면은 근래에 변형된 유래로 굴절되어 있다. 특히 도촌의 유래비는 강수의 처와 관련된 부곡(釜谷)을 점말 또는 가마골을 근거로한 향토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져 있다. 아직은 그를 입증할만한 유적이나 기록이 발굴되지 않아 향토사학계에서도 부정적인 시각이 깔려있다. 금가면(金加面)의 옛지명이 왜 가차산(加次山)일까 ? 조선말기의 고지도에서는 가차산이 장대산 일대로 표기되어 있지만, 가차산은 태고산의 옛지명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금가면 소재지인 경촌은 마을 유래비와 달리 가차산 아래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두무소 또는 두담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책사인 두사충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이여송과 관련된 이야기는 달천, 조령, 장호원 일대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후대에 형성된 민담으로 간주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이 지나간 길목마다 민담이 전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금가면 잠병리와 하담리에 있는 장대산 또는 장태산은 산 정상에 있는 장대에서 유래하지만 장대산 발굴조사에서 장대는 발굴되지 않았다. 가차산(加次山)은 임시로 거처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장대산의 장대는 전란 시에 임시 주둔지의 지휘소로도 추정된다. 특히 인접한 잠병리에서 잠병(岑屛)과 금병(金屛)은 잠(岑)에서 금(今)이 금(金)으로 변천된 것인데, 잠(岑)은 산봉우리를 뜻하지만 산아래의 마을(村)을 의미하며 장대산을 잠(岑)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장대산 또는 장태산은 동서내륙고속도로와 38번 국도가 개설되면서 사라져버린 산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신성스러운 곳이었으며, 장대산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청동기 시대에서 통일신라에 이르고, 제사의식에 쓰이는 독특한 구덩이가 발굴되었지만 사적으로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발굴지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두담마을 사람들이 산에 굴러 다니는 비석을 새마을비로 쓰다가 조상묘의 비석임을 알고, 다시 제자리로 복원했다는 이야기는 중원고구려비를 생각나게 한다. 장대산의 장대도 마을 주민들이 묘지나 가옥을 조성하면서 훼손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망가진 장대산은 동서내륙고속도로와 38번 국도 사이에 절개지가 되어 흉물로 변해 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장대산 유적지을 정비하여 장대산의 유적인 장대와 집수정(돌웅덩이)이라도 복원하고, 충주역사를 홍보하는 시설로 만들었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두무소에서 두사충과 관련된 전설도 장대산의 유래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충주 달천의 " 달다." 라는 유래에서 고려말 기우자 이행의 이야기가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으로 변질된 것과 같다. 달천의 음담패설처럼 본래 의미는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되어 간다.
(장태산 유적지)
가차산과 태고산에 대하여
금가면의 경촌(卿村)은 마을 유래비와 달리 태고산의 옛지명인 가차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일제강점기 초에 작성된 조선지지자료에서 경촌의 옛지명이 거치안리로 나타나는데, 거치안리는 가차산 아래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경촌(卿村)에서 경(卿)은 본래 왕족이나 귀족들을 일컷는 호칭인데, 이는 근래에 형성된 지명일 뿐이다. 또한 싸리골에서 유래했다는 축동(杻洞)에서 축(杻)자도 싸리나무가 아니라, 사(沙) 또는 사(蛇)에 변천된 것으로 추정한다. 싸리골은 추동(杻洞)으로도 쓰는데, 이는 싸리나무가 아니라 소(丑)의 고삐인 사리처럼 휘어진 것을 의미한다. 즉 축동은 싸리나무골이 아니라, 뱀골이거나 구불구불한 골짜기나 고개에서 유래헀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싸리골은 축(杻)이 아닌 사(沙) 또는 사(蛇)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충주 함지못에서 유주막으로 넘어가는 싸리재도 뱀골 또는 사천(沙川)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지명유래는 태고 이래도 변형되어 왔기에 그 근원은 자연환경에 따른 표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유구한 역사의 변천에서도 그 표기를 달리할 뿐 본래 의미를 고수하는 특징을 지닌다. 옛지명을 해석하는 것은 결국 지역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이기에 좋은 의미의 지명은 지역민 스스로가 찾아야할 일이다.
중원경 사량(沙梁)은 어디인가 ?
삼국사기 열전에서 사량(沙梁) 출신의 인물들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 신라의 서울인 경주 사량부는 유리 이사금 때 고허부를 사량부로 고치면서 최씨라는 성을 내린 6부촌 중 하나이다. 열전 중에서 최치원와 눌최가 경주 최씨의 본향인 사량부 출신으로 기록되지만, 강수는 중원경 사량으로 나타난다. 그 밖에 귀산, 휘도, 김영윤, 필부, 검군 등의 열전에서는 사량(沙梁) 또는 사량궁(沙梁宮) 등으로 기록된다. 사(沙)와 량(粱)에 대한 해석이나 위치비정 논란은 단지 추론일 뿐이며, 좁은 소견으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사(沙)란 살(薩), 청(靑), 살(乷) 등으로도 풀이되여 살수가 청천강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사을미부곡이 살미면으로 변천하기도 하며, 사열이현이 청풍현이 되기도 하는데, 사(沙)에서 파생된 지명들은 무수히 많이 산재한다.
금가면의 지명유래에서 사량(沙粱)에 대한 논란은 단지 사천(沙川) 또는 모래내에 관련된 지명들이 산재하기에 중원경 사량(沙梁)을 금가면의 옛지명인 가차산면으로 추정하는 것 뿐이다. 강수의 고향인 중원경 사량(沙梁)과 부곡(釜谷)으로 지목되는 사천(沙川)과 금곡(金谷)이란 지명은 충주천의 옛지명인 사천 일대 뿐만 아니라 전국에 산재하지만, 삼국사기 열전에서 중원경 사량이라고 전제되어 있기에 중원경이었던 장미산 일대에서 그를 고찰해야하는 것이며, 강수의 아버지인 석체가 관직에 있었으므로 강수의 고향은 중원경 치지에 관련된 시설물이나 촌락이 존치해야 하지만 천 년의 세월 속에 그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부곡(釜谷)이란 지명도 부(釜)가 철기소의 대장간을 의미하기에 그에 부합되는 지명으로 추정될 뿐이다. 특히 금가면의 지명 유래에서 신라의 명필인 김생과 관련된 김생사지와 사량과 유사한 지명인 동량면이 인접하여 그에 관한 연관성도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
남한강 태고산과 장태산을 돌아보며
http://cafe.daum.net/chungjuhoMTB/XrfT/317
[참고자료]
서애선생문집 제2권 - 명문장 강수는 묘도 없고, 명필 김생의 암자가 퇴락했네
탄금대(彈琴臺)를 지나다가 느낀 바 있어 박창세(朴昌世) 선생의 운에 차운함 병서(幷序) |
지금 그 아래를 지나는데, 단지 그때 어염을 저장하던 작은 초가집 두어 칸만 남아 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천하의 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십중팔구다.” 했으니, 어찌 이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박상(朴祥) 선생이 이 고을 목사로 있을 때 지은 시에,
“특이한 경치 삼라한 것을 다 볼 수 없는데, / 異境森羅不可探
명문장 강수는 묘도 없고, / 文章强首無遺墓
명필 김생의 암자가 퇴락했네. / 翰墨金生有廢庵
지는 해 윗강에는 배가 둘 둘이요, / 落日上江船兩兩스치는 바람 웅덩이에 해오라비 셋 셋이라. / 斜風盤渚鷺三三
낭도사를 가인에게 부르지 말게 하라, /陶詞莫遣佳人唱
태수가 듣고 얼굴이 붉어지네. / 太守聞來面發慚 ”라고 하였기에,
그 시를 차운하여 나의 뜻을 붙인다.
상류의 경치를 이 속에서 찾으니 / 上流形勝此中探
산은 금성으로 싸고 물은 쪽빛을 둘렀네 / 山擁金城水繞藍
흥폐는 때가 있어 두 눈에 눈물이 흐르는데 / 興廢有時雙淚眼
관문 나루에는 외로운 암자 하나 / 關津無賴一茅庵
가엾구나 부질없이 만 명의 군사를 보내고 / 還憐銳卒空輸萬
앉아서 큰 도읍 셋이나 잃었네 / 坐使䧺都盡失三
묘당에서 수년 동안 조그마한 공도 없어 / 廊廟數年無寸效
바람에 의지해 생각하니 마음만 부끄럽네 / 倚風料理只心慚
[주D-001]낭도사(浪淘詞) : 악부(樂府)의 가사명. 유우석(劉禹錫)이 9수를 짓고, 백거이(白居易)가 6수를 짓고, 황보송(皇甫松)이 3수를 지었다. 원문 도사(陶詞)의 ‘陶’는 ‘淘’의 오자다.
[충주지명유래] 금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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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가-면(金加面)【면】충주시 13면의 하나. 본래 중원군의 지역으로서, 가차산면(加次山面)이라 하여 마산(馬山), 휴암(休岩), 하담(荷潭), 경촌(卿村), 기동(基洞), 마사(麻沙), 사천(沙川), 비산(飛山), 두담(斗潭), 상잠(上岑), 사랑(沙浪), 중잠(中岑), 도리(島里)의 14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금생면(金生面)의 창리(倉里), 반송(盤松), 유동(遊洞), 화동(禾洞), 모산(毛山), 오평(梧枰), 연합(延合), 석교(石橋), 문지(文旨), 마산(馬山), 독재(篤才), 원평(遠坪), 종포(鍾浦), 매사(梅沙), 양평(凉坪), 옥강(玉江), 월탄(月灘), 상시(上矢), 하시(下矢)의 19개 리를 병합하여 금가면이라 하고, 도촌(島村), 매하(梅下), 문산(文山), 사암(沙岩), 오석(梧石), 원포(遠浦), 월상(月上), 유송(遊松), 잠병(岑屛), 하담(荷潭)의 10개 리로 개편 관할함. 동쪽은 동량면(東良面), 남쪽은 충주시, 서쪽은 가금면(可金面), 북쪽은 엄정면(嚴政面), 동북쪽은 산척면(山尺面)에 각각 닿음.
⊙ 하담-리(荷潭里)[하담, 하소]【리】금가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가차면(加次面)의 지역으로서 하소(荷沼)가 있었으므로 하소 또는 하담(荷潭)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두담리(斗潭里), 상잠리(上岑里), 사랑동(沙浪洞), 사천리(沙川里)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하담리라 해서 금가면에 편입됨. 현재 행정리동으로 하소, 두담이 있음. * 두담(斗潭) ●두-담(斗潭)[두무소]【마을】하담리 행정리동의 하나. 원래 하소 북쪽에 위치하며, 안말, 바같말, 건너말, 웃거리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가금면 장천리 저우내들에 공군 사격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위치 즉, 하소에서 24번 군도를 따라 가다가 206번 도로로 좌회전 0.5㎞ 지점으로 집단 이주함.
⊙ 잠병-리(岑屛里)【리】금가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가차면(加次面)의 지역으로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므로 잠병(岑屛)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중잠리(中岑里)와 사천리(沙川里), 사랑리(沙浪里), 하담리(荷潭里), 상잠리(上岑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잠병리라 해서 금가면에 편입됨. 현재 행정리동으로 축동, 금병, 초당이 있음. * 축동(杻洞) ●축-동(杻洞)【마을】잠병리 행정리동의 하나. 하소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 1997년 8월 조사시 75호 281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청명, 싸리골, 양지말이 있음. 논.밭 농사를 주로하며 밭농사로는 고추, 담배를 주로 재배함, 축동마을회관 옆에 마을 자랑비가 있음.. * 초당(草堂) ●초-당1(草堂)【마을】잠병리 행정리동의 하나. 기곡 마을 북쪽에 위치함. 1997년 8월 조사시 44호 156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초당, 사랑골, 구름개실, 수풍말 등이 있음. * 금병(金屛) ●금-병(金屛)[진뱅이]【마을】금가면 잠병리 행정리동의 하나. 초당 북쪽에 위치함. 1997년 8월 조사시 45호, 17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진뱅이가 있음. 논.밭농사를 주로 하며, 고추 담배를 재배함. 마을입구에 마을 자랑비가 있음. ⊙ 도촌-리(島村里)【리】금가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가차면(可次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리(島里), 경촌(卿村), 마사리(麻沙里), 기동(基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리와 경촌의 이름을 따서 도촌리라 하여 금가면에 편입됨. 현재 행정리동으로 경촌(卿村), 괴정(槐亭), 도리(島里)가 있음. * 경촌(卿村) ●경-촌(卿村)[거치라니]【마을】도촌리 행정리동의 하나. 목행대교를 건너 19번 국도를 따라가다 2.4㎞ 지점 서편에 형성된 마을. 1997년 8월 조사시 87호 302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웃말, 아랫말, 구석말이 있음.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며, 밭 작물로는 담배, 고추를 주로 경작함. 군아파트인 쌍마아파트(30세대)가 입주해 있고 면사무소가 있음. 마을입구에는 마을 자랑비가 있음. * 괴정(槐亭) ●괴-정(槐亭)[구라니, 구안(九安)]【마을】도촌리 행정리동의 하나. 경촌(거라치니) 북쪽의 19번 도로 서편에 형성된 마을. 옛날 이 마을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괴정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함. 1997년 8월 조사시 31호 94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웃구라니, 아랫구라니가 있음. * 도리(島里) ●도-리(島里)[섬말]【마을】도촌리에 속한 행정리동의 하나. 경촌과 괴정의 서편에 위치함. 옛날에 무쇠점이 있었으므로 '점말'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섬말' 또는 '도리(島里)'라 했다함. 1997년 8월 조사시 62호, 239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고산대, 양달말, 음달말, 섬말 등이 있음. 관내 금가초등학교와 소방서가 있음. 마을회관 옆에 마을 자랑비가 있음.
⊙ 사암-리(沙岩里)【리】금가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가차면(加次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경촌(卿村), 기동(基洞), 사천리(沙川里), 하담리(荷潭里)의 각 일부와 휴암리(休岩里), 비산리(飛山里)를 병합하여 마사와 사암의 이름을 따서 사암리라 해서 금가면에 편입됨. 현재 행정리동으로 기곡, 마사만이 현존함. * 기곡(基谷, 터골) ●기-곡(基谷)[터골]【마을】사암리 행정리동의 하나. 도촌리 도리마을 서편의 19번도로에서 좌회전 25번 군도를 따라 1.7㎞ 지점에 위치함.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기곡이라 함. 1997년 8월 조사시 31호, 94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벼농사를 주로 하고 밭작물로는 고추를 주로 재배함. * 마사(麻沙)
[충주지명유래] 동량면
⊙ 대전-리(大田里)〔한밭, 황밭, 대전, 황전〕【리】동량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동량면의 지역으로 큰 밭이 있으므로 한밭, 황밭, 또는 대전(大田), 황전(黃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야리(大也里), 사천리(沙川里), 배일리(排日里), 마흘리(馬屹里), 황전리(黃田里)를 병합하여 대야와 황전의 이름을 따서 대전리라 함. 현재 행정리동으로 수회, 내동, 마흘, 배일, 황전, 사천, 대미가 있음. ●수회(水回)[수녹골]【마을】대전리 행정리동의 하나. 목행대교를 건너 19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2㎞ 지점인 대미에서 우회전, 25번 군도를 따라 동쪽으로 2㎞ 지점 황전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동북쪽 2㎞ 지점에 형성된 마을. 안골마을 동남쪽 삼거리에 위치함. 1997년 8월 조사시 28호, 98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되터, 웃말, 건너말 등의 자연마을이 있음. 대전천(大田川)이 마을 앞을 돌아서 흐름. ●마-흘[말흘, 멀미, 흘살]【마을】대전리 행정리동의 하나. 내동에서 서쪽으로 0.5㎞ 지점에 형성된 마을. 수회 서쪽에 있는 배일과 내동 사이에 위치함. 1997년 조사시 42호, 138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동녘말과 서녘말 등의 자연마을이 있음. 이곳이 대전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임.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하며 밭농사로는 고추를 많이 재배함. * 배일(排日) * 황전(黃田, 황밭) ●황전(黃田)[황밭]【마을】대전리 행정리동의 하나. 대미에서 24번군도를 따라 2㎞ 지점에서 좌회전하여 북쪽 0.5㎞ 지점에 형성된 마을. 모래내 동북쪽에 위치함. 1997년 8월 조사시 67호, 234명의 주민이 살고 있음. 자연마을로 모내고개, 안말, 만호실 등이 있음. * 사천(沙川, 모래내) * 대미(大美, 대야) ●대-미(大美)[대야(大也)]【마을】대전리 행정리동의 하나. 목행대교를 건너 19번 국도를 따라 2㎞ 지점 동편에 있는 마을. 동쪽으로 사천마을과 접함. 1997년 8월 조사시 69호, 264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본동, 숲거리 등의 자연마을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하며 밭농사로는 고추, 참깨를 주작물로 함. 관내 중원중학교와 대미초등학교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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