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노은면 노은고개의 유래는 노은면 수룡리에 있는 노은치(老隱峙) 또는 노현(老峴)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청원현감을 지낸 정경연이 수룡리에 은거하여 살았다는 뜻으로 노은(老隱)이 되었다는 설과 고개에 논(畓)이 있어 논고개가 변천하여 노은고개가 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노은(老隱)이라는 지명을 한자로 풀이하면 노인이 숨어지내는 곳이고, 논(畓)은 물을 대어 주로 벼를 심어 가꾸는 땅이라는 뜻이다. 노은(老隱)과 논고개에 대한 유래를 전국에 산재한 지명유래들과 비교하여 살펴 보면은 유사한 몇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논현동 논고개의 유래로 인하여 유사한 지명들까지도 와전되어 논(畓)고개으로 둔갑하여 해석되고 있다.
논고개의 유래에서 서울과 인천의 논현동, 그리고 노은면 수룡리의 본래 자연지형을 살펴 보면은 야산과 구릉지로 형성되어 논(畓)이 형성될 수 없는 지역이다. 하지만 논고개를 논(畓)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저수시설과 관계수로가 설치되면서 과거의 밭(田)과 천수답(天水畓)들이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으로 개간되었거나, 새마을 운동 이후에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용수시설들이 보급되면서 논으로 변천된 지역들이지만, 이를 옛모습이 아닌 고개 주변에 논이 있는 근래의 모습을 보고 그 유래를 논(畓)고개로 와전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과 인천의 논현동은 택지개발로 야산들이 사라지고 빌딩과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지만, 실제는 들(平)이 아닌 구릉지로 논보다는 밭과 숲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야산의 고개는 고갯마루의 그늘에서 잠시 쉬어 휴식과 정담을 나누는 장소라는 것이다. 서울과 인천의 논현동의 논고개는 논(畓)이 아니라 지나는 행인들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웃마을 사람들과 고갯마루에서 만나서 담소를 나는 장소로 인식되는 곳이기에 논(畓)고개가 아니라 논(論)고개로 해석하는 것이다. 논고개에서 논(畓)이란 벼를 심어 가꾸는 땅으로 물이 없으면 불가능하며, 강원도 산골짜기에서도 물이 모자라서 천수답으로 벼농사를 짓거나 밭벼를 심어야 하기에 가뭄에는 구황작물인 메밀과 조 또는 옥수수를 경작하는 것이다. 논고개의 유래에서 논(畓)이 등장하는 것은 논농사를 모르는 궤변일 뿐이다. 논골이라는 지명은 대부분 답동(畓洞)으로 변천되어 있는데, 논골은 넓은 들보다는 산골짜기나 구릉지를 따라 논이 형성되어 있는 곳을 이르는 지명이다.
전국에 산재한 노은(老隱)이라는 지명들을 살펴 보면은 특정한 인물과 연관된 지명들은 후대에 특정 가문이나 지역 사람들이 본래의 지명을 특정인물로 미화하여 와전시킨 사례로 나타난다. 본래 노은(老隱)이란 지명은 은거지 또는 피난지로 산간오지를 뜻하는 지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보련산에 있는 보련산성과 장미산에 있는 장미산성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며, 고려 대몽항전에서 나타난 천룡성(보련산성)에 여주민들이 입보하여 항전에 대비한 사례와 장호원 일대의 고구려시대의 지명인 노음죽현과 신라시대의 지명인 음죽현과 유사한 지명으로 보인다. 노은면 수룡리의 노은고개 또는 논고개는 노은면 수룡리에 은거한 정경연에서 유래되었다기 보다는 와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글표기의 변천에 따라 논고개가 노은고개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노은면의 유래와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문지리의 특성상 고지명의 변천사를 해석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노은(老隱)이란 소지역의 지명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역사 속에 잔존하는 지명들과 지역 속에 숨어있는 화석같은 지명들을 찾아 추정할 뿐이다. 마한과 고구려 시대의 고지명에서 인근 지역의 옛지명을 살펴보면은 장호원은 노람국(怒藍國) 또는 노음죽(奴音竹), 진천은 만노(萬弩) 또는 금물노(今勿奴) 등이 나타나는데, 노(奴), 노(怒), 노(弩) 등은 뜻이 있는 지명이 아니라, 본래의 지명을 차음한 지명이라는 것이다. 노은면(老隱面) 유래에서 노은(老隱)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후기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국원성과 고려의 천룡, 그리고 조선시대 초기에 나타나는 보련사, 국망산, 천룡산 등의 지명들 속에 잔존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닐까한다. 이러한 추정은 논산시와 대전시 유성지역에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논산시(論山市)의 유래에서도 논산(論山)은 논(畓)에서 유래한다기보다는 노성(魯城)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대전의 노은이란 지명도 백제 때 유성의 옛지명인 노사지현(奴斯只縣)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노은면(老隱面) 유래에서 노은(老隱)이란 지명은 고서와 고지도에 등장하는 노은(老隱)과 소고(蘇古)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노현(老峴)에서 노(老)를 고구려의 옛지명인 노(奴)로 해석하면 노현(奴峴)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노(奴)는 양(壤)과 같은 의미로 땅 또는 들이란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래 지명을 가차한 이두문자로 해석된다. 노은(老隱)에서 노(老)를 노(奴)가 변형된 것으로 추정하면 숨어있는 땅 또는 골짜기로 피난지나 은거지를 의미한다. 충주(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난 우벌성(于伐城)도 산성이 아닌 들판에 주둔한 고구려의 군영지로 해석 될 수 있다. 지명에서 들(平)이나 벌(伐)은 평야지대나 분지를 이르기도 하지만, 산골짜기나 산능선에서 평평한 곳도 들(平)이나
벌(伐)이란 지명을 사용하는 사례는 흔하게 나타난다.
(참고자료)
금물노(今勿奴) : 금물노(今勿奴:거물라)...흑성(黑城)-단재 신채호
충북 진천군(鎭川郡)의 고려시대 이름은 진주(鎭州), 통일신라시대 이름은 흑양군(黑壤郡),
고구려시대 지명은 금물노군(今勿奴郡). 여기서 ‘흑양(黑壤) = 금물노(今勿奴)’라는 등식(等式)이 형성된다.
‘흑양’이란 ‘검은 평야’를 말한다. ‘금물’이란 ‘검을(검은)’의 옛말이다.
서울의 논현동(論峴洞)
강남구 논현동에 있던 마을로서, 현재 논현동 151~131번지에 있는 논현천주교회 마루턱이 높은 고개이며, 또 영동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의 산골짜기 좌우로 논밭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논의 음을 그대로 따서 논현(論峴) 또는 논고개라 하였다. → 논현동 [법정동]
인천의 논현동(論峴洞)
조선시대에 인천부 남촌면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1906년 논현리(論峴里)와 사리동(沙里洞)을 합하여 논현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논현리로 개칭되었으며, 남촌면과 조동면을 통합하여 남동면이라 하고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논현정(論峴町)으로 개칭되었고,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다시 논현동으로 개칭되었다. 1968년 구제 실시로 남구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 남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98년 논현·고잔동에 통합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논현·고잔동에서 관할한다. 지명은 의논하여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논고개라고도 하였는데, 마을에 중대사가 있을 때 마을 위에 있는 망월산 넓은 공터에 모여서 의논을 하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옛 지명에 논현말·은봉말·북논현·남논현·산뒷말·호구포·동역산말·사리골말·사당말·노루말·배꼽다리.소래,둔방이들·진배장들·신각들·논현사거리들 등이 있다.
영광 백수읍 논산리(論山里)
<논매기, 노내기, 논산, 노해기>『리』본래 영광군 영마면의 지역으로서 논매기, 노내기 또는 논산, 노해기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만년리, 월산리, 하논리, 명산리 일부와 봉산면의 평정리, 용호등의 각 일부와 관산면의 내황리 일부 지역과 구수면의 채동을 병합하여 논산리라 하여 백수읍에 편입됨.
대전시 유성구 노은동의 유래에서
노은동은 백제 때 노사지현(奴斯只縣)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의 영현인 유성현에 속했다. 고려 때는 공주부(公州府)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에 속했다. 조선 말기인 1895년(고종 32년)에는 공주군 현내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수정리(水井里), 용의동(儀洞), 덕미동(德美洞), 소읍리(所邑里), 죽곡리(竹谷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노은리(老隱里)라고 칭해 대전군 유성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35년 대덕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유성읍에 속했으며, 1983년에는대전시 구역확장에 따라 중구에 편입되었다. 1984년 대전시 직할 유성출장소의 관할지역이었으며,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유성구에 속하게 되었다.원래 이 지역은 넓은 들이었다. 이 들판에 마을이 생기자, 논 가운데 고을이라는 뜻으로 논골이라 불렀다. 논골이 노은골로 바뀌고, 노은골을 한자로 노은리(老隱里) → 노은동(老隱洞)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논산시(論山市)의 유래
논산시는 백제시대에는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과 덕근군(德近郡)의 2개군에 속하였다가 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황산(黃山), 니산(尼山), 덕은(德殷), 석산(石山)의 4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황산(黃山)을 연산(連山)으로 덕은(德殷)을 덕은(德恩)으로, 석산(石山)을 석성(石城)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덕은군(德恩郡)은 시진현(市津縣)을 합하여 세종(世宗)때 은진현(恩津縣)으로 고치고 니산현(尼山縣)은 영조(英祖)때 니성현(尼城縣), 정조(正祖)때 노성현(魯城縣)으로 개칭하였으며, 1912년 4현(縣)을 4군(郡)으로 변경하여 연산군, 은진군, 노성군, 석성군이 되었다.
논산시 노성면(魯城面) 유래
노성이란 지명은 조선 정조 초기에 尼城縣을 魯城縣으로 개칭한데서 부터이다. 백제시대는 熱也山縣 통일신라시대는 尼山縣으로 개칭하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尼城縣으로 고쳐 불렀다.
조선시대는 공주군에 속하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가곡, 교촌, 구암, 노티, 두사, 병사, 송당, 읍내, 죽림, 장구, 하도, 호암, 효죽, 화곡 등 14개리를 편성하여 논산군에 편입시켰다.
문경 동로면 노은리(魯隱里) 유래
1683년경 허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오래 살고 잘 살기를 축원하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노래이라고 하였다. 또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노루미, 마을이 산쪽으로 가려있어 외부로부터 잘보이지 않으므로 피난처로 알맞게 숨어있는 마을이라 하여 노은이라 하였다 한다.
홍성 홍북면 노은리(魯恩里)의 유래
노은(魯恩)이라는 칭호를 불리우게 된것은 숙종이 즉위하고 2년에 이량을 비롯한 선비와 유생들의 상소에 의하여 매죽헌 사당이 창건되고 그후에 16년이 지난 1692년에 당대 학자이며 세도가 였던 송시열에의해 노은(魯恩)서원이 창건되었다 , 단종(매죽헌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이 복위시키고자 했던 문종의 어린 아들)의 호 노산(魯山)의 첫자와 은의(恩義)의 첫자을 따서 노은이라 명명하는는 서원을 창건하게 되었으며 그뜻은 단종을 왕으로 다시 세우고자 했던 매죽헌 성삼문의 의로움에 은혜로 보답한다하여 魯恩書院(노은서원)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라고 전하여 지고 있습니다,
산청군 생초면 노은(老隱)
분성배공(盆城裵公) 하(夏) 호(號)가 노은(老隱)이나 공(公)이 입산 청(淸)하야 정착한 곳이 봉곡(鳳谷)의 노은동(老隱洞)이라 향인(鄕人)이 공(公)의 호를 따라 노은촌(老隱村)이라 하였으며, 이 마을의 형국은 제비집과 같이 생겼으므로 연소혈(燕巢穴)이라 일러 왔고 마을 동편의 능선이 뱀 형국이므로 그 사이에 있는 개울에는 종전에 다리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본래 산청군 초곡면의 지역으로서 노은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촌동, 니기동, 노간동을 병합하여 노은리라 해서 생초면에 편입되었다.
천안 노은정(老隱亭)의 유래
노은정은 노은 김상기가 학문 연마와 후배양성을 위해 숙종 15년(1689)에 지은 정자이다. 건물 이름은 선생의 호에서 유래하였으며, 철종 4년(1853)에 처음 고친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건물은 화강암 위에 앞면·옆면 2칸 규모로 세웠고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정자의 각 기둥에는 수침을 막는 돌기 등을 사용해 안전을 도모했다. 노은정은 천안시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이며, 300년 전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로서 주위경관 또한 아름다워 ‘도원 8경’의 하나로 전하고 있다.
정읍 산외면 평사리 노은(老隱)
본래 태인군 산외일면(山外一面) 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사평리(沙平里), 하성리(下城里), 신천리(新川里), 평동(平洞), 용두리(龍頭里) 각일부와 산외이변면 운전리(雲田里), 노은리(老隱里), 척곡리(尺谷里)를 병합하여, 중심 마을 평동과 사평을 약칠한 평사리라 하고, 정읍군 산외면에 편입하였다.
노은(老隱) 마을
노은마을은「아랫재실」이라고도 부르며 평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고, 웃매실은 척곡(尺谷)이라고도 부른다. 독계봉(獨鷄蜂)이라고도 하며 하성 남쪽에 있는 산이고, 촉대봉은 천곡 북쪽에 있는 산으로 여기에 옥등괘벽(玉登掛壁)혈(穴)이 있다고 한다.
바랑개재는 척곡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재이며, 배려재는 노은에서 목욕리 내목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군신봉조혈이 있다고 한다.
소리개재는 척곡에서 목욕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비로모퉁이(飛瀘~)는 웃재실에서 아랫재실로 돌아가는 모퉁이로 여기에 평사낙안(平沙落雁) 혈(穴)이 있다고 하는 곳이다.
양하골(陽下~), 웃골, 은상골(隱象洞) 등 골짜기가 있고, 둔전배미가 있다.
영광 불갑면 노은(老隱)
고흥유씨가 처음 조선조 세조때부터 살기 시작하였으며 젊어서는 속세에서 생활하고 늙어서는 은둔생활로 자기 수양(修養)을 하기 위하여 찾아들어 마을을 형성 했다하여 노은(老隱)이라 하였음.
신안 신의도 노은(老隱)
하태동리(下台東里): 본래 지도군 하의면의 지역으로서, 하태도(군산천) 동쪽이 되므로 하태동 또는 동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은리, 구만리와 매산동을 병합하여 하태동리라 해서 무안군 하의면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 신안군에 편입되었으며 1974년 하의면 상하태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가 1983년 신의면으로 승격되었음
노은면 유래와 논고개 http://blog.daum.net/topgwon2002/17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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