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일
2011년 신년산행을 충주 남산으로 다녀왔다.
연말부터 내린 눈 덕분에 산행하는 기분은 상쾌했다.
남산을 처음 오른 것이 1977년으로 생각된다.
지난 33년 동안 남산을 몇 번이나 올랐을까 ?
아마도 백번 정도는 족히 넘을 것이다.
왜냐하면 충주에서 살고있기 때문이다.
충주산성은 잘알려진 산성이라 그에 대한 설명보다는 문제점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난 해부터 충주향토사료와 조선상고사를 비롯해서 삼국사기.삼국유사.한단고기 등의
고대사서와 유적지의 발굴조사 보고서 등을 읽으며, 남한강 주변의 산성들을 다시 돌아보고
있다. 역사서에 숨겨진 비밀과 왜곡 그리고 진실게임에서 정답이라는 것은 어려운 과제이다.
역사서와 자료 그리고 정규교육과정의 교과서의 신빙성 문제는 ~~~~ ?
발굴지에서 출토물을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힘든 일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현지답사하여 눈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변형된 유적지와 유물들을 보면서
또 다른 미궁에 빠지곤 한다. 지난 연말에 다녀온 대림산성. 태화산성, 정양산성. 고성산성보다도
충주산성이라고 불리는 남산성을 먼저 2011년 첫 화두로 올려본다.
충주성은 충주읍성을 말한다. 그러나, 김윤휴가 대몽항전을 벌인 충주산성은 어디일까 ?
남산성에는 충주산성이라는 안내 표지판과 안내문이 있다. 남산성은 마고성 또는 금봉산성으로
불리워 왔지만, 마즈막재에 대몽항전비가 건립되면서 남산성이 충주산성으로 불리운다.
마고성은 마고신화에 따른 전설로 마고할미 또는 마고선녀 등이 산성의 축성설화에 흔히 등장하는 것으로
남산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또한 남매의 축성설화도 다른 곳의 설화를 끌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금봉산과 심항산은 충주지역 고지도에 표기된 지명이지만, 고지도에서도 계명산의 옛지명과 혼돈하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동악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 다만, 벡제의 개로왕에 대한
설화는 현 대원고등학교 주변의 옛지명인 어림과 백제수도의 천도에 관한 설화에서 유래된다.
남산성이 충주산성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 대몽항전은 고려시대의 전국토가 해당되며
그 중에서도 충주산성 비롯하여 처인성, 죽주산성. 상주산성 등이 대표적인 승전지로 기록된다.
충주 주변지역에서는 충주산성과 천룡성과 대원령(하늘재)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축성시기가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남산성에서 대몽항전이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남산성은 너무도 작은 성이다. 몽고군을 대적할 충주산성은 대림산성이다.
남산성과 대림산성을 비교하면 성의 둘레가 남산성이 1,145m이고, 대림산성은 4.900m이다.
또한 대림산성은 일명 삼태기처럼 생긴 성으로 이를 면적으로 비교하면 남산성에 비해 대림산성이
10여배는 더 큰 성이다. 또한 군사의 주둔수와 군사물자의 저장능력은 비교가 되질 않는다.
대몽항전과 같은 장기적인 소모전을 치루기에는 남산성보다는 대림산성과 덕주산성이 유리하다.
특히, 다인철소민이 벌인 70일 간의 혈투. 그리고 폭풍우에 따른 몽고군의 퇴각등을 고려하면
충주산성은 남산성이 아니라 대림산성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왜 충주시는 남산성을 충주산성이라고 할까 ?
충주시에서도 대몽항전비를 건립하고, 남산성의 복원과 역사테마길을 조성하면서
향토사학자와 역사를 담당하는 분들에게 그에 대한 자문을 받아서 추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자문한 분들의 역할은 한마디로 둘러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안에서 전문가들은 소외되기 마련이다.
또한 연수동의 후곡산과 종민동의 일향산의 사례를 보면 고유지명을 한자로 풀이하여
표기하면서 발생한 일들이다. 일향산이란 영칭은 어디에서 왔는가 ?
일제강점기에 교육받은 분들의 표현을 대변한 것이다.
현재의 지명들을 보면 무척 헷갈린다. 이는 지명 뿐만 아니라 정부부처의 명칭에서도 나타난다.
해맞이 동산이 명칭논란 속에 심항산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여기에도 모순점은 너무도 많다.
심항산의 유래와 봉수대. 마즈막재의 지명유래 등을 거론하여 해맞이 동산을 일향산에서 심항산으로 변경했지만,
계명산의 옛지명인 심항산과 종민동의 작은 동산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
대림산성 봉수와 심항산 봉수와 남산성 봉수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 조선시대 봉수체계에서 위에 열거한
세개의 봉수 중 하나는 그 시기와 관리에 따라 충주지역을 대표하는 봉수대였을 것이다. 그리고, 충주지역을
관할하는 군체제와 봉수군의 주둔지에 따라 그 위치가 변했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특정지역을 말하기는 어렵다.
해맞이 동산을 조성하면서 그에 걸맞는 명칭을 새로 지으면될 것을 구구한 변명으로 또 다른 왜곡이 시작된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심항산 봉수대의 위치 논란 중에서 그를 열거하면 고지도에서 심항산으로 표기되던 남산 정상.
심항산 영액으로 불리는 마즈막재 차단성. 계명산 정상. 계명산 남측 능선 안부. 종민동 해맞이 동산 등이다.
위에 열거한 심항산 봉수대 중에서 어느 곳이 봉수군 100명 정도가 상시에 주둔할 수 있으며,
봉수대의 규격을 갖출 수있는 면적과 시설이 있었으며, 어느 곳이 봉수를 전달하기에 적합한가 ?
어찌보면 위에 열거한 글들이 또 다른 왜곡일지는 모르겠지만 엉터리 사료를 근거로 가위와 풀로 짜집기하는
엉터리는 사라져야 한다. 비록. 그 역사가 치욕적이라 할지라도 그를 숨길 필요도 없으며, 작은 역사적 사실을
과장하여 침소봉대하는 왜곡은 없어야 한다. 옛역사서에 나타난 왜곡된 사실을 근거로 또 다른 역사가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며 ~~~~
(참고자료) - 高麗史節要 卷之十七
高宗安孝大王[四] [甲寅四十一年 宋 寶祐二年,蒙古 憲宗四年]
○車羅大攻忠州山城,風雨暴作,城中人抽精銳,奮擊之,車羅大解圍,遂南下。
○冬十月,
車羅大攻尙州山城,黃嶺寺僧洪之,射殺一官人,士卒死者過半,遂解圍而退。
○是歲蒙兵所虜男女,無慮二十萬六千八百餘人,殺戮者不可勝計,所經州郡,皆爲煨燼,自有蒙兵之亂,未有甚於此也。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갑인 41년(1254), 송 보우 2년ㆍ몽고 헌종 4년
○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는데, 졸지에 큰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졌다. 성중
사람들이 정예 군사를 뽑아 맹렬히 반격하자 차라대가 포위를 풀고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 겨울 10월에 차라대가 상주산성(尙州山成)을 공격하였는데,
황령사(黃嶺寺) 중 홍지(洪之)가 한 관인을 쏘아 죽이고,
죽은 사졸(士卒)이 반이 넘자,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 이 해에 몽고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남녀가 무려 2십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 군사의 난이 있은 뒤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참고자료 - 충주산성(문화재청)
종 목 | 시도기념물 제31호 (충주시) |
---|---|
명 칭 | 충주산성(忠州山城) |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
수량/면적 | 1,165㎡ |
지정(등록)일 | 1980.01.09 |
소 재 지 | 충북 충주시 직동 산24-1 |
시 대 | |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
관리자(관리단체) | 충주시 |
상 세 문 의 |
충청북도 충주시 문화체육과 043-850-6631~4
|
충주산성은 충주시 안림동 산56-1과 직동산 24-1 및 목벌동 산54에 걸쳐 있으며 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이 성은 외축 내착형이며 산 정상을 이어 쌓아진 테뫼식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축성 재료는 석재를 고루 쌓아 전형적인 고식을 보이며 성 둘레는 1983년 충주시 조사에 의하면 1,145m이며 중간 중간이 무너지고 5개소에 775m의 성곽이 남아 있으며 성안의 넓이는 46,524㎡이고 성벽의 높이는 7∼8m에 이르고 있다. 성안에는 우물자리가 2개소 있는데 현재 물은 나지 않으며 동서의 산능선상에 문터가 있고 동쪽으로 수구가 있다. 또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조각 및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충주산성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몽고병을 물리친 곳으로 추정되며, 조선 고종 40년(1253) 9월 몽고가 제4차 침입을 감행하여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충주 창정, 최수가 금당협에 매복하여 몽고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포위당한지 70여일에 군량이 다하고 사기가 저하되자 방호별감, 승장, 김윤후가 전군과 관노까지를 격려하여 사력을 다해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다음 해 2월에 김윤후를 감문위섭상장군으로 삼았고 4월에는 충주를 승격하여 국원경으로 하였다. 1254년 9월에는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뿐 아니라 성안의 고려인이 열심히 싸우자 차라대도 물러갔다. 몽고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유린되었으나 충주산성은 끝내 수호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가 7일만에 축성하였다고 하며 백제 개로왕 21년(475)에 축성하여 적을 방어하였다고도 한다. 개로왕이 바로 이 성 북쪽에 있는 안림동에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는 설과 일치하고 있음에 주목된다. |
(충주 남산 정상 표지석)
(충주산성 안내 표지판)
(남산 등산로 안내판)
(남산 등산로 안내판)
(남산임도 안내판)
(남산임도 입구 및 주차장 전경)
(남산 등산로에 설치된 대몽항쟁 충주전 설명문)
(남산 등산로 입구 마즈막재 설치된 대몽항쟁비)
(남산성 북문 )
(남산성 북문 )
(남산성 북문터 전경)
(남산성 동측 성벽 전경)
(남산성 서측 치성터 및 서측 성벽)
(남산성 서측 성벽과 계명산)
(남산성 내 암석)
(남산성과 계명산)
(남산성 서측 성벽)
(남산성 서측 치성터 아래의 석축 - 수 십년 전에 보수된 성벽으로 추정됨)
(남산성에서 바라본 충주시 전경)
(남산성 서측 치성터)
(남산성 정상)
(남산성 정상)
(서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남서측 성벽)
(남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남서측 성벽)
(남측 치성터)
(남측 치성터 전경)
(남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대림산 대림산성)
(남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재오개와 월악산 )
(남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남한강-충주호)
(동문터에서 바라본 계명산)
(동문터에서 바라본 충주호 해맞이 동산)
(동문터의 보수된 성벽과 우물지)
(동문터 남측 보수 중인 성벽)
(동문터의 보수된 성벽과 우물지)
(동문터의 보수된 성벽과 우물지)
(동문터의 보수된 성벽)
(동문터의 보수된 성벽)
(동문터의 보수된 성벽)
(동문터의 보수 전 성벽)
(동문터의 보수 후 성벽)
(동문의 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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