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에서/옛날 지명들

익안현(翼安縣)의 다인철소(多仁鐵所)

산골어부 2013. 2. 1. 08:19

 

고려사 지리지 - 충주목(忠州牧)에서 발췌

 

[고종(高宗) 42년 다인(多仁)의 철소(鐵所) 사람이 몽고군을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소(所)를 올려 익안현(翼安縣)으로 삼았다.]

 

 

 

대소원면 능골에서 바라본 충주기업도시

 

충주지역의 대몽항쟁에서 충주목의 다인철소 사람들이 몽고군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워서 어떤 전공을 거두었기에 익안현으로 승격되었을까 ?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익안현에 대한 기록은 "고종(高宗) 42년. 몽고군을 막은 공으로 익안현으로 승격되었다" 는기록 뿐이다. 고려사의 기록에서 고종 42년이란 익안현 사람들이 항전한 년도가 아니라 익안현의 승격시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처인성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김윤후가 그 공적으로 섭랑장이 되었고, 그 후 충주산성 별감 낭장이 된 김윤후는 야굴과 아모간과 홍복원이 이끄는 몽고군과1253년10월 부터 12월까지 충주산성에서 벌어진 기나긴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 공적으로 다음해인 1254년 1월에 정준.최평. 임경필은 추밀원 부사가 되었고, 충주산성 별감 낭장 김윤후는 감문위 섭상장군이 되었으며그 나머지 전공이 있는 자와관노와 백정도 또한 차등 있게 벼슬을 받았다.그리고, 1254년 4월에는 충주목이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하지만, 몽고군을 이끈 이현을 저자에 내어 죽이고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그 아들 지서, 지송.지수. 지백. 영년 등을 모두 바다에 던지고, 이현의 아내ㆍ누이ㆍ사위는모두 섬으로 귀양보냈다또한천룡성에서 전투도 없이 항복하고, 몽고군에 합류한천룡성 별감 조방언황려 현령 정신단을 섬으로 귀양보냈다.

 

익안현(翼安縣)의 다인철소는 어디에 있었을까 ?

 

고려사에 나타난 기록과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기록으로 고찰하면  충주목의 천민거주지인 다인철소가 익안현으로 승격된 것은 철기소 사람들이 특정한 충주전투에서 승리한 공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253년 충주산성전투에 참가하여 승리한 공로로 충주목의 중원경 승격과 다인철소의 익안현 승격이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유학사지가 있던 부연마을 부근에서 다인철소민이 항전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유학산성으로 추정하는 산성의 규모는 인근에 있는 용관동 산성이나 문주리 산성보다도 작고, 그 흔적도 미미하여 작은 보루이거나 화전민의 농경지로 보인다. 또한 고려사절요에서 대몽항전의 기록들은 금당협과 박달현과 같은 작은 전승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천민거주지인 소(所)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관장하는 현으로 승격되었는데, 그 공적이 별도로 기록되지 않았다. 1253년 충주산성전투의 승전에 따른 전후처리에 대한 기록에서 항복한 양근성과 천룡성에도 낭장들이 배치되고, 전공이 있는 자 뿐만 아니라 관노와 백정까지도 차등에 따라 벼슬을 받았으며, 1254년 4월에는 충주목이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 충주성과 충주산성, 천룡성은 책임자가 배치되고 관리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주 사람들은 천룡성(보련산성), 충주 사람들은 충주산성(대림산성)에서 입성하여 항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31년 몽고의 1차 침입 시에 판관 유홍익과 부사 우종주와 그들이 이끄는 양반별초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노군잡류별초만 남아 충주성에서 항전했다. 그로 인하여 다음해인 1232년 충주관노의 난이 일어났다. 충주관노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들을 살펴보면 몽고군의 1차 침입 시 충주성을 방어한 지휘체계나 충주성에 입성한 사람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 발생한 1253년 충주산성전투에서는 충주성과 충주산성이 정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1253년 충주산성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국원경의 승격으로 더욱 정비된 방어체계를 구축하여 1254년 8월에는 차라대가 이끄는 몽고군이 충주산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우회하여 상주로 남하한 것은 충주성과 충주산성이 정비되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한다. 또한 5km에 달하는 거대한 대림산성이 축성 또는 재축성된 것도 대몽항전 기간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편에는 "익안 폐현(翼安廢縣):주 서쪽 30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익안현이 조선 초기에 이미 폐현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익안현의 위치는 현재의 대소원면에 있는 충주기업도시로 이 지역은 이류면의 지명유래에 나오는 이안면 본리와 완오리 일대로 추정된다. 익안현은 현재의 앙성,노은,가금,신니,주덕,대소원 등 남한강과 달천의 서부지역을 관할했을 것이다. 하지만, 익안현은 고려사에서 충주목의 관할지역인 1군 5현에 속하지 못했고, 세종지리지에서도 다른 부곡들과 함께 지(池), 어(魚)의 집단거주지역으로 표기되어있어 익안현이 승격은 되었으나, 현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폐현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충주지역의 철산지와 철기소(쇠부리)의 분포도에서도 이안면을 중심으로 산재한 것을 보여준다. 익안현(翼安縣)은 익(翼-날개)과 안(安-편안하다)으로 날개처럼 편안한 고을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현재의 주덕, 이류, 달천의 중심지는 국도3호선 또는 충북선을 따라 형성된 것으로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대몽항전 시에 촌락분포는 현재와 다를 것이다. 얼마 전에 이류면의 명칭을 대소원면으로 개칭하면서 대소원이라는 작은 원터와 면소재지에 집착하여 이류면의 역사를 더욱 작은 동네이름으로 변경한 것은 몇몇 사람들의 옹졸한 변명처럼 보인다.

 

국원(國原)은 나라의 근본되는 땅이라는 뜻이고. 중원(中原)이란 뜻도 나라의 중앙이 되는 고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충주목이 왜 ! 남경이나 중원경이 아닌 국원경으로 승격되었을까 ?  충주의 옛지명인 미을성, 완장성, 국원성, 국원소경, 중원경, 중주, 충주, 충원, 창화, 대원, 유신, 예성 등의 명칭에서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신립장군이 군사배치와 작전에 실패하여 달천강변으로 후퇴한 것을 배수진을 친 것으로 미화하고, 장수로서 허세만 부리다가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달천으로 도망친 것을 탄금대 열두대에서 피묻은 칼을 씻기 위해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다가 투신한 영웅으로 왜곡하는 것이 충주향토역사의 현실이다.  충주민의 위대한 대몽항전이  잘못 해석되어 관방체계의 작은 성인 남산성을 충주산성으로 표기하는 오류와 더불어 마즈막재에 대몽항전 승전비가 세워진 것은 충주의 대몽항전이 역사적 고찰과 고증보다는 지역주의에서 나오는 지역 예찬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대몽항전이 치뤼진 대림산성과 천룡성 그리고, 대원령과 박달현 등을 답사하다가 보면은 대몽항전은 왕에게 충성하기 위해 싸워다기보다는 충주민들이 삶을 터전을 지키려는 처절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대몽항전의 유적지들은 오늘도 사라져간다. 성벽을 복원하고 승전비를 세우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충주민의 대몽항전의 승리를 재조명하여 정립하고, 대몽항전의 유적지가 더 이상 훼손되지않게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

 

고려사절요/제17권/고종 안효대왕/계축 40년(1253) - 금당협과 충주성 전투

 

九月(구월) : 9월에

忠州倉正崔守(충주창정최수) :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

設伏金堂峽(설복금당협) : 금당협(金堂峽)에 매복하고

候蒙兵至(후몽병지) : 몽고 군사가 다다르기를 기다려

急擊斬十五級(급격참십오급) : 급히 쳐서 15급을 베고

奪其兵仗與所虜男女二百餘人(탈기병장여소로남녀이백여인) : 병기와 포로된 남녀 2백여 명을 빼았었다.

以功除隊正(이공제대정) : 그 공으로 대정에 제수되었다.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에

李峴與蒙兵攻天龍山城(리현여몽병공천룡산성) : 이현(李峴)이 몽고 군사와 더불어 천룡산성(天龍山城)을 치자,

黃驪縣令鄭臣旦(황려현령정신단) :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과

防護別監趙邦彥(방호별감조방언) :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이

出降(출항) : 나와 항복하였다.

也窟等圍攻忠州(야굴등위공충주) : 야굴 등이 충주를 포위하여 공격하자,

前少卿鄭壽(전소경정수) : 전(前) 소경(少卿) 정수(鄭壽)가

率二子(솔이자) : 두 아들을 데리고

自京山府來降(자경산부래강) : 경산부(京山府; 경북 星州)에서 와 항복하였다.

十一月(십일월) : 11월에

也窟在忠州得病(야굴재충주득병) : 야굴이 충주에서 병이 들었다.

卜者曰(복자왈) :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久留則難返(구류즉난반) : “오래 머무르면 돌아가기 어렵다." 하니, 

也窟留阿母侃洪福源守之(야굴류아모간홍복원수지) : 야굴이 아모간과 홍복원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率精騎一千北還(솔정기일천북환) : 정예기병 천 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돌아갔다.

十二月(십이월) : 12월에

忠州報蒙兵解圍(충주보몽병해위) : 충주에서 몽고군이 포위를 풀었다고 보고하였다.

時被圍凡七十餘日(시피위범칠십여일) : 그때 포위를 당한 지 모두 7십여 일이나 되어

兵食幾盡(병식기진) : 군량이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防護別監郞將金允侯(방호별감랑장금윤후) : 방호별감 낭장 김윤후(金允侯)가

諭厲士衆曰(유려사중왈) : 군사들을 타일러 격려하기를,

若能效力(약능효력) : “만일 힘을 다해 싸운다면

無貴賤悉除官爵(무귀천실제관작) :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 하고,

焚官奴簿籍(분관노부적) : 관노의 호적을 불태워

以示信(이시신) : 믿음을 보이고

又分給所獲牛馬(우분급소획우마) : 또 노획한 말과 소를 나누어 주자,

人皆效死(인개효사) :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맹세하여 싸웠다.

蒙兵稍挫(몽병초좌) : 몽고군이 차츰 기세가 꺾이어

遂不復南(수불부남) :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7권/고종 안효대왕/갑인 41년(1254) - 충주성 전투에 따른 국원성 승격

                                                             

春正月(춘정월) : 봄 정월에

謁景靈殿(알경령전) :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安慶公淐(안경공창) : 안경공 창이

至蒙古屯所(지몽고둔소) : 몽고군이 주둔한 곳에 이르러

設宴張樂(설연장악) :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갖추어

饗士(향사) : 군사를 먹였다.

阿母侃還師(아모간환사) : 아모간이 군사를 되돌려 갔다.

京城解嚴(경성해엄) : 경성에 계엄(戒嚴)을 해제하고,

遣少卿郭汝翼(견소경곽여익) : 소경 곽여익(郭汝翼)ㆍ

郞將鄭子璵等(랑장정자여등) : 낭장 정자여(鄭子璵) 등을 보내어

往候蒙兵還否(왕후몽병환부) : 몽고 군사가 돌아가는지 돌아가지 않는지를 탐지하고,

兼安撫天龍楊根二城(겸안무천룡양근이성) : 겸하여 천룡성과 양근성을 안무하게 하였다.

李峴棄市(리현기시) : 이현을 저자에 내어 죽이고

籍其家(적기가) :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其子之瑞之松之壽之柏永年(기자지서지송지수지백영년) : 그 아들 지서(之瑞)ㆍ지송(之松)ㆍ지수(之壽)ㆍ지백(之栢)ㆍ영년(永年) 등을

皆沈于海(개침우해) : 모두 바다에 던지고,

峴妻妹及壻(현처매급서) : 현의 아내ㆍ누이ㆍ사위는

竝流于島(병류우도) : 모두 섬에 귀양보냈다.

峴性貪婪(현성탐람) : 현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好傷人(호상인) : 사람을 중상하기를 좋아하였다.

嘗爲選軍別監(상위선군별감) : 일찍이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어 뇌

多受賄賂(다수회뢰) : 물을 많이 받으니,

人號銀尙書(인호은상서) : 사람들이 '은상서(銀尙書)'라고 별명을 지었다.

及使蒙古(급사몽고) : 몽고에 사신가서

被留二年(피류이년) : 2년 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에

說也窟曰(설야굴왈) : 야굴(也窟)에게 유세하기를,

我國都(아국도) : “우리나라 도성이

介于海島(개우해도) : 섬 속에 끼어 있어서

貢賦皆出州郡(공부개출주군) : 공부(貢賦)가 모두 주군(州郡)에서 나오니,

大軍若於秋前(대군약어추전) : 대군이 만일 가을 전에

奄入其境(엄입기경) : 갑자기 국경에 들어간다면

都人之急(도인지급) : 도성 사람들이 위급하게 될 것을

可知也(가지야) :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因受金牌(인수금패) : 금패(金牌)를 받은 것을 인하여

導也窟而來(도야굴이래) : 야굴을 인도하여 와서

常隨蒙軍諭降諸城(상수몽군유항제성) : 항상 몽고군을 따라다니며 여러 성을 달래어 항복시키고,

又劫楊根天龍二城曰(우겁양근천룡이성왈) : 또 양근과 천룡 두 성을 협박하여 말하기를,

掠山東州春州等城(략산동주춘주등성) : “양산ㆍ동주ㆍ춘주 등 여러 성이

竝以不降見屠(병이불강견도) : 모두 항복을 하지 않다가 도륙을 당하였으니,

宜速出降(의속출항) : 빨리 나와 항복해야 할 것이다.

若守將不許(약수장불허) : 만일 지키는 장수가 허락하지 않거든

卽斬以來(즉참이래) : 곧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라." 하였다.

及降(급항) : 항복하자

自爲達魯花赤(자위달로화적) : 스스로 다루가치가 되어

遂以其民(수이기민) : 드디어 그 백성을 거느리고

攻忠州不下(공충주불하) : 충주를 쳤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及蒙軍還(급몽군환) : 몽고 군사가 돌아가자

峴乃來(현내래) : 현이 왔는데

其軍中所獲婦女財寶(기군중소획부녀재보) : 그동안 군중에서 노획한 부녀와 재물 보화를

盡爲己有(진위기유) : 전부 자기 몫으로 만들어

銀釵至滿一笥(은채지만일사) : 은비녀가 한 상자에 가득하고

他物稱是(타물칭시) : 다른 물건도 이와 비등하였다.

及誅(급주) : 그가 형(刑)을 받자

有人蹴其口曰(유인축기구왈) : 어떤 사람이 그의 입을 차며 말하기를,

喫盡幾人銀帛耶(끽진기인은백야) : “몇 사람의 은과 비단을 먹어 치웠느냐?" 하였다.

二月(이월) : 2월에

降襄州東州(강양주동주) : 양주와 동주를 강등하여

爲縣令(위현령) : 현령이 다스리는 고을로 만들고

金城爲監務(금성위감무) : 금성(金城)은 감무(監務)가 다스리는 고을로 만들었으며,

流天龍城別監趙邦彥(류천룡성별감조방언) : 천룡성 별감 조방언(趙邦彦)과

黃驪縣令鄭臣旦于海島(황려현령정신단우해도) :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을 섬에 귀양보냈다.

以鄭準(이정준) : 정준(鄭準)ㆍ

崔坪(최평) : 최평(崔坪)ㆍ

林景弼(림경필) : 임경필(林景弼)을

竝爲樞密院副使(병위추밀원부사) : 모두 추밀원 부사로,

以忠州山城別監郞將金允侯(이충주산성별감랑장금윤후) : 충주산성 별감 낭장 김윤후를

爲監門衛攝上將軍(위감문위섭상장군) : 감문위 섭상장군으로 삼고,

其餘有軍功者(기여유군공자) : 그 나머지 전공(戰功)이 있는 자와

及官奴白丁(급관노백정) : 관노와 백정도 또한

亦賜爵有差(역사작유차) : 차등 있게 벼슬을 주었다.

夏四月旱(하사월한) : 여름 4월에 가물었다.

謁景靈殿(알경령전) :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陞忠州(승충주) : 충주를 승격하여

爲國原京(위국원경) :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

 

八月(팔월) : 8월에

蒙兵候騎(몽병후기) : 몽고병의 척후 기병이

屯槐州(둔괴주) : 괴주(槐州 충북 槐山)에 주둔하였는데,

散員張子邦(산원장자방) : 산원(散員) 장자방이

率別抄擊破之(솔별초격파지) : 별초를 거느리고 가서 격파하였다.

九月(구월) : 9월에

車羅大攻忠州山城(차라대공충주산성) :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는데,

風雨暴作(풍우폭작) : 졸지에 큰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졌다.

城中人抽精銳(성중인추정예) : 성중 사람들이 정예 군사를 뽑아

奮擊之(분격지) : 맹렬히 반격하자

車羅大解圍(차라대해위) : 차라대가 포위를 풀고

遂南下(수남하) :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에

車羅大攻尙州山城(차라대공상주산성) : 차라대가 상주산성(尙州山成)을 공격하였는데,

黃嶺寺僧洪之(황령사승홍지) : 황령사(黃嶺寺) 중 홍지(洪之)가

射殺一官人(사살일관인) : 한 관인을 쏘아 죽이고,

士卒死者過半(사졸사자과반) : 죽은 사졸(士卒)이 반이 넘자,

遂解圍而退(수해위이퇴) :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고려사 지리지 - 충주목(忠州牧)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미을성(未乙省) 또는 완장성(長城)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여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중원경(中原京)을 삼았으며 태조(太祖) 23년에 또 고쳐 충주(忠州)로 삼았는데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니 충주(忠州)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창화군(昌化軍)이라 부르고 중원도(中原道)를 칭하였는데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安撫使)로 삼고 9년에 정하여 목(牧)을 삼으니 8목(牧)의 하나가 되었으며 고종(高宗) 41년에 올려 국원경(國原京)으로 삼았다. 양진명소(楊津溟所)와 양진연소(楊津衍所)가 있으며 별호(別號)를 대원(大原)【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이라 하고 또 호(號)를 예성(蘂城)【고종(高宗) 42년 다인(多仁)의 철소(鐵所) 사람이 몽고군을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소(所)를 올려 익안현(翼安縣)으로 삼았다.】 이라 한다. 1군(郡)과 5현(縣)이 소속하였으며 1지사군(知事郡)을 관령(管領)하였다.

 

이류면의 지명유래

▣ 이류-면(利柳面)【면】충주시 13면의 하나. 본래 충주군의 지역으로서, 이안면(利安面)이라하여 천동(川東), 금곡(金谷), 당저(堂底), 거곡(巨谷), 상검단(上檢丹), 하검단(下檢丹)의 6개 리를 관할하다가, 그 후 천동리를 빼고, 영평(永平), 두산(斗山), 대소(大召), 마치(馬致), 장재동(長在洞), 성종(城宗), 부연(釜淵), 독동(篤洞), 본리(本里), 노옥(老玉), 흑평(黑坪), 불방(佛坊), 주정(酒井), 가정(佳亭)의 14개 리를 더하여 19개 리로 개편 관할하다가,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유등면(柳等面)의 만적(萬積), 독정(篤井), 두담(豆潭), 소용(所用), 궁동(弓洞), 탄동(炭洞), 산정(山井), 내포(內浦), 수현(修峴), 기동(基洞), 매산(梅山), 장승(長承), 월은(月隱), 수주(水周), 문박(文朴), 팔봉(八峰), 즉문(卽文), 하담(河潭)의 18개 리를 병합하여 이안면과 유등면의 이름을 합하여 이류면(利柳面)이라하여 검단(檢丹), 금곡(金谷,) 대소(大召), 두정(豆井), 만정(萬井), 매현(梅峴), 문주(文周), 본리(本里), 영평(永平), 완오(完五), 장성(長城), 탄용(炭用), 하문(河文)의 13개 리로 개편 관할하다가 1973년 7월 1일에 대통령령 제6542호〔1973, 3, 12공포(公布)〕로 하문리는 괴산군(槐山郡) 불정면(佛頂面)으로 편입되었다. 동쪽은 충주시 달천동, 살미면, 상모면, 괴산군 장연면, 남쪽은 괴산군 감물면과 불정면, 서쪽은 주덕읍, 북쪽은 가금면에 각각 닿음. 충주시와 중원군은 1956년에 분리되었다가 다시 1995년에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 충주시로 단일 행정구역이 되었음.

 

완오리(完五洞)

⊙ 완오-동(完五洞)【리】이류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이안면(利安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흑평(黑坪), 불방(佛坊), 거리(巨里), 주정(酒井), 가정(佳亭)의 5개 동리와 노옥리(老玉里) 일부를 병합하여 완오동이라 해서 이류면에 편입됨.* 가정
●가-쟁이[가정]【마을】온수골 북쪽으로 옛날에 큰 정자나무가 있었다고함.
●사리-실[사래실]【마을】흑평 윗쪽에 있는 마을로 절터의 탑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함. 지금도 탑자리가 남아있음. 사리실 절터에서 승려의 사리가 나왔다고하여 사리실이라고 불렀다고함. 이안초등학교가 개교하자 사람들은 사(舍)를 스승사(師)로 인식하여 스승이 온다는 사래실이라 부름.
 * 거리실
●온수-고을【마을】거리실 윗쪽 솜실 고개 아래에 있음.
●원당-골【골짜기】사리실안에 고을 원님이 살았다고함.
●일곱실-고개【고개】한터말에서 가금면 일곱실로 넘어가는 고개.
●탑-골【골짜기】사리실에 있으며 새마을 사업때 탑골의 탑재를 이용하여 동네 입구에 마을 이름을 써 붙이기도 하였음. 지금도 탑 흔적이 있다고 함.
●한씨-사당【사당】거리실에 있는 사당. * 신촌
●신-촌【마을】불허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음달말, 양달말, 주정골, 밤골 등이 있다.
 * 흑평
●흑-평【마을】흑평은 풍수지리상으로는 거미혈로 닭이 거미를 잡아먹는다고 닭도 사육하지 않았다고 함.
●사지-봉【산】흑평 마을 뒷산으로 삿갓처럼 생겼다고하며 거미의 둔부처럼 생겼다고 함. 마을 사람들은 최근 까지도 마을이 거미혈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닭이 거미를 잡아먹을까바 닭을 사육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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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리(本里)

⊙ 본-리(本里)【리】이류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이안면(利安面)의 지역으로 이안면 소재지였으므로 본리(本里)라 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독동(篤洞)과 당저리(堂底里), 노옥리(老玉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본리라 해서 이류면에 편입됨.* 노계
●노-계(老溪)【마을】본리에 있는 마을로 옛날 노승이 다리를 개울에 담그고 닭을 기르지 못하도록 하여 거미혈의 정기를 보전하여 마을이 번창하도록 하였다하여 시내를 노계라 하였음. 노계는 30호 되는데 경로 우대증 소지자가 38명이 되는 장수촌으로 소문나 있음. 자연 부락으로는 노계, 이안, 샘둥치가 있음.
●샘-둥치【샘】노계 옆 마을에 샘이 있는데 샘두껑을 닫고나서 할머니들의 허리가 많이 구부려져다 함.
●이-안【마을】노계 뒤로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이안면의 소재지였음.
 * 당저
●당-저(堂底)【마을】옛날에 큰 창고가 있어 홍창골이라고하며 또 산제당 밑에 있다고하여 당테미라고 부른다. 새터말, 당밑터, 홍창골, 성종, 장고개의 자연 부락이 있다.
●이-안(利安)【마을】노계 동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이안면의 소재지였음
●장-고개【고개】대소원에서 가젱이 가는 고개로 장사를 많이 치름 공동묘지가 많이 있음.
●활-당이【골짜기】홍창골 서북쪽에 있느 골짜기로 활같이 굽었다고 함.* 독동
●독-동【마을】이안 동북쪽에 위치하며 지형이 오목하여 독골, 옛날 기와집이 많아서 기와집말이라고도 부르며 뽕나무골, 기와집말, 양달말, 사당골, 깃대부리 등이 있음.
●깃대-뿔【마을】독골 앞에 있는 마을. 앞산이 뿔처럼 뾰족함.